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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단의 아름다운 테러리스트-윤금초론
송필란
8월 초 <만해축전>이 열리는 백담사에서 <오늘의 시조학회> 주최로 시조세미나가 열렸다. 1박 2일의 여장을 꾸리면서 이 기회에 윤금초 시인을 인터뷰해야겠다고 작정했다. 시조문단에 등단할 때 나의 작품을 심사하고 뽑아주신 분이고, 등단 후에는 시조전문지 『시조시학』 주간과 편집장으로 다시 연을 맺은 분이다. 오랫동안 <오늘의 시조학회>를 이끌어 오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여, 해남과 담양 등지로 시인을 좇아 내려가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정색을 하고 인터뷰하기가 쑥스러워 내 딴에는 묘안을 낸 것이었다. 백담사로 향하면서 그런 취지를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정식으로 한번 만나 인터뷰하자구.” 라고 말씀하신다. 며칠 뒤로 약속을 잡아놓고 첫시집과 사진 등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부탁드렸다.
백담사에 도착해서 보니 시인께선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었다. 행사의 주관자로서 몸소 온갖 것들을 다 챙기느라 동분서주, 잠시 앉아 쉴 틈도 없어 보였다. 꼼꼼하고 사리가 분명하다고 정평(?)이 난 시인의 성품을 그대로 엿볼 수 있었다. 밤늦게 첫날 행사가 끝나자, 절 앞 계곡 근처에 주연 자리를 마련해 놓아 참가자들을 감격케 하셨는데,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속을 뚫고 내려가 석쇠에 구워먹은 삼겹살 맛은 일품이었다. 더구나 절 앞에서 먹는 고기맛이란 특별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찰 백담사에서 고기 냄새를 피울 발상을 한 시인의 호방한 일면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윤금초 시인과 만나기로 한 날은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시인의 댁 근처인 강남 롯데백화점에서 만나 근방 음식점에서 낮술을 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시인께선 첫시조집 『漁樵問答』과 그동안 상재한 시집들과 수필집, 언론매체들과 인터뷰한 기사와 사진 등을 꼼꼼이 챙겨 오셨다.
시인께서 단 한 권 소장하고 있는 첫시집을 보니 그 장정이나 편집이 매우 고급스러웠다. 시집을 내기가 힘들었던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첫시조집이 해남 윤씨 문중의 지원으로 발간되었다고. 해남 윤씨 가문이라면 孤山 尹善道의 후손들로서, 윤금초 시인이 바로 고산의 12대 후손이었다. 시인은 국회의원을 지낸 같은 문중의 尹泳善 선생을 찾아가 문중에서 시집을 발간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고산 이후 해남 윤씨에서 나온 몇 안 되는 시인이므로 문중에서 시집을 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시집은 모두 문중에 기증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제의하여 흔쾌히 승낙을 받아냈다. 이렇게 하여 첫시조집은 모두 천 부가 발간되었으며, 문중에서는 이를 다시 문중 사람들에게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고산의 시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첫시조집을 지면으로나마 보여드리도록 하자. 시집은 국판 크기로 고풍스런 무늬와 재질의 황토빛 겉집이 따로 만들어져 있고, 시조집의 겉표지는 고운 布크로스(삼베의 질감을 가진 것)로 장정되었으며 제목 ‘漁樵問答’과 ‘尹今初詩集’이 종조체 은박으로 박혀 있다. ‘漁樵問答’의 글씨는 시인이 張遷의 碑에서 集字한 것이라고. 시조집을 펼치면 속표지에 윤금초 시인의 캐리커처가 표지 글자와 함께 배치되어 있다.(사진 참조) 다음장은 5페이지에 걸쳐 고산이 친필로 쓴 「山中新曲」(윤영선 소장)이 화보로 처리되어 있다. 목차를 보면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부 앞에는 2도 화보의 恭齋 尹斗緖의 풍속화가 간지로 붙어 있으며, 얇고 투명한 한지를 별지로 덧붙였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으로 숙종 때 선비화가이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조선 3재로 일컬어진 분이다. 본문은 미색 모조 120 정도로 두꺼운 고급지가 사용되었다.
『어초문답』이 발간된 해는 1977년으로, 등단한 지 만 10년만의 일이다. 당시 나라의 경제 사정상 대부분의 시인들이 등단 10여 년을 넘기고서야 간신히 시집을 발간했던 실정에 비춘다면 그리 늦은 편도 아니며, 매우 호화롭고 고급스럽게 장정된 책이다. 고산과 같은 대 시인을 선조로 둔 덕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에 입상한 후 67년 「내재율 1·2·3」으로 『시조문학』에 3회 추천 완료하여 등단하였다. 68년에는 『동아일보』에 「안부」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당선 통지를 받기까지는 시인의 표현대로 ‘한번의 낙선과 한번의 당선’이라는 일화가 숨어 있다. 똑같은 작품으로 첫해는 예심조차 통과하지 못했다가, 다음해에는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시인의 辯을 들어보자.
(…) 서울의 지독한 냉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방황하던 그 무렵 나에게는 크나큰 충격사건이 벌어졌다. 베트남 전쟁이래 처음으로 한국군의 월남파병 문제가 불거져 나왔고 상하(常夏)의 정글 속에, 대리전쟁의 사선(死線)에, 내 아우 주식(周植)이가 끌려간 것이다.
이방의 국경지대에다 생명을 내맡긴 아우한테서는 1주일이 멀다 하고 거푸 편지가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잔인하게도)끝끝내 단 한 장의 회답도 띄우지 않았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아픔을 아우 주식에게, 그리고 미지의 형제들에게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
아니다. 꼭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었던 그 뭉클한 가슴 속 응어리, 그 절박한 사연(체험담)을 나는 「安否」라는 시조에다 뭉뚱그려 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1967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예심에도 통과하지 못한 채 낙선하고 말았다(그당시 예심 과정에서 누가 내 원고를 빼버렸는지 확증은 없지만 심증은 가지고 있다).
나에게도 오기라는 것이 있었던가. 이제 비로소 고백하지만 이듬해(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오기로, 진짜 독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오기로 똑같은 내용의 시조 「안부」를 다시 투고했다. 그런데 67년도에는 예심에도 통과하지 못했던 그 치졸(稚拙)하기 이를 데 없는 원고가 68년도에는 심사위원이 바뀐 때문이었을까, 내 주변정세를 솔직하게 진술한 「안부」의 당선 통지를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우리 신춘문예사상 유일하게 한 작품을 가지고 한번의 낙선과 한번의 당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화를 남기게 되었다.(…)
67년 당시 시인은 시 「안부」를 투고한 뒤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마다 작품을 낭송해 주었으며, 모두들 신춘문예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라며 미리 술을 사라고 채근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인 역시 당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선에도 들지 못했으니 그 참담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시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예심을 보면서 시기심에 떨어뜨렸으리라는 짐작만을 할 뿐이다. 다음해 심사위원이 바뀌자 「안부」가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이은상·김상옥 선생이 심사를 했는데, 작품과 심사평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安否
―어느 싸움터인가, 내 아우여.
金낚시 드리우는 초승달 앞녘 江에
깎인 돌의 硝煙 냄새 피로 씻지 못한 자리,
어머님 품안을 떠난 罪구렁의 어린 羊.
역한 바람 풀어헤쳐 철새 등에 띄운 安否―
못다 푼 긴긴 說話 실꾸리로 감기는데
저 하늘 닫힌 문 밖에 壁을 노려 섰는가.
누다비아 산허린가 빗발치는 가시덤불
世界의 귀가 얽힌 不幸의 수렁길에
거미줄, 거미줄 사이 겨냥하는 눈망울….
선불 맞은 짐승처럼 파닥이는 나비 죽지,
한 떨기 목숨 가누어 내젓는 祈求의 손,
그 무슨 깃발을 안고 너는 끝내 匍匐하나.
뒤틀린 사랑 타며 咆哮하는 나의 士兵.
東南亞 밤을 밝혀 무지개 지르는 날
떨리는 그 입술 모아 더운 김을 나누자.
…올해 들어 시조를 응모 대상에서 제외한 신문사도 더러 있었으나 이번 『동아』에 선보인 작품들은 의외로 우수한 것이 많았다.
당선작 「安否」와 張正文씨의 「冬栢海曲」은 더욱 빼어났다. 시조의 시적 형태미를 잘 체득하고 있는 점에는 오히려 장씨의 것이 勝하나, 내용에 있어선 「안부」보다 훨씬 劣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안부」가 내용에만 치우친 것은 아니다 ‘金낚시 드리우는 초승달 앞녘 강에’ ‘떨리는 그 입술 모아 더운 김을 나누자’ 하는 구절, 앞의 것은 唐詩 「峨嵋山月半輪秋」의 그런 적막감을 현대적인 기교로 다시 대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뒤의 것은 이미 치르고 있는 어느 전쟁을 회의하되, 빨리 승리와 평화를 갈구하는 외침이 아프도록 생생하다…
신춘문예 당선은 시인에게 설욕의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평생의 배필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장남을 결혼시키기 위해 부모님들은 그 전 해부터 시인을 계속 해남으로 불러내려 선을 보게 했는데, 맞선보는 처녀마다 시인의 눈에 차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남편 뒷바라지 잘하고 아이 잘 낳을 건강한 촌색시가 좋은 배필이라 생각하셨지만, 서울물을 먹고 더구나 젊은 나이의 시인으로서야 원하는 이상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모님도 지치고 시인도 지칠 무렵 시인은 다음엔 선도 안 보고 그냥 결혼할 테니 알아서 하시라는 식의 강짜(?)를 놓고 서울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정말로 시인은 신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처가 정해지고 결혼 날짜까지 받아 두었다는 기별을 듣게 된다. 한편 신부집에서 신랑의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을 승낙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시인의 장인은 일제 때 광주에서 고보를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중퇴하게 된, 당시로서는 지식인층에 속하는 인텔리였다. 장인은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고 옛날 같았으면 과거의 장원급제나 다름없는 인물이 해남에서 나왔다며 그 신문을 벽장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장본인이 사윗감으로 혼사가 들어왔으니, 얼굴도 보지 않고 승낙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혼인은 빠르게 진행되어 신춘문예 당선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2월 20일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그때의 신부가 시인과 금슬 좋기로 소문난 金榮信 여사이시다.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그 덕분에 천생연분의 신부까지 얻었으니, 시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운수 좋은 해’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시인의 지금까지의 삶을 간략하게 더듬어보기로 한다. 시인은 1943년 음력 6월 3일생으로 전남 해남군 화산면 갑길리에서 출생했다. 출생 신고를 몇 년 뒤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때라 둘째누나와 함께 호적에 기재되면서 생년월일이 서로 바뀌게 되어 호적에는 1941년 8월 7일로 등재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부터 남들보다 2년 먼저 입학하게 되는 등 몇 년씩 앞당겨 인생을 가불하며 살게 되었다고. 시인은 고향의 화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조선대부속고교에 입학한다. 이때 헌 책방에서 구한 한국문학선집에서 김동리의 소설과 서정주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시조가 아닌 소설을 향한 것이었다. 고교백일장에 단편소설이 입상하는 등 산문에 소질을 보였으며 서라벌예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소설을 전공했다. 서라벌예대에는 김구용, 김동리, 박목월, 서정주, 이범선, 임동권 선생 등 쟁쟁한 문인들이 출강하고 있었는데, 대학 2학년 때 목월 선생이 시인의 시가 시조의 호흡에 가깝다며 시조를 쓸 것을 충고했다. 그리고 선조인 윤선도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도 작용하여 시조시인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등단한 이후 시인은 조선일보 주간조선부에 입사하였으며, 첫시조집을 상재한 후 『해남나들이』(93년) 『땅끝』(2001) 등의 시조집을 출간했으며, 공동시집 『네 사람의 얼굴』(83) 『다섯 빛깔의 언어풍경』(95), 에세이집 『갈봄여름없이』(80)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의 사랑』(92) 『시조짓는 마을』(98)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정운시조문학상(86), 민족시가문학대상(91), 중앙시조대상(93), 가람시조문학상(99) 등 시조시단의 굵직굵직한 상들을 섭렵하였다. 그리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대한매일 등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심사도 시인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니 시조시단을 든든한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시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단어가 ‘옴니버스시조’이다. 이지엽 교수(경기대 국문과)는 70년대 시조를 논하는 자리에서 “70년대 시인들의 괄목할 만한 변화는 시조가 갖는 형식적 장치의 극대화를 통한 접근이다. 이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도되고 있는데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혼용한 윤금초 시인의 작품들 「사물놀이」 「주몽의 하늘」은 가장 충격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시인은 옴니버스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편의 시조 속에 우리 정형시의 각종 형식(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을 두루 아우르는, 그리하여 곧잘 시조의 취약점으로 지적되는 그릇(형식)의 제약성을 뛰어넘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해남 나들이』 자서에서
즉 외형률에 제약을 받는 닫혀 있는 문학 양식이 아닌, 내재율을 중시하는 열린 문학양식을 지향하는 것이 ‘옴니버스시조’ 즉 ‘혼합연형시조’이다.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한 편의 작품 속에서 그 시적 흐름에 따라 긴 호흡과 짧은 호흡으로 서로 교차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율격을 체험케 해주며, 중요한 것은 서사가 부족한 시조의 단점을 보완해 준다는 점이다. 첫시조집에 실린 「어초문답」은 이미 이러한 옴니버스시조 형식을 갖추고 있다.
漁樵問答
1 私?童 짓소리
두들겨라
지게 장단,
어서 노를 휘저어라.
그 무슨 젓대를 불어
이 아픔을 하소하랴,
환장할 景致를 지고
떼거지로 그렇게
조지고, 비비틀고, 직신작신 할퀸 세월.
더러는 魂을 챙겨 供出 나간 아수라장, 兜率天 차양을 드린 그 마름 야로 속에 모가지 얼레에 감긴 참혹한 生涯던가.
어이어, 어여하 어이, 어이 어이 어여하.
「어초문답」 중에서 제1편 「사동 짓소리」의 두 首이다. 첫 수는 평시조로, 둘째 수는 사설시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평시조―사설시조―평시조―사설시조…’ 혹은 ‘평시조―평시조―사설시조―사설시조…’ 등 다양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어초문답」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평시조의 호흡과 사설시조의 호흡을 통해 자재로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실험의식은 다시 「청맹과니의 노래」로 발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장편시조를 시도하게 된다. 「청맹과니의 노래」는 「어초문답」의 「사동 짓소리」 4편에 다시 「쑥대머리」 「사물놀이」 「지노귀새남」 등 6편이 추가되어 총 10편 38수의 장편으로 구성되었다. 시인의 이러한 혁신적인 창작활동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동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형식적·양식적 차원에 주목할 때, 윤금초 시조 작품들은 시조양식을 제한이나 구속이 아니라 변화와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인은 사설시조의 호방하면서도 격렬한 리듬을 성공적으로 자신의 시적 주제와 결합시키고 있는데, 특히 「청맹과니의 노래」는 연시조 형식을 서사적 장시의 차원으로 이끌어가면서 동시에 극적·제의(祭儀)적 구성을 이루어 놓고 있다. 또한 민요인 제주해녀의 노래나 고전가요인 「정읍사」를 작품 속에 삽입하거나(「청맹과니의 노래」)나 최남선의 신체시(「해일」)나 이상의 「날개」의 구절들을 작품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시조양식의 상호텍스트적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윤금초의 시조가 보여주는 주제와 형식에서의 다양성과 개방성은, 시조가 현대시의 한 양식으로서 살아 있는 문학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현대시조의 요청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시인은 앞으로 우리 시조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사구조를 갖춘 서사시조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조로운 형식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의식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설시조, 양장시조 등 다양한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옴니버스시조와 같은 방식으로 시조문학의 지평을 넓혀햐 한다고. 그래야만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문학형식인 시조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 형식이기 때문에 오히려 세계문학에 더 어필할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시인의 말씀에 공감하는 바가 컸다.
40여 년 가까이 창작하면서 쓴 작품들 중에서 시인 스스로 꼽는 대표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안부」 「주몽의 하늘」 「할미새야 할미새야」 「땅끝」 등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이 중에서 도저한 역사의식이 표출된 「주몽의 하늘」을 감상해 보도록 한다.
그리움도 한 시름도 發墨으로 번지는 시간
닷되들이 동이만한 알을 열고 나온 주몽
자다가 소스라친다, 서슬 푸른 殺意를 본다.
하늘도 저 바다도 붉게 물든 저녁답
비루먹은 말 한필, 비늘 돋은 강물 곤두세워 동부여 치욕의 마을 우발수를 떠난다. 영산강이나 압록강가 궁벽한 어촌에 핀 버들꽃 같은 여인, 천제의 아들인가 웅신산 해모수와 아득한 세월만큼 깊고 농밀하게 사통한, 늙은 어부 河伯의 딸 버들꽃 아씨 유화여, 유화여. 태백산 앞발치 물살 급한 우발수의, 문이란 문짝마다 빗장 걸린 희디흰 謫所에서 대숲 바람소리 우렁우렁 들리는 밤 발 오그리고 홀로 앉으면 잃어버린 족문 같은 별이 뜨는 곳, 어머니 유화가 갇힌 모략의 땅 우발수를 탈출한다.
말갈기 가쁜 숨 돌려 멀리 남으로 내달린다.
아, 아, 앞을 가로막는 저 검푸른 강물.
금개구리 얼굴의 금와왕 무리들 와와와 뒤쫓아오고 막다른 벼랑에 선 천리준총 발 구르는데, 말 채찍 활등으로 검푸른 물을 치자 꿈인가 생시인가, 수천 년 적막을 가른 마른 천둥소리 천둥소리…… 문득 물결 위로 떠오른 무수한 물고기, 자라들, 손에 손을 깍지끼고 어별다리 놓는다. 소용돌이 물굽이의 엄수를 건득 건너 졸본천 비류수 언저리에 초막 짓고 도읍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四神도 布置하는, 광활한 북만대륙에 펼치는가 고구려의 새벽을……
둥 둥 둥 그 큰북소리 물안개 속에 풀어놓고
―「주몽의 하늘」 중에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신화를 옴니버스시조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수는 주몽의 탄생과 주몽을 시기하는 세력에 대한 암시를 평시조의 짧은 형식 속에 함축시키고 있다. 둘째 수는 주몽이 어머니 유화를 동부여에 남겨두고 탈출하는 순간을 사설시조의 유장한 호흡 속에 그려넣고 있다. 셋째 수는 주몽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졸본에 고구려를 세우는 과정을 사설로 풀어놓고 있다.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 수는 탄생에서 성장하기까지의 긴 시간이지만 평시조로 소화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주몽이 탈출하는 짧은 순간의 이야기를 사설시조의 긴 흐름 속에서 안배하고 있다. 이것은 적소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주몽의 갈등이 유화의 고난한 생애와 겹쳐져 서술되고 있다. 셋째 수는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가 동원되면서 절박한 상황과 위기 극복의 과정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며 표현되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극적인 요소들만 선별하여, 긴 시간적 공간을 평시조에 압축시키는가 하면, 짧은 순간의 상황을 사설시조에 풀어놓는 등 자유로이 그 틀을 운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존 시조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틀 속에 단순히 내용을 담아 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위해 형식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적 여정은 바로 이러한 실험의식의 끝없는 추구로 일관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인을 시조시단의 ‘아름다운 테러리스트’라고 누군가가 명명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시인의 시세계가 늘 외부를 향해 치달았던 것은 아니다. 첫시조집에서도 보았듯이 한국적인 정서를 서정적으로 표출해 내기도 했으며, 서구적 예술지상주의를 시조에 접목시켜 내면적인 세계로 파들어가기도 했다. 그 중 한편을 소개해보도록 한다.
들녘을 쏘다는 야생마 그것처럼
툭 툭 짧은 붓 놀림의 신들린 색채 분할.
억압된 격정의 불길, 활활 솟아 물결친다.
노란 보리밭 이랑 까마귀떼 푸득이는,
꿈틀 꿈틀 나울치는 눈부신 풍광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문 빗장을 거는구나.
―「질료와 정신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은 그림을 위해 자신의 귀를 잘라내버린 고흐의 기괴한 행적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이것을 ‘질료와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대신하여 비유하고 있다. 고흐는 자신의 예술적 질료인 ‘그림’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시인에게 있어서 예술적 질료는 바로 ‘시조’이다. 시조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성취할 수 있다. “억압된 격정의 불길”이 “신들린 색채”의 언어로 표출되기 위해서는 온 ‘정신’이 시를 위해 바쳐져야만 한다. 예술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할 수 있다는 예술지상주의적 詩觀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것은 “격렬한 칼끝 언어로 솟구치는 내출혈”(「존재와 꿈―로댕의 ‘코 짜부라진 남자’」)처럼 모든 고통과 열정을 다 바쳐서 시적 언어가 가닿아야 할 목적지이다. 시조에 대한 시인의 치열한 내적 의식이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여 나타나 있다.
이제 작품이 아닌 시인의 외면적인 시단 활동을 추적해 보도록 하자.
40여 년에 이르는 시단 활동 중에서 시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오늘의 시조학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장순하 시인, 백담사 회주인 오현 스님 등과 세검정 계곡에서 탁족회를 결성했다가 발전한 단체로, 15년 동안 <오늘의 시조학회>를 이끌어오면서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상묵, 박시교, 임종찬, 유재영, 박기섭 시인 등 6회에 이르도록 수상한 이 상은 상금은 2백만원이지만 시화와 조각품, 제주도 여행권 등이 부상으로 주어져 상품까지 합치면 거의 천만원에 이르는 상금이 될 정도로 번성한 때도 있었다고 한다. IMF 이후 후원단체들의 지원이 끊기긴 했지만 시인이 주도하는 행사는 이처럼 늘 공을 많이 들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올해도 지난 7월 월드컵 성공기원 시조축제를 광주에서 가진 바 있으며 8월에는 백담사 만해축전 기념 시조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리고 오는 10월 해남 미황사에서 <청소년 시조문학캠프>를, 담양 가사문학관에서 <현대시조와 가사문학의 만남>을 기획하고 있다.
시인은 손으로 원고지에 시조를 쓴 것이 아니라 발로 뛰면서 사회라는 큰 공간에 시조를 써왔다고 할 수 있다. ‘시조가 현대시의 한 양식으로 살아 있는 문학양식’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인식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시조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자존심이 빛을 발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문학사상사의 <가람시조문학상>을 주관하고 있을 때였다. 시인이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시인이 이를 정중하게 사양한 것이었다. 같은 날 시상하는 소월시문학상의 상금이 5백만원인 데 반해 가람시조문학상은 2백만원이었다.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시단 경력 10년 안팎의 시인에게 주는 소월시문학상이 경력 30년 안팎의 중견을 대상으로 하는 가람시조문학상보다 상금이 적다는 것이 시인의 자존심, 나아가서 시조의 자존심 때문에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 건방진 것 같아 시인은 다른 적당한 시인을 찾아보라며 사양했다. 당시 권영민 교수는 도쿄대의 교환교수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시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시인은 문학상 운영의 부당함 점을 강력하게 지적했다. 시조문학상의 상금을 올리거나 시상식을 다른 날짜로 옮겨 달라고 건의했으며, 이에 공감한 권영민 교수의 노력으로 가람시조문학상은 상금이 5백만원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리고 시인은 『문학사상』 99년 12월호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고 특집기사까지 게재되었다. 시조의 문학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시인의 문학적 투쟁(?)은 침체에 빠져 있던 시조단의 자긍심을 높이고 활기를 불어넣었음은 물론이다.
시인은 현재 <오늘의시조학회> 회장, 중앙일보사 중앙문화센터 시조창작교실에 출강하면서 시조시인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경기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오랫동안 조선일보사 <주간조선>에서 근무했으며, 지금은 일주일에 두번 정도 출근하여 편집일을 전담하고 있다. 슬하에 2녀 1남을 두고 있는데,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장녀 윤나라 씨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7월 미국 시카고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둘째 윤시내 씨는 출가했으며 사위는 한의사로 개업하고 있다. 셋째 윤마루씨는 고려대 공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캐나다 유학을 앞두고 있다.
비가 약간씩 부슬부슬 내리는 날은 술 마시기에 아주 적당한 날이 아니던가. 4시부터 마시기 시작한 낮술로 나는 약간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2차로 근처 레스토랑에서 커피로 취한 기운을 털어내니 어느 덧 밤 9시였다. 장장 5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 셈이었다. 시인 댁에서 나의 집까지는 차로 20여 분 정도의 거리였고, 바로 가는 노선이 있어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하루종일 내린 비로 한강 다리 곳곳이 차량 통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회하는 차들로 서울 시내 교통이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장장 2시간을 버스에 갇혀 있으면서 나는 시인이 준 수필집 한 권을 읽으며 유유자적 시간을 때웠다.
그런데 수필집 속에서 나는 「어초문답」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어부 漁자에 나무꾼 樵자, 어부와 나무꾼은 각각 바닷가와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조선시대 李明郁의 그림 「漁樵問答圖」 속의 어부와 초부는 모두 속세를 등지고 은둔생활을 즐기는 양반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인의 「어초문답」의 어부와 초부는 뜻 그대로 순수한 어부와 초부인 것이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뱃놈과 나무꾼 등 조선왕조의 봉건암흑사회 그 참담한 밑바닥 인생”으로, 그런 밑바닥 삶의 우두머리쯤이라 할 수 있는 노비 ‘만적’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사동은 바로 만적의 호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지고 비비틀고 작신작신 할퀸 세월” 속에 “모가지 얼레에 감긴 참혹한 생애”였던 것이다. 만적이 주동하여 일으킨 ‘만적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죽었다 거듭 난 찰나, 도로 賤籍을 입은 너.”가 되고 만 것이었다. 「어초문답」은 도가적 기풍에 젖은 양반 어부와 초부가 만나 한가로이 사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대변하는 어부와 초부가 치열한 사회의식으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언어들인 것이었다.
“오늘의 시조가 ‘마스터베이션 문학’으로 타락해 버린”에 대해 강한 반발심과 거부감을 가진 시인이기에 그의 시의 씨줄과 날줄은 늘 올이 굵고 강직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었다. 시조의 정형성에 반역하여 그 형식의 혁명을 일으키고, 그 틀 속에 역사와 사회라는 치열한 주제의식을 담아 내고자 했던 시인의 시세계가 내내 나를 압도해 왔다.◑ (시인, 경기대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