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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가의대부(家義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社) 선대실록(先代實錄) 편수관(編修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 내의원부조제(內醫院副提調)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병조예조참의(兵曹禮曹參議) 형조호조참판(刑曹戶曹參判)자헌대부(資憲大夫) 지신공(知申公) 안동권공(安東權公)
지신공(知申公) 비원문은 음기 다음과 같다.
(南靈草吸煙之法。本出日本。日本人謂之淡泊塊。言)
남령초흡연지법。본출일본。일본인위지담박괴。언
(其草出自南洋諸國云。我國自二十年前始有之。今則)
기초출자남양제국운。아국자이십년전시유지。금칙
(上自公卿下至轝臺蕘牧。無不服之。其草不見於本草)
상자공경하지여대요목。무불복지。기초불견어본초
(諸書。未知性氣及主治。但味辛似有小毒。人未嘗茹)
제서。미지성기급주치。단미신사유소독。인미상여
(服。但燒煙吸之。吸多則亦令人暈倒。久服者不必)
복。단소연흡지。흡다칙역령인훈도。구복자불필
(然。世之不服者。僅僅千百之一耳。頃見華人朱佐)。
연。세지불복자。근근천백지일이。경견화인주좌。
(浙江慈溪人也。言中國稱南草爲煙酒。或稱煙茶。百)
절강자계인야。언중국칭남초위연주。혹칭연다。백
(年前閩中已有之。今則幾遍天下。治赤鼻最有效。余)
년전민중이유지。금칙기편천하。치적비최유효。여
(問此物燥熱。必傷肺。何能治鼻。朱曰。能散滯氣故)
문차물조열。필상폐。하능치비。주왈。능산체기고
(耳。其言亦有理 余謂南草之用於世。殆將如中國之茶)。
이。기언역유리 여위남초지용어세。태장여중국지다。
(茶自魏晉始著。盛行於唐宋。至於今日。遂爲天下生民)
다자위진시저。성행어당송。지어금일。수위천하생민
(日用之須。與水穀同用。國家至榷賣收利。今南草之行甫數)
일용지수。여수곡동용。국가지각매수리。금남초지행보수
(十年耳。其盛已如此。百年之後。將必與茶爭利矣。)
십년이。기성이여차。백년지후。장필여다쟁리의。
(古者南人重檳榔。謂醉能使之醒。醒能使之醉。飢能)
고자남인중빈랑。위취능사지성。성능사지취。기능
(使之飽。飽能使之飢。蓋酷嗜而稱美之耳。今世嗜南)
사지포。포능사지기。개혹기이칭미지이。금세기남
(草者。亦言飢能使之飽。飽能使之飢。寒能使之煖)
초자。역언기능사지포。포능사지기。한능사지난。
(熱能使之涼。其稱之絶類檳榔。亦可一笑。)
열능사지량。기칭지절류빈랑。역가일소。
(世之攻南草者。以出於蠻夷。非本草所載爲口實。此)
세지공남초자。이출어만이。비본초소재위구실。차
(非通論也。本草宋徽宗時所纂。其經神農所嘗者。僅)
비통론야。본초송휘종시소찬。기경신농소상자。근
(僅什之一。其餘皆後出者。而唐宋以來。從蠻舶來者)
근십지일。기여개후출자。이당송이래。종만박래자
(居多。如破故紙是藥中要品。而出自蠻舶。破故紙之)
거다。여파고지시약중요품。이출자만박。파고지지
(稱。絶無意義。政類淡泊塊。夫南草之能利益人。吾)
칭。절무의의。정류담박괴。부남초지능리익인。오
(所未知果能有之。不當問其所從來也)。
소미지과능유지。불당문기소종래야。
권희(權憘) ; 증(贈)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남악공(南嶽公)
同副承旨 兵曹參議 刑曹參議 戶曹參議 禮曹參議 大司 諫都承旨 江華留守 金山郡守 廣州 牧使 黃海道 忠淸道觀察使 軍器寺 宗簿寺正執義 承政院注書 成均館 典籍 司憲府監察 內醫院副提調 宗廟署領 府君
정헌공계(正獻公系) 17세 절제사(節制使)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휘(諱) 복(復)의 장자인 18세 좌랑공 온(溫)의 차남인 19세 부정공(副正公) 휘(諱) 욱(旭)의 손자(孫子)인 21세 남강공(南岡公) 휘(諱) 상(常)의 셋째아들로 자는 사열(思悅), 호는 남악(南嶽)이며 명종 2년 1547년 정미에 출생하였다. 선조 원년 1568년 무진에 진사가 되고, 동 17년1584 갑신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주서(注書) ․ 전적(典籍)을 거쳐 각조(各曹)의 낭관과 양사(兩司)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동 25년1592 임진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는데,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할 때 역대왕의 신주와 어보(御寶)를 안전히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였다. 동 29년 1596년 병신에 종부시정 겸 집의(宗簿寺正兼執義)로 진위사(鎭慰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兵曹) 및 예조참의(禮曺參議)가 되었다. 그리고 동 36년 1603년 계묘에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都承旨) 대사간(大司諫), 충청도 관찰사와 형조참판(刑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그 동안 외직으로는 강화유수(江華留守) ․ 금산군수(錦山郡守) ․ 광주목사(廣州牧使)를 거쳤다. 명장(明將)의 접반사(接伴使)로 재임하던 동 30년 1597 정유에 안동 태사묘(太師廟)를 성배(省拜)하고 《남악기南岳記》를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묘소는 안동부(安東府) 서후면(西後面) 검제(黔堤)의 천등산(天燈山)에 있으니 부(府)로부터 20여 리 상거한 곳이다. 정유년 겨울에 희憘가 명나라 장수 이방춘(李芳春) 부총병(副總兵)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이곳 부사(府司)에 이르러 곧 주과(酒果)를 갖추고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공의 묘소를 성배 하였더니 묘아래 수리허(數里許)에 거주하는 권 씨 성의 지방민 10여 인이 와서 참사하였다. 묘 옆에는 큰 사찰이 있는데 이것이 곧 봉정사(鳳停寺)라 하는 절이다.
[公墓在安東府 西後面黔堤 天燈山 距府二十餘里. 丁酉冬 憘爲天將副總兵李芳春 接伴使 到此府 卽具酒果 製祭文 省拜于公墓 墓下數里許 居住 權姓士人十餘人 來參焉. 墓傍有巨刹 卽所謂鳳停寺也.]
광해조에 이르러 선조의 왕비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정청(庭請)에 불참해 금고 해직되었으며, 인조 개옥(改玉) 후 동 2년 1624년 갑자에 임진왜란 당시 왕실의 신주를 모셨던 공으로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봉되는 동시에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이르렀고, 기로소(耆老所)에 가입하였다.
동년 5월 29일에 졸하니 향수 78세였다. 임금은 부문을 듣고 예관을 보내어 치조(致吊)하고 제문을 내렸으며 우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숙종 6년 1680 경신에 의정부에서 계청공에게 특별히 추훈(追勳)으로 봉군(封君)을 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의론하도록 하교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배위 증 정경부인(增貞敬夫人) 전주 이 씨全州 (李氏)는 군수 영서(榮緖)의 딸인데 명종 5년1550 경술 2월 1일에 출생하여 인조 7년1629 기사 7월 18일에 졸하니 수는 8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漣川郡百鶴面頭峴里) 삼정동(三井洞)에 해좌로 있다.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비문을 짓고 증손자 환(瑍)이 묘지(墓誌)를 지었으며 미수(眉叟) 허 목(許穆)이 비문의 글씨를 썼다. 이 묘소가 있는 곳은 휴전선(休戰線)의 민통선(民統線)안인지라 출입을 못하여 실전된 상태에 있다가 1969년 기유에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덕정리(楊洲郡檜泉邑德亭里)의 손자 동창위(東昌尉) 대항(大恒)의 묘소 우측에 설단(設壇)을 하고 제향을 받들었다. 그러다가 민통선내의 출입 성묘가 부분적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실묘(實墓)를 심득(尋得)하여 치묘(治墓)하였고 한편 묘지석(墓誌石)을 1973년 계축에 도굴(盜掘)당하여 잃었다가 1975년 을묘에 다시 찾아 단소 뒤에 매봉埋封하였다. 아들은 동지중추(同知中樞) 증 이조참판 익중(益中) ․ 목사(牧使) 의중(義中) ․ 문과 부사(府使) 임중(任中) ․ 생원(生員) 귀중(貴中)이 있고 딸은 3녀가 직장(直長) 박유공(朴由恭) ․ 군수 안대남(安大楠)
권희(權憘 先生 )1547∼1624
옛적 한(漢)나라 선성공곽광(宣成公霍光)이 묘소 앞에 길을 내고 돌기둥을 세워 신도(神道)라 한 이래 송(宋)나라 반산 왕안석(半山 王安石)이 바탕과 머리를 아로새긴 비석에 명(銘)과 시(詩)를 지어서는 묘소 길에 베풀고 그 끼침이 영구하라 하였으며 동파 소식(東坡 蘇軾)이 온 국공 사마광(溫國公 司馬光)의 신도비(神道碑)에 충청수덕(忠淸粹德)이라 하니 세가(世家)와 망족(望族)의 효자(孝子)와 성손(誠孫)이 앞을 다투어 그 조상과 선대의 명당(明堂)자리에 드러나게 새긴 바를 세움으로써 경관과 운치를 더하고 이로써 그 덕을 본받아 닦으며 이로써 그 태어난 바를 욕되지 않게 하고자 할 책무를 맹세하기로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이 여기게 되었다. 고려 개국태사 아부공신(高麗 開國太師 亞父功臣) 휘(諱) 행(幸)인데 신라(新羅)의 종실(宗室)로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병기달권(炳幾達權)에 이르렀다 하여 권(權)으로 득성(得姓)을 하고 안동(安東)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이를 본관(本貫)으로 삼았는데 공(公)은 그 21世 후손이다. 공의 11대조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휘 수평(守平)인데 안동의 관향(貫鄕)을 떠나 서울 개경(開京)에 올라와 간고(艱苦)한 말직(末職)으로부터 청렴(淸廉)하고 곧은 것으로써 현달(顯達)하여 고려사(高麗史)에 그 전(傳)이 실리기에 이르렀다.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가 한림(翰林)학사 평장사 태자태사 충헌공 휘 위(平章事 太子太師 忠憲公 諱 韙)를 낳고 충헌공(忠憲公)이 지첨의 정승 대제학 문청공(知僉議政丞 大提學 文淸公) 휘 단(㫜)을 낳고 문청공(文淸公)이 영도첨의정승 영가부원군 문정공 (領都僉議政丞 永嘉府院君 文正公)을 낳으니 세칭 구봉군(九封君)으로서 휘가 보(溥)요 문정공(文正公)이 그 4남으로서 처음 휘(諱)가 재(載)이고 충선왕(忠宣王)이 아들로 삼아 왕후(王煦)로 사성명(賜姓名)되어 영도첨의정승(領都僉議政丞)에 계림부원대군(雞林府院大君)이 되는 정헌공(正獻公)을 낳으니 공에게 8대조부가 된다. 7대조부 광록대부(光祿大夫)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는 성 휘 왕 중귀(姓諱 王重貴)가 고려말(高麗末)에 35세로서 무고(無辜)히 화를 입고 6대조부는 휘가 숙(肅)인데 고려조에 文科로 벼슬에 나아갔으나 조선개국후(朝鮮 開局後)에 전왕조(前王祖)의 종실을 박해하는 것을 피해 은둔(隱遁)하였다가 재종형양촌(再從兄 陽村)이 조선태조(朝鮮太祖)에게 주달(奏達)함에 힘입어 권씨(權氏)로 복성(復姓)하여 승지(承旨)와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이조참판(大司諫 大司憲 大司成 吏曹參判)을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렀으며 뒤에 부윤공(府尹公)이 귀히 됨에 따라 자헌대부 호조판서로 추증(資憲大夫 戶曹判書로 追贈)되었고 오대조부(五代祖父)께서는 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輔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으로 가증(加贈)되고 화산부원군에 추봉(花山府院君에 追封)되었다 고조부께서는 화산부원군 휘 복의 맏아들이시다 온통례공(溫 通禮公) 자는 화보 태종(和甫 太宗)13년1413년 癸巳에 출생하여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좌익원종공신녹훈(左翼原從功臣錄勳)되었다 사후추증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通勳大夫 通禮院 左通禮)가 되시었다. 아들은 사직서령(社稷署令) 창(昶) 둘째 사도사부정 좌승지 겸 참찬관 욱 증조부 부정공 통례공 온(司都寺副正 左承旨 兼 參贊官 旭 曾祖父 副正公 通禮公 溫)의 둘째아들이다 세종(世宗) 22년 1440년 경신(庚申)에 출생하여 감찰 서령 사의 첨정 상례 사도사부정(監察 署令 司議 僉正 相禮 司導寺副正) 외직으로 안산 평산 강화(安山 平山 江華) 3읍의 수령을 하고 선정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영상인 유순과 더불어 기영회(耆英會)의 가입하여 향수72세로 졸 좌승지 겸 참찬관(左承旨 兼 參贊官)으로 추증되었다 아들은 전생서 주부 섭典(牲暑 主簿 攝) 둘째아들 참봉 진 현감 확 조부 진 참판공(參奉 振 縣監 擴 祖父 振 參判公) 자는 진지(振之)이고 서울에서 성종(成宗)3년 1472년 출생하여 중종(中宗)3년에 1508년 사옹원 참봉(司饔院 參奉)에 전생서 영숭전 봉직(典牲暑 永崇殿 奉職)하였고 중종6년1 2월에 선 고상을 당하여 애훼(哀毁)한 나머지 병을 얻어 중종(中宗) 9년 1514년 갑술(甲戌) 7월 18일 졸 추은후 호조참판(推恩後 戶曹參判)이 되었다 아들은 남강 증영의정 동흥부원군 상南(岡 贈領議政 東興府院君 常)이다. 부친 상 남강은 길재(常 南岡은 吉哉)이고 중종(中宗) 3년 1508년 9월 14일 乙丑 출생하여 중종(中宗) 23년 1528년에 진사(進士)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음사(蔭仕)에 추천되었다 아들 희(憘)의 벼슬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른 것으로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 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시고 아들 협(悏)이 선무공신(先務功臣)에 책봉된 것으로 인하여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동흥부원군(純忠輔祚功臣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東興府院君)에 추가로 증직 되시고 아들 희가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申)1등에 든 것으로 인하여 순충보조공신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동흥군(純忠寶祚功臣 崇政大夫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東興君)에 추가로 증직시키고 아들 협(悏)이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일등에 든 것으로 인하여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관상감사 동흥부원군(純忠寶祚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經筵官上監使 東興府院君)에 증직되셨다. 자는 사열(思悅)이고 호는 남악 휘 희南(嶽 諱 憘)이다. 명종(明宗)2년 1547년 11월 10일에 서울 주동(鑄洞)에서 출생 하였다. 왕실 순천군 이관(順天君 李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宣祖)1년 1566년의 증광시(增廣試) 유학으로 진사(進士)에 3등 제99인으로 합격했다. 선조(宣祖) 17년 1584년 8월 20일의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병과(丙科)제1인으로 급제(及第)하여 예문관(禮文官)에 들어가고 승정원주서(承政院主書)와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형조와호조예조 병조 낭관(成均館典籍 司憲府監察 刑曹와戶曹禮曺 兵曹 郎官)을 거치고 군기사종부(軍器寺宗簿)시정과 삼사(三司)의 여러 직을 역임했다. 선조(宣祖)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임금(壬辰倭亂林檎)이 의주(義州)를 임금이 의주(義州)로 파천하여온 조정(朝政)이 창황할 때 종묘서령(宗廟誓令)으로서 신주(神主)와 역대의 옥(玉)쇄를 받들고 가난과 위험을 무릅 스고 행재소(行在所)까지 같다. 그 후 내직으로는 동부승지 병조와 예조참의 형조와 호조(同副丞旨 兵曹와 禮曺參議 刑曹)와 호조(戶曹)의 참관 대사간 도승지(大司諫 都承旨)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강화 금산 광주 목수 충청도관찰사(江華 錦山 光州 牧守 忠靑道觀察使)를 지냈다. 종부사정겸 집의(宗簿寺正兼 執義)로 있을 때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고 그 공으로 전답 15결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이 모후를 폐할 때 정청(政廳)에 불참하여 좌고(左錮)되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한성부윤(漢城府左尹)으로 수배되고 임진년(壬辰年)에 종묘(宗廟)를 배호(陪扈)한공을 추상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특가 되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으며 주자방(鑄字坊)에 저택을 내리면서 임금이 친히 어필(御筆)로 충신지간(忠臣之間)라 써서 정표(旌表)하였다. 인조 2년 1624년 5월에 이조판서(吏曺判書)를 배하는 명이 내렸으나 이미 질환이 깊어 공직에 이루지 못하다가 동월 29일에 졸(卒)하니 수는 78세였다 부고(訃告)가 문달(聞達)되자 王이 예관(禮官)을 보내 치조(致弔)하고 제사(祭祀)를 내렸으며 호성원종공신(護聖原從功臣) 1등에 책훈 되었던 고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34권 부록(簿錄)에 가의대부호조참판겸동지춘추관사(家義大夫戶曺參判兼同知春秋館社)로서 선대실록 편수관(先代實錄 編修官)에 들고 선조(宣祖) 29년1596년 4월 20일자에 장령(掌令)이되는 것으로 나온다. 5월7일에 경연(經筵)에 시독(侍讀)하고 25일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며 6월 5일 18일 7월 13일에 집의(執義)로 실록(實錄)에 나온다. 8월28일에는 교리(校理)로 나오고 8월6일과 9일에는 종부시정으로서 兼 집의(執義)가 되어 명나라에 간다. 선조30년 1597년 4월 12일에는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나오고 18일에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가 되며23일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6월 16일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오르며 8월 27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9월 29일에는 우승지(右丞旨)로 나온다. 10월2일 좌승지(左承旨)로 오르고 27일에 병으로 사면한다. 선조(宣祖) 32년 1599년 1월 6일자에 명의 부총병(副摠兵) 이방춘이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공의 노고가 많았음을 선조(宣祖)에게 말하는 기사가 나오고 3월24일에 좌승지(左承旨)가 되며 5월25일에는 강화부사(江華副使)가 되어 나간다. 5월26일에는 중국사신(中國史臣)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11월 25일에 도승지가 되고 12월 6일에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가 26에 충청감사로 나갔다. 선조(宣祖) 34년 1601년 5월 25일에 다시 도승지가 되고 8월18일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으로 나오며 11월1일 진가사(進賀使)로 임명 되었으나 24일에 병으로 체임된다. 선조 35년 1621년 2월 15일에 대사간으로 나오고 선조36년 1603년 4월 27일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주청사(奏請使)의부사(副使)가 (황중윤과 함께 세계 유일본인 지도 양의현람도를 하사받아 황중윤의 연행록에 북경에서 구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지금도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황해황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전함)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6월 20일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고명 장복(誥命과 章服)을 받아 가지고와 1자급이 승진되고 전답 15결과 노비 3인을 받는다.7월4일에 대사간이 되고 이후로 경연 등에서 임금에게 주의(奏議)하는 일로 수차실록에 나온다. 선조(宣祖) 37년1604년 7월27일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9월 4일에는 황해감사로 나가며 선조38년1605년 9월21일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2월 22일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이된다. 선조 39년 1606년 2월 12일에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서 주의한다. 선조 수정실록 선조 40년 1607년 1월 23일자에 호조참판으로 나오고 4월 28일에 다시 도승지가 되며 선조 41년 1608년 1월 7일에는 내의원부제조(內醫院副提調)로 나온다. 광해군 즉위년 1608년 8월 6일자에는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로 나오고 8월25일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나오고 광해군 3년 1611년 9월 11일에는 금산군수로서 좌천된 상태에에서 중병으로 파직되는 기사가 나오고 광해군 9년 1617년11월25일에는 행사직으로서 폐모문제에 대한 의정부(議政府)의 의론에 참여하며 광해군(光海君) 10년 1618년 1월 4일에 폐모정청에도 행사직으로 나온다. 그리고 2월 9일자 실록에는 정청에 시종일관 불참한 38인의 1인으로 초계 되는 기사가 나온다 숙종(肅宗) 6년 1680년에 의정부의계청으로 특별히 추훈(追勳)하여 봉군(封君)하고 시호를 내리 라는 교시가 있어으나 이루어 지지못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5.17권에 사적이 실려있다.
배配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명종 5년 1550년 2월1일에 나서 인조(仁祖) 7년 1629년 7월18일에卒 수(壽)는 80세 묘소는 경기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 삼정동에 해좌 합폄이다. 동명 정두경(東溟 鄭斗卿)이 비문(碑文)을 짓고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글씨를 썼다 묘지는 증손 환曾(孫 環)이 지었는데 1973년에 도실(盜失) 되었다가 1975년에 되찾았다.
익중 동지공 남악 휘 희(益中 同知公 南嶽 諱 憘)의 맏아들로 자는 경시(景時)이며 선조 4년 1571년 신미 2월 3일에 출생 선조 38년 1605년 을사에 벼슬에 나가 경산 재령 마전 세 고을에 수령을 하였다 효종원년(孝宗元年) 1650년 경인(庚寅)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소되었고 효종 1654년 갑오(甲午)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되어 향수89세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현령(縣令) 대유(大有) 동창위대항(東昌尉 大恒)이 있다. 의중 목사공(義中 牧使公) 둘째아들로 자는 경의(景宜)로 선조 6년 1573년 계유 6월 7일에 출생 선조(宣祖) 38년 을사에 생원이 되어 관직(官職)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인조 25년 7월 24일에 졸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로추증 되었다. 아들은 통덕랑 대업 대욱 대후 대방(通德郞 大業 大勖 大後 大方)이 있다. 임중 부사공(任中 府使公) 셋째아들이다 자는 경용(景用)이고 선조(宣祖) 16년 1583년 계미에 출생 광해군4년 1612년 임자(壬子)에 진사(進士)가되고 인조(仁祖) 11년 1633년 계유(癸酉)에 51세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병과로 급제 여러 내 외직을 거처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귀중생원공(貴中 生員公) 넷째아들이다. 자는 景得 선조 22년 1589년 출생 임진왜란으로 학생으로 세운공로로 선조 38년 1605년 4월 16일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성균관생원(成均館 生員)이 되었다. 대유 진위공 남악 휘 희(大有 振威公 南嶽 諱 憘)의장손이며 동지중추부사 휘 익중(同知中樞府事 諱 益中)의장자로 자는 웅형 호(雄亨 號)호는 해은(海隱) 선조 31년 1598년 무술에 출생 음사(蔭仕)로 포천 현감이 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현병(縣兵)을 인솔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비하여 진계공(振威公)으로 현령(縣令)으로 승진하였다 인조18년 1640년 경진 12월2 5일 졸하니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현종실록(玄宗實錄) 남계집(南溪集)의 기록에 의하면 숙종(肅宗) 경신(庚申)년 1680년에 추은가증(追勳加贈)하고 봉시(封諡)하라는 교지를 특몽(特蒙)하였으나 결과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아들은 현감덕연 덕휘 군수덕광 주부덕양 동지중추부사덕명 군수덕윤(縣監德衍 德徽 郡守德廣 主簿德養 同知中樞府事德明 郡守德允)등 6인이다. 대항 ; 동창위(大恒 ; 東昌尉) 남악 휘 희(南嶽 諱 憘)의차손이며 동지중추부사 휘 익중(同知中樞府事 諱 益中)의 둘째아들이며 자는 응정(應貞)이며 광해죠 2년 1610년 경술(庚戌)에 출생 정화옹주(貞和翁主)와 혼인하여 자헌대부(資義大夫)에 오르고 동창위(東昌尉)의 작위를 받았으며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總副總管)을 현종 7년 1666 丙午 정월4일에 졸하였다 아들은 부정 덕휘와 동지중추부사 덕찬 치물(副正 德徽와 同知中樞府事 德纘 置物)이 갖추어지지 못한 채로 수백여년이 지났는데 1950년 경인(庚寅)의 병화(兵禍)에 표석(表石)이 깨지고 치물(置物)이 부서지는 변을 만났다가 1982년 임술(壬戌)에 후손 이도(彝道)와 재물을 내어 비석을 고쳐 세우고 1995년 乙亥에 이도(彝道)씨와 이현(彝鉉) 등이 다시 고쳐 봉축(封築)하였다. 그러나 묘역이 마침 남북이 대치한 민통선(民統線) 안에 있어 후손이 뜻대로 修治할 수가 없는 것이 宿望이었는데 이번에 화산부원군 도유사 정택(花山府院君 都有司 貞澤)이 지신공종중(知申公宗中)과 의론 주선하여 향토문화재 지정에 힘써 드디어 연천군 향토문화재지정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성균관 전의 겸 전례사 정택 (成均館 典儀 兼 典禮士 貞澤 )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 그리고 미래의 높은 옥돌을 일으켜 신도비를 세워 이로써 威儀를 도와 일대의 경치에 둥근 無理의 光彩가 나게 하겠다.
臨河莫止逝長流 : 임진강 그칠 일 없어 아득히 길게 흐르고
勿必紀功傳久悠 : 공적을 기려 기록하지 않아도 유구히 전해오네.
未施抱蘊天非吊 : 몸속에 쌓은 것 베풀지 못함은 하늘이 돕지 않음이요
壯年不淑恨千秋 : 장년에 맑지 못하게 됨 천추의 한인데
惜悼追榮臣下極 : 애석히 여겨 영예롭게 추숭함은 신하로서 더할 나위 없고
冕軒盈庭紹業孚 : 수레와 벼슬 뜰에 가득함은 덕업을 잘 이음이롤세.
그윽이 생각하건대 有漏가 없게 되었는데 다만 일후에 國家의 禁制가 풀려 산줄기 아래에 齋舍를 다시 세우는 일만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하겠다.
■ 세계 유일본 양의현람도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金良善)의 논고에 따르면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선조 때 크게 등용됐던 황여일(黃汝一)의 아들 황중윤(黃中允)이 1604년 권희의 명나라 사신으로 함께 구득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 집안에서는 명나라 조정의 하사품이었다고 하나 황중윤의 연행록(燕行錄)에는 북경에서 구득한 것이라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뜻밖에도 이 지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6년대 이르러서다.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평해 황씨 종가에서 300여 년간 비장돼 오던 이 지도를 황씨 집안의 종손인 황병인(黃炳仁)이 밝혀냈는데,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그는 방학을 맞아 집에 와있던 중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물건을 열어보니 ‘兩儀玄覽圖(양의현람도)’라 표제가 붙은 세계지도였다고 한다. 이 지도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까지 들고 간 그는 스승이자 동서문화교류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교수에게 고증을 부탁했다. 이에 교수는 고지도 연구가인 아유자와 신타로(鮎澤信太郞)를 소개했고, 1936년 아유자와가 이 지도를 소개하는 글을 학계에 발표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광복 직후 양의현람도는 황병인의 호의로 김양선 목사가 운영하는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하게 됐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 목사는 이 지도를 박물관 뜰에 파묻고 피란길에 올랐다.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되어 돌아 와보니 박물관 소장품은 대부분 소실돼 없어졌으나 땅속에 묻어 뒀던 양의현람도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知申公 權 憘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 산64번지
22세 | 23세 | 24세 | 25세 |
셋째아들희憘 | 익중 益中 | 대유 大有 | 덕연 德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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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휘 德徽 출위계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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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후出爲季父大恒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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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광 德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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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양 德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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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명 德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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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윤 德潤 | |
| 대항 大恒 | 덕휘 德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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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찬 德瓚 | |
의중 義中 | 대업 大業 | 덕유 德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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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흠 德欽 | |
| 대욱 大勗 | 덕무 德懋 | |
| 대후 大後 | 덕현 德玄 | |
| 대방 大方 | 덕건 德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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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삼 德三 출위종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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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균후出爲從叔大均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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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선 德先 | |
| 임중 任 中 | 대년 大年 | 덕소 德邵 |
| 만년 萬年 | 현덕 賢德 | |
| 백년 百年 | 석덕 碩德 | |
귀중 貴中 | 대균 大均 | 덕삼 德三 | |
| 대평大平세절世絶 | ============== |
익중 (益中) : 동지공(同知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조참판(吏曹參判) 통정대부(通政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1571년 선조 4∼1659년 효종 10.조선 중기문신. 자는 경시(景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권상(權常)이고, 부친 증 우의정(贈右議政) 권희(權憘)와 모친 군수(郡守) 이영서(李榮緖)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현감(縣監) 조서(趙瑞)의 딸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1605년(선조 38) 처음 관직에 나아가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며, 1606년(선조 39)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경산현감(慶山縣監) 등을 지냈다. 그리고 광해군대에 들어서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재령군수(載寧郡守)·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병(病)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649년(인조 27) 회혼(回婚)을 기념하는 중뢰연(重牢宴)을 열었다. 1650년(효종 1)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84세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657년(효종 8)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령(縣令) 권대유(權大有)·권대항(權大恒)이다. 장남 권대항은 옹주(翁主)와 혼인하여 동창위(東昌尉)에 봉해졌다. 배위 증 정부인 한양 조 씨(漢陽 趙氏)는 현감 서(瑞)의 딸로 선조 3년 1570 경오에 출생하여 효종 10년1659 기해 11월 26일에 졸하니 향수가 9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白鶴面頭峴里) 삼정동(三井洞) 고위묘(考位墓) 앞에 해좌로 합폄合窆되어 있는데 미수(眉叟) 허 목許(穆)이 비명을 찬하고 재종손 환瑍이 지문(誌文)을 찬 했다.
대유 (大有) : 진위공 (振威公 抱川縣監 平澤縣令 大司憲)
정헌공계(正獻公系) 17세 절제사(節制使)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휘(諱) 복(復)의 장자인 18세 좌랑공 온(溫)의 차남인 19세 부정공(副正公) 휘(諱) 욱(旭)의 손자 (孫子)인 21세 남강공(南岡公) 휘(諱) 상(常)의 셋째아들인 이조 참판 남악(南嶽) 휘(諱) 희(憘)의 손자요 23세 동지중추부사 휘(諱) 익중(益中)의 장자로 자는 응형(應亨), 호는 해은(海隱)이며 선조 31년1598 무술에 출생하였다.
음사(蔭仕)로 포천현감(抱川懸監) 되어 재임 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현병(縣兵)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을 수비하여 그 공으로 진위(振威) : 현 평택군 진위면의 현령(縣令)으로 승진하였다. 인조 18년 1640년 경진 12월 25일에 졸하였고, (大司憲)에 추증되었다. [《현종실록》 ․ 《남계집南溪集》]의 기록에 의하면 그 뒤 숙종 경신년 1680년에 추훈가증(追勳加贈)하고 봉시(封諡) : 시호를 내림하라는 교지를 특몽(特蒙)하였으나 결과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배위 정부인 밀양 박 씨(密陽 朴氏)는 참판 진원(震元)의 딸로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 삼정동(百鶴面頭峴里三井洞)에 조부 지신(環)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아들은 현감(縣監) 덕연(德衍) ․ 덕휘(德徽) ․ 군수(郡守) 덕광(德廣) ․ 주부공(主簿公)덕양(德養) ․ 동지중추 덕명(德明) ․ 군수 덕윤(德允) 등 6인이 있다.
덕연(德衍 縣監 佐郞)
자는 윤보(潤甫)이고 휘(諱)덕연(德衍) 광해근(光海君) 11년 1619년 7월 24일에 나서 (孝宗)2년1651년의 (式年侍)에 서울거주 자시하(慈侍下)의 유학(幼學)으로 진사(進士) 2등 제 27인으로 입격하여 현감(縣監)과 좌랑(佐郞)을 지내고 숙종 20년 1694년 11월 10일에 76세로 졸하시었다.
숙인(淑人)해평윤씨( 海平尹氏)참봉상지 (參奉尙之)의 딸
지신공 향사축(知申公 享祀祝)
維 歲次辛卯 九月乙酉朔 二十七日辛亥
十三代孫 敬澤 敢昭告于
顯 十三 代祖考 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同副承旨 兵曹參議 刑曹參議 戶曹參議 禮曹參議
大司諫都承旨 江華留守 金山郡守 廣州牧使
黃海道 忠淸道觀察使 軍器寺宗簿寺正執義
承政院注書 成均館 典籍 司憲府監察 內醫院副提調
宗廟署領 府君
顯 十三 代祖妣 贈 貞敬夫人 全州李氏 之墓
氣序流易 霜露旣降 瞻掃封瑩
不勝感慕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尙
饗
동지공
維 歲次辛卯 九月乙酉朔 二十七日辛亥 十二代孫
孝澤 敢昭告于
顯 十二 代祖考 贈 吏曹參判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使
慶山 載領 麻田三郡縣令 司宰監僉正
宣武原從功 臣三等 府君
顯 十二 代祖妣 貞夫人 漢陽趙氏 之墓
氣序流易 霜露旣降 瞻掃封瑩
不勝感慕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尙
饗
의중 (義中) : 목사공 (牧使公)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휘(諱) 복(復)의 장자인 18세 좌랑공 온(溫)의 차남인 19세 부정공(副正公) 휘(諱) 욱(旭)의 손자 (孫子)인 21세 남강공(南岡公) 휘(諱) 상(常)의 셋째아들인 이조 참판 남악(南嶽) 휘(諱) 희(憘)의 둘째아들이다. 자는 경의(景宜)로 선조 6년 1573년 계유 6월 7일에 출생하여 선조 38년 1605 을사에 생원이 되어 처음 출사하고 관직이 나중에 목사에 이르렀다. 인조 25년1647 정해 7월 24일에 졸하여 호조 참의로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장단(長湍 )임진강(臨津江) 상류 화산부원군 휘(諱) 복(復)의 묘소 뒤에 있다.
배위 증 숙부인 고령 신 씨(高靈) 신씨(申氏)는 판관 홍(泓)의 딸로 1남을 낳았고 기일은 9월 29일이다.
재배 증 숙부인 전주 이 씨(全州 李氏)는 덕순수금(德順守凎)의 딸로 기일은 1월 5일이고 묘소는 공과 합장 되어있다.
아들은 통덕랑 대업(大業) ․ 대욱(大勖) ․ 대후(大後) ․ 대방(大方)이 있다.
임중 (任中) : 부사공 (府使公)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휘(諱) 복(復)의 장자인 18세 좌랑공 온(溫)의 차남인 19세 부정공(副正公) 휘(諱) 욱(旭)의 손자 (孫子)인 21세 남강공(南岡公) 휘(諱) 상(常)의 셋째아들인 이조 참판 남악(南嶽) 휘(諱) 희)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경용(景用)으로 선조 16년1583 계미에 출생하여 광해군 4년1612 임자에 30세로 진사가 되고 인조 11년1633 계유에 51세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에 여러 내 외직을 거쳐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그 밖의 관력과 사적은 알 수 없다.
효종 2년1651 신묘에 졸하니 수는 69세였다.
배위 숙부인 밀양 박 씨(密陽 朴氏)는 병마사(兵馬使) 진(晋)의 딸이며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정릉리(長湍郡松西面正陵里)에 있다.
아들은 대년(大年) ․ 찰방(察訪) 만년(萬年) ․ 부호군 백년(百年)이 있고 딸은 진사 송지덕(宋之德)에게 출가했다.
귀중 (貴中) : 생원공 (生員公)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휘(諱) 복(復)의 장자인 18세 좌랑공 온(溫)의 차남인 19세 부정공(副正公) 휘(諱) 욱(旭)의 손자 (孫子)인 21세 남강공(南岡公) 휘(諱) 상(常)의 셋째아들인 이조 참판 남악(南嶽) 휘(諱) 희(憘)넷째아들이다. 자는 경득(景得)이고 선조 22년 1589에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에 학생으로 세운 공로로 선조 38년1605 4월 16일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광해군 4년1612에 생원(生員)이 되고 인조 13년1636의 5월 13일자 실록에 성균관 생원으로 나온다. 헌종 9년 1668에 졸하니 수가 80세이다.
배위 전주 이 씨는 약瀹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대화동에 임좌壬坐이다.
아들은 대균大均 대평大平이고 사위는 함열인 참봉 남궁화민(南宮火民)과 이창하(李昌夏)가 있다.
성균관 전의 권정택 문헌 (연천 문화제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