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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知能), 지식(知識), 지성(知性), 지혜(知慧)의 차이
- 통합적 인재 슈퍼 제너럴리스트
일본 다마(多摩)대학 대학원 원자력 공학과 다사카 히로시(田坂広志, たさか ひろし1951~) 교수의 『슈퍼 제너럴리스트, SUPER GENERALIST : 지성을 연마하다』 저서에서 슈퍼 제너럴리스트가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지성’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진정한 앎이란 무엇일까? 이 어려운 문제를 쉽게 설명해준다.
1. 왜 고학력자에게 깊은 지성을 느낄 수 없는가?
- 지성(知性)이란 무엇인가?
‘지성이란 갈고 닦는 것이다.’ ‘지성과 사이비 지성이 공존하고 있다’
학력은 일류, 명문대 졸업에 박사학위까지 있다. 두뇌는 명석하고 논리적 사고에 능하다. 두뇌 회전도 빠르고 말재주도 여간 아니다. 데이터에도 강하고 책도 열심히 읽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고에 깊이가 없다. 우리 주위에 ‘머리는 좋으나 사고에 깊이가 없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고에 깊이가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으로부터는 ‘지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고학력’인데도 깊은 지성이 안 느껴지는 사람. 그런 이상한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있다.
- ‘지성’과 ‘사이비 지성’
사이비 지성의 정체는 ‘지능(知能)’이다. 그러면 지성과 지능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 이 둘은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능’이란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에 곧바로 정확한 답을 내놓는 능력을 가리킨다. 지능검사는 대상자로 하여금 정해져 있는 문제를 풀도록 해서 얼마나 빠르게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재보는 것이다. 요컨대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에 대해 신속히 옳은 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지능’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입시시험에서 묻고 요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지능’이며, 현재의 학력 사회에서 수험경쟁을 이겨낸 ‘고학력자’란 그런 ‘지능’이 높은 사람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와 달리, 지성이란 지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다.
‘지능’이란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에 대해 재빨리 정확한 답을 내놓는 능력.
‘지성’이란 답이 없는 물음에 대해 그 물음을 계속 되묻는 능력.
즉, 지성이란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는 대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어가는 능력이다.
때로는 생애를 걸고 궁구해도 답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꾸준히 되묻는 능력이다.
지성이란 철학적 사색을 가리키는가?
한 예로 1977년 ‘산일구조론(散逸構造論)’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일리야 프리고진(러시아: Илья́ Рома́нович Приго́жин, 1917~2003)은 젊은 시절에 ‘왜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떠안고는 그 난제와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그 ‘산일구조론’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훌륭한 ‘지성의 영위’라 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우주는 무엇 때문에 생겨났을까?’
‘왜 생명은 진화해 가는가?’
‘마음이란 무엇일까?’
‘인류는 대체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
‘나는 무엇일까? 와 같은 물음은 모두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물음‘이다.
한 인간이 생애를 걸고 궁구해도 답을 얻을 수 없는 물음.
인류가 지금부터 백 년이라는 세월을 걸고 탐구해도 쉽사리 답을 얻을 수 없는 물음.
이러한 물음을 계속 집요하게 파고드는 힘을 ’지성‘이라고 부른다.
’답이 없는 물음은 결코 심원한 철학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이나 업무에도 답이 없는 물음은 무수히 발견된다.
2. ‘답 없는 물음’으로 가득 찬 인생
- ‘답 없는 물음’에 직면하는 지능
단적으로, ‘결론짓기’다.
지능은 그런 행위를 한다.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지능은 상황에 쫓겨 그만 ‘결론지어버리기’로 치닫는다. 이런 판단의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의 자세가 문제다. 그것은 무엇일까?
- 편해지고 싶은 마음
단적으로, ‘편해지고 싶다.’ “이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더라도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다.” 그런 마음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작용하고 있다.
문예평론가이자 작가인 가메이 가쓰이치로(龜井勝一郞, 1907∼1966)가 한 말이 떠오른다. ‘결론짓기란 영혼의 허약함이다.’ 쓰디쓴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우리들의 정신은 그 용량의 한계가 올 만큼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면, 계속 파고들 정신적 부담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만 결론지어버리려 한다. 얼른 매듭지어버리려 한다. 문제를 단순화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여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을 하고, 나아가 그 선택을 정당화할 논리를 찾아낸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짓기’는 어째서 문제인가?
이 책의 주제인 ‘지성 닦기’가 저지당하기 때문이다. 즉, 정신이 편해지는 쪽을 찾아 ‘결론지음’으로 빠져버리면, ‘답 없는 물음’에 맞서는 힘, ‘지성’의 힘이 쇠약해지는 것이다.
3. ‘상황에 쫓긴 결론짓기’가 아닌, 신속한 의사 결정
- ‘결론지어버리기’와는 상반되는 해결법
무엇보다 쉬이 결론지어버려 서는 안된다는 말은 ‘신속한 의사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약한 정신에 휘둘린 의사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허약함에 휘둘리지 않은 신속한 의사 결정’이란 무엇인가? ‘마음 정하기.’ 즉, 특별한 각오도 없이 ‘별수 없다’며 수동적으로 내리는 의사 결정이 아니라 ‘이렇게 하자!’라고 마음을 정해 능동적으로 내리는 의사 결정이다. 얼른 ‘매듭지어버리는’ 식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 ‘결론지어버리기’와 ‘마음 정하기’의 차이
‘결론을 지어버리면’ 속은 후련하겠지만, ‘마음을 정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양자의 서로 다른 결정은 꽤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교토대 임상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河井隼雄, 1928~2007)는 “애정이란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딱 그대로다.
‘마음속으로나마 관계를 이어가는’ 식으로 애정을 유지하는 ‘마음 정하기’는 ‘정신의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정신의 에너지야말로 ‘지성’을 지탱하는 힘이다. ‘지성’을 닦아나가기 위해 요구되는 힘이다. 그 에너지가 있기에 우리는 ‘답 없는 물음’을 계속 물어갈 수 있는 것이다.
- 지성의 ‘가장 높은 형태’
가와이 하야오의 “애정이란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은, ‘애정’에 관한 수많은 정의 중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구체적인 지침이 될 만하다. 인생의 진리를 포착(捕捉)하고 있는 것 같다.
참된 애정이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대가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나 기쁨을 주지 못한다 해도 상대를 계속 떠올리는 힘이며, 상대에게 언제까지나 마음을 내어주는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정(愛情)과 에고ego의 소유욕’을 자주 혼동해버린다. 그리고 ‘에고의 소유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와의 마음의 관계를 무참히 끊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 사태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 편해지고 싶다’는 ‘에고의 욕구’이지 진정한 ‘애정’은 아니다.
따라서, 참된 ‘애정’, 즉 상대와의 마음을 통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일은 우리에게 큰 정신적 에너지(의지)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애정’은 지성의 ‘가장 높은 형태’일 수 있다.
4. 정신의 에너지는 나이와 함께 고양된다.
- 절대로 쇠락하지 않는 ‘정신의 에너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정신의 에너지는 나이가 듦에 따라 점차 높아져 간다. 육체의 에너지는 보통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줄어들기 시작하지만, 사실 정신의 에너지는 예순 살을 넘겨도 여전히 높아져 간다.
- 소소한 훈련으로 높아지는 ‘정신의 스태미나(stamina)’
그럼, 정신의 스태미나와 에너지는 어떻게 하면 길러질까?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닌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이다. 정신의 스태미나(stamina)나 에너지는 나름대로 훈련을 해나가면 나이가 들어도 약해지지 않음은 물론, 나이 예순을 넘겨도 꾸준히 높아진다.
5. ‘고정관념’을 버릴수록 피어나는 능력
- 세계적인 첼리스트의 퀴즈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확실히 많은 사람이 정신의 에너지는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다 보니 실제로 에너지가 줄어들기도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정관념’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도 에너지를 잃어간다.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이런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선입견’이라고 할만한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보겠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 1948~)’가 유럽의 어린이를 모아 놓고 음악 교육을 하는 장면인데, 어린이들에게 퀴즈를 낸다.
“여러분, 지금부터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가운데 하나를 들려줄게요. 세 명의 첼리스트의 연주 녹음을 번갈아 들어볼 텐데요, 어느 연주자가 가장 나이 든 연주자의 것이고 어느 연주가 가장 젊은 연주자의 것인지 맞혀보세요.”
그러고는 세 명의 연주를 들려준다. 방송으로 연주를 들은 나는 ‘너무도 간단한 퀴즈인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어린아이들도 나와 똑같은 답을 말했다. 그러자 마이스키는 차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답은 그렇군요. 그럼, 정답은? 여러분이 ‘가장 나이 든 사람의 연주로 고른 묵직한 연주는 사실 내가 16년 전에 한 연주이고, 여러분이 ’가장 젊은 사람의 연주로 고른 가벼운 연주, 그것은 최근의 내 연주입니다.”
- ‘고정관념’이라는 함정
이 장면을 보고 나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고정관념’을 자각했다.
‘나이 든 연주자는 중후한 연주.’ ‘젊은 연주자는 경쾌한 연주.’
그런 통념과 고정관념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믿음과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인간의 정신은 나이가 들수록 유연함이나 발랄함을 잃어간다.’ 우리는 이런 통념과 고정관념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정신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런 유연함이나 발랄함을 키워간다. 마이스키의 에피소드가 일깨워주는 것은 실은 그런 단순한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품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나이가 들수록 유연함이나 발랄함을 잃어간다’는 완고한 고정관념에 의해 실제로 우리의 정신은 해를 거듭할수록 유연함이나 발랄함을 잃어간다. 이것은 ‘정신의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정신은 해를 거듭할수록 에너지를 잃어간다. 우리는 이런 믿음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정신은 해를 거듭할수록 에너지를 높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지니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해를 거듭할수록 에너지가 쇠락해간다는 완고한 고정관념에 의해 실제로 우리의 정신은 해를 거듭함에 따라 에너지가 줄어든다.
- 훈련 부족 비즈니스맨
많은 사람이 정신의 에너지가 해가 갈수록 쇠락해간다고 믿고, 그러다 보니 실제로 에너지를 잃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하나는 ‘훈련부족’이다.
단적으로, 정신의 에너지는 누군든 어느 정도 훈련만 쌓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높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소소한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훈련’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실로 소박한 것이다.
자기 능력을 조금 웃도는 수준의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수년 동안 가진다. 말하자면 그것뿐이다.
- 지성을 닦는 에너지
내가 가진 통념과 고정관념을 자각할 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정신의 에너지를 높여, ‘답 없는 물음’을 묻는 힘을 단련하고 ‘지성’을 갈고닦아 나갈 수 있다. 아니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기내면에 자리잡은 믿음과 고정관념을 스스로 직시할 때, 우리는 이제껏 무심코 억압해온 ‘숨겨진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
6. 박식함은 어째서 지성과는 관계가 없는가?
- 또 하나의 사이비 ‘지성’
지성과 지능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지성과 비슷한듯해도 결코, 같지 않은 말이 또 있다. 바로 ‘지식’이라는 말이다.
요즘에는 책을 많이 읽고 해박한 지식을 쌓은 사람을 지성을 체현한 사람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웬만큼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고 해도 그것을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그럴까? 왜냐면, ‘지성’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말로 드러나는 것’이며,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지혜’란 ‘말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며, ‘경험’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즉, ‘지혜’란 헝가리-영국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 1891~1976)가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ing)’라고 칭한 것으로 ‘말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책이나 문헌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결코 익힐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직관력(直觀力), 통찰력(洞察力), 대국관(大局觀)’ 등으로 불리는 능력을 가리킨다. 오랜 ‘직업경험’이나 ‘현장경험’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직관력, 대국관뿐만 아니라 ‘지성’이라고 불리는 능력도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인간의 지극히 높은 수준의 능력이다. 지성의 본질은 경험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지혜(知慧)’일 따름이다.
- ‘지식’과 ‘지혜’의 혼동이라는 병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식과 지혜를 혼동하는 병폐가 만연해 있다.
즉, ‘지식’을 쌓으면 ‘지혜’를 얻는 줄로 믿는 병이다.
“화술의 요체 중 하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마치 ‘낱알’인 양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낱알 화술’을 ‘지혜’로서 갖추고 싶어한다면, 실제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수없이 쌓아 단어 하나하나를 낱알인 양 명료하게 말하는 훈련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그 기술을 ‘몸’으로 체득해야만 한다. 책을 통해 풍부한 지식을 흡수했다고 해도 그것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혜는 아니다.
‘지식과 지혜의 착각.’
그것은 일상 속 어디에나 존재한다.
- 어째서 고학력자에게서 깊은 지성을 느낄 수 없을까?
이제까지 ‘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놓고 ‘지성’과 그 사이비인 두 가지 말, 즉 ’지능‘과 ’지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능’이란 ‘답이 있는 물음’에 대해 재빠르게 옳은 답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지성’이란 ‘답 없는 물음’에 대해 그 물음을 계속 물어가는 능력이다.
‘지식’이란 ‘말로 드러나는 것’이며, ‘책’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지혜’란 ‘말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며,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성’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왜 높은 지능을 가진 데다 풍부한 지식까지 쌓은 고학력자에게서 깊은 지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진실로 ‘지성을 닦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는 ‘답 없는 물음’을 되묻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좀처럼 답이 없는 물음을, 절대 체념하지 않고, ‘결론지어버리기’에도 휘둘리지 않은 채 계속 물어가는 힘.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나날의 일들을 통해 부단히 정신의 스태미나와 에너지를 키울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지식과 지혜의 착각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독서를 통한 ‘지식’ 습득만으로 ‘지혜’를 얻었다고 착각하지 않고, 오래도록 꾸준히 경험을 쌓아서 깊은 ‘지혜’를 깨달아 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밝힐 경우, 그것이 책으로 배운 지식인지, 아니면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인지를 자문해봐야 한다.
이 두 가지만 유념해도 우리들의 지성은 확실하게 닦여 나갈 것이다.
7. 어째서 우수한 전문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
- 지성과 그 사이비인 세 번째 말
하나는 ‘지능’
다른 하나는 ‘지식’
세 번째는 ‘전문성’이다.
요컨대, 우리에게는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곧 ‘고도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이것은 지성이라는 말의 정의(定義)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우수한 ‘전문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지구 온난화 문제.
환경과학, 환경공학, 환경경제학, 환경정치학, 환경사회학, 환경윤리학, 환경정보학····.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은 널려있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해결 불능인 상태이다. 어째서 그럴까? 이에 대한 답도 명확하다.
“지구환경문제라는 것은 개별 전문 분야를 넘어선 학제적인 테마라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슈퍼제너럴리스트’ 정말로 필요한 사람은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통합할 ‘슈퍼제너럴리스트’.
개별분야의 ‘전문지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학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별적 ‘전문지성’의 담을 넘어 그것들을 통합할 ‘통합의 지성’이 필요하다. 다양한 전문 분야를, 그 경계를 넘어 수평적으로 통합할 ‘수평통합의 지성’을 가진 인재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필요한 인재는 바로
‘수직통합의 지성’을 갖춘 슈퍼제너럴리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