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바람계곡의 암벽에 인생을 바치신 고 범재수 선배와
광주전남 등산의 소중한 기록을 남겨주신 고 정순택 선생을 기리며...
월출산 바람계곡의 암벽에 매달려 도전과 모험의 열정을 불살랐던 젊은이들 덕분에 월출산은 호남 알피니즘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광주전남 등산문화를 이끌어 온 그 젊은이들이 세월이 흘러 중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었지만 그 산에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젊은이들이 다시 들지 않고 있습니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세풍이 클라이밍을 실내암장이 있는 도시로 끌어 내렸고 자연암벽 조차 볼트가 촘촘히 박혀있어 추락하더라도 안전 사항만 잘 지키면 위험하지 않는 스포츠 클라이밍이 현대 등산의 대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담보로한 도전과 모험의 정신을 가진 알피니즘 등산은 불확실성을 제거해 안전성을 높인 실내인공암벽등반, 스포츠클라이밍, 경기등반과는 분명히 다른 가치를 가진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상황은 1980-1990년대 활동했던 산악인들이 알피니즘 등산의 마지막 세대라 하여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긴 침체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알피니즘의 명맥을 잇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미래에 돌아올 젊은이들을 위해 선배들의 등산 활동을 알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겨 놓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피니즘 등산이 가장 화려하게 꽃 피웠다는 80-90년대의 풍부한 등산 활동조차 빈약한 기록으로 인해 기억을 짜내야만 하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계속 방치한다면 일생을 바쳐 헌신해 온 선배 세대의 위대한 업적이 모두 잊혀져버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까봐 두렵습니다.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_ 나는 왜 쓰는가(제임스 설터) 중
더불어 선배 산악인이 된 저의 할 일을 고민해봅니다.
일본의 경우 20세기 초반 히말라야 탐험을 시작해 중반에 전성기를 맞았고 후반부터 침체기를 맞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70년대 침체기의 시작 전후에서 그들은 활발한 학술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지식은 이때 일본의 연구 결과를 차용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탐험의 역사를 갖지 못한 채 1960년대에 바로 히말라야 원정을 접했고 이후 시대는 다르지만 일본의 산악등반 변천사와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알피니즘 상황은 황금기와 침체기의 경험이 섞인 일본의 1970~1990년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산악인들처럼 지금 우리의 역할은 학술적 풍요로움을 만드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등산연구 활동과 세미나를 통해 후배들이 배울 수 있는 우리 것의 정보를 만드는 일, 광역 히말라야 지도의 공백부를 찾아 채워 나가는 그런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 세대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제가 산에 다녔던 시간들이 이를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기에 능력보다는 의지가, 빠름보다는 꾸준함이 더 필요하다는 자기 위안으로 용기를 내어 감히 연구활동이라 말하며 등산의 이야기를 기록해 나가려 합니다.
2017. 1.
선앤문등산학교장 문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