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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충만하게 임하시다
40: 34-38
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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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은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을 연계한 강론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매주 설교할 때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출애굽기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할 처소를 지으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따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회막을 완공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회막이 완공되었으니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차 비유로 설명드린 것처럼 신랑 신부가 언약을 맺고 신혼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나라적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 한 나라의 도성이 완공되고 그 도읍지를 옮겨서 왕이 그 도성에 거하게 되면 그 왕조가 새롭게 열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출애굽기의 마지막 본문은 이스라엘 나라가 시내산에서 개국을 했다고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시면 레위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예물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나가 제사를 드림으로 교제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짧기는 하지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충만하게 임하므로 모세가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을 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낮과 밤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막에 있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연결해서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매 모세가 들어갈 수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기둥을 따라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여호와께서 성막 가운데 함께 계심을 이스라엘 백성은 밤과 낮으로 보았습니다.
이 구름과 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더랬습니다. 또한 구름과 불은 시내산 위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실 때에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셨고, 불과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임하셨을 때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시내산에 완공된 회막이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의 성전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6-11절입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그룹들이 그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채가 길므로 채 끝이 내소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지성소의 그룹들 아래에 메어 들이고 나왔습니다. 제사장들이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 때문에 회막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 모세와 제사장들이 이 영광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출애굽기 처음부터 계속 우리가 해왔던 것처럼 마가복음과 병행하는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6:9-2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복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마가복음도 오늘 출애굽기 본문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9-13절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는 것과 14-1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과, 그리고 19-20절은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통치하시니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도 믿지 아니했다,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른다,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고 합니다.
영해를 한다고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믿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은 부활의 영광과 함께 할 수 없었다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한 집에 산다고 하는 것은 항상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결혼의 언약을 따라 사는 것인데, 사실 두 사람 모두 미래를 모두 경험하거나 서로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어도 믿음을 따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대면하며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삶을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주 비유로 말씀드린 것처럼 약혼의 관계는 결혼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온전한 믿음의 관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혼한 두 사람은 24시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만나고 교제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결혼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혼의 관계는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연합의 관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구약의 관계는 온전한 관계가 아니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할 때에 모세와 제사장들은 들어가지 못하거나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와 어둠이 지배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온전한 관계를 누릴 수가 없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충만하게 성전에 임하실 때에 그들은 하나된 관계를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온전한 믿음의 관계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의 16:9-20절의 내용과 출애굽기 40:34-38절의 내용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듣고 믿지 아니했다는 것은 모세가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이 임했을 때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구름이 떠오르거나 떠오르지 아니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하거나 진행하지 아니한 것은 곧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따라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의 삶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면 표적이 따릅니다. 즉 구름과 불로 인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영광이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성막 가운데 거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할 때에 함께 역사하셨는데, 그 역사는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중에 함께 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은 서로 병행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마가복음 16:9절 앞에 괄호가 있고, 16:20절 끝에 또 괄호가 있어서 마가복음 16:9-20절은 후대 사람이 첨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력한 사본에 이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9-20절을 주석에서 빼버리거나 부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성경을 받고 있고, 교회가 합의한 성경본문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따로 배제시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또한 제가 보기에는 만약 이 부분이 빠져 있다고 한다면 마가복음이 결론이 없는 책으로 생각이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마가복음에는 비천한 이방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 수로보니게 여인, 두 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 여러 질병이 있는 자들이 바로 약하고 가난하며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들에게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출범했다고 마가는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살아나셨다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시골로 내려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기 시골로 내려가는 두 사람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부활하신 영광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기 표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모세가 그 영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면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나타납니까? 17-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뚜렷하게 눈으로 보이는 표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말하는 것처럼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표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당혹스럽지 않습니까?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얻은 표적적인 삶이 이렇게 나타난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저희 교회에 이런 분이 한 분도 없는 것 같은데 여러분은 전부 가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닌가요? 아니면 믿음이 없는 모양입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은 적이 있었습니까? 성경을 말씀대로 믿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조금 위안을 드린다면 저도 이런 표적을 행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한 통속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여러분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지요. 어떤 통치로 함께 하십니까? 그 통치는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름과 불기둥이 성막 가운데 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눈으로 보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함께 역사하셨습니까? 표적을 나타내셔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습니다.
믿고 구원얻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운 기적이나 신비적인 치유가 나타나야만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들보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시 부부관계를 예로 들겠습니다. 사랑의 프로포즈를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것이지요. 결혼하였으니 이제 결혼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얻은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생활을 신혼생활이라고 하며 이 생활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신랑, 신부라고 합니다. 결혼을 한 후 신랑과 신부는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새 삶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남자는 총각으로 친구만 좋아하고 친구에만 빠져 살았습니다. 친구라면 간이라고 내어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싹 달라졌습니다. 친구보다 아내를 더 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삶입니다. 옛 시대의 총각으로 살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에 남편으로 사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너 결혼하더니 변했구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이 따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삶은 옛 시대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서로 사랑의 언약을 따라 살면서 확실히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한 집에 동거하며 알콩달콩 살아가면서 사랑의 말씀이 눈에 보이도록 증언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삶과 출애굽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막 가운데 낮과 밤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눈으로 보이게 함께 거하셨다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 복음을 전파하니까 표적이 따르며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말하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았다고 하는 말씀은 죄와 질병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새 삶이 나타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과 연합하여 그와 함께 세례를 받으니 새 시대의 새 표적으로 함께 하는 삶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주로 어느 순간에 믿어 구원을 얻은 확신 속에 살다가 마지막 임종할 때에라도 반드시 구원을 소멸치 아니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 믿기만 하면 영원한 구원이 보장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교회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주님의 영광을 뵙는 주님의 몸으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천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자들이 주님을 제일 먼저 뵙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모세와 제사장들도 가득히 임한 여호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는데,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부활하신 영광을 친히 뵈올 수 있는 자가 바로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라고 마가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천한 죄인이요, 원수와 같은 이방인들이 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믿고 함께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영광은 바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아주 큰 선물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신다’는 말은 천막을 치고 함께 거하셨다는 뜻입니다. 시내산에 성막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보았는데 그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요한복음 1: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어떻게 왔습니까? 아버지와 방불한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옛 성소를 섬겼던 모세와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영광에 함께 할 수가 없었고 친히 뵈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시대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으로 아버지 품 속에 독생하신 아들이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20장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셨습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영광을 친히 뵙지 못하였기에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그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친히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구름으로 임하신 영광 앞에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는데 도마에게는 손으로 만지도록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너는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는 사극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아주 천한 천민들은 왕의 궁궐 앞에 감히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궁궐을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왕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을 본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올 수가 없었고, 주님의 성전에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인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아 구원얻었다고 하는 것은 새 시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죄의 종으로, 사망의 종으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부활의 생명 가운데 주님의 몸된 성전으로 사는 삶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마가복음이 말하는 구원을 얻은 자의 표적은 마치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표적이 나타나는 구원의 삶에 대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비유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왕조이든지 건국 초기부터 쇠망하는 끝날까지 똑같은 나라의 모습을 가지지 않습니다. 즉 건국할 때의 나라의 모습과 전성기 때의 나라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나라가 건국될 때는 주로 무장들이 힘을 얻습니다. 피를 흘리는 싸움을 통해 나라를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이 되고 발전이 되는 시기에는 무장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문인들이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이 16장에서 말하는 표적이 함께 하는 구원의 삶은 성령이 임한 오순절 초대교회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독사에게 손이 물렸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역사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선교초기에 항상 나타났습니다. 한국 땅에 복음이 들어오고 복음이 전파될 때에도 이런 표적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든든히 서가고 말씀이 왕성해 가면 이런 표적보다도 말씀 가운데, 진리 가운데 굳게 서는 모습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혼여행으로 누리는 신랑 신부의 삶은 단 한 번, 그것도 결혼초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혼여행처럼 결혼생활을 누리겠다고 하면 그 생활은 금방 절단이 나고 말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관광지에 가서 오직 두 사람만의 행복을 누렸던 그런 날은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런 신혼여행의 삶 보다는 매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행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혼여행에서 누렸던 삶은 표적과도 같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언약을 따라 서로 지키며 사는 일상적인 부부로써의 삶입니다.
이제 교회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충만하게 임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새 삶이 교회에게 부어졌습니다. 부활의 권세있는 삶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므로 교회가 받은 권능입니다.
구름으로 충만히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게 교회에게 임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을 친히 뵙고 그 얼굴 앞에 능히 서서 섬기게 됩니다. 교회는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성령을 좇아 삽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고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죽음과 질병의 권세 아래 신음하였던 삶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마음으로 확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마십시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표적이 따릅니다. 새 시대의 구원의 삶이 보여지도록 나타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긴 새 능력의 삶이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땅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속한 새 삶이 밤과 낮으로 나타나 보여지게 됩니다. 부부가 사랑의 언약으로 함께 할 때 그 사랑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가 오늘 사랑하지 않으면 어찌 살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언제나 부부가 사랑함으로 깨어 있어 서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그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파의 경우처럼 결혼식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면서 자신들이 그 날 결혼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는 삶이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결혼을 언제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결혼의 언약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구원은 부활의 주님을 뵈었듯이 부활의 능력과 권세 아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신 날에 한 상에 모여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살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여 새 생명을 나타내도록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12-20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되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임한 주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귀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전에 주님을 알지 못하던 그런 몸으로 사는 것은 음행입니다. 주님과 합한 한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라고 하는 갈라디아서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구름과 불 기둥이 인도하고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성령이 거하는 성전된 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에나 말에나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거룩한 삶이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고, 새 시대와 새 삶에 속한 새 언약으로 함께 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항상 보여지도록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출석을 잘한다는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즉 모든 일상적인 삶에 하늘에 속한 것을 분별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 생명에 속한 것들을 확실히 증거하며 사는 삶이 시작된 것이 구원입니다. 죄와 사망을 밟는 승리의 삶을 모든 환난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능히 나타내는 거룩한 삶이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보좌 우편에 살아계셔서 주님이 여러분이 복음을 전파하는 삶 속에 함께 역사하며 나타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럴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빙거가 나타날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멸망의 빙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천국이 어디 있느냐? UFO는 무엇이냐? 이런 헛된 질문에 답하지 말고, 성령이 거하셔서 하늘에 속한 삶을 말씀을 따라 나타낼 때에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는 새 삶을 사시는 것이며, 이것이 곧 증거입니다.
이러한 영광된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 여러분이 몸으로 살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이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한 몸으로 사랑하며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나타날 때에 여러분을 주님의 제자라고 일컬을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