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전 11 (삿 21:1-12)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오늘도 ‘내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영적 문제를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보수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원리와 표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란 계시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분명하고 명료하게 간추리고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신앙고백서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심도 있게 다룬 것은 성경론입니다. 성경을 보는 기준이 잘못되면 모든 것들이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비극은 계속 되고 있는데 그 원인은 그들의 신앙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죄를 회개치 아니한 베냐민 지파와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길르앗 거민에 대한 징벌 문제였지만, 내면적으로는 25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한 대로 진리에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세계에서도 무지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계속하여 영적 문제가 어떤 때에 발생할까요?
28. 감정에 기반한 맹세 때문입니다.
1-4절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대성통곡한 것은 이스라엘의 4만 명의 전사자와 아울러 베냐민 지파가 멸절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구성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로 지파의 존속의 여부는 언약성취의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러므로 12지파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언약백성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냐민의 위기는 곧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이 말씀은 슬픔을 고조시키기 위한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학적으로라도 하나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가 생긴 것은 인간의 잘못 때문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미스바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총회의 성급한 맹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맹세한 것은 크게 3가지입니다. 먼저 범죄한 베냐민에 대한 응징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베냐민 사람에게는 딸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스라엘 총회에 모이지 않는 자, 즉 이 일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5절). 갈수록 태산입니다. 변개할 수 없는 일만 계속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니 변개할 수가 없습니다.
맹세,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만 해도 맹세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5절에는 "큰 맹세"라고도 했습니다. 내용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에, 생사가 갈리는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감정으로 맹세를 연발하는 것을 보면 한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말씀도 지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앞서면 실수를 연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약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했습니다.
29. 지혜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삿21:25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했습니다. 당시 사사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른이라고 할만한 지도자는 비느하스였습니다.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데 바알브올 사건으로 우상숭배하고 간음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거룩한 열심으로 창으로 찔러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한 신앙의 영웅입니다.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지혜와 사랑으로 이끄는 리더심은 탁월하지 못했습니다.
수 2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 때도 큰 사건이 터질뻔했습니다. 가나안 서편의 기업 분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두 지파 반이 동서편 모두가 한 하나님을 섬기고 한 민족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형단을 쌓았을 때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장하고 모여 들었고 비느하스를 대표로 대표단을 이끌고 갔을 때도 내용을 들어보기도 전에 책망부터 하였습니다. 두 지파 반이 누굽니까? 가나안을 정복하기까지 7년 동안 목숨을 걸고 형제들을 도운 사람들입니다. 다행히 두 지파 반이 감정을 누르고 해명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전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이 베냐민의 기브아에서 발생합니다. 삿20:28에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한 것을 보아 대제사장으로 지도자격인 어른도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이번에 발발한 내전에 비느하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정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내용도 알지 못한 정의한 없으며 그것은 만용이지 정의가 아닙니다. 만용이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날뛰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드온과 입다의 차이입니다. 삿 8장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거칠게 대항할 때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2-3절) 하면서 문제를 키우지 않았지만, 비슷한 사건인데 입다는 그들과 싸워 에브라임 사람 수만 명이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30. 그들은 무엇이 잘못인지도 몰랐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난감한 점이 죄가 무엇인지 모를 때입니다. 갈5:19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이렇게 현저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율법적 조항을 많이 만들어내면 낼수록 더 혼란스럽습니다. 이걸 하면 저것이 걸리고 저걸하면 이것이 걸리고, 유대인들이 혼란에 빠지고 점점 외식화로 나간 이유가 수많이 생산해 낸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적국이 침략을 했는데도 안식이라서 싸워보지 못하고 정복 당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죄일까요? 보편적 기준은 십계명이고 더 자세히는 산상수훈에 나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핵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러므로 조항의 유무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이웃을 해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롬13:8-10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거짓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혹은 피 흘리는 것이 율법을 범하는 걸까요? 이웃을 살리기 위해 헌혈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분노가 나쁠까요?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계2:6에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미워하지 말되 악은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분노가 지나치면 사람을 미워하는 시험에 도달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했습니다.
31. 말씀보다 맹세를 크게 여겼습니다.
5-12절, 7절까지만 보면 “5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이스라엘의 총회는 총회에 불참한 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불참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므낫새 반지파의 한 성읍으로 베냐민 지파와 같은 라헬의 자손들입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와 깊은 유대가 있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악을 제거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맹세한 맹세로 인하여 또 다시 길르앗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 비극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본문을 깊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한 맹세의 잣대가 제 각각입니다. 그들은 베냐민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하는 일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을 진멸하여 길르앗의 여자들을 빼앗아 베냐민 의 남은 남자들에게 주자는 것입니다. 맹세대로라면 베냐민의 600명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려주고 길르앗만 죽이려고 합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자기 편리할 대로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란 절대적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에도 서원을 했어도 보호자가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보호자는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 저 목사가 될 거예요. 혹은 순교할 거예요.’ 그랬어도 ‘아니다 넌 그 사명이 아니다. 너는 이걸 해야 한다.’ 하시면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말을 받으시면 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징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악함을 아시고 일 시키시기 위하여 서원이라는 방법을 쓰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공회를 열어 결정했다 해도 그 결정이 성경에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카톨릭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교회를 성경 위에 둡니다. 교회가 성경을 결정할 권한이 있기에 교회의 결정이 성경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정경성을 교회가 결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아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금속감별사가 금이라고 해서 금입니까? 그냥 금인 것을 인정한 것뿐입니다. 금은 감별을 했기 때문에 금이 아니라 감별하든 안 하든 영원히 금입니다. 다만 감별을 통해서 더욱 공신력이 있고 빛납니다. 카톨릭의 문제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들 맘대로 교리를 만들어 통과시켰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무원죄설, 평생동정녀설, 마리아승천설, 마리아중보설, 교황무오설까지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직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딤전3:12에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라고 했는데 독신하는 신부나 수녀는 뭡니까? 딤전4:1-3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하셨습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흔들리면 신앙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지구의 어떤 지진보다 진리의 근본인 성경을 못 믿는 것이 가장 큰 지진입니다. 눅21:33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다 하셨습니다. 말씀 영접이 하나님 영접이고, 말씀 순종이 하나님 순종이고, 말씀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문제를 낳고 그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낳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기 소견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인정하시고 사도와 선지자들이 물려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진리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늘 사모하고 힘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