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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 1: 10 우리를 비방하고도 - 요삼 1: 11 선한 것을 본받으라.
요삼 1: 10 우리를 비방하고도 -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 (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 도다. )
둘째,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사도 요한과 그의 동료들을 부당하게 비난하였다.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해 정당한 비난도 조심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 (마 7: 1).
하물며 부당한 비난이야 더 합당치 않다. 그것도 참된 목사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매우 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자는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 마 12: 35 -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잠언 12: 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라고 말하였다.
* 약 3: 2 -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셋째, 디오드레베는 요한과 그의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접하려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 쫓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악한 행동이었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마 10: 40).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교회 안에 다른 양들을 밀뜨리는 염소들에 대해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 도다.'라고 책망하셨다. (겔 34: 21).
1]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자신이 회중을 직접 방문할 것을 약속한다. 그의 여행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인 내용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Westcott) '내가 가면'이란 표현을 통해 자신이 방문할 것을 알리고 있으며 방문했을 때 디오드레베가 행한 일에 대해 엄하게 꾸짖을 것을 약속한다. (Smalley).
'내가...잊지 아니하리라'(휘폼네소)는 문자적으로는 '내가 생각나게 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잘못한 행위에 대해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망령되이 폄론하고도'(플뤼아론)은 문자적으로 '허튼소리'나 '남을 모함하는 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디오드레베가 요한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상모략을 하였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디오드레베가 장로에 대항하여 진술하는 요구들이 이치에 맞지 않고 거짓된 것임을 시사한다. (Stott, Smalley).
(2)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디오드레베는 요한을 중상 모략하여 그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요한이 '두어 자'를 적어 보낸 편지의 내용 즉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는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여 선교사들을 접대하지 않았다.
개역 성경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아우토스'(그가)라는 인칭 대명사가 헬라어 본문에 사용되어 디오드레베가 속한 교회 전체가 선교사들을 대접하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디오드레베가 거부한 것임을 나타낸다.
(3)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 도다.)
'금하여'(콜뤼에이)는 현재 시제로 계속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선교사들을 대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제안을 받아들여 접대하고자 하는 자들을 방해하고 접대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더 나아가 디오드레베는 자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쫓아냈다.
'내어 쫓는 도다'(에크발레이)는 문자적으로 '내던지다'라는 의미로 디오드레베가 단지 자신을 따르지 않는 무리를 회중 밖으로 쫓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추방의 행위를 자행했음을 시사한다. (Smalley).
* 마 18: 17 -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눅 6: 22 -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요 9: 34-35 -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 고전 5: 2 -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아마도 이러한 디오드레베의 방해와 거부로 인해 선교사들을 즐거이 접대한 가이오는 교회에서 냉소를 당하였던 듯하다(6절).
또한 디오드레베는 그의 믿음과 행위가 초래한 교회 내의 대립과 붕괴 위험으로 인해 장로와 그의 공동체로부터 지지받을 수 없었던 듯하다.
요삼 1: 11 선한 것을 본받으라. -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
사람들은 선한 일을 보고 본받기도 하지만, 악한 일을 보고 본받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15: 33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성도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악과 선의 근원이 다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의 근원이 다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다.
선행은 성도가 중생한 자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사람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본문은 두 가지 명령, 즉 부정적인 명령과 긍정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부정적인 명령인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는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염두에 둔 것이고, 긍정적 명령인 '선한 것을 본 받으라'는 데메드리오의 참됨을 염두에 둔 듯하다. (12절, Smalley).
요한은 앞서 언급된 디오드레베의 행위, 즉 자기가 으뜸이 되고자 하여 선교사를 영접하고 접대하며 지원해 주기를 원했던 요한의 제안을 무시한 것을 가이오에게 본받지 말 것을 간절히 요청한다.
이것은 비록 디오드레베의 영향력으로 인해 가이오가 냉소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전에 해왔던 선교사의 접대 행위를 계속적으로 행하라는 요청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 있는 진리(1-3절), 실제적인 사랑(6절), 그리고 옳은 행실(11절)로,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닮아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들이다. (Barker, Smalley).
2] 선한 것을 본받으라.
사도 요한이 보낸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는 문제가 있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란 자가 그 교회의 높은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잘못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의 지시와 권면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대로 교회를 운영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우려 할 만한 악행을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요한은 격분하고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자의 악한 것을 본받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1) 디오드레베의 악행
디오드레베란 인물이 교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바 없다. 다만 본문에 나온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자기가 가진 교회의 직위를 선한 일에 쓰지 않고 교회를 독단으로 지배하고 악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을 자행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은 9절에서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란 사도 요한이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보낸 복음의 일꾼들을 말한다. 10절에서 ‘형제를 접대하지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 도다’고 했다.
사도 요한은 이들 복음 사역의 형제들을 그곳에 보내면서 특별히 그 교회의 중진인 디오드레베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잘 접대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도모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디오드레베는 접대하는 일조차 거부하고 접대하려는 교인들까지 교회에서 내어쫓는 횡포를 부린 것이다. 디오드레베의 이런 일은 사도의 권위를 가진 요한을 무시한 행위요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다.
이 자의 악한 행동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를 접대치 아니했다’고 했다. 비방한다는 말은 헬라어의 어의로 허튼 소리나 남을 모함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디오드레베는 사도들의 권위를 알고 있었다.
아마 그도 사도 요한이나 아니면 다른 사도에 의해 그 교회에 직분을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악한 말로 망령되이 비방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는 이 자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있었다.
(2)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악한 것이란 바로 이 같은 디오드레베와 같은 망령된 행실을 가리킨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의 말과 행실에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본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디오드레베의 이 같은 악한 행실을 본받는 일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며 파당을 조성하는 일이다.
사도 요한은 12절에서 데메드리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데메드리오가 누구인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데메드리오의 준말로 나타나는 ‘데마’일 것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데마드리오에 대해 그는 뭇 사람에게 증거를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언 받았다는 뜻이다.
디오드레베와는 달리 사도들을 극진히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을 대접하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신앙의 본을 보이는 생활을 해 왔다. 이런 사실을 모든 성도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증언을 받았다. 다음에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했다. 진리에 증거를 받았다는 말은 그의 한 옳은 행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디오드레베의 악한 행실은 뭇 사람에게나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지 못했다. 그의 악하고 교만함이 그로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독단적인 판단으로 운영하며 자기 임의대로 주장했다.
세 번째 증거는 우리도 증언한다고 한 사도 요한의 증거이다.
우리라고 부르는 대상은 사도들을 말한다. 데메드리오의 선한 행실은 사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이런 행실은 권장할 만한 선행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의 기준을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에 두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눈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모본의 대상자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메드리오와 같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본받되 디오드레베와 같은 악한 자를 본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교훈해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에서 처럼 디오드레베를 공격하고 그를 악한 자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이 서신을 받는 가이오와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받는 믿음의 사람, 데메드리오가 교회의 실권을 쥐고 휘두르는 디오드레베의 핍박이나 공격에 결코 굴복하지 말고 진리를 위해 굳게 싸워야 한다는 격려를 주기 위해 이 서신을 보내었다.
사도 요한은 이토록 급박한 교회 사정을 감안할 때에 그곳에 가서 사도의 권위로 디오드레베를 권징하고 교회의 지도자를 새로 선임하며 바른 지도 체제를 세울 것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0절에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13절에서는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3]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을 행하고', 모든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며, 형제들을 영접하는 모습(5-6절)에서 구별된다.
* 요일 2: 7-11 –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이러한 선한 행위는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와 교제를 내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Hass)
* 요일 4: 6-8, 14 –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뵈옵지'(헤오라켄)은 완료 시제로 현재까지 효과가 계속되는 과거의 사건을 나타낸다.
이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 지속적으로 악을 행함으로 나타난 궁극적 결과로,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대면할 수 없으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Smal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