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3: 14 점도 없고 흠도 없이 - 15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3. 온전한 성화를 위해 힘쓰라 ( 3: 14 – 18 )
⑭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⑮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⑯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⑰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⑱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 14 점도 없고 흠도 없이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
사도 베드로는 본 장에서 본서를 받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거듭 불렀다(1, 8, 14, 17절).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잘 드러낸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한다. 또 성도들은 주의 종들을 사랑하며 그 입에서 나오는 바른 교훈을 성심으로 받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앞에서 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의 천국을 생각할 때 우리가 마땅히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성결(聖潔)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것은 우리가 불타 없어질 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의(義)만 가득한 천국에 속한 자답게 거룩하고 의롭고 흠 없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천국은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 13)이다.
1]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죄 없는 상태,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성결의 상태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이었다.
에베소서 1: 4-5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완전한 성결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목표이었다.
에베소서 5: 26-27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완전한 성결은 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고린도전서 1: 2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헤기아스메노이스, 완료분사)[거룩하여졌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 6: 11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0: 10은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분사).”
히브리서 10: 14은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죄가 많고 마귀의 시험과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도 마땅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전한 거룩의 상태로 주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완전한 거룩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 완전 성화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이어야 한다. 물론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 23-24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러나 우리 자신도 완전 성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 1은 “더욱 많이 힘쓰라.”
베드로후서 1: 5, 10은 “더욱 힘써[모든 열심을 보여].”
2]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는 거짓 교사들이나 기롱자들의 미혹되고 방종하는 삶과 대조되는 삶으로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다.
이런 삶은 그 기준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가리킨다.
* 민 19: 2 -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 빌 2: 15 -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 벧전 1: 19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평강 가운데서'는 소망과 인내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상태를 의미한다. (1: 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될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벧후 3: 15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아직 회개치 않은 택한 자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바로 아직 회개치 않은 택자들의 구원을 위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곧 오시는 것도 기다리는 바이지만, 그가 지체하시는 것도 회개할 영혼들을 위함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바울을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표현하면서 바울도 이런 일들 곧 주의 재림과 불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그의 서신들에서 썼음을 언급한다. 특히 베드로는 바울의 모든 편지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짐을 암시한다.
그 모든 편지에도 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이 벌써 그 당시에 많이 알려졌고 수집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 다른 성경과 같이 라는 표현은 그가 바울 서신들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했음을 보인다.
여기에 사도들의 글들의 권위가 있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말씀 전파의 특별한 임무와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글들은 신적 권위의 책으로 간주되었다.
단지, 베드로는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들의 어떤 어려운 부분들을 잘못 해석함으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억지로 푼다(스트레블로오)는 ‘왜곡시키다, 변개시키다’는 뜻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복음 진리와 다른 것을 말하고 정로(正路)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은 멸망할 큰 죄가 된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취급해야 한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은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뜻을 잘 파악하고, 모든 성경을 거기에 조화시켜 해석해야 한다.
1]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베드로는 9절에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부가적으로 설명한다. 조롱자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며, 하나님의 인내이다. 따라서 재림의 지연을 재림을 부정하거나 핑계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2]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형제'라는 호칭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사역하는 동역자를 부를 때 즐겨 사용하였다.
* 빌 2: 25 - 그러나 에바브로 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 고후 2: 13 -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 살전 3: 2 -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당시 로마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흔히 사용된 호칭이었다.
* 엡 6: 21 -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 골 4: 7, 9 - ⑦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⑨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 벧전 5: 12 -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초대 교회 때에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좋지 않은 긴장 관계에 있었음을 전제하면서(갈 2: 11-14) 튀빙겐 학파(Tubingen Schule)는 본 절이 본서가 위작(僞作)임을 나타내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 갈 2: 11-14 –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형제간의 사랑과 용서를 강조했던 사도들의 사상에 어긋난다. (Green, Bauckham).
* 몬 1: 16 -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사도 베드로는 본 절에서 같은 사도로서 바울에게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언급하고 있으며(Bigg) 자신이 언급한 재림에 관한 교리도 바울의 사상과 일맥상통함을 암시한다.
* 롬 2: 4 -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