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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15장
불의 앞에서 막 15:1-5
산헤드린의 사형언도는 원래 죄인의 심문 후 하루가 지나야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또 국가 명절 전 날을 절대로 큰 사건을 다룰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회의 의원들은 이 모든 법을 깨뜨리고 새벽에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로 사형언도를 선고한 후, 급히 형 집행권을 가진 로마 정부의 총독관 빌라도에게 주님을 넘겼습니다. 저들의 고소 죄목은 엉뚱하게도 '국가반란죄'였습니다. 로마는 유대의 예민한 종교문제에는 불필요한 간섭은 하지 않기로 원칙적으로 정책을 세웠기 때문에 산헤드린 의원들은 교활하게도 주님을 정치범으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원칙과 정의가 말살된 불법 환경이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겠습니다. 이제 이러한 불의의 세력 앞에 선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답변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주님응ㄹ 넘겨 받은 총독 빌라도는 주님이 결코 정치범이 아님을 확실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요18:31) 재판의 형식을 밟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을 긍정하면 예수님께서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긍정하면 그것은 사형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왜냐하면 에수님은 예언된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마1:1)
2) 성도임을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주님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니라'(막14:61)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역시도 세상에서 '당신이 신자인가?'라고 질문 받을 때 '그렇다'고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0:33) 세례요한은 제사장들이 '너는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주님 앞에서 외치는 광야의 소리'라고 답변하므로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2) 확신에 찬 고백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산헤드린 공회의 살기 등등한 분위기 속에서도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15:62)고 확실한 경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봤던 베드로 사도는 '두려워 말며…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3:14,15)라고 불신자들 앞에서의 성도들의 확실한 답변의 필요성을 말했습니다. 성도들의 확신에 찬 담대한 모습과 간증은 불의한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는 큰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데반 집사의 소망 중의 순교는 사울을 회심케 하는 간접적인 요인이었습니다. (행7:58-60)
3) 축복기도의 입을 열어야 합니다.
성도가 불의함을 당할 때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은 불의한 사람을 위해 축복 기도의 입을 여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 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의 은혜를 내리십니다.
2. 침묵해야 할 때
빌라도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제사장들은 매수된 거짓 증인들과 더불어 맹렬하면서도 다양하게 주님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눅23:5) 그때 형식적이나마 빌라도는 예수님께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으로 시종일관하셨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불의에 대한 슬픔의 침묵이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생리적으로나 환경적 차원을 초월한, 사명적인 침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사업을 성취하시고자 묵묵히 순종하시는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침묵'(사53:1-7)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악한 세상에서 불의한 경우를 당했을 때 지혜롭게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게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16:28) 그러면 왜 불의 앞에서 침묵해야 합니까?
1)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2:22) 사람은 누구나 불의를 당하면 저주와 폭언, 정죄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판결에 맡기기 위해서 입니다.
주께서는 원수갚은 것이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롬12:19)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원수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여 선을 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옳다면 주께서는 원수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 막15:6-11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주어진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 뒤엔 반드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걸어야 할 죽음의 길은 이미 예정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메시야를 죽인 그들의 책임은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막14:21) 여기 빌라도의 법정에는 우매하고 사악한 무리가 또 다시 선택의 자유를 남용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비극적인 죄악의 역사에 동참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할 화가 가룟 유다의 것보다 결코 가볍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봄으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1. 주어진 선택의 기회
본문 6절에 보면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명절에 백성의 요구에 따라 한 사람의 죄수를 방면하는 특별사면이 있는데 그 죄수의 선택권은 백성에게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선택은 한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순간에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1) 영생을 위한 선택
인생 앞에는 양자택일의 기회가 많이 닥칩니다. 특히 신30:19,20에는 모든 인간이 선택해야 할 내용들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인간 앞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권면하여 주십니다.
2) 신앙을 위한 선택
복된 신앙생활을 위하여 성도들은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입니까? 여호수아는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불순종한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삼상15:1-35) 경건과 불의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벧후2:9)
2. 잘못된 선택
유대 군중은 죄수 중 한 사람을 놓아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해당자는 반란을 일으킨 살인자 바라바와 죄 없으신 예수였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은연중에 예수를 놓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9절)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의 충동질을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14절)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유대 군중은 선택의 기회를 악용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1) 살인자를 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버려 인류를 대속키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시기에 성경의 예언대로 십자가의 처형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구세주 대신 살인자를 택한 사람들은 스스로 어리석고 우매한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살인자의 역사에 동참한 책임을 영원히 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잘못된 선택입니다.
2) 증오와 폭력을 선택했습니다.
예수의 길과 바라바의 길은 완전히 상반된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점령해 가신 분입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증오심과 폭력으로 민란을 주도해 온 비정한 증오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폭력과 증오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 군중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증오와 폭력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선택입니다. 잘못된 비극적인 선택입니다.
3. 잘못된 선택의 원인
(1) 육신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대제사장들의 시기심과 같이(10절) 술수와 분냄과 시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갈5:19-21) (2)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민14:1-45) (3) 거짓 선지자를 좇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죽이려 무리를 선동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말세에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여 합니다. (마24:11,24)
빌라도의 범죄 막 15:12-15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장본인으로서 성도들에게는 과거에도 기억되었거니와 미래에도 언제까지나 기억될 죄인입니다. 본문은 빌라도의 행위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상고하여 빌라도의 죄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어떻게 죄인이 되었으며, 불명예스런 인물이 되었는가를 상고하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 태도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에게만 난처한 운명의 시련이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상고하며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
빌라도를 가리켜 전적으로 악하다고만 볼 수 없다는 동정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진실을 흐리게 하는 판단입니다. 빌라도가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사건에 깊이 연류되지 않다고 해도 총독으로서 빌라도는 그 사건의 실제적인 책임자로서의 문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으로서 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죽게 하는 재판과정에서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1)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았습니다. (10절)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빌라도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로부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마27:19)라는 충고도 들었습니다. 빌라도 자신이 조사한 바로도 민란죄로 고소된 예수의 죄는 입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상황을 모두 알면서도 즉시 예수를 무죄로 선언하여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2) 예수와 바라바를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재판 과정에서 판결관으로서 석연치 않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판단대로 예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당시 민심을 흉흉케 했던 살인자로서 현행범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명절의 특별사면으로 방면해야 할 대상은 그때까지 혐의를 찾을 수 없었던 예수였읍니다만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를 바라바와 같은 기결수로 취급하여 무리가 죄수를 방면하는 선택의 장소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분명히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대한 유기가 이런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2. 나약한 재판관
'나약한 사람'이란 우유부단한 사람을 말합니다.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자기 소신 없이 남의 말을 따라 부화뇌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1) 불의한 무리의 압력에 굴복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악한 일을 한 바 없는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함치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15절)합니다. 혹자는 빌라도의 이러한 나약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영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 지상에서 올바른 일을 수행하도록 위임받은 통치자였건만 올바른 일을 수행하기를 두려워하였던 인물로서 가히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통치자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불의한 무리의 압력에 굴복했기에 조롱거리가 되었고 불의와 타협한 까닭에 죄인이 된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를 외치며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5:24)라고 절규했던 선지자는 아모스였습니다. 백성들을 지도하는 지도자는 적어도 이러한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불의를 용인하는 지도자는 역사를 어둡게 하는 죄인입니다.
2)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버렸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충고도 받았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도 그것을 진압할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호하는 것이 올바른 일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무사 안일주의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외견상의 편익만을 생각하여 구부러진 판단을 하였습니다. 눈 앞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큰 일을 그르친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 때문에 불의한 일에, 죄악의 길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의 길에 장애가 되고 하나님의 일에 원수 된 결과가 된다면 과감하게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3. 죄인 빌라도
빌라도의 결정적인 죄는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오히려 무죄한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유죄로 만들어 사형대인 십자가에 보내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정의를 거스리고 진리를 외면한 그의 행동을 죄없다 할 수 없습니다.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의 예수 막15:16-20
인간들에게 당연히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지 몽매한 인간들에 의해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그 수모를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시고(고후5:21) 궤사가 없으심(벧전2:22)에도 불구하고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나약한 예수님, 힘 없는 구세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홍포를 입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이 비록 초라하고 희롱거리로 여겨졌을지라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에겐 그 모습이 가장 위대하고 진실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왕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1. 자색 옷과 가시면류관의 예수님
1) 멸시와 조롱의 상징
예수님의 총독의 관저로 끌고 온 로마 군병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시켜 주님을 희롱했습니다. 왕들이 입는 홍포, 곧 자색옷을 입히고(마27:28) 날카로운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에 눌러 씌움으로 고통을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게다가 옷을 벗기고 다시 입히는 등 멸시와 조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빌라도의 물음에 대해 유대인의 왕이라 인정한 사실을 비꼬아서 심한 모욕을 주는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오늘날도 로마 병정들과 같은 무지한 인간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비방과 저주의 말과 행동으로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의 눈엔 주님의 홍포와 가시 면류관이 여전히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2)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
예수님도 때로는 인성을 가진 분이라 슬픔과 피로도 느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으로 인한 고통과 로마 병정들의 조롱거리로 입혀졌다 벗겨졌다 다시 입혀지는 자색 옷 등으로 받는 정신적 고통으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그처럼 핍박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인간의 악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3) 웃음거리로 삼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정신적 풍요로움 중의 하나가 바로 웃음입니다.(시126:2)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그러한 웃음을 비웃음으로 남용하고 있습니다. 비웃음은 비열한 행위로서 무책임한 자들이 즐겨 자행하는 악입니다. 남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생각의 바탕에서 행해지는 비웃음을 비인격적인 행위입니다. 비웃음은 그것을 당하는 자에게 커다란 모욕과 수치와 함께 고난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이와 같은 비인격적인 대접을 받기까지 하셨습니다.
2.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의 교훈
1) 진리의 승리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여 법정에 서게 하고 게다가 육체적 고통과 수모와 조롱을 당케 하고 결국엔 십자가에 처형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인간사 모든 불의와 부정을 드러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무지함, 불신앙, 사회 구조적인 악, 권력층의 부정 등 모든 악행을 총동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 자체는 선과 악의 투쟁이었습니다. 거짓과 진의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선과 진리는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확신케 함
비록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고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갈대로 머리를 맞으며, 조소의 말과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 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더욱 인류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심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왕은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군림하는 자가 아닙니다. 율법을 준행하고(신17:20), 공의로 다스리며(삼하23:3,4), 겸손해야(심17:19)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많은 고난을 통해 구약에서 예언(시45:6-7)된 영원한 왕(계11:15-17)임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3) 하나님의 섭리의 성취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도 예수님 자신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만백성을 구원하신 엄청난 역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홍포와 가시 면류관을 보는 시각을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수치와 고난이 아닌 영광과 승리라는 놀라운 섭리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막15:21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정부에 의해 정치적 반역자나 노예들을 상대로 행해진 가장 가혹한 사형 집행수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는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는 희생과 봉사, 그리고 거룩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빌2:8;히12:2)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한 절에 요약되어 있으나(마27:32;눅23:26)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누구나 져야 할 십자가
1)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순례자의 행렬에 끼어 예루살렘으로 온 시몬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주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 속에서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나 인간이 시몬 편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때때로 아주 예기치 않은 일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우연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연을 섭리로 신앙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2) 강제적일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로마 군병들이 '억지로 같이 가게' 한 십자가였습니다. 원래 죄수는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문에 의해 시달린 나머지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동기가 어찌 되었든지 비록 강제적인 억지에 의한 요구라 할지라도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바로 이 말씀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3) 성도에게는 필수적입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진 시몬에게 있어 그 십자가는 그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습ㄴ디ㅏ. 그러나 그 고통은 잠간 뿐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26;빌1:29)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날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고백함으로 주님을 위한 고난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고난입니다.
2. 성도가 십자가를 져야 할 이유
1)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전체가 인류를 위한 봉사의 사역이었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실 때부터 승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계1:10-18)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요4:34) 생애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의 전사역을 성취한 사건이었습니다. (요17:4) 그러므로 신자들이 겪는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감당하는 일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보상하시고(렘31:16) 축복하여 주십니다. (빌1:6)
2) 신자로서의 책임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한 제자 베드로(마26:69-75)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었음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가능했던 것입니다. (요21:15-19) 또한 다른 사도들 역시도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행5:41) 지금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받는 고통은 당연한 것입니다.
3. 십자가를 짐으로 오는 축복
1) 후손들이 존경을 받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시몬을 소개하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씀을 기록하던 당시 그가 모든 이들이 알 수 없었던 덕망있는 신자였음을 증명하여 줍니다. 시몬의 집안은 분명 이 일을 계기로 믿음의 집안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롬16:13) 이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 자신에게 복이 되고 후세에 알려질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집안과 후손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고통은 오히려 축복이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2)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잠간 동안(벧전5:10), 장차 받을 하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롬8:18;벧전4:13) 대제사장이나 왕들에게 씌여지는 면류관(레8:9:삼하12:30)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함께 한 자들에게도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히2:9)
대속적 죽음의 조건 막15:22-27
예수의 사형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부패한 교권과 비겁한 정권이 야합하여 내린 결정이었으며, 이 결정은 인간이 하나님을 정죄한 인류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참람하며 잘못된 결정으로서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의 오명을 역사에 남기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이 땅에서의 시각이며 하늘에서의 시각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보는 시각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의 예정된 뜻에 따라 진행된 것이며(행2:23) 그 진행과정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이루어졌고(시22:16,18;단9:26;슥13:7;12:10)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형벌)로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시각을 배경으로 하고 진행된 대속적 죽음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성문 밖에서 지신 십자가
1)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22절). '골고다'가 '장소'로서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곳이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의 원리에 입각한 것으로 속죄를 위한 제물(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제물의 고기는 영문 밖에서 불사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피로써 인류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히13:11,12) 속죄제로 드리는 아사셀 염소도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회막문에서 광야로 내보내졌습니다. (레16:6-12) 이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도말과 죄의 철저한 유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속죄제물로써, 아사셀 염소로서 성문 밖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 나무에 달린 자로서
당시 사형을 집행하는 십자가는 네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1) 말뚝과 같은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고, (2) X자형의 십자가와 (3) 단검 모양의 십자가가 (4) T자 모양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3)의 십자가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통치하에서의 십자가 형은 극악한 흉악범에게 과하는 형벌이었으며, 율법적으로는 '나무에 달릴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신21:22,23;갈3:13)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반역자'로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참람'한 죄인으로(막14:61-64) 정죄되었기 때문이며 '십자가'는 이 두 집단의 형벌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2. 죄인으로 정죄된 죽음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26절). 공관복음서에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으로 되어 있으나(마27:37;눅23:38) 요한복음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19:19)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종교(율법)에 대한 죄를 범한 일이 없으셨으며, 정치적인 (로마)법을 어긴 일도 없었고, 하나님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셨으며(고후5:21), 죄를 범치도 아니하셨으며(벧전2:22), 죄가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히4:15;요일3:5) 그의 무죄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였으며(요8:46), 빌라도가 증거하였고(요18:38), 빌라도의 아내가 증거하였으며(마27:19), 가룟 유다가 (마27:4),십자가에 달린 강도가(눅23:47), 그리고 하늘과 땅이(마27:51-54) 이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롬8:32) 것이며, 내어주시되 악인으로 헤아림을 받도록 내어주신 것입니다.(사53:9,12) 저주받은 자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갈3:13)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이 뜻을 수용하고 복종하셨습니다. (요18:11)
3. 두 사람의 강도와 함께 한 죽음
1) 두 사람의 강도와 함께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27절)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는 강도들이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강도들은 모든 인류를 상징합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강도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인간들은 이것을 다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식도, 물질도, 권력도, 명예도, 다 지기들의 오만과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강도들입니다.
2)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두 강도 중에서 한 사람은 회개하고 구원받았으나 한 강도는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고 멸망을 자취했습니다. (눅23:39-4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정죄될 것입니다.(요3:18)
땅의 생각과 하늘의 생각 막15:28-32
본문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부터 당해 오신 모욕에 대한 마지막 장면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신 때부터는 오로지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시는 일 한가지만을 위하여 위대한 인내심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잡히시던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아버지게서 주시는 잔'(요18:11)을 받으시기 위하여 기사와 이적을 행하실 능력을 부활의 아침까지 일체 유예하시고(마26:53)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사53:7) 예언의 말씀에 따라 골고다 언덕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그를 잡아 심문하는 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눈에는 가증스러운 위선자로 비쳐졌으며, 허황한 말로 민심을 현혹한 이단자로 인식되어짐으로써 조롱과 심한 모욕을 그들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수치와 능욕을 통하여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에 대한 땅의 생각
1) 예수를 모욕함
'지나가는 자들은…모욕하며 가로되'(29절)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일 먼저 끌려간 곳은 (1)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이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그의 하속으로부터 손으로 침을 당했으며(요18:22), (2) 다음으로 간 곳이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는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는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았습니다. (마26:37) (3) 세번째로 간 곳은 빌라도의 관사입니다. 거기서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갈릴리의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헤롯에게로 보냈습니다. (막15:1-5) (4) 네번째로 헤롯에게 끌려간 예수는 거기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희롱을 당했습니다. (눅23:11) (5) 다섯번째로 간 곳은 다시 빌라도의 관저였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채찍에 맞고 군병들로부터 옷을 벗기우고 홍포가 입혀졌으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로 맞으며 희롱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갈대로 머리를 맞고 다시 홍포를 벗기고 다시 먼저 옷을 입고 희롱을 당한 후에 골고다를 향하셨습니다. (마27:15-31) (6)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뒤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모욕하고 희롱하고 욕을 했습니다. (29-32) 예수께서 이렇게 수치와 능욕을 당하신 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여 하신 것입니다. (사53:1-12)
2) 땅의 생각
'지나가는 자'(29절). '제사장과 서기관들'(31절),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32절)이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서부터 당한 것을 치면 그 하속들(요18:22), 헤롯과 그 군병들(눅23:11), 빌라도와 그 군병들(마27:15-31)까지를 치면 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모욕하고 희롱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모욕한 것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1:18)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잡히셔서 재판받는 광경, 조롱과 모욕을 당해도 반항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그 모든 물리적인 힘에 대하여 대항하지 않는 태도를 보고 그들이 기대했던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환상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그 반동적인 감정이 조롱과 멸시와 모욕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립니다. (갈5:17)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며(사55:8,9), 땅의 생각은 하늘의 생각과 다릅니다.
2. 예수에 대한 하늘의 생각
1) 하늘의 생각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사53:1-12)는 인간들로부터 수치와 능욕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 피를 흘려야 되도록 계획된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 예수의 고난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도말하고 구원시키려는 지극하신 긍휼의 표현이며, 인간의 본질을 취하시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인간이 당하시는 모든 수고와 가난과 고초를 겪으시고 고뇌하시고 매를 맞으시며 온갖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역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성자 예수의 망극하신 사랑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능력과 성결의 은혜로 그 심령 속에서 거룩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지혜는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2) 모든 의미의 재창조
그리스도의 수욕은 이 세상의 모든 의미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기적을 창출합니다. 그의 십자가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그 보좌이며, 그의 손과 발에 박힌 못은 세상 만민을 그 앞에 경배케 하는 권능의 홀이며, 그가 쓰신 가시관은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는 패배하심으로써 승리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사셨습니다. 그는 죄인을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그리고 그 부끄러운 치욕을 영원한 영광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구속사역 막15:33-37
제3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제9시 즉 오후3시 예수의 운명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큰 목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이 절규는 십자가위에서 말씀하신 일곱가지 말씀 중에서 네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왜 온 땅이 갑자기 어두워졌는가를 살펴보면서 거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와 독생자
'제6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33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6시간 동안이었는데, 전반 3시간이 지나고 후반 3시간 동안 어두움이 온 세상을 덮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후반 3시간 동안은 십자가의 고통이 더 격렬해지는 때로서 심한 갈증이 수반되었습니다. (36절:요19:28) 예수께서는 전반 3시간 동안에 (1)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 대한 용서(눅23:34), (2) 한편 강도에 대한 구원의 약속(눅23:43), (3) 요한에게 어머니의 부양 위탁(요19:26,27) 등 타인에 대한 최후의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반 3시간 동안에는 주로 자신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1)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데 대한 절규(34절) (2) 목마르다는 호소(요19:28), (3) 구속사역의 완수에 대한 승리의 고백(요19:30), (4)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눅23:46)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인간들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하시는 시간까지는 자연의 질서에 아무런 영향을 주시지 않다가 그것이 끝나자 바로 해가 빛을 잃도록 하시고(눅23:44) 땅에 어두움이 덮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자신의 문제만 남게 되자 하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당신의 아들을 어둠 속에 방치하셨습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당신의 구속사역을 성취시키고자 그를 대속의 재물로 삼으시는 공의의 엄정함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 결정적인 시간에, 가장 고통이 극렬한 시간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철저히 외면하신 것입니다.
2. 철저히 버림받은 대속의 제물
1) 율법의 철저한 적용과 집행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34절). 갑자기 어둠이 찾아오자 자기를 버리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절망적인 절규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평소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으나 여기서는 공적 칭호인 '하나님'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행하고 있는 대속 사역이 공적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당신의 법과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는 법을 (레17:11) 철저히 적용, 집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법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철저히 대속의 제물로서 버려진 것입니다.
2) 죄의 철저한 청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34절) 할 때의 '나'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대속의 '제물'이기 때문에 이 '나'는 철저히 버림을 당해야 합니다. 대속의 제물로서의 '나'가 철저히 유기된다는 것은 죄의 철저한 사유, 또는 유기를 뜻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기'(시103:12) 위해서이며,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43:25)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철저히 버리시는 것은 우리 모두의죄를 철저히 청산하심을 의미합니다.
3. 독생자에 하나님의 기대
1) 완전한 겸손과 복종의 모범으로서의 기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버리시기를 기뻐하신 것은 그의 겸손과 복종을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게 하시고자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빌2:6-8;히5:7-9;벧전 2:22-24).
2) 완벽한 대속 사역의 완수에 대한 기대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의 예수를 버리신 것은 완벽한 대속 사역의 완성을 위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공의의 철저한 집행만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람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더욱 완전한 중보 사역에 대한 기대
예수께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버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철저히 버림 받은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형태의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보다 완전한 중보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부활 승천케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써 확증하셨습니다.
4) 사탄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 대한 기대
예수의 철저한 유기는 죄의 근원을 궤멸시키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이 그를 철저히 분쇄시킴으로써 사탄의 세력을 근원적으로 파괴시켜 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찢어진 성소의 휘장 막15:38,39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내리고 예수의 사형 집행을 감독하고 있던 백부장은 운명하시는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39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운명과 함께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서 매우 함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 율법의 완성
1)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됨
'성소 휘장이 …둘이 되니라'(38절). 예루살렘 성전에는 두개의 휘장이 있었습니다. 바깥 휘장은 성전 앞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곳에 있었고, 안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었습니다. 바깥 휘장을 '카룸마'라 하고 안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찢어진 것은 안 휘장, 즉 '카타페타스마'로서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와 시은소(속죄소)가 있고 거기에는 1년에 한 번 오로지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시은소에 피를 뿌림으로써 자기와 백성들이 죄를 사함받았습니다. (레16:14;히9:7) 다시 말하면 하나님(법궤)이 계시는 지성소를 차단하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 내림으로써 성소와 지성소의 구별이 없게 된 것입니다.
2) 율법의 완성
이 '카타페타스'는 (1) 하나님(법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2) 백성들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만 1년에 한번씩 열렸으며, (3) 그 휘장은 두 겹으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카타페타스'를 예수의 '육체'(히10:20)라 했습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이 휘장이 찢겨진 것은 (1)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차단하고 있던 장애물을 제거하고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히10:20)을 열어 놓으셨다는 끗이며, (2) 휘장과 예수의 육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고 있는 죄를 상징하고 (사59:1-3) (3) 휘장이 두 겹으로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은 원죄와 자범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39절)이 십자가 뒤에서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겨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차단하고 있던 죄(원죄와 자범죄)를 단번에 완벽하게 청산하고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뜻이며, 이것은 곧 율법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요19:30)
2. 하나님과의 화해
1)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성소 휘장을 찢음으로써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사함받던 것을 단번에 영원히 완성함으로써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백부장이 고백한 것처럼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장(히7:1)'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7:11-19)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인 자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과의 화해
성소의 휘장은 뒤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휘장입니다. (사59:1-3)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 죄의 휘장을 찢어버리고 이 죄의 휘장을 찢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는 성소와 지성소, 이방인과 선민, 여자와 남자의 구별없이 누구든지 이 '화해'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죄로 인하여 원수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죄를 청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신 것입니다. (엡2:14-16;골1:21-22)
3. 개방된 천국
1)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그 육체로 열어놓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10:19,20)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게서 열어놓으신 이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길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이길은 믿음의 길이요, 소망의 길이요, 사랑의 길입니다.
2)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만민에게 개방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의 문'(요10:7)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은 당신의 육체로 열어놓으신 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첫 아담의 범죄로 닫혀 있었던 천국의 문을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개방해 놓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진리를 믿는 자는 다 천국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위에 열려져 있는 영원한 천국의 문입니다.
갈릴리 여인들 막 15:40,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현장에서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에서 예수를 섬기며 따라온 여인들이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다 버려두고 도망해 버린 때 골고다 언덕길은 많은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울면서 따라 왔는데(눅23"27), 본문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은 그 많은 여인들 가운데서도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었습니다. (마27:55,56) 또한 그중에서도 그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40절)등이었습니다.
1. 예수를 끝까지 섬긴 신실한 여인들
1) 예수의 친척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40절). 여기에 나타나 있는 여인들 중 예수의 친척으로 확실한 여인은 (1) 살로메입니다. 이 살로메는 세베데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세베대의 아내이며, 에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 관계입니다. (요19:25) (2) 그 다음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인데 그녀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이며(막3:18),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19:25)와 동일인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할 때 '글로바'는 '알패오'의 별명이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글로바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형제라고 하는 바 그것이 사실이라면 알패오(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의 아들은 사도인 작은 야고보, 요세, 그리고 레위입니다.
2) 막달라 마리아
예수에게 있어서 남자 수제자가 베드로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 수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으나 주님에 의하여 병고침을 받고(눅8:2) 그 후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병고침을 받은 다른 여인들, 즉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예수의 복음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3) 그밖의 여인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본문에 안 나타나는 것은 예수께서 그 부양을 요한에게 의탁하자 그 비통한 십자가 밑에 그냥 있을 수가 없어 떠난 것으로 생각되며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41절)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중에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도 (눅8:2)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 믿음을 끝까지 지킨 여인들
1) 은혜를 잊지 않은 여인들
살로메나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녀들이 예수의 친척이 될 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아들들이 예수의 사도들이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예수의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봉사했으며,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의 인생이 예수로 인하여 다시 살게 되었으므로 갈릴리 여인들 중에서도 제일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녀들은 은혜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여인들입니다.
2)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인들
이 갈릴리 여인들은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하는 동안 한번도 그 밈음이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로부터 은혜를 받은 때로부터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킨 여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들 가운데의 일부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다락방에 있었을 것이며(행1:14), 신약 교회의 충성스러운 여종들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 예수의 복음 사역 전반을 목격한 증인들
이 갈릴리 여인들은 (1) 예수의 복음 사역을 지성으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눅8:2,3) 예수께서 사역하신 구속사역을 목격한 자들이며, (2) 본문에 나타나 있듯이 그녀들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자들이며 (3) 예수를 장사지낼 때에도 그 무덤에까지 따라가 매장하는 것도 목격한 자들이며, (47절) (4)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것도 이 여자들이었습니다. (막16:1) 이 갈릴리 여인들은 예수의 공생애 전반을 걸쳐 중요한 상황을 거의 목격한 여인들로서 이들 만큼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자에 의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남자의 협력을 얻지 아니한 여인에게서 예수는 태어나셨으며, 이 여인에 의하여 양육을 받고, 공생애 전반을 통하여 여인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받으시고 여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음과 장사와 부활의 대사건들이 진행되었으며, 오늘 교회는 예수의 신부로써 세상에 있고 그가 신랑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그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시고 그의 교회는 둘째 하와입니다.
영광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전야 막15:42-47
안식일 전의 고요한 전야에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을 장사함으로 영광의 날을 준비했습니다.
1. 주님의 죽으심
1) 역사상 단 한번의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나와 너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유일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의 시체를 장사한 자들과 백부장에 의해 명확히 증명됩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사건을 반증할 수 없고 또 다른 죽으신 예수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 한번의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기묘하신 섭리는 작용하는 것입니다.
2) 육신의 완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대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가사설인데 이는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장사를 치룬 자들 외에 백부장(마27:54)과 로마 병정(요19:33) 그리고 빌라도 (44,45절)가 그 증인이 됩니다. 둘째로 시체 도난설인데 그렇다면 부활 후 남겨진 수의와 무덤을 지키는 병정들에 대해선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세째로 환상설로 이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제자들과 여인들이 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목격자들과 같은 환상을 과연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그 환상이 40여일이나 지속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풀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들은 주님의 육신의 죽음에 대하여 반증할 아무 타당성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죽음은 육신의 완전한 죽음이었습니다.
2. 주님의 죽음이 주는 의미
1) 사랑의 봉사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고 깊은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독생자를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까지도 소멸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의 봉사인 동시에 죄의 죽음인 것입니다.(롬5:8;벧전3:18)
2) 소망을 갖게 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었던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속죄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고 (엡1:7)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고후5:19) 이제 우리 인간은 죄에서 깨끗해지고(요일1:7)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됨(히2:14)으로 하늘의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소망을 품을 수 아 게 되었습니다. (골3:1,2) 또한 주님을 바라보며(히12:1,2)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다리게 됩니다. (딤2:11-15) 이 모든 소망은 오직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평케 하신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3. 죽음을 통해 영광을 보는 자
1) 옳은 일을 위하여 담대해집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실을 숨겼던 요셉(요19:38)이 이제는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옳은 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것입니다. 잘못하면 예수님과 같은 죄목으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행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고향으로 돌아가고 은신처를 찾았으나 죽음을 통해 영광을 보는 자의 행동은 죽음을 초월한 담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선 대적자인 빌라도도 수긍하였던 것입니다.
2) 자신이 지닌 것 중 최상의 것으로 보답할 줄 압니다.
아리마대 요셉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자신의 소유를 들여 수의와 매장지를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누구도 하려하지 않은 일을 정성을 다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간섭하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준비된 무덤조차도 없었는데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의 정성과 물질로 주님을 장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향하여 주님도 최상의 것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바로 신자들의 주님에 대한 태도에 대해 그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하여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그의 담대하고도 굳은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삶은 바로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할 수 있으며(마6:33,34),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3:1,2) 죽음을 통해 내일의 영광을 보는 자, 그는 비록 어둠 속이라 할지라도 밝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