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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날 (DIES DOMINI)
주일의 성화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에게 보내는 교서
| 차 례 머리말 제1장 주님의 날(Dies Domini)-창조주의 위업에 대한 경축 제2장 그리스도의 날(Dies Christi)-부활하신 주님의날이며 성령을 선물로 주신 날 제3장 교회의 날(Dies Ecclesiae)-성찬 모임: 주일의 핵심 제4장 인간의 날(Dies Hominis)-주일: 기쁨, 휴식, 연대의 날 제5장 날 중의 날(Dies Dierum)-주일: 시간의 의미를 알려 주는 근원적인 축일 결 론 |
머리말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과 신부님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사도 시대부터 주님의 날로 불리어 온 주일1)은 그리스도교 신비의 핵심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까닭에 교회 역사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아 왔습니다. 실제로 시간의 주간 계산에서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상기시킵니다. 주일은 매주 돌아오는 부활이며,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창조의 완성과 “새로운 창조”(2고린 5,17 참조)의 시작을 경축합니다. 주일은 세상이 생긴 첫날을 감사와 흠숭의 마음으로 상기하며,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오시어(사도 1,11; 1데살 4,13-17 참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묵시 21,5 참조) “마지막 날”을 힘찬 희망으로 고대하는 날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사건입니다(1고린 15,14 참조). 부활은 신앙의 빛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더욱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증언하였던 놀라운 실재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신비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 예로니모는 그와 같은 깊은 감동으로 “주일은 부활의 날이고 그리스도인들의 날이며 우리의 날이다.”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은 연속되는 시간을 구분지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더욱 깊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정해진 “근원적인 축일”4)입니다.
3. 주일 근본적인 중요성은 2000년 역사에 걸쳐 인정되어 왔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사도 시대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여덟째 날마다 파스카 신비를 경축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날을 합당하게 주님의 날 또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5)
4. 아주 최근까지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퍽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보편적인 관습이었고, 시민 사회 조직에서도 주일의 휴식은 정해진 노동 계획표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일의 축제적 성격을 법적으로 인정한 국가들에서조차 흔히 사회 경제 상황의 변화로 사회적 습성과 주일의 특성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매주의 휴식 기간인 ‘주말’ 관행이 더욱더 확산되면서, 가능하면 집에서 멀리 떠나 보통 휴일에 열리는 문화·정치·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의 날을 진실로 거룩하게 지키는 길이어야 하는 주일의 거행과, 단순한 휴식과 여가의 시간으로 이해되는 ‘주말’을 결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영적 성숙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인이 “있는 모습 그대로” 신앙의 선물과 완전히 일치하여 자기 안에 간직한 희망에 대하여 언제든지 설명할 준비를 갖출 수 있게 해 줍니다(1베드 3,15 참조).
6. 이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주일에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신자들을 재생하게 하여, 산 희망을 가지게 하셨기’(1베드 1,3 참조) 때문입니다.”8)
7.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시간을 바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간을 열어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의 시간을 밝혀 주시고 방향을 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시간의 비밀과 영원의 비밀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며, 언제나 새로운, 당신 사랑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날’을 주십니다.
제1장 주님의 날(Dies Domini)
창조주의 위업에 대한 경축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요한 1,3)
8.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은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온전히 빛을 발하는 부활 축일입니다. 이 날은 ‘새로운 창조’의 축일입니다.
요한의 복음서 첫머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1,3). 바오로도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1,16).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서 성자의 이러한 활발한 현존은 파스카 신비에서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1고린 15,20)으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수립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도록”(1고린 15,24.28 참조) 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그 순간에 완성하시게 될 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 1,1)
9.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0.12 등). 이야기의 한 단락마다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이 표현은 우주의 모든 요소에 긍정적인 빛을 던지고,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궁극적인 재생의 비밀을 밝혀 줍니다. 세상은 그 기원에 결합되어 있는 한 좋은 것입니다. 죄 때문에 변질된 세상은 은총에 힘입어 창조주 하느님께 되돌아갈 때 다시 제 모습을 찾습니다.
10.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그대로의 우주에는 그분의 선(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찬미의 마음을 일으키는 이 아름다운 세계는 가꾸고 개발해야 할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마무리”하시자 세상은 이제 인간의 활동에 맡겨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2,2). 성서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인간의 모습처럼 묘사함으로써, 창조주와 창조된 세계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일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주와 관련한 인간의 임무에 빛을 던져 줍니다. 하느님의 ‘일’은 어떤 면에서, 우주 안에 살면서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도록 부름 받고 있는 인간에게는 본보기입니다.
“안식일”: 창조주의 즐거운 휴식
11. 하느님의 ‘휴식’을 하느님의 ‘무활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는 창조 행위는 본질상 끊임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이렛날에 하느님께서 쉬셨다 함은 하느님의 무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하신 “참 좋은”(창세 1,31) 일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며 기쁨과 환희에 찬 시선을 보내시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시선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지으신 피조물을, 사랑의 계약을 맺도록 부르심으로써 그들과 맺고자 하시는 일종의 혼인 관계를 나타냅니다. .
12. 유다 전통의 일부 요소들이 암시하는 것처럼12) “안식일”, 곧 하느님의 ‘휴식’의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특징짓는 혼인의 열정적인 사랑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호세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날 나는 이스라엘을 해치지 못하도록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밭의 해충에게 다짐을 받고 활이나 칼 같은 무기를 이 땅에서 부수어, 이스라엘이 다리 뻗고 자게 하리라.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다오”(2,18-20).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3)
13.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 안에 있다. 그것을 단지 공동체의 종교 규율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의 계시로써 선포되고 설명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짓는 본질적인 표현으로 여긴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14.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특별히 복을 내리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그 날을 각별히 “당신의 날”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심오하고 역동적인 계약의 대화, 실은 ‘부부 사이의 대화’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중단을 모르면서도 결코 단조롭지 않은 사랑의 대화입니다.
15.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또한 분명하게 기도 시간을 요구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모든 차원을 포함하는 열정적인 대화가 됩니다. “주님의 날”은 특별히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며 이러한 관계를 맺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날이 휴식의 날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휴식이라는 말이 ‘새로움’과 ‘떠남’이라는 생생한 뜻을 지니고 있듯이, 숨막힐 듯이 반복되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과 우주의 의존성을 나타냅니다.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16.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애 20,11).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쉬신 것처럼 쉬도록 부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찬미와 감사를, 자녀로서 사랑을, 배우자로서 우정을 바치면서 그분께 모든 피조물을 되돌려 드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17. 신명기(5,12-15)에서 안식일 계명은 창조 사업보다는 하느님께서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이루신 해방의 업적에 더 많이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느님께서 억센 손으로 내리치시고 팔을 뻗으시어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러므로 너희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
두 기록을 하나로 합쳐 생각할 때, 이 두 기록은 창조와 구원을 하나로 묶는 단일한 신학적 시각 안에서 “주님의 날”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의 핵심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
18. 성 대 그레고리오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일은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4) 하고 말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의 ‘영적’ 의미가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안식일에, 하느님께서 무(無)에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며 만족해하시던 그 기쁨이, 그리스도께서 부활 주일에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와 성령을 선물로 주시던 기쁨(요한 20,19-23 참조)에 나타나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입니다.
주님의 날에 대한 구약의 계명의 의미는 이러한 신비에 비추어 재발견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영광 안에서 완성되고 완전히 드러납니다(2고린 4,6 참조). “안식일”에서 “안식일 다음 첫째 날”로, 이렛날에서 첫날로 옮겨짐으로써 주님의 날은 그리스도의 날이 됩니다!
제2장 그리스도의 날 (Dies Christi)
주간 부활절
19 5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주일을 거행한다. 이것은 부활주일에만 지내는 것이 아니고, 매주 돌아오는 주일마다 지내는 것이다.”
(해설) 역사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주일, 주님의 날이라 부르지 않았음.
다만 ‘부활 경축일’이라 하였고, 이 ‘부활 경축일’이 정착되면서 ‘주일’ ‘주님의 날’이라 불리어졌다. 따라서 부활은 원래 ‘부활경축일’이었고 안식일의 토대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날이 된 것이다.
20 ‘안식일 다음 날’의 의미
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마르코 16,2.9; 루카 24,1; 요한 20,1)
②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루카 23, 13-35)
③ 열 한 제자들에게도 발현 (루카 24,36; 요한 20,19)
④ 토마를 포함한 11제자들에게 발현 (요한 20,26)
⑤ 성령강림일 (= 첫 부활선포의 날, 첫 세례의 날)
주간 첫날
21 “안식일 다음 첫째 날” = 주간 첫날
이때부터 달라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 (그리스도인의 특징)
(해설) 주간의 계산법을 바꾸게 한 부활신앙
지금도 유다인들은 우리가 말하는 토요일을 그들은 우리의 주일과 같이 지내고 있다 (안식일). 즉 우리의 주일이 그들에게는 월요일이 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월요일에 해당하는 주간의 첫날을 그리스도교인들은 ‘주님의 날’ (‘주일‘) 이라고 경축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시행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생활리듬을 바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에게는 주간 첫날인 월요일에는 모두 일하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한 자리에 모여 성찬례를 거행하며 부활의 뜻을 새기는 것이 힘들었다.
22 (해설) 바로 이점이 신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날을 지키는데 매우 어려운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해 뜨기 전에 모여야 했다. 그래도 낮에는 사회를 따라 일을 했다. 이런 어려움 중에서도 신자들은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려 했다. 이런 신앙의 근거는 부활신앙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안식일과 더욱 분명해 지는 차이
23 유다인의 안식일과 주일의 구별을 위해 초대 교회는 부활을 강조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중 몇몇 곳에서는 유다인들의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거행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두 날을 분명하게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해설) 안식일에서 주일로 바꾸는 과정
초대 교인들은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지켜야 하는 의무로 고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결책으로 안식일 예배에도 나가고, 다시 별도로 주일 경축 거행에도 참여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다가 안식일보다 주일이 우월하고 안식일의 완성이 주일이라는 생각이 강해져 안식일의 의무에서 탈피하여 주일만을 고수하기 시작하였다.
안식일의 완성이 주일이라는 근거는 안식일이 창조에 국한되어 있다면, 주일은 창조신앙에 구원신앙이 보태져 창조신앙의 의미를 살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구원신앙이 없다면 창조신앙은 그 빛을 잃게 된다.
새로운 창조의 날
24 주일과 안식일의 개념 비교는 부활과 창조사이에 있는 특별한 관계를 명확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적인 반응은 자연적으로 안식일 다음 첫째 날에 일어난 부활을 우주적 주간 (창조 주간)의 첫째 날과 연결시켰다.
우주적 주간의 첫째날은 창세기에 있어 빛을 창조하신 날에 해당된다. 이러한 연관은 부활을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이해하도록 하였고, 새로운 창조에 있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는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 (골로 1,15)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 (골로 1,18)이 되시어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신다.
(해설) 이제 부활 신앙의 교리가 발전하여 주일은 제2창조를 경축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부활과 구원의 의미로 새로운 창조라는 시각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최초에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제1 창조),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켜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죄로 인하여 이런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됨으로 제1 창조의 의미는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는 다시 당신 부활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2 창조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 경축의 날인 주일은 제2 창조의 경축일이라 할 수 있다. 즉 제1 창조의 계획이 회복되었음을 경축한다는 뜻이다.
25 주일은 어떤 날보다도 구원을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이 구원은 세례로서 받은 것이며,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해설) 주일: 우리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 세례를 기념하는 날
성서적으로 구원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낡은 인간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고, 죽었던 인간이 새 생명을 얻었고, 어두움의 인간이 빛의 사람이 되었고, 타락했던 인간이 깨끗한 인간이 되었고, 절망의 인간이 영원한 행복의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성령을 선물로 주신 날
28 빛의 날인 주일을 성령과 연결 시킨다면 역시 ‘불의 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빛은 성령의 ‘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이 두 가지 모습은 그리스도교 주일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 부활하신 날 저녁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22)하고 말씀하심
- 부활 후 50일 ‘강한 바람’과 ‘불길’과 같이 성령이 내려오심
- ‘매주의 부활절’은 빠스카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로 성립되며, ‘매주의 성령강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기쁜 만남을 한 것처럼 그 기쁜 만남을 체험하고 당신 성령의 숨결로 활력을 얻는 것이다.
(해설) 주일은 성령의 은혜를 받는 날: ‘불의 날’
성령강림의 날도 주일이었다. 여기서 모든 주일은 불의 날이요, 성령의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령은 교회의 생명이요 모든 신자들의 내적 생명의 원천이 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그리스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완성되어 가도록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셨다.
성령이 내린 그 순간부터 교회가 탄생하고,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들은 군중은 같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주일은 성령의 은혜가 강화되는 날이고, 주일은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하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다.
신앙의 날
29 주일은 탁월한 신앙의 날 : 주님의 첫 발현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
그것은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되는 날이다.
또한 주일은 신앙고백의 날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을 이날 한다)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가 자기 신앙을 재확인하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날이 바로 주일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날!
30 (해설) 2000년 동안 교회가 주일을 지키도록 가르쳤고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주일을 정착시키고 지켜온 데에는 그만한 신앙적 이유가 있었다.
교회는 세상 종말까지 주일을 옹호하고 지켜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주일을 지키지 않고는 신앙을 보호할 수가 없다. 초세기의 신자들이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주님의 날’을 형성하고 지킨 것은 주일 없이는 그들의 신앙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3장 교회의 날(Dies Ecclesiae)
성찬모임 : 주일의 핵심
31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
주일이 부활의 날이라면 이는 단순한 지나간 사건의 기념만이 안이고, 당신 백성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 계신 현존을 경축하는 것이다.
이 현존이 올바로 선포되고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의 비밀 속에서 내적으로 기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의 정체성을 충만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Ekklesia)는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불러 모이게 한 공동체이다. 이들의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 때, 외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기들이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묵시 5, 9) 뽑히어 구원된 백성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고, 그것을 세상에 증거하게 된다.
(해설) 주일은 신앙 공동체의 날
근본적으로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체험하고 그 기쁨을 경축하는 날이지만, 그것을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로서 하는 날이다.
주님의 날에 하느님 백성이 한자리에 모여 부활의 신비를 경축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백사장의 모래알과 같은) 단순한 집합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찬모임
32 성찬례는 교회에 영향을 주고 교회를 형성한다. 성찬례에 내재하는 교회적 차원은, 성찬례가 거행될 때마다 실현된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날에 가장 뛰어나게 드러난다. 같은 의미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는 “주님의 날과 주님의 성찬례의 거행은 교회 생활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가르치고 있다.(2177항)
(해설) 성찬례와 교회와의 관계
이 항에서는 신앙 공동체 생활, 즉 교회의 실질적 모습은 성찬례(성체성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비체인 하느님 백성이 같은 식탁에 모여 같은 빵을 나누어 생명력을 얻고 하나가 되는 것은 교회 모습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찬례와 교회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참례한 사도들의 모습과도 같다. 여기서 나누어 먹는 빵을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며, 우리가 성찬례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신앙생활도 교회생활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3 바로 주일미사 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함께 모였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요한 20, 19) 사도들이 체험한 것을, 각별한 열정으로 다시 체험하는 것이다.
(해설) 성찬례와 부활과의 관계 : 평화의 기쁨
이 항에서는 성찬례와 주님의 부활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하고 참례하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함께 기억하고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기 위해서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인사 :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살아 계실 때는 사용하지 않으신 인사법이다. 부활의 기쁨은 평화로 표현된다. 악과 죽음으로 향하게 하는 세력을 무너뜨리고 선과 참 생명의 질서로 회복시키셨기에 거기서 누리는 것은 평화가 된다. 성찬례에 참례하는 우리는 이러한 평화를 누려야하고 남에게도 이 평화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주일 성찬례
34 성찬례는 본질상 교회의 공현(Epiphania)이다. 이것이 가장 의미 있는 때는 교구 공동체가 자기 목자와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는 때이다.
주일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례케 하시는 날에 거행되기 때문에 공동체의 참례의무와 함께 장엄하게 지내게 하며, 한편 다른 성찬례의 표본이 되게 함으로써, 교회 차원의 성격을 아주 강하게 드러나게 한다.
(해설) 성찬례와 일치된 교회의 모습
이 항에서는 성찬례에서 일치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날
35 주님의 날은 교회의 날(Dies Ecclesiae)이기도 하다. 한 본당의 여러 가지 활동 가운데 공동체를 위해서 주일날 주님의 날을 거행하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만큼 활력적인 것은 없고, 교육적으로도 그만큼 기여하는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 교회 공동체 의식은 주일미사를 공동으로 거행함으로써 특별히 함양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해설) 주일은 교회 모습을 강화하는 날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 주님의 날은 교육적 측면에서 기여하는 바가 크다.
교회의 모든 사람은 그 어느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형제적 자격으로 주일 성찬례(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이런 모임의 모습이 주는 교육적 효과는 어느 교육 방법보다 뛰어나다.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은 이러해야 한다.
이런 정신과 모습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밝은 빛을 줄 수 있다. 또한 그 모습이 하느님을 증거하는 길이기도 하다.
36 주일의 집회는 특수한 일치의 자리이다. 사실 그 자리에서 일치의 성사(Sacramentum Unitatis)가 거행되며, 이 일치의 성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 “안에서” 또 일치에 “의해서” 모인 백성의 특성, 즉 교회의 특성을 드러낸다.
(해설) 주일은 공동체의 일치를 최우선시하는 날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일은 공동체의 일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주일미사 참례를 중요시해야 한다.
주일미사에는 본당 내 모든 단체들이 다 함께 어울리도록 하여 일치의 모습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특수 단체만을 위한 미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순례하는 백성
37 시간을 따라 교회가 걸어가는 여정의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고 매주 돌아오는 주간에 장엄한 기념제(성찬례)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순례와 종말론적 성격을 회상케 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실 주일을 지내고 또 주일을 지내는 교회는 “최후의 주님의 날” 영원한 주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해설) 반복되는 주일은 영원한 종말을 향한 여정
매주 맞이하는 주일은 꼭 같은 주일을 지내는 느낌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는 종말을 향한 전진이다. 즉 오늘의 주일이 종말의 주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주일은 종말의 주일의 예고라고 생각해야 한다.
주일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고 종말을 향한 새로운 주일의 계속이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된 교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희망의 날
38 만일 주일이 신앙의 날이라면 역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날이다.
(해설) 주일은 영원한 희망을 새롭게 하는 날
영원한 안식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해주는 날이 주일이다. 주일날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경축하면서 우리도 부활의 기쁨을 누리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해설) 말씀의 전례의 중요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 이전에는 말씀 전례라는 말을 몰랐다. 공의회와 전례개혁에 의해서 미사의 두 가지 부분을 분명히 하면서 미사의 본질을 말씀의 전례와 성찬례로 나누어 명백하게 되었다.
새로운 전례개혁에 따르면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고 두 가지가 합하여 완전한 미사가 이루어짐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신자들은 성찬 전례만을 미사의 본질로 혹은 핵심으로 생각하고 말씀의 전례는 미사의 준비 부분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하느님 말씀 안에도 현존하시고 성체성사 안에도 현존하신다. 그 현존은 똑같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신자들은 성서를 자주 읽고 공부하여 성서에 대한 지식을 넓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의 전례는 듣기만 할 뿐 생명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
말씀의 식탁
39 우리는 주일 집회에 있어 하느님 말씀의 식탁과 생명의 빵의 식탁인 두 식탁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말씀의 식탁 : 구원의 역사를 알아듣게 된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부활신비의 역사를 깨우쳐준다.
“교회 안에서 성서를 봉독하는 동안”에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이 말씀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생명의 빵의 식탁 : 이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적, 본체적, 지속적 현존이 당신 수난과 부활을 기념함으로 실현되며, 생명의 빵은 미래의 영광의 보증으로 봉헌된다.
공의회는 “하느님 말씀의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마련하도록 요구하며 아울러 주일미사와 축일미사에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강론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촉구하였다.
40 따라서 본당 공동체들은 성찬례에 참례하는 사람들-사제, 봉사자(복사), 신자들-까지 포함하여 낭독할 하느님 말씀을 미리 생각하고, 주간 중에 주일 전례를 준비하는 활동은 매우 찬양할 일이다.
(해설) 말씀 전례의 효과 - 외적으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거행하느냐의 문제
․성서봉독자의 품위 있는 자세, 마이크 사용법, 발음 등 듣는 신자들에게 이해를 돕고 있는지?
․성가의 가사나 멜로디가 성음악 원칙에 부합하는지?
․말씀이 내적으로 어떻게 와 닿게 지내느냐하는 관점에서 신자들을 살펴야 한다.
․말씀선포가 듣기만하고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평가와 반성을 통하여 본당 공동체는 개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 본당에서 거행하는 말씀전례가 보다 효과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41 미사 때의 하느님 말씀의 전례적 선포는, 묵상이나 교리교육을 위한 시간이기 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대화하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대화에서는 구원의 놀라운 사건이 선포되고, 계약이 요구하는 것들이 계속 설명되고 있다. 하느님 백성 편에서는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동시에 끊임없는 “회개”를 위해 자신의 충실한 노력을 입증하여 보여드리면서, 사랑의 대화에 응답해야 한다.
그리스도 몸의 식탁
42 “주님의 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모든 공동체가 모일 때, 성찬례는 마치 큰 감사축제와도 같이 다른 어떤 날보다도 돋보인다.
(해설) 십자가의 희생제에 참례하는 자세도 갖추어야 한다. 이 제사는 네 가지 성격은?
① 하느님을 높이 받드는 흠숭제 ②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제
③ 하느님께 바치는 속죄제 ④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바라는 기원제
43 (해설) 성찬례의 제사적 성격
하느님 백성은 성찬례를 통하여 기쁨과 감사와 희망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제사는 오늘도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바로 그분을 희생제물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고 있다. 이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바치시는 제사인 동시에 또한 우리가 바치는 제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바치는데 우리의 찬미, 우리의 모든 시련과 고통, 우리의 간절한 기도, 우리의 일상 활동을 함께 바침으로 우리의 제사가 되고 있다. 하느님 백성인 신자들은 한 주일 동안 겪은 수고와 고통의 가치들을 함께 봉헌하는 것이다.
미사에서 “선교”로
45 부활을 처음 증언한 사람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선포하기 위해 매주일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생생활에 있어, 복음 선포자가 되고 신앙의 증거자가 되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미사가 끝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가, 그들의 모든 생활이 하느님께 의합한(로마 12, 1) 선물이 되고, 영적 제물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영성체 후 기도, 마지막 강복, 신자파견) 그것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즉시 되돌아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주님을 만난 기쁨을 나누었던 것과 같이, 미사참례로 성찬거행 중에 받은 것에 대해서 자기 형제들에게 돌려줄 채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해설) 주일미사에 참례한 하느님 백성이 할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 낡은 생활에서 새로운 생활로 부활해야하고 남에게 부활신앙을 전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임무가 없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 오늘날에 이 말이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말로만 여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주일 의무
46 성찬례는 참으로 주일의 핵심이기 때문에 초세기부터 교회의 목자들이 신자들에게 전례적 집회에 참석해야 할 필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왔다. 3세기의 ‘사도들의 가르침’(Didascalia)의 원문에는 “주님의 날에는 모든 일을 그대로 두고 부지런히 집회에 달려가십시오.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당신의 찬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의 날에 모이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어떤 변명을 하겠습니까?”
(해설) 주일을 지키는 의무에 대한 바른 이해
1917년 교회법 개정에서부터는 주일의 의무를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이 의무의 성격은 어떤 법적 강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일의 중요성과 당연성을 양심적으로 인정하고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성찬례는 주일의 핵심이고 주일은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되고 있어 성찬례와 이에 참례하는 주일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과 신앙생활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47 이 양심적 의무는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내적으로 강하게 느꼈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었고 교회는 단번에 그것을 법제화하지는 않았어도, 언제나 그 의무를 인정하는 데 그친 일이 없었다.
(해설) 주일의 의무는 신앙과 양심의 의무이다
주일의 역사를 보면 초기 사도시대 때는 자발적으로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 대신 지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주일의 의무 규정은 1927년 교회법을 개정할 때부터였다. 이 법에 따르면 “모든 주일과 의무 대축일에는 미사성제에 참례하여야 하고 힘든 노동과 재판 행위는 피해야 하며, 적법한 특전이 없는 한 공적으로 상거래를 피해야 한다” (구 교회법 제1248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법적 의무화는 처벌법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보호와 신앙적 양심을 촉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 충분한 이유없이 이 의무를 지키지않으면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에 역행하는 중대한 잘못으로 생각해야 한다.
48 (해설) 주일을 지키는데 어려운 여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각적인 노력도 필요하며, 먼저 신자들의 주일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을 하면서 불가피한 동안은 주일미사 참례를 대신하는 특별기도를 바치도록 해야 한다. 과거에는 이를 ‘대송’이라는 말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기도는 해당 주일의 말씀의 전례에 나오는 성서를 읽고 묵상과 아울러 적절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기본이고, 그것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묵주의 기도록 바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9 신자들에게 중요한 장애가 없는 한 미사에 참례할 의무가 있다면, 사목자들에게는 신자들이 실제로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데 상응한 의무가 있다.
- 한 대 이상의 미사 (3대까지)를 드릴 수 있도록 교구장의 허락
- 저녁미사의 제정
- 주일미사 의무를 다 할 수 있는 시간을 토요일 오후 주일 제1저녁기도 시간부터 시작하도록 함
노래를 이용한 즐거운 미사 거행
50 주일미사는 그 중요성에 따라서 특별히 세심하게 준비하여야 한다. 사목경험과 지역 관습에 따르면서 전례 규범과 일치하여 주일미사 거행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다운 축제적 성격을 띠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회에서 사용되는 노래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는 즐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거행의 엄숙함을 강조하며, 공동의 신앙과 사랑의 나눔을 강화하는데 특히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해설) 성가와 성음악의 중요성
주일은 축제의 날이다. 따라서 미사 전례의 분위기도 축제의 분위기가 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축제의 기쁨을 드러내는 데 노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고 표현이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꾸준히 성가와 성음악의 개발과 시창을 해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 임의로 작사 작곡을 할 때에는 주위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편교회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통일된 원칙을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신앙 공동체로서의 본당은 이 점에 유의하여 주일미사의 전례가 성스럽고 장엄하고 축제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참례하는 미사 거행
51 (해설) 미사 참례냐? 참관이냐?
우리는 미사에 참례한다고 하지 아무도 참관한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제사를 바치는 주체가 되지 않으며 성찬례에서는 생명의 빵을 나누지 않음으로 해서 참관하는 경우가 많다.
전례적으로도 완전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미사 참례가 된다고 강조한다. 나 자신도 미사를 함께 거행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물론 미사 전례는 외형상 사제가 집전하고 있지만, 신자도 사제와 응답을 주고 받고 있고, 기능적으로도 해설 및 독서, 복사 등으로 미사에 참례한다. 신자들의 사제직은 직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도 주일미사의 공동 주례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주일의 다른 시간들
52 성찬례에 참석하는 것이 주일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할 의무를 그것만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사실 주님의 날을 잘 지내려면 이날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구원사업에 대한 감사와 생생한 기억으로 채워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날 - 전례와 연관되지 않은 생활로서 가정생활, 사회관계, 휴식시간 등이 있고 - 과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지내려고 다짐해야 한다. 예컨대, 부모와 자녀가 조용한 휴식 가운데 모이는 것은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는 기회일 뿐 아니라, 교육과 보다 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평신도 생활에 있어서도 가능하다면 성무일도의 기도를 바친다든지, 저녁기도를 장엄하게 바친다든지 해야 한다.
(해설) 주일미사 참례만으로 주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끼리의 성지순례 등도 장려할 만한 것이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께 정성을 바치고 그리고 영육에 필요한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제없는 주일 집회
53 교회는 성찬례 거행이 불가능한 경우를 고려하여, 사제가 없어도 주일집회(공소예절)를 권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는 교황청의 지시와 지침에 따른 것이며 주교회의에 그 적용을 위임한 것이다. 그러나 미사만이 성찬의 집회가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해설) 사제가 부족하여 미사 참례를 할 수 없는 경우
공소예절이라 함은 본당에서 거행하는 말씀의 전례와 같은 것이다. 신자 중에 차례를 정해 그날 주일의 (또는 의무 대축일) 독서와 복음을 낭독하고 공동체 대표자가 그날 복음의 해설책을 낭독하거나 직접 공부하여 적절한 해설을 하고 함께 묵상한 다음 사도신경과 신자들의 기도를 바치고 가능하면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폐회하는 것이 공소예절의 핵심이다.
거기에 첨가한다면 성찬례에 참여 못하는 대신 성체께 대한 기도와 함께 신령성체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록 미사에는 참례하지 못하나 이러한 방법으로 하느님께 대한 정성을 다해야 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젼
54 끝으로 질병이나 장애 그 밖의 다른 중대한 이유로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신자들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떨어져 있지만 주일미사 거행과 결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선 그날 주일미사 경본에 나오는 독서와 기도를 통하여 또 성체께 대한 갈망을 통하여 일치하려고 해야 한다.
여러 나라에 있어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통해서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성찬거행에 동시에 일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주일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는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방송은 귀중한 도움을 제공한다.
특히 특별한 봉사자가 있어 그들에게 봉성체를 할 수 있게 하고, 공동체 전체의 인사와, 일체감(연대감)을 전하는 것과 같은 호의적인 봉사가 보완된다면 더욱 값진 도움이 될 것이다.
제4장 인간의 날 (Dies Hominis)
주일: 기쁨, 휴식, 연대의 날
그리스도의 “충만한 기쁨”
55 역사적으로 주일이 휴일이 되기 이전에, 즉 민간 달력에서 휴일로 규정되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부활하신 주님의 날을 특별한 기쁨의 날로 지냈다.
“매주의 첫째 날에는 모두 기뻐하여라”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다. 이 기쁨의 표현은 전례적 생활에 있어, 서로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여 드러내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초세기의 일반적 교회의식을 해석하면서, 매주일의 부활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부활의 증표로서 금식은 해제되고, 기도는 서서하는데 그러한 모든 주일에 역시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해설) 주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기쁨을 체험하는 날
안식일이 주님의 부활하신 날로 (안식일 다음 날) 바뀐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안식일의 의미가 주님의 부활로 완성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부활의 기쁨이 더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주님의 기쁨으로 바꾸어 가지는 날이 주일이다.
56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의 첫 체험을 재현하는 매주일은 제자들이 스승을 만났을 때의 기쁨으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요한 20,20) 주일 성찬례의 축제적 성격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혜로 당신 교회에 전해주시는 그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쁨은 바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해설) 주님 안에서 체험하는 기쁨
주님과 함께 살았던 사도들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탈하고 불안감에 사로 잡혔고, 각자 옛날의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또 다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을 체험하고 문을 박차고 세상에 나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였다. 주님 안에서 체험되는 기쁨은 바로 사도들이 체험한 이러한 기쁨이다.주일은 이러한 기쁨을 새롭게 해 주는 날이며 우리에게 그러한 기쁨을 새롭게 체험하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동안 온갖 고뇌에 억눌려 잃어버린 기쁨을 주일날 미사에 참례하면서 주님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되찾고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한다.
57 그리스도교적 기쁨은 틀림없이 모든 생활을 표나게 해야 한다. 그것은 한 주간에 하루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 가지는 의미로 인해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새로운 창조” 사업을 경축하는 주일은 특별한 명칭으로 기쁨의 날이며, 또한 스스로 기쁜 날이 되게 해야 하는 날이고, 또 기쁨의 진정한 모습과 깊은 근원을 재발견하는 날이고, 이 기쁨은 헛된 만족감이나 쾌락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기쁨은 보다 지속적이고 위안을 주는 것이다. 성인들의 증언과 같이 기쁨은 고통스러운 어두운 밤에도 견딜 줄 아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가꾸어야 할 ‘덕’이다.
(해설) 우리가 바라는 참 기쁨의 성격
만일 현세적 기쁨만을 추구하고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체험하려 하지 않는다면 현세적 기쁨마저도 완전하게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주님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가 누리는 현세적 기쁨도 하느님의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고 고뇌에 찬 삶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58 바오로 6세는 그리스도교적 기쁨에 관한 권고서에서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적 기쁨은 영광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이면서 인간적인 기쁨이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참여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교회가 주님의 날에, 사도들이 부활 날 저녁에 주님을 뵈었을 때 체험했던 그 기쁨을 강력히 증거하기를 당부하셨다. 따라서 교황은 사목자들에게 “세례 받은 사람들이 주일 성찬례를 기쁨 속에서 거행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도록 당부하셨다.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사랑으로 준비하신 이 잔치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 참례는 품위있고 축제적이어야 한다 (영문판에서는 가치있고 기쁜 것이어야 한다로 되어 있다)
그리스챤 기쁨의 표지와 원천이며, 영원한 잔치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정신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진정한 “축제”를 지내는 방법이며, 인간이 인간적으로나 완전하게 성장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날이다.
안식일의 완성
59 구약성서에서 창조사업과 이집트 탈출에 연결시키고 있는 주님의 날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계약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창조에 대한 경축은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스도 중심적 시각 안에서 그 깊이를 더해 가고 있으며 이집트에서의 해방된 일을 기념하는 것 또한 완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세상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일은 안식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완성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구원 역사의 과정에 따라 드러나는 안식일의 연장이고 또 충만한 표현이기도 하다.
60 안식일에 대한 성서신학은 주일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해치지 않고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봉인(끝맺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시고” (창세기 2, 3) 쉬신 그날을 축복된 날, 거룩한 날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 휴식일은 정기적으로 오는 주간의 한 시점일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그 신학적 의의까지 드러내고 있다.
사실 안식일이 계속적으로 돌아옴으로 시간이 시간 안에 갇혀버릴 위험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때 (Kairoi), 즉 은총의 때, 하느님의 구원활동의 때를 받아들임으로써 영원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61 안식일은 모든 창조 작업을 끝맺는 날이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세 1, 26) 인간을 만드신 엿샛날의 작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부들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묵상할 때 “하느님의 날”과 “인간의 날” 사이의 이러한 지극히 밀접한 관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다른 것들은 창조하시고 쉬지 않으셨지만] 당신께서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인간을 만드시고는 휴식을 취하였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출애 20, 8)하고 선언되는 하느님의 계명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날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정해진 휴식은 인간에게 지워진 의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봉헌하며, 자유로이 창조주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다. 또한 휴식은 창조주의 사업에 협력하며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수단이다.
하느님의 “휴식”을 기리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발견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날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 새겨져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축복의 은혜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번성”의 축복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번성”은 안식일이 주는 활력, 어떤 의미로는 시간 자체를 “늘리는 것”과 살아 계신 하느님을 기억함으로써 삶의 기쁨과 발전의 욕구와 그리고 생명 전달의 욕구가 인간 안에서 증가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62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유다인의 안식일 형태가 주일의 “완전한 형성”에 의하여 낡고 뒤진 것이 되었지만,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 근본 동기는 그대로 유효하게 남아 있고, 십계명도 그것을 엄숙히 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해설) 안식일과 주일은 해방의 날이다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고 해서 안식일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번 설명했다.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지 신명기 5장 12 -15절에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너희 주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여야 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주 하느님 주님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만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억센 손으로 내리치시고 팔을 뻗으시어 너희를 거기서 이끌어 내셨다. 그러므로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즉, 안식일에는 일체 생업을 위한 활동을 중지하고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고 몸과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특히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을 기억하며 인간이 같은 인간을 억압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셨다.
이 신명기의 정신은 모두가 해방이라는 의미로 압축된다.
첫째는 현세적 삶의 집착과 애착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모든 근심과 고통에서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으로 해방되어야 하고, 에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듯 모든 죄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직접 그러한 해방을 본보기로 우리에게 주셨다. 현세적 모든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극복하시고 당신 부활로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을 열어 주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일은 해방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일은 우리의 해방을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현세 생활에 억매어 있다든지, 현세적 고통을 십자가의 의미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든지, 하느님 뜻과 교회의 가르침과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삶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없다.
63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탈출”을 성취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시러 오셨다. 그분께서는 안식일에 많은 치유를 행하셨다 (마태 12, 9-14 및 병행구절들 참조).
그것은 물론 주님의 날을 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 2,27) 예수께서는 당시 일부 사람들의 지나치게 율법에 얽매인 해석에 명백히 반대하시면서, 성서의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발전시키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 (마르 2, 28) 으로서 하느님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를 세심하게 보호하시면서, 안식일 준수에 해방의 성격을 되찾아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얻은 해방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부활의 날로 옮길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빠스카는 실제로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근본적인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다. 죄는 역사 속에 끊임없이 악과 폭력의 씨앗을 뿌리면서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기 자신과 이웃 사람들과도 멀어지게 한다.
(해설) 주일이 해방의 날이라면 남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와 불행에서의 해방을 원하시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노력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소경, 귀머거리, 앉은뱅이, 중풍환자, 나병환자, 마귀들린 자를 치유하시고 특히 안식일에 많이 고쳐주시고 (마태 12, 9-14),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려주시는 기적들을 보여 주셨다. 이런 모든 치유의 행위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죄의 용서라고 생각하셨다. 마태 복음 9장 2-6절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한 병의 치유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보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적은 죄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있다. 죄인들의 회개를 강조하신 것도 같은 뜻이었다. 특히 안식일에 병자를 많이 치유하신 것은 안식일, 즉 주일이 해방의 날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안식일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죄에서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자신이 죄에서 해방되어 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남을 억압하고 있는 것도 살펴보아야 한다. 부부 사이에, 부모 자녀사이에, 직장에서, 이웃과 동료 사이에 독선과 권위와 고집으로 남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해방시켜주어야 우리도 해방될 것이다.
휴식의 날
64 ~ 68 항 생략
연대의 날
69 주일에는 신자들에게 자비와 사랑, 사도직 활동에 헌신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을 내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속에 고동치는 사랑을 온전히 공유하는 것이다. 사랑 없이는 기쁨도 없다.
주일의 성찬례는 신자들에게 사랑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갖가지 애덕과 신심과 사도직 활동에” 투신하도록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업으로써,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의 빛이며, 또한 사람들 앞에서 성부께 영광을 드린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한다” (전례헌장 9항)
(해설) 주일은 남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날이다
우리 중에는 이기주의적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나누는 것도,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이익이 있을 때만 하려고 한다. 주일은 이런 자세와 이런 정신을 고치는 날이다. 남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우고 기르는 날이다.
70 사도시대 이후부터 주일 모임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형제애의 나눔을 실천하는 시간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가난한 유다 교회들을 위하여 헌금을 모금하면서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 두십시오” (1고린 16,2)하고 말하였다.
주일의 성찬례에서 신자들의 마음은 교회의 모든 측면으로 넓혀진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권고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바오로는 좁은 의미의 “자선”의 정신을 기르려고 하기보다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도 힘들지만 나눔의 문화를 실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해설) 남을 사랑하는 첫째 실천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다
71 사도들의 가르침은 초 세기 때부터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교회 교부들의 설교 속에 강한 울림으로 되살아났다. 성암브로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의 설교를 참조
(해설) 주일은 가진 사람들이 반성해야 하는 날
72 성찬례는 참된 형제애를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러한 형제애를 실천하려는 호소이다. 주일미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강물은 신자들에게 주일의 휴식을 실천하도록 격려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신자들의 삶 전체로 확산되어 나간다.
주일이 기쁨의 날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실제 행동으로 우리는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여야 한다.
(해설) 주일은 작은 사랑의 봉사활동을 실천하는 날
73 이렇게 생각할 때 주일의 성찬례 뿐만 아니라 주일 전체가 사랑과 정의, 평화를 가르쳐 주는 위대한 학교가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심은 연대의 보증이 되고, 내적 쇄신의 원동력이 되며 개인과 공동체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모든 사람을 옭아매는 죄의 구조를 변화시키도록 격려하는 힘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주일은 도피가 아니라, 시간 자체에 새겨진 ‘예언’이다. 곧 신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러” (루가 4, 18-19) 오신 분의 뒤를 따르게 하는 예언인 것이다.
(해설) 주일은 신앙학교와 같은 날이다
2000년 동안 주일은 교회의 핵심이 되어 왔고, 주일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자들 개개인을 위해서도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앙은 고갈되고 만다. 냉담자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신앙학교와 같은 날이 바로 주일이다. 매주일을 통하여 하느님과 멀어졌던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고, 대립과 갈등과 미움들을 사랑으로 해결하고, 현세의 집착에서 해방되어 영원을 바라보게 되고, 인색과 물욕을 떨쳐 버리고 남과 더불어 동고동락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주일이다.
주일을 버리고 우리가 가는 길은 무엇일까? 주님을 버리고 우리가 찾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주일은 그 해답을 준다.
제5장 날 중의 날 (Dies Dierum)
주일: 시간의 의미를 알려주는 근원적인 축일
시간의 알파이며 오메가이신 그리스도
74 “그리스도교 안에서 시간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간의 차원에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이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전개되어, 강생이라는 ‘시간의 충만’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시간의 끝에 오실 하느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재림에서 그 목표에 이르게 된다. 강생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은 스스로 영원한 분이신 하느님의 차원의 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교서 ‘제 삼천년기’ 1994. 11. 10) 10항)
바오로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연설하면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하고 기록된 시편 제2편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시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부활 성야를 지낼 때,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시작이며 마침이고, 알파이며 오메가”이신 분으로 선포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분께서는 시간의 시작이시고 마침이시다. 시간의 충만 속에서 재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해와 모든 날 그리고 모든 순간은 그분의 강생과 부활 안에 내포된다.
(해설) 현재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운동 또는 변화라고 한다. 변한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은 의미한다. 절대적으로 완전하면 변하지도 않고 따라서 시간에 속하지도 않는다. 바로 하느님이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만이 변하실 수 없다.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완전을 향하여 변화해 나가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에게는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75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을 상기시키며, 현재화시키는 주간 부활 날이며, 역시 시간의 의미를 계시하는 날이다. 주일은 우주의 주기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자연 종교와 인간의 문화는 우주의 시간 주기에 의해 시간을 따르려 하고 있고, 때로는 끝없이 돌고 돈다는 신화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이와 다르다. 주일은 부활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시간인 달이나 해(年)나 세기를 마치 화살처럼 가로질러 (관통)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목표를 향햐여 나아갑니다. 주일은 최후의 날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의 예시이기도 하다. 재림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미 선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세상 종말까지 일어날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는 인류를 위한 힘의 원천이 되신 그날에 일어났던 것의 확산이고, 그 표명에 지나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구원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세상이 아무리 지속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마지막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의 시간이 (인간 역사의 모든 단계가) 언제나 희망으로 유지되도록 하는데 불리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해설) 주일은 종말의 예시
시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은, 시간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주의 창조는 시간의 시작이고, 우주의 종말은 그 끝이 된다. 개인의 시간은 출생과 죽음사이의 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종교나 현상주의 사상에 있어서는 시간을 단순한 회전이라고 생각하고, 우주는 영원한 회전이라고 말한다. 시간을 단순히 회전, 즉 돌고 도는 것이라면 시간의 의미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변화이고, 변화는 완전을 향한 변화이다. 변화가 지향하는 완전은 시간의 끝이다.
우리의 시간 생활의 목표는 완전한 변화이다. 그러나 죄악에 기울고 나약한 인간은 이러한 변화의 생활을 하기 어렵다. 여기에 하느님은 사람으로 오시어 삶의 모범을 주시고 마침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완전한 삶의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기리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을 앞당겨 생각하며,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은 우리의 종말과 부활의 예시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주일
76 매주 돌아오는 주님의 날은, 가장 오래된 교회 전통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례주년”이라는 다른 주기가 생겨났다. 사실 주년행사가 과거 사건의 기념을 매년 돌아오는 날이나 절기에 맞추어 기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와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사람들의 생활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때, 그 주년행사가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고 축제의 분위기를 조성하려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토대가 되는 구원의 대 사건들(부활과 성령강림)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축제인 과월절과 오순절에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그 축제들 안에 예언적으로 예시되고 있다.
2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지낸 주년부활 대축일은 매주 지내는 부활 경축에 추가됨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폭넓게 묵상할 수 있게 되었다. 부활축일의 준비로 먼저 금식이 행해지며, 긴 전야제가 거행되고, 성령강림까지 50일 동안 연장되어 부활축일은 “축일 중의 축일”이 되면서 예비신자들의 입문을 위해서 훌륭한 날이 된다. 만일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어버리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 때문에 돌아 가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로마 4, 25; 6,2-11 참조)
빠스카 신비와 긴밀히 연결된 성령강림 대축일은 마리아와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신 사건과 모든 사람에 대한 선교의 시작을 경축하는 것이므로 특출한 (특별히 중요한) 날이다.
77 비슷한 기념의 이치가 모든 전례 주년을 편성하는데 주도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상기기켜 주듯이, 일년 내내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강생과 성탄에서 승천, 성령강림, 복된 희망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까지 펼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구원의 신비를 경축하면서, 신자들에게 주님의 권능과 공로의 보고를 열어주며,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 신비들이 현존케 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그 신비에 접하고 또한 구원의 은총으로 채워지게 하고 있다” (전례헌장 102항)
부활대축일과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가장 장엄한 대축일은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은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고, 우리를 당신 신성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관상하게 된다.
(해설) 전례주년을 따라 사는 생활
시민 생활은 달력에 따라 주간별, 월별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속한 나라의 여러 가지 공휴일, 국경일, 기념일들을 고려하여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시간적 계획들은 전부 현세적 삶에 맞추어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신자들이 시민생활을 하면서도 교회의 전례주년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은 구원의 신비에 초점을 두고, 전례시기의 의미를 따라 은총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례주년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한 기념의 생활이 아니고, 하느님이 현재도 활동하시는 신비로운 구원의 활동에 참여하는 생활이고 교회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이끄심과, 1년 동안의 천상적 생활 계획표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주일은 한 주간 동안의 생활 계획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몸으로는 현세적 생활을 하지만 마음으로는 주일과 전례주년을 따라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78 (해설) 전례주년에 있어 성모님 공경과 성인들 공경의 의미
전례주년을 지내는 가운데 중요한 내용의 순서는 세 가지로 되어 있다.
1.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을 계획하시는 삼위일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 종말까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께 대한 신심이 핵심적 내용이다.
2.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계획에 완전하게 협력하시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고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을 각별히 모시는 신심이 둘째 내용.
3. 성인성녀들에게 대한 신심이다.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마리아를 공경하고,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 공경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 그것은 우리의 신앙 교리와 전례정신을 올바로 이해 못하는 데서 기인된 생각이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모친이라는 각별한 지위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께 완전한 협력을 하시고, 완전한 삶으로 하느님과 최고의 일치를 이루시고,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기에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도 그들 중에는 자기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완벽한 그리스도교적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기에 그들의 모범을 따르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빛내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회 전례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구원의 신비를 조화롭게 드러내고, 그 안에 성모님과 성인들의 공경이 포함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지상에서 전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79 주일은 전례주년의 대축일들을 이해하고 경축하는데 자연스럽게 표본이 된다. 그 축일들의 가치는 그리스챤 생활에 있어 지대한 것이어서 교회는 비록 이 축일들이 평일에 해당되더라도 신자들에게 미사 참례의 의무와 휴식의 준수 의무를 제정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교회법 제1247조).
이 의무축일들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고, 이 축일들이 교회 전통 속에 얼마나 뿌리박고 있는지, 더욱이 시민법의 지지를 얼마나 받고 있는지를 감안하여 그 수는 달라졌다.
현재의 교회법과 전례규범은 나라마다 특별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각 주교회의에서 의무 축일의 수를 줄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사도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그런 경우에 주님의 공현 대축일이나, 주님의 승천 대축일, 또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같은 주님의 신비를 거행하는 축일들은 전례규범에 따라 주일로 옮겨 신자들로 하여금 그 신비를 묵상하는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사목자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주간에 거행되는 다른 중요한 축일미사에도 참례하도록 권장할 것이다.
(해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생활
전례력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전례주년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돈독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전례력을 따라 살 때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게 되고, 현세적 삶을 축복된 삶이 되도록 하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들은 교회 전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전례의 뜻을 모르면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만다.
80 어떤 한 지역에 있어 고유한 민속적 또는 문화적 전통이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 정신에 이질적인 요소를 혼합시켜, 그 정신을 변질케 하여, 주일과 전례적 축일의 경축을 침해할 때, 그러한 환경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목적 문제로 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그리스도의 복음과 배치되는 점을 배제하도록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에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어렵지 않게 일치하는 가치들이 흔히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정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문화와 특히 민속신앙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을 구별하여 보호하는 판단과 전례적 거행, 특히 주일과 대축일의 거행에 지장이 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유리하도록 하는 것은 사목자들이 노력할 일이다.
결 론
81 전통이 우리에게 전해준 영성적 사목적 풍요는 참으로 크다. 모든 의미와 그와 연관된 모든 것 안에 있는 이 풍요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종합이고,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바로 사는 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님의 날을 준수하는 것이 왜 교회의 특별 관심사가 되는지 그리고 왜 교회 규범 안에 중요한 의무로 존속하게 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일의 준수를 하나의 계명으로 생각하기 전에, 그리스도교적 생활 내면에 있는 필요성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주일의 준수는 참으로 중요하다. 모든 신자들은 주일 성찬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례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에 완전하게 참여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만일 하느님께 올려야 하는 흠숭(경배)이 성찬을 통하여 완전하게 실현된다면 그것은 신자 공동체 주일 집회에 특별한 효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이 공동체는 부활하신 분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공동체이며,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한 구원의 성사의 샘과 같이 당신 말씀의 빛과 당신 몸을 양식으로 주시려고 공동체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 샘에서 솟아 나오는 은총은 인간과 삶과 역사를 새롭게 한다.
(해설) 주일을 지키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교회가 20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주일의 전통을 수호하고, 지켜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일을 통해서 영성적으로나 사목적으로나 받는 은혜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고, 주일이 아니면 달리 받을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 총수의 30% 만이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82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적 유인(誘引)에 대처하려면, 강한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일을 지킴으로써 따라오는 인간적 가치의 유산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의 문화는 휴식과 자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오락의 형태로 유도하는 것을 방임하고 있다. 확실히 그리스도인들도 매주 휴식의 날을 즐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주일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유일한)과 고유성을 깊이 인식하고, 주일에는 자신과 전 인류의 구원을 경축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일이 기쁨의 날이고 휴식의 날이라면 이는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해설) 주일을 지킬 때 건전하고 축복된 삶이 가능하다
83 이렇게 이해되고 생활화된 주일은 다른 날들의 혼(anima)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리게네스는 다름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주님의 날 안에 있고 언제나 주일을 거행하고 있다”
주일은 진정한 학교이며, 교회 교육의 지속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현실적 사회 상황에 있어서는 대치될 수 없는 교육방법이 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분열과 문화의 다원주의로 강한 특징을 띠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신앙적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시련을 겪게 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있어서 주일날 신앙적으로 형제들을 다시 만나고 형제적 사랑의 선물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인 힘(도움)이 되는 것이다.
(해설) 주일은 현세적 도전에 맞서는 날이다
84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을 지원하도록 된 주일은 자연 신앙의 증거와 선포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주일은 기도와 친교와 기쁨의 날로서, 사회 전체에 삶의 활력과 희망의 근거를 확신시키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일은 신앙의 선포가 된다. 그것은 부활하신 분이고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사셨던 시간이 우리의 환상의 무덤이 아니고, 오히려 언제나 새로운 미래의 요람(출발점)이며 우리로 하여금 덧없이 지나가는 삶의 순간을 영원한 씨앗(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예고한다.
주일은 앞을 바라보라는 초대와도 같다. 이 날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주님, 오소서“ (Maranatha) 하고 외치는 날이다. 이 희망과 기대의 외침 속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인간의 희망을 간직하고 또 지켜간다. 그리고 주일에서 주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빛을 받아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의 주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해설) 주일은 증거의 생활을 촉진시키는 날이다
삶을 통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과 하느님을 증거해야 한다.
85 성령께서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부활사건을 현실화하고, 또 그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준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과 형제들에게 우리를 한 몸과 같이 긴밀히 일치시켜 주시고, 우리의 신앙을 되살아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하시는 내적 선물이시다.
성령께서는 매일 교회 안에 끊임없이 현존하시면서, 당신의 풍요로운 은혜를 예측할 수 없는 방법과 너그러운 방법으로 베풀어주신다. 그러나 매주 부활 경축을 위해 모이는 주일에 교회는 특별히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심을 열렬히 바라고 있다.
(해설) 주일의 성화를 위하여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줄기에 매여있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요한 15, 4-6)고 하신 말씀 중에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주님 안에 성령께서 작용하시는 신비를 우리는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을 통해 신앙을 완성하려면 성령께 대한 믿음과 도움을 청해야 한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도 바로 성령께도 해당되는 것이다. 오늘까지 교회를 이끌어 주시고 교회 안에 살아 계신 분도 성령이십니다. 교황께서 이 교서를 발표하신 것도 성령의 이끄심이라 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신앙이 확고해야 하고, 회개로 깨끗한 양심을 회복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가 따를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신다.
86 성모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심점을 조금도 훼손하시지 않고 교회가 지내는 주일마다 현존하고 계신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비 자체가 그것(현존)을 요구하고 있다. 주님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주님의 날이며 교회의 날인 주일에 어찌 현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일 모임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들은 성모님께 눈을 돌려 바라보면서 성모님에게서 마음으로부터 그 말씀을 간직하고 묵상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루가 2,19)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를 성부께 봉헌하며, 자기들의 삶을 함께 봉헌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그들은 성모와 함께 Magnificat의 말씀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아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 이 Magnificat은 가차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은혜를 노래한 것이다.
한 주일에서 다른 주일로 순례하는 백성은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성모님의 전구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께 바치는 교회의 기도를 특별히 힘있고 효과적인 기도가 되게 한다.
(해설) 성모님께 대한 의탁
교황은 이 교서를 끝맺으면서 신자들이 진심으로 이 교서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실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모님께 의탁하신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로서 언제나 교회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위치에 있지 않으시지만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고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계신다. 우리에게 어머니로 계시고 완전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신앙을 보살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주일에 모일 때 성모님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87 얼마남지 않은 대희년은 우리의 영적 사목적 책임을 심화하도록 촉구합니다. 바로 그것이 대희년의 참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해와 이 특별한 때는 지나갈 것이고, 다른 희년과 다른 주년 대축일들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매주 ‘축일’로 지내는 일반 주일은 끝없는 주일까지 교회의 순례 시간을 이어가기 위하여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주교들이나 사제들은 이 거룩한 날 (주일)의 가치가 언제나 더 깊이 이해되고, 실현되도록 신자들과 함께 끊임없이 노력해 주어야겠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열매를 맺게 할 것이며, 일반 사회 전체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매주 부활을 기념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며, 구원의 복음 선포자로서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라며, 또한 보다 능동적인 사람의 문화 건설자가 되기를 바란다.
(해설) 결론과 당부
이 교서 발표의 동기
① 당신의 오래된 사목적 경험에서 오늘의 주일의 실태를 우려하게 되었다는 것.
② 주님의 강생 2000년과 대희년을 앞두고 교회 쇄신과 반성의 차원에서 주일의 문제는 재검토되어야 하겠다.
③ 대희년을 준비하는 1998년 성령의 해를 맞이하여 교회의 생명력이신 성령의 감도로 주일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 교서를 통하여 이에 대한 사목적 노력을 당부하고 있다. 어쩌면 교황님은 오늘의 주일 실태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고 계시지만 전체적 표현을 통하여 볼 때 교회의 위기로 판단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해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볼 때에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전 세계 교회 안에서 젊은 교회, 활력있는 교회, 아시아에서 가장 모범 교회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신자의 30% 만이 주일미사에 나오고 있고 냉담자를 제외한 신자 중에 42% 만이 주일미사에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한국 교회도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기본 정신을 회개와 쇄신이라고 한다면 주일의 문제는 희년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해야 하겠다. 외적 성장만 생각하고 내적 후퇴를 보지 못한다면 대희년의 의미도 퇴색되고 밝은 미래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일은 세상 종말까지 신앙의 원동력이 되므로 그 의미와 중요성의 재인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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