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김소월
- 슬픔과 한의 민족 시인 -
덕향문학 편집국
김소월 ( 출생 1902년, 사망 1934년), 한국 현대 시인의 대명사. 그는 명실 공히 한과 슬픔으로 덧난 우리네 민중의 상처를 보듬어 안은 민족 시인이다.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인 『진달래꽃』은 많은 유·무명 출판사에서 숱한 판본으로 거듭 출간된다. 그의 시집은 마치 판매 부수가 공식 집계되지 않는 성경과 마찬가지로 세월과 무관한 이 땅의 베스트셀러다. 김소월은 “서구(西歐)의 데카당적 시상(詩想)과 이국적(異國的)인 언어 형식(言語形式)만이 풍미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와 “토속(土俗)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民謠風)의 리듬 속에 동양(東洋)의 심상(心象)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삶의 갱생을 부르짖은 경륜가가 아니었다. 조만식 등 몇몇 민족 지도자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흠모한 소지식인에 불과했고, 또 당대의 표준적 생활 수준으로부터 그닥 벗어나지 않았던 한 사람의 농민, 한 사람의 식민지 잔맹(殘氓)에 불과했다.”변방의 이름 없는 소지식인, 얼치기 농민, 식민지 잔맹에 지나지 않던 이 젊은이, 저 북녘의 소도시에서 신문사 지국을 꾸리며 비관과 술로 서서히 생명의 불꽃을 연소시킨 이 평범한 젊은이가 어떻게 “우리 시대의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민족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평론가 송희복은 그 비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우선 민족의 토속어·토착어를 가림새 있게 시적으로 승화하는 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지탱해 온 민족적 정서, 민족적 심정의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는, 즉 1920년대 우리 시단을 지배했던 생소한 외래적 풍조에 반(反)한 토착적 감수성을 계발하는 데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뿐이 아니다. 비록 그의 몸이 민족이란 제단 위에 꽃다운 순교적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지만, 그의 넋은 그 어느 저항 시인보다도 동시대를 뼈저리게 상심하고 동시대 삶의 현실에 비통해 했다는 사실을 텍스트(시)로써 결정적으로 증명해 줄 만큼 저항적인 열정을 머금고 있었다.
송희복, 『초혼』(솔, 1995) 해설
1934년 12월의 어느 날, 산자락 여기저기에 널린 무덤 주변을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그는 간략한 성묘를 마친 뒤 무덤에 뿌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무덤가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남자는 허청거리며 산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장에 들러 아편을 구했다. 이윽고 서둘러 귀가한 그는 아내와 함께 밤 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는 아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장에서 사온 아편을 삼켰다. 이튿날인 1934년 12월 24일 아침, 그 남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유장한 슬픔과 한의 시편들을 빚은 소월(素月)은 이렇게 서른두 해의 짧고 고단한 삶을 마친다. 전통 가락과 설화, 그리고 민족의 정한을 담은 김소월의 시편들은 오랫동안 우리 민중의 시름을 달래주며 널리 애송된다.
김소월은 본명이 정식(廷植, 1902~1934)으로, 1902년 9월 7일에 태어난다. 출생지는 평북 구성군 곽산면 남서동인데, 그 곳은 일찍부터 공주 김씨들이 백여 호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소월은 정주의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김성도는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에 음식 선물을 말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에 나섰다가, 그것을 빼앗으려던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폭행을 당한다. 말 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온 그의 아버지는 한 달 가까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깨어난다. 그러나 이후에 정신 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지낸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구석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아버지를 보며 자라야 했다는 것, 이런 것은 소월의 운명에 깃들인 어둠의 원초였다. 어른이 되면서 나타난 김소월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폐쇄적인 내향성은 이런 어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김소월의 유년기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일로 숙모 계희영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학문에 눈을 뜬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언문을 깨쳐 고대 소설과 설화들을 탐독한 계희영은 그가 만 세 살 되던 해에 공주 김씨 집안으로 들어온다. “신부인 나는 큰 머리를 하고 은봉채를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개구멍 바지를 입고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며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새색시 앞으로 다가앉으며‘야, 새엄마다.’하고 반색을 했어. 사내아이는 치맛자락 가까이 다가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옷도 한 번 쓸어보고 종일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라고 숙모 계희영은 김소월과의 첫 만남을 회고한다.
이후 그는 틈만 나면 숙모한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댄다. 성격이 활달해 종가 살림살이를 떠맡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인제부터는 자네가 우리 갓놈에게 이야기를 실컷 좀 들려주게. 나는 이야기하는 재질도 없고 또 할 말도 없어.”하며 아들을 동서 계희영에게 떠맡긴다. 혼인한 직후부터 숙부가 고향을 등지고 외지를 떠도는 바람에 소박맞은 것처럼 혼자가 된 숙모는 틈만 나면 찰싹 달라붙는 조카에게 「심청전」·「장화홍련전」·「춘향전」·「옥루몽」·「삼국지」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억력과 관찰력이 아주 좋던 김소월은 숙모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는 것에 재간을 보인다.
집안을 이끌던 어머니와 그에게 옛날 이야기와 민요를 들려주던 숙모, 어릴 적의 이런 가족 배경은 남성인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혐오와 더불어 나중에 김소월을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시 세계로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어릴 적에 숙모한테서 들은 갖가지 이야기는 그의 문학적 자양이 되기도 하는데, 평안도 박천 진두강 언저리에서 살던 오누이가 계모의 학대 때문에 죽은 뒤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를 담은 「접동새」 같은 시는 바로 숙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버지가 폐인이 된 바람에 김소월의 교육은 광산을 경영하던 할아버지가 책임진다.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힘쓰던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한다. 오산학교에서 김소월은 숙모에 이어 그의 두 번째 문학 스승이 되는 김억을 만난다. 그는 김억의 감화와 영향을 받으며 시 창작에 몰입한다. 이윽고 『창조』 동인이던 김억의 소개로 그는 1920년 3월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適)」·「무과(無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岡)」 등 5편의 시를 발표해 문단에 나온다. 그는 곧 이어 『학생계』 7월호에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등으로」를 발표해 자신의 문학적 자질을 확인하게 된다.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 졸업할 때까지 『개벽』에 시 「엄마야 누나야」·「봄밤」·「진달래꽃」·「개여울」·「먼 후일」과 소설 「함박눈」 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이듬해인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상과대학에 다니지만, 9월 들어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짧은 유학 생활을 접고 돌아온다. 귀국 뒤 잠시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1925년에 시집 『진달래꽃』을 펴낸다. 이 시집에 나오는 시편들은 거의 다 오산학교에 다닐 때 씌어진 것이다. 김소월의 시편들에 나타난 민요적 서정성, 한과 슬픔의 정조, 설화성 등은 이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24년 그는 상속받은 전답을 팔아 식구들을 이끌고 처가가 있는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다. 그는 거기서 『동아일보』 지국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 배포와 수금 등 경영을 도맡는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없고 처세에 서툴러 곧 파산 지경에 이르고, 생계를 위해 어울리지 않게 고리 대금업에도 손을 대지만 다시 실패하고 만다.
문학도, 생활도,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도 놓아버린 김소월은 술에 기대어 세월을 보낸다. 술꾼으로 허송 세월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자, 문중에서조차 그를 ‘불량자’로 낙인찍고 등을 돌린다. 결국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쳐버린 김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삼키고 서른두 해의 짧은 삶을 스스로 마감한다.
『진달래꽃』
문단이 카프가 몰고 온 바람 앞에서 떠들썩할 때, 한쪽에서 묵묵히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정서를 빚어내던 시인 김소월이 1925년 그 동안 쓴 작품들을 엮어 시집을 낸다. 그는 이 시기의 여느 작가들과 달리 서구 사조의 모방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색채와 목소리를 낸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 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전문, 『개벽』(1922)
시집의 표제로 삼은 「진달래꽃」은 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별이 처절할 만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된 시다. 가는 님을 잡지 않고 고이 보내드린다거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린다는 것은 어느 서구 유행 사조도 흉내낼 수 없는 한국식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이별의 표현법은 「진달래꽃」 외에도 「못 잊어」·「예전에 미처 몰랐어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님의 노래」· 먼 후일」·「초혼」·「왕십리」·「산유화」·「엄마야 누나야」 등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작품에서 계속된다. 김소월이 남긴 시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전쟁으로 끊임없이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되는 우리 민족 역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먼 뒷날까지 많은 사람에 의해 애송된다.
그의 전반적인 작품 경향은 전통 시편들인 「정읍사」·「가시리」와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님과의 사랑·이별·한 등을 향토 냄새가 나는 언어와 민요적인 율격에 담아낸다. 이 때문에 주옥 같은 시편이 많음에도“유교류의 휴머니스트”라든가 “과거 지향적 수동주의”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소월 시에서 언뜻 비치는 유교풍이나 과거 지향은 낡은 도덕이나 규범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님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기꺼이 보내주겠다는 융통성 있는, 즉 현대적 자유가 부여된 복고주의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또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 노래」 외에 연대 미상의 작품 「봄」·「남의 나라 땅」·「전망」·「물마름」·「옷과 밥과 자유」·「가을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을 보면 거기에는 민족적 저항 의식이 은근히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가운데 빼앗긴 땅의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이 눈에 띈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 가지런히 / 벌가의 하루일을 다 마치고 /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 즐거이, 꿈 가운데. //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 동이랴, 남북이랴, /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 물결뿐 떠 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 한 걸음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 온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김소월의‘한’에는 성장 배경과 고단한 삶에서 오는 우울, 그리고 시인이 말하듯 “남의 나라 땅”에서 사는 서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김소월의‘한’은 그를 따라다니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허무 의식과 슬픔에서 연유한 바가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도 연결된다.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죽기 얼마 전 스승 김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면서 김소월이 마주친 허무의 깊이를 가늠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 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김소월이 김억에게 보낸 편지(1934) ― 이어령, 『한국 문학 연구 사전』(우석출판사, 1990) 재인용
김소월을 단지 임과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서정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 식민지 상황에 놓인 조국 현실에 대한 엄혹한 인식을 담고 있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은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인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에 발표한 「상쾌한 아침」 이라는 시에서도“심어서 자라는 꽃도 없고 메꽃도 없”이 “다만 되는 대로 되고 있는 대로 있는 무연한 벌!”을 노래한다. 이 “무연한 벌”은 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가혹한 수탈로 거덜나버린, 그래서 마치 주인 없이 버려진 땅처럼 피폐해진 일제 강점기의 조국 현실을 상징하고 있음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김소월이 청승스럽게 ‘사랑’ 타령만을 늘어놓은 시인이 아니라는 게 증명된다고 하겠다.
그는 저항 시인은 아니었지만 식민지 상황을 파악하는 안목과 현실 인식을 갖고 나라 잃은 설움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김소월은 ‘임’과 ‘사랑’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갖고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소지식인의 풀 길 없는 울분과 희망 없음을 노래한 시인이다. 이런 뜻에서 김소월을 가리켜 “그는 옷과 밥과 자유 없는 고향 상실의 시대에 원초적인 그리움과 정서적인 합법화를 통해서 인간 회복과 민족 회복을 호소한 우리들의 귀한 터주 시인의 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유종호의 평가는 곱씹어볼 만하다.
김소월의 많은 작품 몇 편을 편집하여 탑재합니다.
< 진달래꽃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못 잊어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오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어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뜨리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나겠지요?
< 산유화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개여울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먼 후일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첫 치마 >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해 다 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도 감은 첫 치마를
눈물로 함빡히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 가는 길 >
그립다 말을 할까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그리워
저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봄바람 바람아 >
봄에 부는 바람아,
산에, 들에, 불고 가는 바람아,
돌고 돌아 - 다시 이곳,
조선 사람에
한 사람인
나의 염통을 불어준다.
오 - 바람아 봄바람아,
봄에 봄에 불고 가는 바람아,
쨍쨍히 비치는
햇볕을 따라,
인제 얼마 있으면?
인제 얼마 있으면오지
꽃도 피겠지!
복숭아도 피겠지!
살구꽃도 피겠지!
< 무덤 >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 저기,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내 넋을 잡아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첫댓글
봄이 오면
진달래꽃이 핍니다.
詩 진달래꽃을 읊조립니다.
그리고 시인 김소월 님을 생각합니다.
편집국에서 준비한 문학특강 자료입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기를 빕니다.
봄이 오면 부르는 소리...
나를 잡아 끄는 소리가
여기에 있었네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복습의 기회를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