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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 이렇게 가르쳐라 !!
🟫 광해군에서 병자호란까지
*️⃣ 이재익
*️⃣ [1] 왕위의 불안정성
명종 무후無後)에 덕흥군 말자가 계승하여 선조 임금이 되었다.
의인왕후 박씨가 무자하고 선조 13명 서왕자(庶王子) 중에서
공빈 김씨 소생 광해가 총명 유공한지라 세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조의 명운이 풍전등화 같아서
황급한 길에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로 나누어 파천(播遷)하니
부왕은 의주에서 명의 영토를 바라보고
세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군분투하여 독전하니 공이 많았더라.
명(明)이 부자를 교묘하게 경쟁시키고 부왕(父王)은 아들(광해군)을 미워하였다.
선조 6월 22일(1592) 의주 도착하여 비통한 심정으로 詩 한 수를 지었다.
國事蒼黃日 誰能李郭忠 (국사창황일 수능이곽충)
-나라는 갈팔질팡 어지러운데 뉘라서 나라건질 충신이 될꼬
去邠存大計 恢復杖諸公 (거빈존대계 회복장제공)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요, 회복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나니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통곡관산월 상심압수풍)
-국경이라 달아래 소리쳐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마음 상하네
朝臣今日後 尙可更西東 (조신금일후 상가경서동)
-신하들아 오늘이 지난 뒤에도 또 다시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선조 51세에 19세 계비 인목왕후를 맞이하여 영창대군을 낳자
세자 교체를 시도하니 영의정 유영경이 기세하였으나
정인홍 이이첨 등 반대가 거세어 이루지 못했다.
*️⃣ [2] 중립 실리외교
1618년, 명이 요청하여 강홍립은 13,000명으로 출병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 의리를 지켰으나 나라가 위태로운 지라
"형세를 판단하여 향배를 잘 택하라" 는 밀지를 내렸다.
사르흐 전투에서 명군이 후금에 대패하는 것을 보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후금은 강홍립 등 장수 10여명만을 잡아 두고
조선군은 모두 돌려보내주었다.
명은 조선을 의심하여 사신을 자주 보내와 감시하였다.
이러한 강홍립의 처신은 광해군의 중립적 실리적 줄타기 외교라
후금과는 전쟁이 없었다.
청에 대한 정보라인을 긴밀히 가동하여
전란을 피한 것,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광해군의 치적이다.
*️⃣ [3] 긍정적인 내치
광해군이 이룬 대동법, <<동의보감>> 반포, 5대사고 정비 등과
대외 정책은 탁월했건만
외교는 내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왕권 강화 위해 무리하게 시도했던 궁궐 재건과
대북파 실세들이 주도한 '폐모살제' 등으로 당시 사대부들에게 '패륜아'로 낙인찍혔다.
말년에 대외 정책을 둘러싸고 대북파와의 공조가 깨져
훈련도감 수장(이흥립)마저 반정군에 가담하였으니
어찌 몰락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조 이래 붕당 정치의 흐름 속에서
붕당 갈등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파국으로 갔다.
*️⃣ [4] 폐모살제
광해군은 17년간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제15대왕으로 즉위했다.
친형 임해군(臨海君)은 난행과 야심으로 명을 재촉하였다.
처음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중용하여 어진 정치를 행하였으나
차츰 임진왜란시에 의병으로 공을 세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
북인, 대북파 정권에 둘러싸였다.
보좌진은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많았건만 소인배들도 끼어서
서양갑 등 명문서자들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 김제남(인목대비 친정父)을 연루에 옳아 넣어서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에
김제남, 능창군(조카) 의창군(이복동생)도 화를 당했다.
*️⃣ [5] 안타까운 시들
명나라에서 온 무인 조도사(趙都司)가 사회상을 읊었으니
光海亂政譏詩(광해난정기시)라 한다.
맑은 향기의 맛좋은 술은 백성들의 피요
기름진 진수는 백성들의 기름이다.
촛물 흘러내릴 때 백성들의 눈물도 방울져 내리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성도 높다.
[원 문]
淸香旨酒千人血 청향지주천인혈
細切珍羞萬姓膏 세절진수만성고
燭淚落時人淚落 촉루낙시인루락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폐모에 반대하다 북청으로 귀양간 이항복은
시조 한 수를 남기고 배소에서 죽었다.
철령 높은 고개 자고가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 [6] 김상궁
김상궁(김개똥 ; 金介屎)은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대 최악인(最惡人)이다.
<<광군일기>>의 광해군 5년 8월11일자에
'이이첨과 김상궁 개시에 관한 비교 평가' 에는
그 둘의 비슷한 점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역적토벌론을 과격하게 주장한 것.
둘째, 벼슬 욕심을 줄이되 실권을 최대한 갖는 것.
-그래서 이이첨은 영상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김상궁은 희빈이니 귀빈 자리 같은 데 욕심을 두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실익은 마음대로 챙긴다는 점.
셋째, 악역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그 일에 대한 공은 자신이 차지하는 것 등이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의 독살에 간여하면서,
광해군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 김상궁을 이귀가 포섭해
광해군에게 들어간 첩보를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김상궁 포섭은 인조반정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
*️⃣ [7]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그러나 어이하랴, 아, 인조반정이여!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신경진, 최명길, 장유, 심기원 등
서인(西人) 일파가 모두 일어서서
선조 5남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綾陽君, 倧)을 인조로 옹립했다.
* 폐모살제, * 궁궐 건설' 등 토목 공사 강행',
* 후금과 밀통해 명을 배신한 점 등
세 가지를 들어서 실정을 자행한 폭군으로 매도했다.
서인이 집권한 후에 의도적으로 폄훼하였으니
광해군 시대의 실록인 <<광해군 일기>>는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의 내용이 다르다.
폐주는 ‘광해군’ 봉작(封爵)만 있고 묘호(廟號)가 없어서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올리지도 못했다.
운 좋게도 19년간 위리안치에도 67세의 천수를 누렸다.
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반정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 [8] 강홍립과 유몽인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한 후에
강홍립(姜弘立) 장군은 어찌 되었는가?
억류되었다가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에서 화의(和議)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하자, 단식하여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었느니라.
<<어우야담>>의 저자, 당대 문장가로 풍미한 유몽인(柳夢寅)은
왜란 때 광해군의 작은 정부 '분조(․分朝)' 에서 활약했다.
대제학에 경세가였지만, 광해군이 난맥상을 보이자.
초개같이 벼슬을 버리고 백이숙제 처럼 은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후 유몽인은
폐주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킨 역적으로 처형됐다.
아 ! 인재를 이렇게 희생시켜도 되는 것인가?
'흰 머리에 젊은 태도로 꾸민다면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
그가 읊은 상부사(孀婦詞)는 유명하다.
후일 복권시 정조가 평했다.
“단종 때의 김시습이 웅장한 설악산이라면
광해군 때의 유몽인은 화려한 금강산과 같다”
살고 죽음이 다르고, 강개하고 조용함에 차이가 났으나
정성다해 굳굳한 원칙을 지켰음이 같았나니.
*️⃣ [9] 정인홍, 이이첨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은 선조의 양위를 집요하게 주장하다가
소북의 유영경에게 탄핵되어 유배길에 올랐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곧 대북정권의 영수가 되어 광해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곽재우, 김면 등과 더불어 경상우도를 이끄는 의병장,
산림출신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이첨 또한 대단한 배포를 지닌 인물이었으나,
권신 이극돈의 후예라는 무거운 짐이 있었다.
정인홍을 통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광해군에게는 일등 공신들이었지만,
동시에 폐모살제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둠으로써
광해군 정권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 [10]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인조 5년)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미봉(彌縫)되었다.
인조반정후 서인정권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의 명(明)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은밀히 원조했다.
후금은 명 본토로 진입하기에 앞서서
배후 위협을 제거하고자 조선을 침략했다.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후금의 침략을 종용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정묘조약(丁卯條約)을 강요했다.
‘양국은 형제국, 조선·명 적대관계는 원치 않는다’
종실 원창군을 인질로 잡고 철수했다.
*️⃣ [11]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청이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 세폐(歲幣)의 증가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척화파 의견에 따라 인조는 사신을 인견하지도 않고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려 전의를 다졌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켰으나
용골대 마부태군은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세자비․ 원손(元孫) 등 종실(宗室)은 강화도로 피난하고
인조는 길이 막혀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농성하였다.
청군 20만이 조선 군사 1만 3000명을 포위했다.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필사적인 논쟁을 거듭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농성 45일 만에 항복하였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항례를 하고,
청태종의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임진왜란 끝난 지 28년, 정묘호란이 끝난 지 9년 후인데도
무엇하나 방비한 게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한심한 역사였다.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과 척화파 3학사 ;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가 인질이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과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된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봉림대군이 당시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할 때 지은 시이다.
<瀋 陽 吟 (심양음 ; 심양에서 읊은 시)>
봉림대군
暗推世事正堪悲 암추세사정감비 / 세상 일 추리하면 정말 서글픈 거니
貴賤同歸一土邱 귀천동귀일토구 / 귀천이 다 함께 흙으로 돌아가네
漢武玉堂塵已沒 한무옥당진이몰 / 한 무제의 옥당은 이미 티끌 묻히고
石崇金谷水空流 석숭금곡수공류 / 석숭의 금곡장엔 물만 그저 흐르네
光陰易旦還爲夕 광음이단환위석 / 광음은 아침 바뀌어 도로 저녁이 되고
草木逢春直到秋 초목봉춘직도추 / 초목은 봄 만나면 곧바로 가을 되네
處世若無毫末善 처세약무호말선 / 처세에 조그마한 선행도 없다면
死將何物報宣侯 사장하물보선후 / 죽어서 무엇으로 선후에게 보고할꼬
병자호란시 신하 이경여가 심양에 끌려가서 귀국을 가슴 졸여 기다리며 읊은 시가 있다.
< 秋夜 有感 (가을밤 감회) >
李 敬 與
詩從枕上得 시종침상득 / 시구는 베개 위에서 얻게 되고
家向夢中歸 가향몽중귀 / 집은 꿈속에서나 돌아가 보내
虫語天機動 충어천기동 / 벌레 소린 천기가 움직이는 것이고
鐘聲曉漏稀 종성효루희 / 종소리는 효루(새벽 물시계 소리)처럼 드문드문 하구나
簾疎看落月 렴소간낙월 / 주렴이 성글어서 지는 달 보고
霜冷晩秋衣 상냉만추의 / 서리 기운 차가워서 가을 옷을 끌어 덮었네
知有前期迫 지유전기박 / 앞으로의 기약(귀국)이 박두한 걸 알기는 하나
翻疑事却非 번의사각비 / 일이 도로 틀어질까 도리어 의심되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고,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하여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12] 임경업(林慶業 ; 1594~1646)
철저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으로 백마산성을 지켰다.
2만군사로 국경을 지키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묵살되니 군사 없는 장수에 불과하였다.
명군의 총병(總兵)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였는데
명의 졸장이 장군을 청에 넘김으로써 청의 포로가 되었다.
청태종이 충성심에 감복하여,
‘남의 충신 대접이 내 충신 대접’이라며 대우하였다.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에 연루되었다고
김자점이 누명(陋名)을 씌워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장살(杖殺) 당했다.
인조는 탄식했다.
"아깝구나!, 적의 손에서도 죽지 않은 몸이 제나라 손에 죽었구나."
숙종 때 복관(復官)되어, 충주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 [13]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
김상헌은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삼학사 등이 인질이 되어
심양에 끌려가 4년간 고초를 겪고 돌아왔다.
김상헌이 인질이 되어 갈 때 읊은 시조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 만은
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 불화로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스스로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강화회담에서 활약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인조가 소현세자빈을 처형할 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를 용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최명길)의 주화론적 신념과 양명학(陽明學) 존중사상으로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렸다.
17세기 최대의 역사 라이벌(김성한과 최명길)은
이역 땅에서 포로의 몸으로 다시 만나서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기회가 됐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함이여....’
‘주화론이 진정 나라를 위한 길이구나....’
'두 세대의 좋은 우정을 찾고, 백년 묵은 의심도 풀리도다.'
'그대 마음 돌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 라며 절의를 칭송했다.
이들은 화해했건만 후손들은 그 명암이 뒤바뀌었다.
주화파(실리론) 최명길의 후손은 소론이 되어 정치적 힘을 상실한 채
강화도에서 양명학파를 형성, 외로운 현실비판의 길을 갔다.
반면에 척화파(명분론) 김상헌의 후손은 노론이 되어 세력을 잡고
훗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까지 이어졌다.
조선이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한 사회였음이다.
*️⃣ [14]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빈
병자호란시에 소현세자는
봉림대군 등 186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갔다.
포로 노예시장에서 돈이 있으면 속환(贖還)할 수 있음을 알고
강빈은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소현세자는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했다.
인조는 이런 강빈과 소현세자에 대하여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강빈의 부친 강석기 상(喪)때 심양에서 잠시 귀국한 세자빈이
빈소에 왕곡(往哭)도 못하게 하는 가혹한 조치를 취하였다.
소현세자 부부가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심양관에는 4,700석이나 되는 곡식이 남아 있었고
세자는 천주교와 서양의 각종 과학기구․서적들을 전래했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정치권력을 두고 부자간에 비정이 극에 달했다.
*️⃣ [15] 삼전도비를 쓴 이경석과 송시열
외적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석조물을 세운 일이 두 번 있었다.
당나라 소정방 장군이 백제를 함락시킨 후 부여에 세운 평제탑과
조선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삼전도에 세운 대청황제 공덕비다.
삼전도비는 당대의 최고 문장가인 백헌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인조가 이경석에게 간곡히 종용하였다.
비문 내용은 조선의 과오와 무례를 용서한 청태종의
공덕과 자애로움이 넘쳐흐른다고 했다.
이경석과 우암은 모두 영의정까지 지낸
당대의 최고 석학이요, 정치인이었다.
이경석은 송우암의 공격에 태연하게 대처했다.
이경석에 대한 송시열의 공격은 배은의 흠이 되고 말았다.
훗날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를 찬하는 글에
두 사람을 ‘봉황과 올빼미’에 비겨 송우암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려울 때 서로가 이해하고 과거지사를 허물하지 않음이 인간의 미덕이다.
송우암은 그 점이 부족했다.
천시(天時)는 불여지리(不如地利)요,
지리(地利)는 불여인화(不如人和)라고 했다.
서로 돕는 인화(人和)는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덕목이다. //
첫댓글 지금다시 한국사를 공부?하는게 가슴에 와닿는다는게 신기합니다 가슴아프고 울분! 200년도 안되는 이야긴데 꽤 멀어보이네요 그시대의 과오가 지금도 행해지는걸 보면 모두다 역사 공부 다시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