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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1-32) 소 닭 보듯 한다.
오늘 함께 읽은 삼하2장 말씀중심으로 <소 닭 보듯 한다.>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소 닭 보듯 한다.’
시골 농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소는 서서 아니면 배를 땅에 깔고 앉아서 목을 약간씩 흔들면서 눈이 졸린 듯, 그 큰 눈을 껌뻑껌뻑 하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데,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으면서 그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그럴 때면 그냥 너무너무 무심하게 전혀 괘념치 않고 그 닭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 정말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관심을 가질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와 닭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내 주변에서 마땅히 나의 일로 채택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무 무심하게 괘념치 않고 있는 상황을 일컬어서 소 닭 보듯 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보면 이렇게 내 자식의 일을 소 닭 보듯 해야 하고 내 남편과 아내의 일을 소 닭 보듯 해야 하고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 닭 보듯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많이 빚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다윗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B.C.1010년 쯤 되었습니다. 주님 오시기 1000년 전 쯤 드디어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전쟁의 패배와 함께 자살하면서, 실질적으로 다윗은 그 사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벗어나자마자 우리가 읽은 1절에 보면 하나님께 자신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이제는 사울 왕이 죽었는데 내가 내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십니다.
그리고 또 "유다 땅 어디로 갑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헤브론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 철저하게 묻습니다. 당연히 유다 땅으로 올라가지요. 제일 먼저 고향 땅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유다 땅은 자기 고향인데 다윗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빠삭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올라갑니다. 이렇게 올라가다 보니 유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 부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고 하는 말에서 시작 되어서 사울 왕이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질투하고 시기하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사울은 이미 죽었고 다윗이 돌아왔고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유다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파가 사울의 넷째아들(사울의 세 아들은 다 죽었고), 이스보셋을 사울 집안의 친척이었던 아브넬 군대장관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다 그쪽 편을 들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했겠어요. 10년 동안 쫓겨 다니다가 사울 왕이 죽어서 이제 유다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는데, 다윗의 마음속에는 어떤 흥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그 오랜 기간의 고통을 다 보내고 이제야 내가 왕으로 등극하는구나."라고 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스라엘 모든 나머지 지파 전체가 다 다윗을 반대하고 사울의 집안에서 사울의 넷째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왕이 죽었으면 왕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 왕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다급한 상황이었을 것이에요. 또 부담이 되었을 것 같고 어떻게 왕권을 수립해 나가야 하는지 그런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황이 어떻게 되나 보세요. 기브온 연못이 있습니다. 이 연못은 적에게 포위를 당해도 기브온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 연못 때문에 5,000명이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는 큰 연못입니다. 요새이면서도 아주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는 것인데 기브온 연못을 차지하려다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고 동족 간에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동족끼리 싸움을 하려고 하는데 너무 민망하잖아요? 그러니까 사울 편에 있던 군대장관 아브넬과 다윗 편을 들고 있는 요압장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편을 갈라서긴 했지만 동족을 향해서 싸울만한 무슨 명분이 있습니까? 마음이 있습니까? 도저히 마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싸움의 전의를 불태우기 위하여 사울 편에 있던 아브넬이 뭐라고 제안을 하는가 하면, 12명씩을 내세워서 장난을 치자고 했는데, 그 장난이 선전(先戰)을 한 겁니다. 앞서서 싸우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이지요. "너, 내 뺨 때려봐."라고 장난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딱 때렸어요. 그리고 이쪽도 "때려봐."라고 해서 때렸어요. 좀 아파요. 그리고 더 때리게 합니다. 어, 좀 아프게 때리네. 더 세게 때려. 서로 오고가다가 에스카레이터가 되는 것이지요. 막 감정이 격앙되는 것 아닙니까? 12명을 내놓았는데 12명이 막 싸우고 머리채를 붙잡고 칼로 찌르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리가 나 버린 겁니다. "저 놈들 죽여라."라고 청군 백군 나누어서 하다가 대표팀끼리 싸우다가. 야구하면 선수들끼리 막 싸우게 되면 관중들이 뛰어 내려와서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12명을 앞세워서 가만히 있는 사람들, 싸우기도 민망해 하는 사람들을 싸움을 위한 흥분을 시켜서 자극을 한 겁니다. 그래서 동족끼리 싸웠는데 다윗 편에서는 20명이 죽고 사울 이스보셋 쪽에서는 360명이 죽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생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 싸움이 시작되고서부터 싸움이 끝날 때 까지 다윗의 얘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몰랐겠습니까? 왕이 되어서 기분 좋다고 아내 둘을 데리고 어디 놀러 갔겠어요? 그럴 리가 없지요. 바로 앞에 너무 대조되지 않습니까? 사울 왕이 죽은 뒤에 ‘하나님! 제가 이제는 유다 땅으로 올라갈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래 올라가라.’라고 했으면 올라가면 되는데, 유다 땅 어디로 가느냐고 또 묻습니다. ‘어느 성읍으로 갈까요? / 헤브론으로 가라.’라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묻는 그런 신앙이 지금 현재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다윗이 마땅히 지금 요압과 아브넬 두 장군끼리 싸움을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앞에 그 얘기를 해놓고 전쟁을 시작하는데, 다윗이 앞장서서 싸웠다는 얘기도 없고 하나님께 물었다는 얘기도 없고, 아브넬과 요압이 나와서 서로 싸우는 거예요. 이 상황을 다윗이 지금 ‘소 닭 보듯’ 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힘이 빠져서? 그날은 특별히 몸살감기가 걸려서? 아니지요.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행동에는 시동이 걸리지 않아요. 하나님께 묻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한 답이 없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바로 내 일로 내 측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소 닭 보듯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도살장으로 끌려가시는 어린 양처럼 빌라도와 헤롯 앞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니 그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인데 당신의 일을 가지고 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람들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당신의 일 자체를 소 닭 보듯 합니다. 이거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헤브론으로 올라가라는 응답을 받고 올라가는 액션을 취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어렵지요.
그런데 여러분! 내일 우리가 보겠습니다마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왕권이 저절로 다윗 아래로 복속이 됩니다. 왕권이 확립되면서 온 나라가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에게로 저절로 굴러 들어옵니다.
참! 신기한 거예요. 손대야 될 때가 있고 안 대야 될 때가 있는데 안 대는 것도 하는 거예요. 일이 저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윗이 마음이 급했어요. 마음이 급해서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게 분명하다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를 반대하는 놈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는 것이라고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왕권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유다 왕이 되었어요. 그런데 다윗 생각에 나라를 갈라먹으라고 하셨겠어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어요.
그러면 마땅히 우리 같으면 액션을 취할 수가 있어요. 자, 왕권을 주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제 가만히 있어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겠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지. 내가 움직여 나가야 되겠어. 내가 무찔러야 되겠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왕권을 주시기로 약속을 했다고 해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고 해서,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고 묻지 않아도 내가 내 마음대로 액션을 취하고 계획을 세우고 뛰어나가도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왕권을 받을 때는 받을 때고, 약속을 받을 때는 받을 때고, 그 다음 날 지나갔으면 그 다음 날은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저께 왕권 약속 받았다고 오늘 내일 그냥 내리 달려서 기왕에 시작된 것, 계획대로 밀고 나가고 내 마음의 원대로 끌고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때,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는데, 물었는데 대답이 없거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지침을 주지 않으시면, 소 닭 보듯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 닭 보듯 하는 동안에, 도저히 모사꾼을 동원해서 나머지 11지파를 다 자기에게 복속시키려고 어떤 계획을 세운 것보다도, 더 기가 막히게 모두가 다 그 다윗의 왕권 아래로 복속되게 됩니다. 내일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저절로.
이 소 닭 보듯 하는 것이 축복이에요.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는 아무 지침도 주시지 않는다면 이것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팔 걷어붙이시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을까요? 마음이 아팠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상황을 이겨내려면 한 가지 마음밖에는 없어요. 마음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왕권을 마음에서 빼내는 겁니다.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 마음에 있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에 담고 내가 마음에 담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담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넬을 향해서 다윗이 칼을 들고 나가게 됩니다. 결국 자기가 다스려야 될 그 백성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자기 백성의 피를 묻힌 왕이 되어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압과 아브넬을 통해서 전쟁이 일어난 게, 나머지 이스라엘 11지파 사람들이 다윗의 왕 됨을 인정해 가기 위한 절차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더 철저하게 왕권을 인정하기 위해서 거쳐야 될 과정으로 하나님이 허락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냥 닭 보듯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겠습니까? 계속 다윗은 이 상황에서 ‘왕이 내 것 아니야. 내가 왕이 되기 위하여 어떤 액션을 취해서 될 일 같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도 않았어. 이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없는 일이다.’라고 내 뱉는 겁니다.
마치 선교회를 시작하신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믿었으므로 목회까지 그만두고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시작하셨다고 해서 이제 선교회의 삶, 선교회의 역사를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생각한대로 끌고 나가도 되는 거냔 말입니다. 아니라는 겁니다. 소 닭 보듯 해야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분은 어떤 점에서 서운해 하신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어떤 점에서 문제제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게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내가 마음이 안타까워서 마음이 좋지 않지요. 선교회의 진행되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데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그때 어떻게 합니까? "선교회가 내 것입니까?"라고 합니다. "만나봐라. 전화를 해봐라."라고 하는 이런 지침을 특별히 주시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욕하면 욕하는 대로, 소 닭 보듯 합니다. 어떨 때는 불평과 원망을 한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 분이 그냥 마음에서 불만이, 불만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이 잘못돼서 그럴 때도 있고, 그럴 때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한 번 지침을 주어 봐라. 가르쳐 주실 때도 있어요. 그러면 행동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계속해서 선교회라고 하는 자체를 빼내고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만 계시면 되지. 최악의 경우 선교회가 이 세상에서 살아진다고 할지라도 내 일이냐? 내 일이라서 시작했느냐? 내가 여기서 밥 벌어 먹자고 선교회를 시작했느냐?"라고 소 닭 보듯 하는 상황이 너무 많은 겁니다. 소 닭 보듯 하고 내 할 일 하는 겁니다. 제 할 일이 뭡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지요. 하나님 모시고 성경 읽고 전하는 것이지요. 그 외에는 소 닭 보듯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뭐, 뭐 해라."라고 하시면 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 닭 보듯 하려면 겉으로는 소 닭 보듯 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는 겁니다. 다윗이 지금 요압과 아브넬의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아무 지침도 주시지 않습니다. 답답하지요. 이게 왕이 되려나? 말려나? 도대체 겨우 10년 참아서 도망자생활 하다가 왕위에 올랐는데 기껏 유다지파, 내 출신지파 한 지파만 나에게 따라 붙으니 애들 말로 정말 창피하지 않겠어요? 애들 장난 같고 부끄럽지 않겠어요? 나머지 11지파에 대해 마음이 꿀꿀하지 않겠어요?
"하나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아니 내가 10년 고생해서 왕위에 올랐는데 이거, 이거." 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왕은 무슨 왕? 내가 무슨 왕? 내 것 아니지. 내 안에는 하나님만 들어오시면 되지."라고 하면서 밀쳐내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분명하더라도 매일 매일 마음에서 그 일을 빼 내는 겁니다.
자, 어떤 직분을 맡고 어떤 일을 합니다. 우리 여름수련회 같은 일을, 해당되는 일을 맡는다면 어떻게 해 나갑니까? 내가 수련회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일을 마음에서 빼내는 겁니다. "그 일이 어찌 내 일인고?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이겠지?"라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모신 하나님께서 하라하면 하고 특별히 지침이 없으시면 그냥 소 닭 보듯 하는 겁니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자식을 쳐다보면서 급한 마음, 걱정스런 마음으로 개입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런 급한 마음, 걱정스런 마음이 생길 때 어떻게 한다고요? 일단 하나님께 돌아서서 십자가 붙잡고 자식에 대해 죽고 제로 됩니다. 제로 되어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지침이 주시지 않는다면 껌뻑껌뻑 소 닭 보듯 합니다. "니는 닭이고 나는 소다."라고.
남편이 사업이 어려워서 쩔쩔 매면서 "당신은 집구석에 앉아서 편하게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 사니까 걱정도 안 되냐?"라고 하든지 하나님이 특별한 지침을 주시지 않으면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껌뻑껌뻑 남편을 향해서 "너는 닭이고 나는 소다."라고 하는 겁니다.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집안 일 무슨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느끼는 평정과 평강을 찾고 유지하고 감사와 기쁨을 회복하고, 그 다음에 아무 지침이 없으면 껌뻑껌뻑 대상을 향해 ‘니는 닭이고 내는 소다.’라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다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만 허락해 주시면 좋겠어요. 보는 것마다 하나님이 ‘쟤는 닭이고 너는 소다.’라고 이렇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내가 뭘 그렇게 나서서 하려고 합니까?
오늘 그렇게 사십시오. 특별한 지침이 없으시면 마음의 소원을 통해서나 상황을 통해서 어디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되는 게 아니라면 모든 게 다 닭이요 나는 소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니는 닭이고 내는 소다. 니는 닭이고 내는 소다.’라고 이렇게 한 번 살아보시지요. 특별한 지침이 없으시면. 하나님께서 다 해나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 붙잡고 모든 것에서 죽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평강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 보는 겁니다. 그래서 특별한 지침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저 하던 대로 가세요. 직장에 가시고 학교에 가시고 가정에서 그저 routine한 일들을 하세요. 그리고 세상을 닭 보듯 해 보세요.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루어 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무런 특별한 지침이 허락되지 않는 것도 그것 자체가 특별한 지침입니다. 소가 닭을 보듯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의 일들에 대해서조차도 그렇게 무심하고 괘념치 않는 그러한 태도로 살아야 할 때가 오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복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