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길 하숙방 사전 모의
1960년 4월 18일 저녁 광주고 3학년 이홍길 하숙방에서 19일 시위를 결의하고 '3.15 부정선거 다시하라' 등 4개항의 요구사항을 정하였다. 이때 참여한 학생은 이홍길, 김선단, 김병욱, 김동운, 홍갑기, 박화부, 조병수, 지부일, 신강식 하성수, 전길만(조대부고) 등 11명이었다.
광주 4.19민주혁명의 물꼬가 터지다.
광주 4ㆍ19민주혁명은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됐다. 19일 오전 10시께 학생들은 약속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선생님 광주학생의 위신을 세워야 할 게 아닙니까!”라며 데모를 감행했다. 광주고생 100여명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으로 나뉘어 시내로 진출, 전남여고·광주여고·광주일고·광주공고·조대부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광주여고생들은 판자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오후 2시 금남로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가득 찼다.
이어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광주학생항일운동 선배를 따르자!’등의 구호와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 곳곳을 행진하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 1000여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총격을 무릅쓰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전남일보 1960년 4월23일∼5월2일‘광주학생 4·19 발자취’에서)
이들은 '학우의 시체를 넘으면서' 애절하게 전우가를 불렀다고 한다.
전우가는‘전우야 잘 자라’라는 군가다.
생을 달리한 전우를 뒤로한 채 계속해서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호가 가사를 짓고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 자라’
‘유정천리’라는 노래는 개사해 불려졌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천리만리 타국땅에 박사 죽음 웬말이냐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선거 웬말이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민주당에 꽃이 피네 자유당에 눈이 오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취재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박정욱기자 jw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