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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침(木枕)은 어디 가고 객(客)꾼들만 설치나
천사(天師) 유품(遺品)의 비기(秘機)
박용덕〈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전라도는 약속의 땅이다.
스승을 만나기 위해, 도덕 회상을 건설하기 위해,
또 무수한 창립 인연들을 만나기 위해 수십 생을 드나들며 예약을 해놓은 연토(緣土)이다.
18세 소년 정산이 전라도에 간 것은 사모님을 모셔오기 위해서이다.
사모님은 누군가?
증산이 천지공사를 할 때 시중을 들던 수부(首婦) 고판례를 말한다.
도군이 처음 전라도로 찾아간 곳은 모악산 원평 송찬오의 엿방이다.
송찬오의 집은 현재 금산면 면소재지 원평 새마을금고 근방으로
학원 마을의 음식점 우리회관의 뒷집으로 최충주의 소유 193-1번지이다.
송찬오는 원불교에서 송적벽(宋赤壁;법명)이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무슨 내용으로 발단되었는지 모르나
그는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친구 김남천과 말다툼을 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떠나가버린 사람이다(대종경 실시품 3).
당시 그의 본가(후원)는 쓰러지고 보천교 흥성 시절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퇴락된 한옥들이 남아 있다.---> --사진 문향허 기자
송찬오는 충청도 사람으로 증산천사의 제자이다.
그는 엿방을 운영하므로 각지 행상을 나가는 엿장수를 통하여
증산 관련 도꾼들의 연락처 역할을 하였다.
송찬오가 도꾼들 세계에 명망을 떨치게 된 것은
증산이 신임하는 첫 제자 김형렬의 집(구릿골 약방)에서
증산 사후 사모님이 천사의 유품을 깡그리 수거해 올 때
엿방에 얼마간 보관할 정도로 촉망받는 종도였다는 사실이다.
증산 사후 그의 제자들은 천사의 유품에 대단한 비기(秘機)가 어려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를 수거한 高부인을 중심으로 교단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송찬오가 유품을 보관할 때
무언가 소중한 것 하나쯤은 빼돌렸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그에 대한 종도들의 기대와 인식은 남달랐다.
송적벽의 목침
이때 빼돌린 유품 하나를 송찬오는 소중히 간직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증산이 화천한지 10주년 되는 기미년 가을(원기4년)이었다.
대종사가 정산의 소개로 원평 엿방에 찾아왔다.
금산사 송대에 거처를 정한 대종사는 미륵전에서 치성을 드리던 스님이 횡사하는 변을 당하자
그의 이마에 「나 여기 왔노라」는 뜻의 열 十자를 긋고 그를 회생시킨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송찬오는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부랴부랴 「짚신 들메고」
영광으로 쫓아가 대종사 앞에 무릎꿇고 제자되길 청원했다.
대종사 그 연유를 물으매 송찬오가 말하였다.
『저는 증산천사님께서 화천하시기 몇 해 전에 입문하였는데,
천사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나는 대리 선생이고 앞으로 큰 선생이 한 분 나면,
동학도는 수운신사께서 다시 오셨다 할 것이고, 야소교는 예수가 재림하셨다고 하며,
부처 믿는 사람은 미륵불이 하생하셨다 하며 다 따르리라」 하시면서
저보고 「영광에서 소식 있거든 짚신 들메고 쫓아가라」 하셨는데
이 늙은 눈구녕이 진작 알아뵙지 못하고 이제사 큰 선생님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고
소중하게 싸왔던 보자기를 풀고 목침을 내놓았다.
『거 무슨 목침이요?』
『내력을 말씀드리자면 사연이 깁니다.
이 목침은 천사님께서 늘 베시던 것인데 묘한 인연으로 제 손에 들어와 깊이 간직하다가
이번 길에 가지고 왔습니다』
목침에 얽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송찬오는 대종사를 진법(眞法)의 대선생임을 믿고 문하에 입참하길 자청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바로 입문하지 못하였다(이상 범산님 이야기).
송찬오가 정식 제자로서 「적벽(赤壁)」이란 법명을 받게 된 것은
대종사가 변산 봉래정사에 머물 무렵이다.
대종사는 증산의 유품에 대해 전연 관심이 없었다.
천사님의 두상의 정기를 홈빡 받았다는 그 목침에 대해 증산교 도꾼들간에 말이 많았다.
천사님께서 「목침이 한 짓 먹는다」는 말을 하였다는 것과
원불교세가 저처럼 대창하는 것은 원광대학교를 지을 때
그 기초에다 목침을 묻은 때문이란 말들을 한다.
어쨌든 송적벽은 대종사가 인도대의에 입각한 도덕만 설할 뿐
천지 공사를 행하거나 개벽 선경을 건설하는 신통 묘술을 행하지 않음에 대단히 실망하고
같이 왔던 친구(金南天)와 크게 싸운 뒤 목침을 도로 가지고 귀가하였으며,
교단에서는 원기13년 평의원회의의 결의에 따라
4월4일자(음)로 그를 「입교 원명부」에서 제명 처분하였다.
眞法의 主人
증산교계에서 목침을 가지고 설들이 한창 분분하므로
한때 교단에서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그 진상을 밝히려 나선 일이 있었다.
송찬오의 엿방 이웃집에는
기독교 장로이며 국의(國醫)라 일컬을 만큼 용한 의술을 가진 영생의원 조공진이 살고 있었다.
송찬오의 집은 명의 조공진의 영생의원(현 우리회관)의 바로 뒷집에 있었다.
송찬오는 원평에서 엿방을 하다가 살림이 어려워져
안암리로 이사하여 도배(벽 바르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1940년경에 죽었다.
이때 그는 얼마간의 돈을 받고 원평 뒷고샅 산밑에 사는 박공우에게 목침을 넘겨주었다.
키가 크고 뚝심 좋은 성격에 의리가 있는 박공우는
증산이 「천하장사」라 할 정도로 힘이 세었고 제자들 중에 가장 청백한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목침을 소유하게 되었어도 별로 덕을 보지 못하고
그의 말년은 교계에서의 활약이 유야무야하였다(원평 이병근, 고병규씨의 증언).
송찬오가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목침은
본시 그 자체가 아무 계교 사량 없고 권능 없음으로 인해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목침의 넋은 증산천사의 화천과 동시에 갔다.
딱한 것은 그 껍데기(목침)에 집착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스승을 망령신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목침의 권능이란 제 망념의 치기어린 조화일뿐 허망한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목침의 주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에 나타난 형상의 물건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실상의 주인은 엄연히 존재한다.
욕심을 가진 자들이 각기 주인이라고 설치지만 그들은 객꾼들이요 허수아비들이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목침의 본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짐승의 탈(貪慾)을 벗고 귀신의 탈(執着)을 벗을 때,
그리하여 마침내 허상의 틀(業習)마저 미련없이 송두리째 훨훨 벗어던질 때
본래 주인(本主)이 되는 것이다.
목침은 실상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탐착의 덩어리를 압축시켜 놓은 허상의 상징물일 뿐이다.
차천자(車天子)와 송도군(宋道君)
원기2년 봄, 원평 송찬오 엿방을 찾아간 도군은 사모님을 만나기 위하여
정읍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의 집을 방문한다.
송도군이 대흥리에 당도한 때는 한밤중이어서 바로 사모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겨우 차경석을 만나게 되었다.
기걸 차고 야심 만만한 차경석은 이종 누이 고판례를 연금시키고
자신이 교단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경상도에서 온 송도군의 사모님 면담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차경석은 당초부터 판례에 대해 후견인 격의 위치에서 행세하였다.
과부가 된 판례는 이모의 집에 의지하였으며 이종간인 두 사람은 38세로 동갑나기이나
경석의 생일이 빨라 오라버니로 행세하며 고씨를 천사께 수부로 천거하였던 것이다.
작달막한 키에 해사한 얼굴의 경상도 소년이 20년이나 연상인 차경석에게 묻는다.
『큰일을 벌이고 계신단 말을 듣고 왔심더.
어떻게 하는기 참말로 천하 창생을 위한 천하 대삽니껴?』
『미경사(未經事) 소년이 말만 옹통스럽군』
경상도에서 사모님을 모시러 왔다는 소년의 당돌한 물음에
경석은 대꾸는커녕 경험도 없는 어린 사람이 무얼 아느냐고 핀잔만 주었다.
연이 아닌가 보다, 송도군은 자리에서 물러나와서,
다시 사모님 만날 길을 모색해 보았으나
「광기(狂氣)가 있어 외인 대면을 못하고 있는중」이라 하여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루봉 新月里 손바래기
高부인을 만나지 못하고 낙담한 도군에게 송찬오는
천사님의 본댁을 찾아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안을 내었다.
「아무 데 가면 우물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쪽물치마 입은 아주마씨가 나올 것이니
그 여인에게 물어보라」 하여 그곳에 갔더니
과연 쪽물치마 입은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나오므로 안내를 받아 증산 생가를 찾아가게 되었다.
길라잡이를 한 남색(쪽물) 치마 입은 구씨 여인은
뒷날 대종사 문하에 입교하고 「남수(具南守)」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들이 넓어 호남 곡창의 중심부라 일컬을만한 들판에
우뚝 솟은 말(斗)과 되(升)의 뫼 두승산, 그리고 떡시루를 의미하는 시루봉,
강증산은 덕천들 넓은 들을 가슴에 안으며 풍요를 상징하는 신월리 새터에서 탄생하였다.
증산의 생가는 두승산 시루봉 아래 정읍 덕천면 新月里 손바래기에 소재한다
.(新月里의 여러 마을 가운데 하나인 「새터」 마을은 또 「손바래기」라고도 부른다.
일부의 기록에 客望里라 표기한 것은 손바래기를 漢譯한 것이다.
계해생으로 손바래기에서 76년을 살았다는 전재풍 옹은,
본시 이 새터 마을은 예전에 「仙望里」라 하다가 증산 선생 재세시에 「손바래기」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 때는 「新基」(새터)라 하다가
지금은 道路 건너 「松山」 마을과 「新基」를 합쳐 「新松里」라 부른다고 한다.
천년을 두고 새 터를 잡고 달덩이처럼 잘 생긴 손을 바래기 위해
그렇게 이름한 「새터」의 「손바래기」에 간 도군을
증산의 유족들은 한 식구처럼 반겨 맞았다.
가야산에서 정산이 찾아온 원평 학교 마을의 송찬오 집 앞에서.
고병규 옹(77세)은 예전 이 집이 엿방이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집 바로 앞에 불법연구회 2대 회장 경산 조송광 선생(공타원의 부친)이 운영하는
영생의원이 있었다. --사진 문향허 기자
증산의 수부 못지 않게 鄭 부인에게도 필시 깊은 공부가 있을 것이라고 도군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 증산의 본부인 정씨에게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
손바래기에는 증산의 부모와 증산의 무남독녀 순임(舜任)과 증산의 누이 선돌댁이 살고 있었다.
순임은 나이가 어리고 가족 중에 유일하게 선돌댁이 증산교 치성에 공력이 깊어 보였다.
선돌댁은 고부 선돌마을(立石里) 박창국에게 출가하였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여 친정에 돌아와 살고 있었다.
선돌댁과 백일치성(百日致誠 )
송도군은 전라도에 간 지 한 달만에 유월 보리타작이 한창일 무렵,
사모님 대신 증산의 누이동생인 선돌댁을 데리고
성주 고향으로 돌아와 할아버지께 고하였다.
『할아부지예, 사모님은 광증이 있다캐서 못 모시오고 대신 스생임의 여동상을 모시고 왔심더』
당시의 일을 청운 사모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이때 선돌댁은 마흔 가량의 나이로 흰옷을 입었고
상섭이라는 이름의 40대의 사내(증산의 제자)와 같이 왔다.
사내는 10여일 뒤 전라도로 돌아가고 선돌댁의 주도로 석달간 치성에 들어갔다.
치성 제물로 소머리를 사다놓기도 하고
『비싼 돈 들일 게 뭐 있소. 정성이 중요하지라』 해서 개를 잡아놓기도 하였다.
저녁에 가족들은 물론 머슴까지 자리를 함께 하여 주문을 외우면
우그르르하는 소리가 밤새도록 요란스럽게 울려와
「비도 올 것 같지 않은데 무슨 천둥이 저처럼 일까」 내심 걱정되었다.
선돌댁은 그 소리는 「모악산에서 기운이 몰려오는 소리」라고 설명하였다.
점잖은 선비 집안에서 치성을 올리고 하니
동네에서는 「괴변이 났다」 하고 「저 집안 속내를 알 수가 없다」고 쑤군대었다.
또 낯선 전라도 여자가 와서 같이 사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宋性欽)를 두고 「훈장님이 늘그막에 첩을 얻어다 놓았다」며
「점잖은 선비 집안에서 그럴 수가 있냐」는 둥 말들이 많아 할아버지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흠은 당장 치성드리는 일을 중지할 것을 명하였는데,
갑자기 복통이 나 데굴데굴 구를 지경이 되었다.
이때 도군이 치성 드린 청수를 할아버지께 드려 마시게 한 다음
『신장이 벌을 줘서 안 그렀습니껴』 하고 주의를 주었다.
이때부터 성흠은 다시는 손자의 치성드리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소년 정산, 백일 치성드려 신통력 얻었으나 만족못해
다시 참 스승 만나야겠다며 두 번째 전라도 行
이 치성을 통하여 몇 가지 이적이 나타났다.
밤중에는 몇 시간 동안 치성실 주변에 서기가 어렸고, 호랑이가 동네에 내려와 지켜보기도 하였다.
또 신장들을 불러들인다는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이상한 일은, 도군이 장가 들 때 이미 타계한 장모의 인상을 말하여
그의 처 여씨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여씨는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던 체증은 물론이고
치성 드리며 먹었던 구육이며 찰떡도 시원하게 소화되었으며,
치성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영이 둥둥 떠 친정집에 가 있기도 하였고
친정어머니 무덤에 가기도 하였는데, 정신이 번쩍 들 때는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의 구술자료는 필자가 청운사모님으로부터 취재한 것임).
이 치성을 드리는 기간에 세 차례나 서기가 집 위에 서려 서쪽 하늘로 두세 시간 동안 뻗질렀다.
선돌댁을 모시고 석달 열흘 동안의 치성으로 도군은 몇 가지 신통은 있었으나
마음공부에는 진전이 없었다.
송도군은 불현듯 이제 불법공부를 해보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간혹 눈을 감으면 원만한 용모의 큰 스승과
고요한 해변의 개펄에 빨간 행자(海草)가 있는 풍경이 가뭇없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였다.
송도군은 생각하였다.
내가 경상도에는 여러 해 동안 두루 다니며 스승을 찾아보았으나
아직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전라도는 도꾼들이 많이 있으니
그리 가서 기어이 참 스승을 찾고야 말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급하여 하루도 더 견딜 수 없어
할아버지와 부모님께
『전라도에 가서 큰 스승을 만나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더』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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