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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겨울과 함께 떠난 영웅 이태식
"김 동지, 자꾸 그러지 맙시다. 김 동지의 그 좋은 학벌을 언제 써먹으려고 그럽니까?" 대한 반공청년단 지부단장의 마땅찮아하는 어투였다. ""글쎄 내 몸을 좀 보십시오. 좌우익이 행동으로 정면대결을 벌이고 있는 이런 형편에 무슨 일을 맡자면 학벌보다는 몸이 튼튼해얄 것 아닙니까. 몸이 이 모양이 돼가지고 나 혼자 행동하기도 불편한데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내가 통솔력이 있다하더라도 몸 성한 사람들이 누가 이런 병신한테 명령을 받으려고 하겠어요. 나부터라도 얕잡아보고 아니꼽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딴 사람을 좀 찾아보도록 하세요." 김범우는 상대방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아주 겸손한 태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오. 김 동지 정도 불편한 걸 가지고 병신이라고 하는 건 말이 안돼요. 그 정도면 활동에 별다른 지장이 없고, 오히려 대원들에게 역전의 용사라는 걸 과시할 수 있어서 더 효과가 클 수도 있어요. 지부단장은 꽤나 능숙하게 김범우를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예,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은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법인데,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속으로 많이 결리고..." "김 동지,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오. 사양이 지나치면 동지의 사상을 의심하게 돼요." 지부단장은 얼굴을 구기며 급소를 찌르고 들었다.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란 말은 일이년 사이에 대유행을 이루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은 이런저런 경우에 상대방의 기를 꺽거나 위압하는 데 더 없이 효과가 큰 무기였다. 반공사상 만능시대다운 현상의 하나였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김범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거 보시오, 윤 단장!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시오? 빨갱이라면 당신보다 내가 더 치떨리는 사람이란 걸 똑똑히 아시오. 내 몸이 누구 땜에 이 꼴이 됐는데. 내가 몸만 성했으면 그까짓 대대장 자리는 우습소. 바로 당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사람이라 그거요. 사람을 알려면 똑똑히 아시오!" 상대방이 이쪽의 허파를 찌르고 들었다면 김범우는 상대방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아니, 김 동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능력 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일 좀 하자는데, 남의 호의에 대해 그거 너무 하잖소." 지부단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금방 수세가 되었다. "호의면 호의답게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그런 막말을 쓰는 건 예의가 아니잖소. 이 말도 안되는 포로생활을 하면서 난 아무하고도 감정을 다치고 싶은 사람이 아니오." 김범우는 그쯤에서 이야기를 끝내려고 상대방을 더 몰지 않고 슬쩍 한 발을 물러섰다.
"나도 마찬가지요. 김 동지가 정 그렇게 몸이 불편하다면, 그럼 없었던 애기로 해둡시다." "그리 이해해주니 고맙소." 김범우는 웃음지으며 손을 내미는 여유까지 보였다. 김범우가 대한반공청년단에 가입한 것은 "면회심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사월 초순이었다. 그 단체에 가입한 것까지는 신분의 위장을 위해 필요했던 것인데, 귀찮은 일은 그 다음부터 생겨났다. 청년단이 벌이는 이런저런 일에 소집되었고, 그러다보니 직책을 맡으라는 요구를 몇 차롄가 받게 되었다. 그때마다 몸을 핑계삼아 피해오다가 결국은 그렇게 부딪치게 된 것이었다.
반공청년단에서 하는 절대적인 일은 반공포로들의 수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단원들은 "면회심사"라는 것에 적극 동원되었다. "면회심사"라는 것은 말뜻 그대로 포로교환을 앞두고 북쪽으로 가겠느냐, 남쪽에 남겠느냐를 미리 가르는 조사였다. 수용소의 그 사전행위에 대해서 좌익수용소에서는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상대국의 포로는 완전히 상대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의 위반에 대한 항의시위였다. 그 항의시위와는 별개로 곤궁한 입장에 빠진 포로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익수용소에 있는 포로들이었다. 한 단위 육천 명의 수용소에서 좌나 우로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 사람들은 삼백 명에서 육백 명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인공기가 올라가든 태극기가 올라가든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면회심사"가 시작되면서 우익수용소에서는 반공청년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예비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소대마다 백지가 돌려지고, 무기명으로 남과 북을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백지에, 무기명으로 포로들은 누구나 맘놓고 자기 속뜻을 적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백지는 그냥 백지가 아니었다. 소금물로 종이마다 포로들의 일련번호를 미리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걸 불에 쬐면 물기가 증발하면서 소금글씨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 조사를 통해서 북쪽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다. 그 종이에 그런 함정이 파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김범우는 뒤늦게 기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익이 곤경에 처할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좌익이 장악한 수용소에서 우익성향을 드러낸 포로들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회유와 협박을 지나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끝내는 죽어가는 폭력이 난무했다. 그리고 드럼통을 잘라 만든 똥통에 토막난 시체들이 숨겨져 하수구에 똥과 함께 버려졌다. 그래서 거제도 앞바다에는 임자없는 팔다리가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신문들에는 좌익포로들의 "폭동"과 함께 그런 사실이"잔악무도한 공산주의자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보도되었고, 우익포로들의 "폭동"은 전혀 실리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포로수용소는 최전선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하와이 포로수용소를 거친 김범우로서는 세계 어느 포로수용소에서도 볼 수 없는 그 특수한 현상에서 6. 25라는 전쟁의 특성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면회심사"를 계기로 포로들마다 입장이 드러나면서 대립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 "76수용소"의 도드사령관 납치사건이었다. 도드 준장은 오월칠일 아침에 납치되어 사흘 동안 "포로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했다. 다음날로 콜슨 준장이 사령관으로 부임해왔다. 그는 이틀 동안 도드 준장의 구출에 노력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네 개 항의 각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첫째, 본인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들을 살상한 유혈사건이 있었음을 시인한다. 또 본인은 국제법에 의해 앞으로 본 수용소의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앞으로 폭행 및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만일 이런 사건이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은 본인이 지게 될 것이다. 둘째, 북한공산당 및 중공의용군들의 자유송환 문제는 판문점에서 토의되고 있다. 나는 평화회의에서의 결정을 좌우할 권리가 없다. 셋째, 도드 준장이 무사히 석방되면 본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강제 심사나 재무장 또는 개인심사가 없을 것을 확언한다. 넸째, 도드 준장의 동의와 본인의 승인을 얻은 세칙에 의해 포로로 구성된 포로대표단을조직할 것을 승인한다.
나는 귀측의 요청에 의해 이 회답을 보내는 바이다. 이 회답이 접수되는 대로 속히, 늦어도 오늘 하오8시 안으로 도드 준장을 무사히 석방하겠다는 귀측의 양해하에 본인이 서명한이 서면 회답을 도드 준장을 통하여 귀측에 전달한다. 포로수용소 사령관 육군 준장 찰스 F. 콜슨 도드 준장은 그날 밤 아홉시 반에 무사하게 석방되었다.
그러나, 장군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도 미국의 세계적인 망신이었지만, 포로수용소에서 폭행과 살상을 자행했다고 시인한 것은 미군의 추악한 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콜슨 준장은 그런 각서를 발표한 책임추궁을 당해 십이일자로 수용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재직은 겨우 닷새였다. 그 뒤를 이어 보너트 준장이 부임했다.
그는 삼단계작전을 강력하게 추진해나갔다. 일단계, 지휘권 확립을 위한 병력 증강. 이단계, 오백 명 단위의 소형 수용소로 재편성. 삼단계, 면회심사를 거쳐 송환을 택한 친공포로의 재심사와 좌우익포로의 분리 수용. 포로들의 분리와 재편성은 무장병력이 동원되어 강압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북쪽의 공작원들이 수용소에 인접한 민가들을 이용하여 암약할 것을 예방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철거명령이 내여졌다. 수용소 부근의 이천백여 가구는 사십팔 시간 안에 강제철거를 당했다.
그런 강력한 시행으로 수용소가 재편성되면서 김범우는 감투를 쓰라는 압력을 더 심하게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막사로 돌아오며 줄곧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는 계속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기왕 시작된 휴전회담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반공포로들을 다른 지역 수용소로 옮긴다는 말도 떠돌고 있었다.
외서댁은 가늘고 긴 풀줄기를 뽑아 검지손가락에 감고 이빨을 닦아댔다. 밥에 찍어먹을 소금도 아껴야 하는 형편에 이는 그렇게밖에 닦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매일 닦을 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세라도 심해지면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풀줄기를 감아 어설프게라도 이를 닦고나면 입안이 개운해지며 순간적으로 기분이 반짝해지고는 했다. 그 맛에 외서댁은 이빨을 자주 닦는 편이었다. 이빨을 닦다보면 꼭 옛날에 소금으로 닦던 때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발이 가는 흰 소금은 아예 살 엄두도 못 내고, 발굵은 회색 소금을 사쓰는 형편이라 이를 닦자면 그것을 몽글게 빻아야 했다. 그녀는 그 소금빻기를 즐겼다. 장독대의 오목한 돌에다가 발 굵은 천염을 한 주먹 놓고, 끝이 뭉실한 돌로 조근조근 정성 들여 몽글게 빻아나갔다. 처녀 적에 봉숭아 꽃술과 잎을 정성스럽게 찧었던 것처럼. 발이 가늘어진 소금을 양쪽 가운뎃 손가락에 꾹꾹 눌러찍어 이를 뽀드득뽀드득 닦아냈다. 네댓 차례씩 소금을 찍어 이를 닦고나면 잇몸이 얼얼해지는 것이었다. 그 기분이 얼마나 개운한지 몰랐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바탕 하고난 기분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생각은 장독대의 하이얀 접시꽃을 생각나게 했고, 먼 세상으로 떠나간 남편을 생각나게 했고, 두고 온아이들을 생각나게 했다.
"부지런도 허요. 외서댁 동무." 등뒤에서 들인 울림 좋은 굵은 목소리에 외서댁은 하대치라는 걸 직감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으쩌요, 닭지름은 다 장만혔소?" 하대치가 아침 냉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면 물었다. "야아, 어지께 병마동 다 채왔구만이라." 외서댁이 고개까지 끄덕였다. "이, 수고혔소. 근디, 보리밥에 못 비베 묵게 잘 단속허씨요이." 하대치가 건너편 물가에 자리잡았다.
"다 일렀구만이라." "이이, 말로 일러서 소양웂소. 눈으로 똑바라지게 지켜야제. 맘이 꼭 아그덜 겉은 대원덜이 있어갖고 살짝살짝 비베 묵고 그러요. 요것 입다셔 봇씨요." 하대치가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머신디요?" "다래럴 멫 개 땄소." "음마, 다래가 폴세 익었습디여?" 외서댁은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내밀었다. "폴세가 머시오. 시월이 다가는디." 손바닥에 놓인 네댓 개의 연두색 다래 하나를 외서댁은 조심스럽게 집어 입에 넣었다. 다래는 연하고도 달았다. 그건 산과일의 맛이면서, 대장 하대치의 따스한 마음이었다. 봄이면 가을에 저 다래를 따 먹어야지 하며 지나쳤고, 가을이면 다시 그곳을 지날 수가 없거나,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어 그 생각은 까막득하게 잊어버리기도 했다. 산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맛보는 다래였다.
"참 맛나구만요. 고맙구만이라." "고맙긴넌. 실답잖게." 하대치가 뚱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강 동무넌 은제 뜨는 게라?" 외서댁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오늘 저녁에 뜰 참이요. 닭지름 잘 챙기씨요이." 하대치는 다시 다짐을 하고는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외서댁은 다래 하나를 다시 입에 넣으며 겨울투쟁 준비를 서둘러 끝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중대에서 닭기름을 볶아 짠 것도 그 준비 중의 하나였다. 닭기름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어느 법이 없어서 총 닦는 기름으로 제격이었다. 그런데 그 기름으로 깡보리밥을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 먹는 맛도 기막혔지만,그러나 그건 그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 두가지는 "빨치산의 이대 별식"으로 꼽혔던 것이다.
강동기는 대원 아홉을 뽑아 야간기습을 나서고 있었다. 겨울투쟁을 위한 총알 확보를 위해서였다. 지난 동계공세로 병력손실이 심해 후방부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버렸듯이 병기과도 거의 파괴상태에 빠져 지난날 같은 총알 공급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태식의 부대도 엇비슷한 시간에 지서습격을 나서고 있었다. 이태식의 부대가 때아니게 지서를 기습하려는 것도 총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강동기 부대의 공격목표는 벌교의 회정리 일구에서 삼구로 넘어가는 도래등에 위치한 초소였다. 그 초소는 지난 겨울에 새로 생긴 것으로, 진트재 초소와 터널이 하대치에게 공격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읍내 안통이 공격당할 위험을 그 지점에서 일단 막자는 것이었다. 강동기의 부대가 그곳을 목표로 삼은 것은 우선 그 초소는 기관총으로 무장되어있지 않았다. 그 다음이, 산이 바로 옆이었다. 초소에서부터 소화네 집까지는 이백여 미터거리였고 거기서부터는 바로 제석산 겉자락이었다. 그러니까 진트재 초소와 읍내 경찰서 사이의 거의 중간지점인 그 초소를 신속하게 치고 산으로 붙으면 안전하게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초소에 배치된 병력은 경찰 넷이라고 했다.
이태식은 총알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적을 하나라도 더 무찌르는 동시에 수류탄이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까지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대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지서 하나를 한바탕 까뒤집는 적극적인 공격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 일오 결정"에다가 조원제까지 흉한 일을 당해버려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느 때 없이 어두웠던 것이다.
강동기와 대원들이 제석산 바깥줄기에서 어둠에 묻힌 기나긴 포구와 중도글판과 읍내 안통을 한꺼번에 내려다본 것은 자정이 얼마 안 남은 시각이었다. 강동기는 그저 어둠일 뿐인 회정리 삼구 쪽에 한동안 눈길을 박고 서 있었다. 그 어둠 어딘가에 아내와 딸아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간에 무엇을 먹고 살아왔을지... 그는 가슴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금니를 맞물며 고개를 단호하게 돌렸다. 그리고 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동무덜, 지끔부텀 정신 뽀짝 채리씨요. 우리덜 코밑이 초손께. 짜아, 내래갑시다." 강동기는 힘이 들어간 낮은 소리로 말하고는 혁대 구멍을 하나 줄였다. 그들은 빠르고 소리 없이 산비탈을 타내리며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가을벌레들의 울음소리들이 그쳤다가는 이어지고 했다. 저편 포구 쪽의 어둠 속에서 가끔씩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끼륵끼륵 들려왔다. 어쩌면 보초를 서고 있는 놈들의 무슨 신호인지도 몰랐다. 기러기라는 놈들은 하늘을 날 때도 그렇지만 잠을 잘 때도 반드시 보초를 세웠다. 그놈들은 어찌나 귀가 밝은지 조그마한 인기척에도 즉각 신호를 울려 떼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냥꾼들은 기러기 잡기에 애를 먹었고, 그래서 물오리값은 집오리값의 열 배가 더 되는지도 몰랐다.
강동기네는 현씨네 제각 뒤에서 일단 발을 멈추었다. "동무덜, 초소넌 인자 엎어지먼 코 닿소. 근디 고것이 고개 몬뎅이에 달랑 올라앉은디다가, 큰길얼 건느야 헌께 치기가 쉽덜 않소. 몬뎅이 초소에서 내래다보먼 큰길이 훤허니 뵌다 그것이요. 긍께 여그서 직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왼짝으로 멀찍허니 돌아서 큰길 반대편짝인 회정리 이구 짝에서 치기로 허겄소. 총언 나가 쏘기 전에넌 절대로 쏴선 안돼요이. 글고, 여그서부텀 몸얼 땅개맹키로 낮추씨요. 제일비상선, 제석산 뒤골 미륵바우, 제이비상선, 오금재 너메 왕참나무 밑이요. 헹에 일 터지먼 둘썩 소조 짜논 대로 산에 붙도록 허씨요. 짜아, 뜹시다!" 강동기의 빈틈없는 작전지시였다.
도래등은 제석산의 끝자락으로, 그 끝을 철길 가까이까지 대고 있었다. 큰길을 그 중턱을 무질러 깎아내리고 뚫려 읍내 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정리 삼구 쪽에서 보면 도래등은 제법 가풀막진 고개였다. 그 고갯마루의 오른쪽 등성이에 민가가 두 채 자리잡고 있었고, 초소는 그 민가를 맞바라보며 왼쪽 등성이에 서 있었다.
강동기와 대원들은 회정리 이구와 초소의 중간인 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강동기는 등성이를 약간 남겨놓고 초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가 발을 멈추었다. "뒤로 전달, 대열 옆으로." 그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공격대열이 갖추어졌다. "옆으로 전달, 전진." 가로선 대열이 초소를 향해 움직여갔다. 초소의 불빛이 어둠 속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놓고 있었다. 그 구멍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으아앙, 으응응... 강동기는 신경이 섬뜩 곤두섰다. 그러나,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손간 판단을 했다. 컹! 컹컹컹! 우아앙, 컹컹!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어둠을 흔들어댔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저 쌍눔에 개새끼! 강동기는 그만 암담해지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구냐!" "손들고 나왓! 쏜다!" 초소에서 터져나오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전짓불빛 두 줄기가 쭉 뻗치더니 어둠을 마구 헤쳐대며 날뛰기 시작했다. 개는 더욱 기세를 올려 짖어대고 있었다.
개까지 다섯이다! 밀어붙이자! "동무덜, 돌격!" 강동기는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들은 총을 갈기며 초소를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공비다!" "저기다!" 초소에서도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초소를 얼마 안 남겨놓았을 때였다. 엉뚱한 데서 전짓불빛들이 쏟아져왔다. 그리고 총소리가 갑자기 늘어났다.
"길얼 막어라!" "포위해라, 포위!" 이런 외침도 터지고 있었다. 그 돌발상황이 초소 건너편의 인가에서 일어난 것을 강동기는 알아챘다. "엄니!" 비명이 터졌다. 강동기는 대원인 것을 직감했다. 그는 부르르 떨며 외쳤다. "비상선! 비상선!" 대원들이 흩어져 뛰기 시작했다. "잡아라! 도망간다!" "산으로 튄다! 쫓아라!" "동무덜, 이짝으로! 이짝으로!" 제각 쪽의 길이 막혔다고 판단한 강동기의 회정리 입구 쪽으로 뛰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큰길을 따라 내리막을 뛰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급히 꺾었다. 뒤따라 뛰는 대원이 서넛이었다.
"아이고메!" 그중의 하나가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동기의 마음은 돌아서고 있었지만 발은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날아오는 총알이 그를 쫓아대고 있었다. 민가들 사이를 헤집고 그는 산 쪽으로만 뛰었다. 그가 비탈의 산밭으로 나서서 뛰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총소리들이 난무했다. 제각 쪽으로 앞질러온 경찰이었다. 강동기는 총을 떨어뜨리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 더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먼동이 터올 때까지 도래등에서부터 제석산 바깥줄기 일대에는 수십개의 횃불들이 겅중겅중 춤을 추었고, 그 사이사이에서 전짓불빛들이 불눈을 번쩍거리며 어둠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햇살이 퍼지면서 경찰서 마당에 옮겨진 빨치산들의 시체는 모두 일곱구였다. 그 소문은 읍내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날 밤 이태식의 부대 강경애도 죽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돌격대를 이끌고 앞장섰던 그녀는 대울타리 방어벽을 뚫다가 기관총에 난사 당해 대울타리 사이에 두 팔이 끼여매달린 채 죽어갔다. 이태식은 지서를 점령하고 나서야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태식은 노획한 무기 대신 벌집이 된 그녀의 몸을 업고 돌아왔다. 이태식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 여자가 도래등을 치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고름 겹매듭이 풀어져 있었으며, 검정고무신은 한쪽 발에만 꿰어져 있었다. 눈이 뒤집힌 그 여자는 길가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본다는 것도 모른 채 읍내로 뻗은 큰길을 줄기차게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경찰서 마당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총을 맞은 일곱 구의 시체는 양쪽을 터 길게 펼친 가마니 한 장씩을 갈고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길게 뺀 염상구가 빠른 눈길로 시체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긴장의 빛이 가시며 그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구산댁도 사람들에게 밀리며 시체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살펴나갔다. 분명 아들과 사위는 없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구산댁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른 채 더듬더듬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도래등을 넘었던 여자가 경찰서 마당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여자는 뛰던 기세 그대로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광기 서린 그 여자의 눈이 시체를 훑었다. 그 여자의 눈이 한곳에 딱 멎었다. "워메! 길자아부지이" 그 여자는 마침내 울부짖으며 앞으로 튀어나가 시체 하나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긴 시체는 강동기였다. "워메, 워메, 길자아부지, 길자아부지, 길자아부지..." 남양댁은 싸늘하게 식은 강동기의 얼굴에 볼을 비벼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양쪽에서 시체들을 지키고 섰던 두 경찰이 한꺼번에 달려와 남양댁을 잡아일으켰다. "워째 그요, 냅두씨요, 냅둬!"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남양댁은 두 경찰을 뿌리치며 소리질렀다. 그러나 경찰들의 손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여그 노란께라, 여그 놔!" 그녀는 경찰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안되겄네, 안으로 끌고가야제." 경찰 하나가 말했다. 그리고 곧 두 경찰은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끌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두 남자의 힘이었다.
"이눔덜아, 냅둬어, 냅둬! 죽었응께 인자 나 냄편이란 말이여어. 여그 놔, 놔아! 죽었응께인자 나 냄편이랑께로오." 경찰 부상 한 명에 공비 사살 일곱. 이것은 엄청난 전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전화보고는 도경찰국을 놀라게 만들고 말았다. 도경에서 다시 걸려온 전화는, 당일로 도경국장이 직접 내려가 승전 축하식 및 유공자 표창식을 거행할 것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경찰서는 그만 잔치 분위기가 되어 모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없이 돌아치기 시작했다.
도경국장은 오후 두 시쯤 도착했다. 경찰서 마당에는 남국민학교 교실에서 전부 모아온 교단을 쌓아올려 단상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일곱구의 시체는 단상 아래로 옮겨 눕혀졌다. 읍내의 유지란 유지는 다 모여들어 다투듯 단상차지를 하고 앉았고, 학교 운동장의 반정도 크기의 마당을 읍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채우고 있었다. 단상 옆에는 벌교 상업고등학교 악대까지 동원되어 빠라빠라, 뿡짝뿡짝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벌교상업고등학교는 학제 변경에 따라 진작 중학교와 분리되었고, 회정리 일구 아래 방죽 옆으로 터를 넓게 잡아 옮겨가면서, 두 손이 악수하고 있는 표지가 찍힌 원조물자 바람에 건물을 번듯하게 지어 학교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악대가 생긴 것도 다 원조물자 덕이었다.
빠라빠빠, 뿡빠뿡짝...
그런데,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단상에 한 발도 올려놓을 수 없는 형편에 네 발까지 떡 올려놀고 있는 이색적인 존재가 있었다. 그건 한 마리의 개였다. 두 귀가 쫑긋하게 선 개는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었는데, 목에서 가슴으로 긴 어깨띠를 엇지게 두르고 있었다. 그 어깨띠에는 "충견만세"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인자, 잘 가씨요, 길자아부지... 근디, 워찌 요리도 허망허니 가뿐다요... 요리 허망허니 갈람사 아덜이나 하나 태와주고 가제... 부디 존 디로 가씨요이, 죽어서나 존 시상 만내 살어야제... 소리지를 기운도 다 빠져버린 남양댁은 유치장의 벽에 기댄 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해마다 그래왔듯 잎 다 떨어진 산을 북풍이 휩쓸면서 토벌대의 활동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찬바람에 잎이 지듯이 차츰차츰 수가 줄어들고 있는 빨치산들은 겨울을 맞으며 최소한의 소투쟁으로 들어갔다. 토벌대를 맞아 상황이 불리해지면 두명씩 소조가 되어 흩어져 싸웠고, 기습의 기회를 포착하면 다시 큰 덩어리로 뭉쳐졌다. 철저한 이정화령 이령화정의 전술이었다.
전투경찰이 주축을 이룬 토벌대가 아무리 작전을 본격적으로 펼친다해도 작년 겨울의 군작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력과 화력이 그랬고, 작전기간도 길어야 삼사일이었다. 빨치산들은 우선 밥을 굶지 않아도 되는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경찰토벌대라고해서 전혀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병력과 화력은 빨치산 자신들에 비하면 월등했고, 기동력 또한 얕잡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빨치산들에게 전혀 없는 통신장비를 갖추고 있는데다, 산과 산을 이동하는 데도 길만 어지간히 뚫려 있으면 트럭을 동원했다. 그리고, 경찰은 어느 면에서는 군인들보다 대적하기가 더 어려운 상대였다. 군인들은 능선을 타고 흝어내리기 때문에 자기들의 위치를 다 노출시키는 데 비해서 경찰들은 계곡을 더듬어 올라오기 때문에 자기들의 움직임을 곧잘 은폐시켰던 것이다. 경찰은 그런 방법으로 기습을 시도했고, 포위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낮에 소조로 흩어졌던 하대치의 부대원들은 날이 어두워지며 비상선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서댁은 대원들이 도착하는 대로 인원을 파악해나가고 있었다. "워찌 되얐소?" 외서댁이 긴장하며 한 대원에게 물었다. "총 맞어부렀구만요." 그 대원이 힘없이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되얐소, 동무라도 성헌께." 외서댁은 그렇게만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 그리 되었는냐고 묻지 않았다. 다른 대원이 이미 죽은 마당에 그런 물음은 살아온 대원을 괴롭히게 될 뿐이었다.
대원들이 모두 돌아왔다. 희생자는 더 늘어나지 않았다. "유만복 동무가 총 맞어 죽었구만이라." 외서댁이 하대치에게 보고했다. "유만복 동무가?" 하대치가 놀라는 기색이더니, "지길, 또 한 사람이 떴구마. 그 쿠렁쿠렁소리 잘 질르든 동무가 가부렀이니 인자 개덜 보고 소리질르자먼 외서댁 동무 혼자서 심이들겄소." 그는 이내 감정을 감추며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도 더 이상의 말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천막 대신 담요 몇 장을 둘러쳐 불빛을 막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동무덜, 밥 따땃허니 묵었응께 밥값얼 한바탕 허기로 헙씨다. 우리가 소조 투쟁얼 헝께로 개덜이 아조 안심얼 허고 암디서나 천막을 치요. 고것이야 우리가 기둘리든 것잉께 워디 보고만 있겄소? 우리 빨치산에 맵고 짜운 맛얼 톡톡허니 봬야제." 하대치가 대원들에게 기습작전을 알렸다.
하대치는 이미 보아두었던 공격지점을 찾아 산줄기 두 개를 넘은 다음 골짜기를 타고 내렸다. 경찰토벌대는 야영을 하는 것도 군토벌대와는 달랐다. 군인들은 골짜기를 빼고는 산중에서 야영을 하기가 예사인데 경찰들은 반드시 산을 벗어났다. 일단 개활지로 나간 그들은 손쉽게 민가를 차지하거나, 민가가 없으면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을 골라 천막을 쳤다.
"쩌어그 천막얼 잘 보씨요. 천막이 네 갠께 한 천막에 시물만 잡아도 합이 여든이요. 그리 되먼 우리 시 배가 되는디, 거그다가 저 여시겉은 새끼덜이 평지에다가, 개울물까지 끼고 천막얼 친 것이요. 반대편짝에 있는 산이야 맥이 끊어져 우리가 못 붙을지 다 알고 저리 자리럴 잡은 것이요. 긍께로 여그서 공격을 허자면 평지럴 질러야제, 개울물얼 건느야제, 아조 에롭게 맹글어놨다 그것이요. 쌈이란 것이 서로 머리 짜내긴께, 우리넌 요러크름 허겄소.
외서댁 동무가 왼짝으로 싸악 허니 돌아서 먼첨 공격얼 허씨요. 소조로 간격얼 짝짝 벌래갖고, 그려서 개덜이 쫓아나오면 워리, 워리 총알로 불러감시로 뒤로 빼다가 산으로 붙으씨요, 그 새에 나가 오른짝으로 돌아서 뒤통수럴 뽀개뿔겄소. 물을 말 있으먼 물으씨요." 하대치의 작전 설명이었다.
"웂구만이라." 외서댁은 주머니에서 빨간 띠를 꺼내들며 힘 뻗치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밤이고 낮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간에 싸움만 시작하려고 하면 빨간 띠를 머리에 동여맸다. 그녀는 개털모자 위에다가 빨간 띠를 질끈 동여매며 말했다. "쩌것덜이 잠 푹 들었겄구만이라." "그려도 적은 개덜언 보초를 단단허니 시운께." 하대치는 주의를 환기시켰다. 외서댁은 대원 일곱 명과 함께 개울가에 도착했다.
"우리넌 개덜얼 유인허는 것잉께 서로 간격얼 넉넉허니 벌리고 총얼 쏨스로 뒤로 물러스는것이요. 몸덜 뽀오짝 붙이고, 총언 총구녕 하늘로 솟기게 허덜 말고 한 방이라도 지대로 쏘씨요이!" 외서댁은 물을 건너기 전에 다짐했다. 작전을 계획대로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외서댁의 부대가 뒷걸음질을 하며 개울을 얼마 안남겨 놓았을 때 반대쪽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포위당했다. 포위!" "한쪽으로 몰리지 말앗!" 이런 발악적인 소리와 비명소리가 적진에서 터지는 것을 들으며 외서댁은 다시 개울물에 발을 넣었다. 그 순간 개울을 건너고 싶지가 않았다. 이쪽에서도 함께 공격을 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대장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었다.
"동무덜, 한바탕썩 더 쏘고 물얼 건느겄소!" 외서댁은 대원들에게 외치며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외서댁은 비상선으로 돌아와서야 물에 젖은 발이 시려운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하대치의 부대는 꽤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대원덜 워찌 되얐소?" 외서댁을 보자마자 하대치가 물었다. "다 무사허구만요. 뒷일언 워찌 됐는게라?" "아조 잘 되얐소. 개덜이 쌩똥깨나 싸댐스로 꼬드라졌을 것이요." 하대치의 목소리가 만족스러웠다.
"근디, 워째 그러고 기시오?" 외서댁은 하대치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의아스럽게 물었다. 하대치는 머리 오른쪽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쪼깐 다친 모냥이요." "워메, 머리럴! 싸게 불 피고 봐야제라." 외서댁은 덜컥 겁이 났다. "우선 여그 떠서 안전헌 디로 가고 난 담에 봅씨다." 그들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하대치는 걸으면서 대원들이 듣지 못하도록 신음을 씹고 있었다. 피는 계속 옆볼로 흘러 목을 타내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류탄 파편에 맞은 것이었다. 맞은 순간 까마득해졌었고,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통이 심하고 피가 멎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볍게 다친 것이 아닌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워메, 워메, 큰탈 만낼 뿐혔소. 워찌 요리 크게 다치고도 참어집디여." 불을 피우고 상처를 들여다본 외서댁은 금방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건 그녀의 호들갑이 아니었다. 반뼘이 넘게 찢어진 상처가 헤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헤벌어졌다는 것은 잘못 본 것이었다. 상처가 벌어진 만큼 살이 떨어져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워메, 쪼깐만 더 심혔드라먼... 외서댁은 그 아슬아슬함에 뒤늦게 가슴이 벌떡벌떡 뛰고 있었다. 상처를 들여다보고있는 다른 대원들의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외서댁은 대장, 아니 영웅 하대치가 없는 부대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워쩔께라, 피가 자꼬 흘르는디이." 외서댁이 안타까워 울상을 지었다. "여그 존 약이 있소. 요것이 피럴 뽈아묵어 쑥떡이 되게 두툼허니 뿌리씨요." 하대치가 꺼내놓은 것은 담배쌈지였다. "워메, 담배가리야 칼이나 연장에 살짝 다친 디나 뿌리는 것이제, 요리 살점이 떨어져나가뿐 짚은 자리에 뿌리면 속살이 애리고 씨려 사람이 워쩌크름 살아진다요." 외서댁이 고개를 내저었다. "싸게 뿌리씨요. 명령잉께!" 외서댁을 노려보듯 하는 하대치의 단호한 말이었다.
외서댁은 하는 수 없이 쌈지를 집어들었다. 하대치는 그날 밤부터 꼬박 사흘 동안 열에 들뜨고 한기에 떨어대면 앓았다. 외서댁은 날마다 비트를 옮겨가며 하대치를 치료했다. 치료라고 해야 어떻게 해서든 죽을 쑤어서 떠먹이는 것이었고, 담요를 다 모아 몸을 감싼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러다가 그만 죽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날마다 피가 타들었다. "외서댁 동무가 나러 살려냈소." 몸을 일으킨 하대치가 말했다. "음마, 무담씨 영웅이간디라." 고마움의 눈물을 머금으며 외서댁이 한 말이었다. 하대치는 이가 갈리도록 아프던 상처의 통증이 말끔히 가신 것을 느끼며, 자신이 죽을 고비를 요행히 넘겼다는 것을 되짚어 생각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겨울은 매운 바람과 거친 눈보라에 휩싸여 변함없이 혹독하게 추웠다. 토벌대들은 지리산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길목이란 길목은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투를 차단시켜 추위 속에서 굶겨죽이자는 장기작전인 동시에, 그래도 보투를 안 할 수 없는 빨치산들을 손쉽게 잡자는 투망작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토벌대들은 그런 안일한 작전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쪽 골짜기를 불시에 습격해 들어오기도 했다. 겨울이면 북쪽 골짜기들이 남쪽 골짜기보다 훨씬 더 추워 빨치산들이 남쪽 골짜기로 몰린다는 것을 그들은 일찍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급습을 가해오는 경우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때가 많았다.
새로 투항했거나 생포한 빨치산들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빨치산들은 대원 중에 하나라도 행방불명이 되면 비트부터 옮기기에 바빴다. 새로운 투항자들은 전투원보다 환자들 속에서 많이 생겨났다. 환자트에는 치료약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보투가 어려워 식량마저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총상을 입었거나 중증의 동상환자들은 마음이 약해져 마지못해 어느 순간 뒤집혀지고 말았다. 한 사람이 마음 변해버리면 같은 환자트의 네댓 명,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포로신세가 되는 경우는 흔했다. 그렇게 생포된 환자들 중에서는 끌려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기도 했고, 도망가는 척해서 유인자살을 하기도 했다.
어느 환자트에서는 한 명의 변심으로 토벌대가 들이닥치게 되자 한 환자가 몰래 감추고 있었던 수류탄을 터뜨려 환자 네 명과 토벌대 세 명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지리산의 가혹한 추위 속에서 빨치산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맞아 죽어가며 시나브로소멸되어가고 있었다.
김범준은 이월의 추위 속을 이해룡에게 업혀 다니고 있었다. 그러기를 벌써 두 달째였다. 그건 기동이 어려운 환자는 반드시 환자트로 보내야 한다는 규정 위반이었다. 그러나 이해룡은 규정 위반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환자트로 보내달라는 김범준의 의사도 막무가내로 묵살한 채 김범준을 업고 다니며 토벌대와 싸우고 있었다. 김범준은 동상으로 발이 썩어들고 있었다. 중국의 투쟁에서부터 동상을 앓아온 그는 압록강을 건너올 때 벌써 왼쪽 발가락 두 개가 없는 몸이었다. 빨치산 출신들은 누구나 겨울이면 동상 재발, 여름이면 무좀극성으로 남 모르는 고생들을 했다. 김범준이라고 예외일 수가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겨울을 지리산에서 나면서 동상이 심하게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지리산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십이월 중순에 그는 결정타를 입게 되었다. 토벌대에게 포위를 당해 쫓기는데 그는 몸을 숨길데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적들의 눈초리에 에워싸인 눈 덮인 산은 몸뚱이 하나를 숨길 데가 없이 갑자기 손바닥만 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이있었다. 계곡의 개울에 부풀어올라 있는 얼음덩이였다. 키 높이로 층이 진 개울에 물이 쏟아져내리면서 얼어붙기 시작한 얼음이 커다란 바위처럼 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그 옆구리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구멍으로 다급하게 몸을 디밀었다. 그는 물로 풍덩 빠지면서 질겁을 했다. 틀림없이 얼음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 물이었던 것이다. 급히 쓷아져내리는 물이라 그안은 얼어붙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몸을 숨기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오락가락하는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질이 된 동상에 그 냉탕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고, 또한 흩어졌던 부대를 다시 만나기까지도 시간이 너무 걸렸던 것이다. 온몸이 얼음덩이가 된 그는 이해룡을 만나면서 실신을 하고 말았다. 그는 가가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발은 이미 동상이 극심해져 걸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발가락마다 흑자줏빛으로 변해 썩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환자트로 보내달라고 몇 번씩이나 말했다.
원칙을 강조하기도 했고, 명령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추하게 만들지 말아달라고 간청도 했다. 그러나 이해룡은 아침 저녁으로 고름을 닦아내고 냉수찜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월이 끝나가면서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동백꽃이 지고 진달래 꽃망울들이 부풀어오르는 가운데 이태식이 죽었다는 소문이 백아산 지구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해 조계산지구와 백운산지구로 번져나갔다. 부하 세 명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쏘고 죽었다고도 했다. 죽은 것도 통명산 줄기라고도 했고, 무등산 기슭이라고도 했고, 백아산 매봉이라고도 했다. 어쨌거나 "백아산 호랑이"로 "강철부대"를 이끌며 도당의 영웅칭호까지 받았던 머슴 출신 이태식은 영웅다운 죽음의 전설을 남긴 채 겨울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갔던 것이다.
겨울은 또 많은 빨치산들을 데려갔다. 그래서 지구마다 부대개편을 하게 되었다. 지구 기동연대장 하대치는 지구 부사령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