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간의 해외연수기(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2
1월 4, 5, 6일 / 카이로와 룩소에서 바라본 이집트
1월 4일 토요일, 카이로에서
南橘北枳
흔히는 나일강과 피라미드, 스핑크스의 나라로 알려진 이집트의 거대함, 미이라와 상형문자, 왕들의 무덤 발굴과 관련해 더욱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나라, 이집트!
아마도 고대 역사와 관련해 이집트만큼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자연이 베풀어준 나일강 젖줄의 풍요로움 위에 과거 조상들의 찬란한 문화의 영광을 배경으로 하여 살아가는 오늘날 이집트인들의 모습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라는 설레임을 갖고 공항을 나섰다.
임대 버스를 타고 달리는 차창밖의 모습은 본격적으로 이국땅에 발을 디뎠음을 느끼게 했다. 파라오의 모자처럼 둥글게 다듬어 놓은 모습의 쥐똥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우리가 울타리로 심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컸다.
南橘北枳(남귤북지, 남쪽 지방의 귤을 추운 북쪽 지방으로 이식하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환경의 영향이 중요함을 말함)를 연상할 만큼 인상적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흔히 비커스라고 했다.
시원스럽게 큰 나무들과 둥근 돔의 이슬람 사원들, 덩치가 큰 규모의 건물들을 지나고 오는 손님들을 맞는 호루스(Horus,이집트 왕조의 상징적인 매)와 가는 손님을 배웅하기 위해 세워둔 람세스왕의 거대한 석상을 보면서 비로소 이집트 땅에 발을 디뎠음을 실감했다.
인샬라의 이집트인들
현지 가이드 김인순씨의 안내로 제일 먼저 간 곳은 아침 식사를 위해 카이로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 ‘구룡‘이었다. 한국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한 뒤 잠시 짬을 이용해 한 동료 의원과 근처를 10여분 산책했다.
경제의 낙후성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차량 매연이 좀 심했고, 우리와는 달리 차선과 신호등이 없이 달리는 차들이 신기했다. 이래도 우리보다는 교통사고율이 적은 나라인데 그래도 혹 사고가 나면 누구 책임일까? 우리 같으면 신호등을 만들지 않은 국가에게 구상권의 책임을 물을텐데...
부주의한 보행자? 아니면 운전자?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인샬라‘란다. 신의 뜻대로! 사망 사고일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100불만 지불해 주면 다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인샬라! 그러기에 이들은 바쁠 일도 없다. 12시에 점심 약속을 하면 2시나 3시가 되어서야 나타나거나 아예 나오지 않아도 다음에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인샬라‘라나? 예전에 우리의 코리안타임처럼 이들에겐 최하 두 세 시간 늦는 것을 ‘마스리타임‘이라고 한단다.
그러니 우리처럼 ‘빨리빨리‘라는 말은 거의 쓸 일도 없고 대신 ‘천천히‘란 의미의 ‘슈와슈와‘란 말이 있지만 이마저도 손짓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 얼마전까지만 해도 ‘만만디‘라는 말이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급격한 산업화로 ‘콰이콰이‘란 말이 더 많이 사용된다는데... 글쎄...빨리빨리 속에 이루어지는 산업화와 물질적 풍요가 곧바로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는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사다트 전 대통령이 군사퍼레이드 중 암살당한 뒤 무바라크 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계속된 계엄령으로 인해 시내 곳곳 어딜 가든지 검은 베레모의 군인과 경찰이 총을 들고 서 있지만 우리도 70년대와 80년대를 군부통치를 살아온 경험으로 무뎌진(?) 감각 때문인지 그다지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깔린 군인과 경찰은 이집트 젊은이들의 실업 구체 방법의 하나라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인지 오히려 무력하게만 비춰졌다.
이집트에는 군인이 약 1백만명, 경찰이 30~40만명인데, 군인의 경우 무학자는 3년, 중졸자는 2년, 대졸자는 1년을 복무해야 한다고 한다.
거리에 서있는 경찰들의 경우 거의가 까막눈인데 혹 약도를 들고 이들에게 길을 물어본다면 열 명중 여섯 명이 가리키는 곳과는 반대로 가면 정확히 가고자 하는 곳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곳에서 10년 이상을 산 안내인의 농담 아닌 설명이었다.
경외와 질투, 부러움의 시작 - 카이로 박물관
식사한 곳에서 타이르 광장을 가로질러 카이로박물관으로 갔다. 고대 이집트 유물을 한눈에 일별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고대 이집트 유물은 과거 그리스 로마시대 때부터 해외로 반출되기 시작하여 근세기까지 이어졌는데 19세기 프랑스의 샹폴리옹이라는 학자에 의해 20여년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상형문자가 해독됨으로 해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의 중요성이 알려져 국제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관심이 일었다.
서구 기독교 문명인들의 양심일까? 그들보다 최소한 2~3천년 앞섰던 앞선 거대한 문화의 자취들을, 숨통을 끊기 위해 스핑크스의 코들을 그토록 일그러트렸던 기독교 문명인들의 베품일까?
그러한 양심 중의 하나가 바로 카이로박물관으로 볼 수 있는데, 1895년과 1902년에 걸쳐 국제입찰로 건축된 건물이다.
허나 국제적 관심 속에 지어졌다는 건축물에 대해서는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물론 큰 규모의 2층 건물이기는 하지만 색깔이 칙칙한 흙빛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카이로 박물관 뿐이 아니라 이집트 전 지역에 걸친 건물들의 칙칙한 빛이었다.
이유인즉 일년내내 비는 한방울도 내리지 않고 가끔씩 불어오는 계절풍에 의해 먼지로 뒤덮이기 때문에 외형에 굳이 아름답게 색조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이집트 여성들의 머리수건(차도르)은 종교적 이유보다는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으려는 실리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박물관 앞마당에 심어진 고대 상하 이집트의 상징인 파피루스와 로터스(Lotus, 나일강변에만 자라는 수련을 말한다.)를 보면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원전 4천년전부터 시작된 고대 이집트의 상대 중대 하대의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석상과 석관 및 부장품들은 경외심과 아울러 다소 질투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투탄카멘왕의 무덤에서 고스란히 발굴된 현란한 유물들, 살아있는 인간의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사카라의 검은 수정 눈동자!(발굴 때 처음으로 이 석상을 발견한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까를 상상해보라. 불빛을 그 얼굴에 비췄을 때 살아있는 사람처럼 반짝이는 그 눈동자를!)
실은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질투감 내지 부러움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 문화가 목조문화이고 사계절의 기후가 뚜렷한데다 여름의 우기까지 있어 과거의 문화 유적이 제대로 보존될 수 없다는 한계점도 있고, 이들보다 규모는 작지만 자연과 인간과의 융화 속에 발전시켜온 세련된 문화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고,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프랑스인이 우리의 탁월한 문화재들을 보고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해 강화도에 보관된 우리의 최고급 문화재를 약탈한 뒤 나머지는 철저하게 불태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이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의 그 탁월함을 어디에 견주어야 할까?
그들의 문명이 얼마나 탐이 났으면 터어키의 오스만 투르크, 로마인들, 프랑스인들은 그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배를 새로 만들어서 그들의 땅으로 가져가는 무지막지한 욕심을 내었을까?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병인양요 당시 우리나라 문화재를 약탈했던 프랑스 로즈제독의 마음(그는 강화도를 둘러본 뒤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감탄하면서 볼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을 이제는 조금 이해해주고 싶다.
그러나 철저하게 파괴한 그의 행위는 여전히 용서할 수 없지만 하여튼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같은 사람(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살아난 모든 문화는 충분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조차 정말 질투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니...
(각설하고, 고대 이집트의 각종 유물과 유적들을 여기에 상세하게 거론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들의 신화를 먼저 이해하고 보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가까운 곳에서 얼마든지 상세한 것들을 알아볼 수 있기에 몇 가지 독특한 점과 나의 단상들만 적어 나가려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귀족들의 석상, 그림의 특징은 주인공 혼자만을 만들지 않고 반드시 짝으로 즉 부부의 모습을 함께 조각하거나 그린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음양의 조화가 이뤄져야만이 또다른 부활과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사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음양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투탄카멘왕의 황금의자에 새겨진, 왕에게 향유를 발라주는 왕비의 아름다운 모습, 고대 이집트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금슬이 좋아 정비를 한명밖에 두지 않았다는 아메노피스 3세와 그의 부인상,
귀족이었던 라호텝과 그의 부인상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상하 이집트의 통일을 상징하는 파피루스와 로터스상(이 문양은 현재 이집트의 상징 문양이기도 한데 아름다우면서도 현대적 감각의 세련미가 있다)을 항상 함께 새기고 있으며, 피라미드 앞의 거대한 스핑크스가 홀로인 것 같지만 하늘의 한 별자리가 그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하루 종일을 둘러보아도 제대로 못볼텐데, 두 시간여만에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왔으니 그 아쉬움이라니...
이것도 ‘인샬라‘인가 싶다.
어쨌든 고대 이집트 문명과는 첫인사를 한 셈이다. 점심을 먹고 이집트 서민들이 사는 지역을 가로질러 예수님 피난교회와 모세가 출애급직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했던 장소, 요즈음은 곱트교회라 불리우는 유대교회로 향했다.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4년판>>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