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5
1.
“산을 왜 좋아하나요?”
“암벽은 왜 하게 됐나요?”
산을 다니고 바위를 찾으면서
남들로부터 자주 들었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물었던 질문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멋있어 보이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하려던 적도 있지만
실은 그런거 없구요,
지나간 몇 개의 기억들이
답이 되려나 생각은 듭니다
2.
누구나 학창시절에
그런 추억 한두개쯤 있듯이
나도 방학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바다도 가고
강, 계곡도 가고
산에도 갔습니다.
그냥 십대 시절의 평범한 놀이였고
추억만들기의 하나였습니다.
산이란
그냥 뭐, 그저 그런
그냥 올랐다 내려오곤 하는...
그러다가 친한 친구놈 따라
산악부에 가입을 했습니다
3.
지리산엘 갔습니다.
무등산이나 월출산을
이미 여러번 다닌 후라서
큰산인 지리산이라고 하여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끊임없이 오르는 산길,
뙤약볕과 매미소리,
가도가도 보이지 않던
목적지
그리고
마침내 마주선,
천왕봉(天王峯) 이라고 쓰인
커다란 정상석
발아래 펼쳐진 운무,
뭇 산들의 높고낮은 봉우리와
계곡과
넘실대는 지평선...
그런데 그때 거기에서
어느순간 문득
전에 올랐던 다른 산에서 보이지 않던
다른 세상을 보았습니다.
왜 그때 그런 기분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십대의 그 시절 가슴 속 가득했던
막연한 어떤 물음들에 대해
가끔 산이
대답해 줄 것도 같았습니다.
3.
그렇게 산악회 활동을 하면서
맨처음 대청봉을 올랐을 때
거기서 일박을 했습니다.
지금은 말도 안되지만
사십오년 전에는
대청봉 정상석 옆에서
비박도 취사도 가능했습니다
무척 더운 여름이었으나
밤기온이 십도 이하로 떨어지고
빗방울이 후둑거리더니
텐트가 찢어질 듯
강풍까지 불어닥쳤습니다
체력은 이미 상당히 소진되었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라면국물을 안주삼아
소주를 나누어 마셨습니다
사방천지는 깜깜했으나
비를 머금은 구름 사이로 간간히
글자 그대로
와르르 쏟아질듯한 별빛,
한번씩 스치우던 달빛...
저 멀리
속초 시내 불빛보다
더 휘황하게 빛나던
자정이 지난 시간의 은하수…
4.
인생이란게
별거 아닌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살면 될 거 같았습니다.
그냥 작은 꿈들 꾸며
학교 졸업하고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고
그러다 보면 세월 가고...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냥 사는 것
그것 만으로는 답해주지 못할
그 무엇도 느껴졌습니다
그게 답니다.
산에서 느꼈던 위안과 격려를,
막연한 답들을,
산에서 다시 느껴 보자는…
5.
<조지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타고난 미성과 재능을 가진 성공한 가수
부와 명예, 좋은 남편과 착한 아이
이 모든 걸 가진 언니 조지아,
그런 언니에 비해 모든 게
조금씩 (남이 보기엔 많이) 모자란
동네 싸구려 클럽 무명가수 동생 새디,
영화를 본게 오래 전이라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영화 후반부에 그런 대사가 있습니다
언니에 대한 열등감에
마약과 문란한 삶의
자학 속에서도
조금씩 스스로를 발견해 가던 새디에게
누군가 질문을 던집니다
“재능도 실력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노래 부르는 데 집착하느냐?”
새디는 대답합니다.
“그건 당신 생각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좋으면 할 수도 있는거지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사족을 달 필요가 있을까요?
이 간단한 명제,
이것이 내가 산에 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