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로의 주인공, 의병장 박광옥
2009년, 광주에 회재로라는 도로 이름이 생겨난다. 남구 칠석동에서 시작하여 서부 농수산물도매시장과 풍암 저수지, 원광대 한방병원을 지나 남구 백운동 동아병원 앞에서 대남로와 연결되는 도로다. 넓이 뿐 아니라 약 13킬로미터인 길이도 광주에서는 가장 길다. 그럼에도 도로명이 왜 회재로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도로의 주인공이 된 회재 박광옥이 아직 일반인에게 낯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회재 박광옥(1526~1593)은 중종 21년 광주 선도면 개산리(현 서구 매월동 회산)에서 사예 곤의 아들로 출생한다. 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러 그 선행이 널리 알려진다. 10세 때 조광조의 제자였던 남원 출신인 정황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한 후 21세인 명종 원년(1546)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친다. 그러나 그의 관직 진출은 매우 늦다. 명종 11년(1556)에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연 개산송당에 머물면서 제자를 기르고 성리학만을 탐구한 결과였다.
선조 3년(1570), 45세의 늦은 나이에 학행으로 천거된다. 그의 첫 발령지는 내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종 9품직의 내시부 교관이었다. 그 뒤 선조 7년에 종부시주부로 승진되고, 운봉현감에 발령된다. 부임하기 직전 실시된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1577년에 그는 운봉 현감시절 그 유명한 황산대첩비를 오늘의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운다. 황산대첩비는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가 운봉읍 화수리의 황산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완전히 섬멸한 대첩을 기린 비다. 그런데 400여 년을 버텨오던 이 비는 일제의 민족 혼 말살 정책에 의해 1945년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1957년, 파손된 비석들을 한데 모아 다시 비각을 세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파비각이다. 회재의 왜구와의 인연은 이 때 이미 운명되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년인 임진년에 다시 쳐들어 온 왜군과 직접 맞닥뜨린다.
이후 그는 전라도사, 충청도사, 영광군수, 밀양도호부사, 나주목사 등의 외직과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성균관직강, 춘추관기주관, 성균관 사예지제교, 사첨시정 등의 내직을 거친다. 사헌부 지평 시절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사행의 중책을 수행한다. 그가 외직인 수령으로 나갈 때 가장 신경 썼던 일 중의 하나는 향교를 손질하여 그 고을 자제들에게 학문을 강독하는 일이었다. 운봉현감 시절에도 영광군수, 밀양부사가 되어서도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데 온힘을 기울인다. 그가 영광군수 시절에 성균관을 모델로 세운 향교는 호남 최대 규모였다.
그의 선행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감동시킨다. 운봉의 현민들은 그를 잊지 못해 그의 치적을 돌에 새겼으며, 용암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제향까지 지낸다. 영광과 밀양의 군민들도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운다. 그의 강학열은 영광군수와 밀양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광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면서도 이어진다. 선영이 있는 풍암리 운리사에 강학당인 숭본당을 세운다. 숭본당의 건물은 바뀌었지만, 그가 직접 쓴 현판 ‘崇本堂(숭본당)’은 지금도 운리사에 남아 있다.
그가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낙향한 것은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난 선조 22년(1589), 그의 나이 64세였다. 사헌부 지평 시절(1581), 정여립의 이조전랑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을 탄핵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3년 뒤 임진년(1592)에 왜란을 맞는다. 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김천일, 고경명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것을 약속하고 의병 모집 활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고령과 노환으로 출전할 수 없게 되자,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의병의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달한다. 당시 의병들에게 그의 역할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는 호남 최초로 의병장이 된 나주 출신 김천일의, “대군이 출전하여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면 가히 믿을 바가 없는 것인 즉 의병이 잘 싸우고 못 싸우는 것은 오로지 선생에게 달려 있다.”는 편지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후 그는 광주목사로 부임한 권율을 도와 국난의 극복에 큰 공을 세운다. 회재로가 생겨나고 운리사가 건립되는 등 오늘 회재 박광옥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다. 의병 활동의 공로를 인정한 의주 행재소는 그를 승정원 판교에 이어 나주목사에 제수한다. 불편한 몸으로 고을 인심을 수습하다 다음해인 1593년,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당대를 함께 산 광주 출신의 고봉 기대승과는 소년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고봉은 그의 1년 후배였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의지교로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한다.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과 제봉 고경명과도 우애가 깊었으며, 23살이나 차이가 난 풍영정의 주인 김언거와의 사이도 돈독했다. 극락강의 뱃길을 따라 풍영정을 자주 찾은 이유였다.
고봉과 회재가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고 있었음은 광주 향교의 흥학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560년 광주목사 유경심이 향교를 중수하여 학풍을 일으키자, 회재는 제도와 학규를 바로잡아 생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다음, 사전과 노비를 향교의 비용에 보탠다. 향교의 중수를 기념하여 흥학비를 세울 때 고봉은 비문을 짓고, 회재는 비석의 뒷면에 문장을 새긴다. 이는 당시 고봉과 회재가 광주의 대표적인 학자였음을 알게 해준다.
회재는 당대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가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남인의 거두인 허목이 쓴 비문의 다음 글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비문에 “선생은 심덕이 매우 후하며 온화하고 근엄하여 세인들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1999년 운리사가 세워지자 운리사묘정비를 쓴 한국 고전번역원 원장인 박석무는 “학향이자 의향인 광주의 상징적 인물이던 선생은 살아계시던 당시에 옥 같은 마음과 옥 같은 용모, 이름까지 옥이어서 삼옥이라고 불렸다.” 라고 쓰고 있다. 옥 같은 마음은 운리사와 회재로의 주인공 박광옥이 당대에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박광옥이 남긴 흔적
회재 박광옥, 그는 죽어서도 지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사후 10년 만인 선조 35년(1602)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벽진사가 벽진 마을 뒤에 세워진다. 벽진사는 벽진서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숙종 7년(1681)에 충장공 김덕령을 추가 배향하면서 의열사로 사액된다. 의열사가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의해 훼철되자, 1927년에 회재만을 기리는 운리영당이, 1999년에는 서구 풍암동에 운리사가 건립된다. 그의 사당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이곳저곳으로 옮겨지지만, 그에 대한 후손과 지역민들의 사랑만은 지극했다.
그가 태어난 매월동에는 회재가 40세 되던 1566년 매월과 벽진 지역 주민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쌓은 개산방죽이 남아 있다. 회재는 이 방죽 언저리에 조그마한 정자 하나를 짓고 수월당이란 현판을 단다. 회재는 이 정자에서 고경명, 기대승 등과 함께 시회를 열기도 했고, 선도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는다. 회재가 쌓았던 개산방죽은 지금 연꽃으로 가득 차 있고 인공 섬과 나무다리가 만들어져 시민들의 힐링처가 되어 있다. 나무다리 끝 무렵에 회재가 시회를 열고 향약을 실시했던 수월당이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방죽 언저리에 그를 기리는 회재 선생 유허비가 두개나 서 있다. 하나는 단기 4303년에, 또 하나는 최근에 세운 것이었다.
회재유집과 유집의 목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3호)도 운리사 목판각에 남아 있다. 유집에는 회재의 시 299편과 잡저, 상소 등 총 6편과 부록인 연보와 행장, 상소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1799년, 종 8대손인 박성일에 의해 서문 없이 첫 목판본 유집이 간행된 후, 1983년에 또 홍직필과 김호영의 서문과 강인환의 발문이 추가되어 유집이 발간된다. 지금 현존하는 회재유집은 이것이다.
그의 사위였던 예조정랑 유사경이 쓴 행장과 남인의 거두 허목이 쓴 묘비문, 한국 고전번역원 원장인 박석무가 쓴 운리사 사당의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운리사묘정비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흔적이다. 이런 흔적과 기록들이 남아 전하고, 그의 학덕과 절의 정신이 추앙되면서, 그는 광주에서 가장 길고 넓은 도로명인 회재로의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