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항일루트 2 : 단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1909년 10월18일, 보로실로프(현 슬라비얀카)를 서성거렸다. 그 때 연추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음이 울적하고 초조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하오.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고 있을 생각이 없어 떠나려는 것이오.”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 “다시 안 돌아오겠소.” 작별인사를 나누고 기선에 올랐다.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계동학교 앞 이치권 집을 찾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남몰래 “소원하는 일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기뻐하였다. (옥중 자서전-안응칠 역사 중에서)
아르쫌 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길은 시원했다. 푸틴 대통령의 동방정책 덕분이란다. 러시아는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프리모르스키(연해주)를 손에 쥐었다. 꿈에 그리던 부동항을 얻어서 그랬을까. 도시 이름을 ‘블라디(정복하다), 보스토크(동쪽)’라 했다. 시내 중심가는 한국인들로 북새통이다. 작년에만 20여 만 명을 넘었다. 해양공원과 독수리전망대, 혁명광장, 영원의 불꽃, 러시아 정교회 같은 관광지는 줄을 서야 할 정도다.
하바로프스카야 26A 신한촌 기념비를 찾았다. 한인들은 1863~4년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 왔다. 초기에는 크라스키노 주변의 지신허에 머물다, 점차 연추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블라디보스토크 개발 붐이 일자 1874년부터 대거 이주를 시작했는데, 그 때 이 땅을 해삼위(海蔘崴)로 불렀다. 첫 집단촌은 개척리였다.
신한촌은 러시아 측이 개척리를 폐쇄하자 1911년 새롭게 조성한 집단촌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이상설, 이동녕, 신채호, 홍범도 등 항일 지도자들도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한인은 어림잡아 1만 명을 웃돌았다. 연해주 신한촌과 만주 명동촌(연변자치주 용정시)은 해외 2대 항일기지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서울스카야 2A'(СЕУЛЬСКАЯ·서울거리)라는 도로판이 신한촌의 흔적을 알려준다.
기념비는 화강석 기둥 3개, 작은 돌 8개, 제단으로 구성돼 있다. 기둥은 남, 북, 고려인(또는 해외동포)을, 작은 돌은 1937년 강제이주 중앙아시아 정착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화환을 올리고, 신한촌의 항일 투사들을 기억하며 묵념-.
쇠락한 아파트 촌으로 변한 옛 신한촌을 거닐며 그를 떠 올렸다. 안중근은 느닷없이 왜 블라디보스토크로 왔을까. 유숙했던 집 주인 이치권, 이토 만주시찰을 확인해준 대동공보사와 안중근은 어떤 관계일까. 그는 왜 우덕순에게 의거를 제의했나. 발걸음은 어느새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 흘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 종착역이자 1907년 이상설 헤이그 특사단이, 1909년 안중근 일행이 떠난 기차역이다. 모스크바까지 9288km, 6박7일의 여정, 60여개 역을 지나야 한다. 대합실 벽면에 부산역과 자매결연 표지판이 부착돼 있다. 하필, 부산역일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역에서 발발한 항일투쟁은 안중근 의거와 광주학생독립운동인데, 나주-광주역, 하얼빈, 블라디보스토크를 묶어 자매결연했다면 더 좋았을걸….
기차역은 여객선 터미널과 맞붙어 있었다. 터미널로 들어서자 잘라토이 로그(금각만)와 현수교가 확 들어온다. 러시아 태평양함대 군함 몇 척이 정박해 있다.
이 터미널로 안중근도 도착했을까. 그는 슬라비얀카에서 배를 타고 하루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틀을 보낸 뒤 21일 늙은 도둑을 잡으러 하얼빈으로 떠났다.
다시 안중근 미스터리가 떠올랐다. 그럼, 그는 단 이틀 만에 이토 격살을 준비했단 말인가. 안중근은 자서전과 일제 신문(訊問)에서 대동공보사에 들러 이토 소식을 듣고, 의거를 결심한 뒤 여기저기를 돌며 경비를 마련하고, 그날 밤 우덕순을 만나 의거를 제의했다고 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논문 ‘안중근과 최재형’에서 “안중근은 우덕순과의 공모 사실, 1908년 동의회 국내 진공 참여, 단지 동맹 결성 사실 등은 일본의 집요한 추적에 밀려 방어하는데 실패했다”면서 “다만, 대동공보 관계자들의 관여사실, 최재형과의 관계를 숨기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그는 신문 뿐 아니라 자서전에서 조차 의거의 전모를 숨기고자 했다. 아직도 만주, 연해주에서 동지들이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기에 어떻게 든 그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렇기에 신문과 자서전에 기대서는 이토 격살의 총체적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토 히로부미 격살은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이하 블라디 지회)의 담대한 프로젝트였다. 미국 항일단체인 공립협회는 1908년 이강, 김성무를 연해주 지역에 파견, 지회 설립에 나섰다. 이강은 그 해 9월29일 블라디 지회를 설립하고, 11월18일 기관지로 대동공보를 창간해 편집장을 맡는다. 공립협회는 1909년 2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 국민회로 확대 재편되는데 국외 조직도 자연스럽게 국민회로 계승된다.
안중근은 1908년 7~8월 무렵 동의회 의병의 국내 진공 패배로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연해주 의병 열기도 식어갔다. 러시아가 의병활동 금지 정책을 취한데다, 최대 후원자였던 최재형의 지원 난색, 이범윤 파와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안중근은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안중근은 1908년 9월 공립협회 블라디 지회에 가입했다. 단지동맹의 연추 지역 의병 무장투쟁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축으로 한 조직운동으로의 전환이 아니었을까.
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동하 선생'(2008.10) 자료에 따르면 공립협회 블라디 지회 회원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부친 유경집 등이다. 국민회로 확대된 이후 △최재형(동의회 등 연해주 항일운동 대부) △유진율(대동공보) △이치권 △차석보 △기산도 등도 가입했다. 1909년 말에는 프리아무르주에만 12개 지회 3000여명이 활동했다.(러시아 조사보고서)
하얼빈 의거의 주역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경집(유동하의 부친)은 모두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 핵심멤버들이었다.
이토 격살의 기획실행은 대동공보사 지도부가 맡았다. 보훈처의 유동하 자료를 보면 1909년 10월 이강, 정재관(친일 미국인 스티븐슨 처단 관련인사) 등 국민회 원동위원들과 대동공보사 인사들은 이토의 만주 시찰 정보를 파악한 뒤 이토 처단을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애국심이 출중하고 백발백중의 명사수인 공립협회 멤버 안중근이 추천됐다. 이강 선생은 “내가 안중근을 안 것은 그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해삼위에서 청년단사찰 간부로 있을 때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강은 바로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냈고, 안중근은 바로 달려와 의거 실행 논의에 참여했다. 자서전에서 밝힌 갑작스런 블라디보스토크 행은 바로 이강 편지 때문이었다.
이강의 안중근 호출은 우덕순의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어느 날 밤이 좀 깊어진 다음에 대동공보 편집국장 유진율씨와 동 주필 이강 씨가 나를 찾아 왔습네다. 그들은 이번 좋은 기회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내 놓았습니다. 나는 동지를 기다리네? 누구?, 안(安)?. 그렇지 그 사람하고 의논해 보겠네. 그럼 얼른 안을 부르게. 걱정들 말고 가만히들 있기만 하게. 우리들이 해 볼거니. 이렇게 대강 말하고 흩어졌습니다.”라고 밝혔다. (안중근의사 자료집 중 우덕순 선생 회고담)
대동공보사 지도부의 의거 실행은 우덕순 회고와 독립기념관 홍일교 학예사의 글에서도 재차 증거된다. 홍 학예사는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우덕순’을 통해 ‘1909년 10월20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에서 유진율, 이강, 안중근, 우덕순, 정재만 등 7명이 이토 처단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면서 “안중근이 자진해 실행 책임을 맡았고, 우덕순에게 거사에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고 확인했다.
하얼빈 거사일이 다가오면서 결사단도 결성됐다. 유경집,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등 7명(미 확인 1명)은 ‘7인 동맹’을 결성하고, 구국혁신을 맹세했다. 연추 의병시절부터 안면을 익힌 유경집은 러시아어가 능통한 아들 유동하를 통역으로 보내기로 했다. 대동공보 신문 판매원인 탁공규는 하얼빈에서 지원임무가 부여됐다. 개인별 임무도 하달됐다. 총과 탄약은 이강, 경비는 유진율이 맡았다. 거사 실행 안중근, 우덕순, 통역 연락은 조도선, 유동하-.
하얼빈 의거는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그 지회의 총지휘, 대동공보사 지도부의 기획, 7인 동맹원의 결사로 결행된 민족사 쾌거였다.
1909년 10월21일 오전 8시50분, 안중근과 우덕순을 태운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빠져 나갔다. 이강과 유진율은 두 동지를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 삼천리 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