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Golgotha)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600 m 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한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 마련된 14개 장소는 18세기에 와서야 확정되었으며,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당시에 존재하였던 도로라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갈보리 산 위에...” 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찬송은 이 마지막 길을 목가적이고 조용한 장면을 상상하게 하지만, 늙은 올리브 나무 사이에 있는 구부러진 길을 따라 십자가가 하늘을 향해 높이 서 있는 산까지 올라가는 길을 생각한다면 꿈은 깨어지고 만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이름을 가진 옛 예루살렘의 실제 시가지를 걷다 보면 고통스러운 이미지는 없어지고 매우 소중하고 더욱 의미 있는 순간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장식품을 사라고 외치는 상인들로 매우 소란스럽다. 옛 석조 건물이 한 쪽에 우뚝 서있고 나무로 가득 찬 시골 길 대신에 끝이 없어 보이는 돌 계단이 하늘 높이까지 뻗쳐 있다. 종종 기독교인 방문객들은 이 사실이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인 점에 놀란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목격한 그대로다. 이 때는 유월절 기간 이었으며, 예루살렘은 순례자로 매우 붐비었을 것이다. 이 기간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로마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다(마가복음 15:21).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인들이 이 거룩한 도시에 와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순례하는 것을 신앙의 정표라고 생각하였다.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방문객들은 같은 길을 걷고 있을까? 그러나 그곳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은 이것을 기회로 자신의 이익을 체우기 위하여 이미지를 만들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성스러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즉, 십자가가 잠시 쉬어서 가는 장소가 된 것이다. 이곳에는 14개의 십자가 관련 장소가 있다. 첫 번째 장소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을 내린 총독관저라고 추정하는 안토니 요새다(마가복음 15:15). 현재는 이 거대한 요새에 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더금 더 가면 에코 호모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의 지하실에는 가바타(Gabata)로 알려진(요한복음 19:13) 고대의 판석 즉, 돌로 된 포장도로가 있다. 이 포장 도로 아래에는 예수님을 조롱한 로마의 병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을 헤롯 대왕이 만든 거대한 물 저장소(마태복음. 27: 27-31)가 있다.
순례객들은 고대 유물로부터 현재의 도로 아래 5m까지 십자가의 길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당국에서 몇 년 전에 도로를 유지 보수할 때 이 고대의 돌로 된 길을 발견했고, 당시 이스라엘 당국은 기독교인들이 이 성스러운 장소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새로 도로를 깔았다. 에코 호로 수도원을 지나면 예수님께서 십자기를 진 채 넘어졌던 장소가 나온다. 전통에 따르면 이 일은 여러 번 되풀이 되었으며 예수님은 두 번 넘게 넘어졌다고 한다. 네 번째 장소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넘겨 받은 장소다. 각 장소에는 각각의 사연이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던 고귀한 여인 마리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장소(누가복음 23:27-30)로서 이야기를 끝마치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다음 현재 성묘교회가 위치한 곳에 묻히게 됩니다. 순례객들은 비아 돌로로사를 통해 예수님이 이 도시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순간과 예루살렘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현재의 경로는 여러 경로를 대체하여 18세기 이후에 확정된 길이다. 그 길에는 오늘날 9개의 십자가의 표시가 되어 있다.15세기말 이후 무덤 교회내에 5개의 중요 지점을 포함하여 14개의 지점이 있었다. 비아돌로사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엘리야 카피톨리나의 동서를 연결하는 주요도로중 오늘날 남아 있는 잔재중 하나다. 표준로마 도시계획은 도시 중앙에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가 있어야만 되지만 도시의 중앙에 성전산이 위치하고 있어서 도시의 북쪽에 또하나의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를 계획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 언덕으로 쭉 뻗은 길과 남북으로 연결하는 도로 즉 카르도외에 또하나의 남북을 연결하는 도로가 티로포에온 계곡 라인에 추가 되었다. 두 개의 카르도 도로가 비아돌로사 근처에 있는 다마스커스 성문 옆에서 모아지게 만들었다. 만일 비아돌로사가 계속 서쪽으로 쭉 뻗어 두 개의 카르도와 곁친다면 표준 건물을 건설하기에는 너무 좁은 삼각형 형태의 불록을 만들게 될 것이다.카르도 서쪽에 있는 비아돌로사는 그 동쪽 부분의 남쪽에 건설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남아 있어서 도로의 불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성경 사건의 참여하는 성지순례객들의 참여하였다는 처음의 보고서 나온다. 그때에는 올리브산 정상에서 출발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간 정지하였다가 사자문을 통하여 올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주님 무덤 교회까지 오늘날의 여정과 거이 비슷하게 순례 하였다. 그러나 비아돌로사 자체를 따라 실제로 정지하는 여정은 없었다. 8세기에 이르러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출발하여 통곡의 벽을 거쳐 시온산의 가야바의 집과 당시 프레토리움이라고 생각하였던 하기야 소피아 교회를 경유하여 주님의 무덤까지 가는 것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은 두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하나는 통곡의 벽 위에 있는 교회를 주관하는 파와 동쪽의 언덕에 있는 교회를 주관하는 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여정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시온산에 총독의 관저가 있다고 생각하여 만드는 여정이 있었고 또 하나는 안토니 요새 근처에 총독의 관저가 있다고 생각하여 여정을 만들었다. 14세기에 교황 클레멘트6세는 칙서를 통하여 여정의 일관성을 달성하였다.
성지에서의 카톨릭의 종교적 예식과 방어.유지,지도뿐만 아니라 라틴 순례자들을 돌보는 것과 지도,인도를 통한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의 보호로서 그일을 이행하고 있었다.1350년대 초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은 성묘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빌라도의 집으로 추정하는 곳까지 즉 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의 행적의 반대코스를 공식적인 여정으로 하였었다. 이 여정은 1517년까지 변경되지가 않았다. 1517년에 이르러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은 빌라도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부터 주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간 골고다 언덕까지 주님의 고난의 여정을 따르기 시작하였다.프란시스코 관리의 시작에서, 비아돌로사의 개발은 밀접하게 유럽에서 신앙의 관행에 연결되었다. 수사 마이너는 열정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수단으로서 신앙적 명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들이 만들어낸 시간과 가이드는 유럽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반드시 그러한 신앙적 문헌은 성경에서 비아돌로사의 존재를 확장시키게 된다. 빌라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은 후의 주님에 대한 비난의 시간은 사복음서의 짧은 구절보다 더 간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14세기에 걸쳐서 비아돌로사의 표시된 사이트의 수는 예루살렘에서 실제적인 신앙적 사이트의 수로 표시되게 된다.
순례자에게 표시되는 첫 번째 표시되는 포인트는 예루살렘의 딸과 구레네 시몬과의 만남이었다. 이러한 곳은 베로니카의 집, 시몬의 집, 바리세인의 집,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은 부자의 집, 헤롯의 집 등이 있었다.유럽인들의 상상력과 실제적인 장소와의 협의가 다음 6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비아돌로사의 첫 번재 포인트, 네 번째 포인트, 다섯 번째 포인트 그리고 여덟 번째 포인트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 20세기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서쪽 언덕에 있는 비아돌로사의 초기 경로가 실제적인 경로였음을 확인 시켜주었다. 성경상의 여정으로서 현재의 비아돌로사의 여정은 인접한 안토니 요새에 총독관저가 있다고 가정하에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나 필로처럼 1세기 후반의 작가 요세푸스는 가이사라에서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은 그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헤롯 궁전에 있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으며, 그는 포장도로에서 그의 판단을 수행하였고 그들의 죄가 발견되면 즉시 조치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헤롯 궁전은 서쪽 언덕에 있다고 언급을 하고 있으며 그 궁전은 2001년 야포게이트 시티텔 코너 밑에서 재발견되었다.더구나 그곳은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설된 알레아 카피톨리아 때에는 안토니 요새 가까이 까지 이르는 거대한 노천 풀장이었음이 2001년 고고학 발굴팀에 의하여 밝혀졌다. 2009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시몬 깁슨은 외부 게이트와 내부 막사를 연결하여주는 요새의 와 야포게이트 남쪽에서 포장된 도로를 발견하였다.
안뜰은 약 2m2 정도의 플랫폼을 포함 하고 있다. 총독 관저로서 조사를 하였으나 망루 이상의 것은 없었고 긴 로마의 창으로 보이는 것이 나왔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 의하여 복음서에서 기술한 여정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고대 다른 여정이 발견되어 매치가 되었다. 고고학자 시몬 깁슨에 의해 추적된 경로는 성묘 교회를 향하여 가기 전에 야포 게이트 근처 다윗의 망루 옆에 오래 된 도시의 오스만 벽을 통과, 아르메니아 분기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연구 결과 십자가 못박힌 장소는 전통적으로 인정된 장소보다 약20m정도 착오가 있다고 밝혀졌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통적인 경로는 라이온 게이트 즉 성 스테반집사 게이트 근처에 있는 우마리야 초등학교 내에서 시작하고, 성묘 교회를 향하여 예루살렘 올드 도시를 통해 서쪽으로 길을 만든었다.현재 비아돌로사의 포인트들은 14세기에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믿음의 여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의 여정은 주로 서방 순례자들에 의하여 행하여졌지만 비아돌로사를 따라 주님 성묘교회에서 끝나거나 아니면 겟세마네 또는 시온산까지 가는 여정으로 만들어졌다. 예루살렘에있는 많은 도로의 이름이 자신의 흔적을 영어, 히브리어 및 아랍어로 번역하는 반면, 비아돌로사 이름도 역시 세 가지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화 한 것중 가장 성공한 곳이 바로 비아 돌로사다. 지금은 이곳에 대하여 아무도 물어보거나 이곳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만 아무도 이 대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피 성지 연구소
김 용규 목사
010-3766-2646
예루살렘 현지 연락처 070-4655-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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