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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 그 이유와 방법 (2023년도 강의)
배 정 규 (심리학 박사, 재은심리상담센터 원장)
본 원고는 위 주제로 제가 강의했던 내용을 녹음하여 그것을 녹취록으로 풀고 수정하여 작성한 원고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장으로 옮겨놓았을 때 표현법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당사자들을 언급하는 호칭이 때로는 부적절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 그러한 경우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원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 공부할 내용은 당사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이유를, 둘째 시간에는 방법을 설명하려 합니다.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크게 볼 때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당사자들의 비주장성 때문인데 이 문제를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또 하나는 침습적 반추 때문입니다. 당사자들은 지나간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계속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침습적 반추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려면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과 관련해서는 세 가지를 강조할 생각입니다. 첫 번째 비판단적인 태도로 말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공감적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세 번째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환청과 망상을 경청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거에요. 환청과 망상은 잘 들어주셔야 합니다. 잘 들어주면 환청과 망상이 줄어들고 내용도 바뀌어요. 그런데 이 간단한 원리를 몰라서 병원에 가도 의사 선생님도 이야기를 안 들어주고 또 “환청 망상 얘기는 듣지 마라. 들으면 심해진다.” 이렇게 얘기하고, 상담실에 가도 안 들어줘요. 저도 옛날에 대학원 석사 박사 때 그렇게 배웠고 서울대병원에서 3년 수련받을 때도 “환청 망상 들어주지 마라.” 그렇게 배웠어요. “들어주면 더 심해진다.” 지금도 책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의사 선생님들도 환청 망상 얘기가 나오면 속으로만 “이거 환청이구나. 이거 망상이구나.” 짐작하고 화제를 돌려버려요. 그러면 본인은 얘기하고 싶어도 말을 안 들어주니까 못하고 가족분들에게도 그렇게 일러주죠. “환청 망상 얘기 나오면 그거 가지고 대화하지 마십시오. 화제를 돌리십시오.”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러면 당사자 입장에서는 갑갑한 거죠. 속으로 혼자만 생각하면 더 심해져요. 누군가 들어주면 이게 점점 덜어지는데...... 그래서 이따가 그 얘기도 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 비주장성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비주장성의 문제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병의 원인이 뭐냐고 했을 때 학술적으로 공인된 이론은 취약성-스트레스-대처능력 모형이에요. 조현병, 조울증에 걸리기 쉬운 취약한 뇌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감당하기 버거운 사회적, 환경적 스트레스를 오랫동안 받게 되고, 그것에 대처하는 심리적 대처능력이 부족할 때 문제가 생긴다. 즉 뇌의 신경전달물질체계에 이상이 생긴다. 그래서 발병한다 하는 것이죠. 이게 학술적으로 대다수 학자들이 인정하는 원인론인데, 저도 그 말이 맞다. 취약성-스트레스-대처능력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고, 치료할 때도 그걸 염두에 두고 치료해야한다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덧붙여서 그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순환, 악순환의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당사자들이 조현병 당사자도 그렇고 조울증 당사자도 그렇고 태어날 때부터 얘들은 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려서 키워보면 남들하고 달랐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애들이 환경과 자신이 가진 기질이 잘 맞아 들어가면 선순환이 이루어져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 강점으로 작용해서 어떤 뭔가를 열심히 관찰하고 집요하게 생각하고 등등 이런 것들이 선순환으로 가는데, 이때는 옆집 사람 문제를 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공부하는 공부내용을 가지고 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 분야의 대학자가 되는 것이고, 음악을 가지고 열심히 생각하니까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것이고, 미술을 가지고 열심히 생각하니까 훌륭한 미술가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각각 어떤 분야에 대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 애들인데 이것이 불행히도 선순환으로 가지 않고 악순환으로 가게 되면 관심사가 꽂혀야 할 데 안 꽂히고 엉뚱한데 꽂히는 거에요. 그러면 괜히 옆집 사람 가지고 의심을 하고 학교 친구들을 가지고 의심을 하고 자기 외모를 가지고 신경을 쓰고 이러느라고 정작 신경써야 할 곳에 신경을 못쓴다 이렇게 가는 게 악순환이라는 거에요. 악순환이 가고가고 가다보면 드디어 감당이 안되고, 이렇게 감당이 안 될 때 조현병 환자들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거고, 그래서 이게 조현병이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숨고 밖으로 안 나가려고 하고, 조울증 환자들은 이 위기를 내가 극복해야 된다 해서 뭔가 자기 나름대로 한가지 목표를 정해서 하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온갖 사고를 다 쳐대고, 이런 게 조울증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선순환 악순환 개념으로 볼 때 우리 애들이 악순환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발병한 겁니다. 그리고 발병하고 나서도 자칫하면 이 악순환이 계속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가족들도 이 이치를 잘 모르면 자꾸 당사자를 나무라거든요. 그러면 악순환은 점점 더 심해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과제는 악순환을 어떻게 멈추고 선순환으로 다시 돌려세울 거냐인데,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해야 할 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두 가지가 중요한데, 하나는 가족분들이 당사자의 말을 귀담아 잘 듣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사자 본인이 선순환적인 생활습관 좋은 생활습관을 갖도록 가족분들이 도와주시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 중에서 본 강의는 가족분들이 당사자의 말을 귀담아 잘 듣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방금도 이야기했듯이 저는 조현병 조울증의 문제를 선순환 악순환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당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느냐? 저는 이것을 경쟁사회에 취약한 불리한 당사자들의 특성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요. 경쟁사회라고 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당사자들을 보고 우리 모든 부모님들이 한결같이 우리 애가 착했다고 말씀하세요. 우리 애가 착하다라고 얘기하거든요. 착한 애들이에요. 본인 스스로도 자기가 착하다는 거에 자부심을 갖고 사는 애들이에요. 어떤 애들이냐? 얘들은 거짓말을 못해요.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하고 상대방도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원해요. 거짓말을 하게 되면 자기도 상처받고 배신감 느끼고 이래요. 화목의 욕구가 강해요. 가족들하고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하고 그래서 부모님이 싸운다던지 친구들끼리 싸운다던지 하면 얘들이 다른 형제들보다 다른 애들보다 상처를 더 많이 받아요. 그래서 화목하기를 바라고 그러다가 보니까 남들에게 양보를 하는 거에요. 자기 것이라고 고집을 안 부리고 양보를 하고 등등 이렇게 되는데, 그러니까 착하다는 게 뭐냐면 착하다가 보면 잘못하면 손해만 보고 사는 수가 있다는 거에요. 착하면은 내 것 못 챙기고, 예로써 애들끼리 뭐 나눠 먹는데 나는 뒤에서 있다 보면 딴 애들이 두 개씩 가져가 버리고 내 것은 없고, 이래 되면 내 것이 왜 없냐고 달라고 요구하고 어떻게든 내 것을 찾아 먹어야 하는데, 얘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을 꾹 다문다는 거에요. 속이 상해도 입을 꾹 다물어요. 어려서 부모 말 잘 들으려고 하고 선생님 말 잘 들으려고 하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속으로 꾹꾹 쌓여간다는 거에요. 화가 쌓여가는 거에요. 속상한 게 꾹꾹 쌓여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걸 참고 그렇게 살아온 거에요. 착하다는 말이 달리 말하자면 비표현적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비주장적이다, 자기주장을 못한다, 그래서 자기주장을 못하고 살다가 결국은 이게 골병들었다, 착하기 때문에 골병들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당사자들이 기본적으로 착한 애들인데, 착한 성품은 좋은 특성이지만 이 착한 성품에 주장성이 곁들여지면 선순환으로 간다는 거에요. 착한데도 가끔 자기주장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주장을 잘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 잘못 생각하면 막 소리 지르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 걸 주장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주장이 아니에요. 주장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상대방이 거슬리지 않게 편안한 음성으로 따박따박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줄 알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면 상대방의 의견도 귀담아 잘 들어볼 줄 알고, 그랬더니 내 생각하고 저 사람 생각하고 이렇게 다르네, 그러면 절충점이 뭘까? 하고 절충점을 찾을 줄 알고, 그걸 가지고 상대방과 타협할 줄 알고, 그렇게 되면 내가 원하는 걸 100을 가져오지는 못하지만 매 번마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걸 40이나 50이나 60은 가져올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면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게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서 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못하게 되면 삶에서 내가 원하는 걸 못 가져온다는 거에요.
우리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비주장적인데, 비주장적인 게 두가지가 있어요. 비주장적인 정도에도 등급이 있어요. 제일 낮은 등급이 입을 다무는 거에요. 침묵하는 거.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고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인간관계가 불편하면 잘라서 끊어버리고, 이게 제일 하수예요. 근데 우리 당사자들은 거의 다 이렇게 지내왔다는 거에요. 자기가 힘들면 속상하면 뭐가 힘들었는지 속상한지 말해주면 좋겠는데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하거든요.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리거든요. 그리고 가족들이니까 못 잘라내서 그렇지, 가족 이외의 친구는 다 잘라내거든요. 얘는 이래서 안 되고, 쟤는 저래서 안 되고, 이런 식으로 다 잘라버리거든요. 이러니까 이게 비주장적인 거에요. 그랬을 때 이렇게 하고 있는 애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애를 어떻게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애로 만들거냐? 이게 관건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입을 꾹 다물고 살았더니 드디어 감당이 안 된다. 어느 날인가 드디어 화가 터져 나오기 시작해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해요. 이게 언제 시작되느냐? 보통 발병 전부터 소리 지르고 물건 집어 던지고 하다가 조현병 발병하는 애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발병하고 나서 이런 문제가 생겨요. 치료과정 중에 순하던 애가 한 번도 부모한테 안 대들던 애가 어느 날부터 부모한테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쾅 닫고 컵을 집어 던지고 하더니, 급기야는 입만 열었다 하면 부모원망, 욕을 하기 시작하는데 생전 듣도보도 못한 욕을 부모에게 해대고 그러고 화나면 자칫하면 집안의 기물을 다 때려 부수고 엄마를 때리고 아빠를 때리고 이런 식으로 감당이 안되는 선으로 막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제 이야기가 이게 당연하다는 거에요. 입 꾹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소리 지르고 욕하는 게 훨씬 나은 겁니다. 소리 지르고 욕하면 “아 이제 얘가 병이 낫기 시작했구나. 고름이 채였던 게 이제 터져 나오는구나.” 생각하고 그 고름을 짜주셔야 된다는 겁니다. 소리를 지를만큼 지르도록 내버려두면 한 2년이 지나면 그다음에 말로 할 줄 아는 애가 되요. 그래서 이 고름을 쭉쭉 짜줘야 되는데 소리지를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 당사자가 난폭하게 나올 때는 말로서 욕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느냐 아니면 물건을 때려 부수고 사람을 때리느냐에 따라서 대처를 달리해야 해요. 폭력과 폭행이 나오느냐 아니냐? 말로 하느냐에 따라 대처가 달라져요. 폭력과 폭행이 나오면 무조건하고 112에 신고하십시오. 그래서 경찰을 부르면 한번 두 번 세 번 경찰을 부르면 그 다음부터는 경찰을 부를까봐 겁이 나서 못때려부셔요. 그리고 때려부수는 정도가 심하면 무조건 정신병원에 입원시키셔야 됩니다. 사람을 때렸다면 무조건 일주일이라도 입원시켰다가 꺼내야 됩니다. 입원시키십시오.
그 공식을 알게 해줘야 합니다. 사람을 때리면 무조건 입원이다. 기물을 심하게 때려 부수면 무조건 입원이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는 내가 물건만 부수면 무조건 경찰을 부르더라. 이게 공식으로 성립이 되어야 해요. 폭력이 나올 때는 그렇게 하시고, 말로 하는 거는 다 내버려 두십시오. 실컷 말하라고 내버려 두십시오. 말할 때 말하지 마라라고 자꾸 누르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시고 그래 너 속상한 거 한번 얘기해봐라. 실컷 이야기하게 내버려 두고 그때는 무슨 욕을 하더라도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해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두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해요. 하나는 당사자가 화를 내고 막 난리를 칠 때는 참고 꾹 참고 잘 듣는 거. 그다음 또 하나는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이나 지나고나서 반드시 물어보는 거. “어제 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칠 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니? 네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뭐냐? 왜 화가 났는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로 한번 해봐라.” 이렇게 말로 해봐라 하고 물어보셔야 하는데 이걸 왜 못 물어보느냐? 다시 애가 소리를 치고 난리를 칠까 봐 겁이 나서 못 물어보시는데 다시 또 소리 지르고 난리치면 또 들어주고 그 다음날에 또 물어보고 이렇게 하면 되요. 그러면 어느날인가 당사자가 편안한 음성으로 말을 할 줄 알게 되요. 이렇게 되면 된 거에요. 항상 이 두가지를 할 줄 알아야해요. 소리 지르고 화낼 때는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거. 실컷 소리 지르고 화내게 내버려두시는 거, 그다음에 지나고 나서 반드시 물어봐주시는 거. 이 두가지를 하실 줄 알면 되요.
아무튼 착한 성품인데 이왕이면 주장적이면 참 좋은데, 착한 성품인데 비주장적이면 악순환으로 간다는 거에요. 비주장적일 때 침묵, 회피와 고립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당사자의 주장이 증진되는 단계는 침묵하던 당사자가 공격적인 표현이 나오면 이거 좋아지고 있는 거라는 거에요. 겉보기에는 이거 나빠졌다. 흔히 부모님들이 이런 원리를 모르면 애가 화내고 하면 “얘 병이 심해졌다. 재발했다.” 하고 입원시켜요. 그러면 의사선생님도 애가 재발했다 하고 약을 더 높여요. 그러면 애가 드디어 말문이 터져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확 눌러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말하려고 하던 게 다시 꾹 닫혀버리고 그러면 애가 완전히 침묵하는 애로 되돌아가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본인 생각 얘기해보라고 하면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좋아요. 괜찮아요.” 이 소리만 하는 애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공격적인 표현이 나오면 “아~ 좋아졌구나.” 해서 이 세월을 2~3년 견뎌주면, 잘 견뎌주면 그다음에 애가 이전 같으면 소리 지르고 할 것을 소리 안 지르고 “엄마,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앉아서 따박따박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해요. 이게 주장의 시작이에요. 말로써 따박따박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것. 그러고 나면 자기 할 말 다 하고 나서 “엄마도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한번 해봐라.” 하고 엄마가 얘기하면 잘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것, 이렇게 돼서 서로 간에 타협점을 찾고, 이렇게 되면 주장적이 되는 거에요. 집에서부터 이런 게 되면 밖에 나가서도 이게 되겠죠. 중간에 이렇게 반드시 화내는 단계가 있는데 잘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사자의 주장성이 커집니다.
당사자의 주장성을 키워주는 것은 자기노출이에요. 결국은 자기 속마음을 표현해야 한다는 거죠.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욕구를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 자기노출을 격려해주고 공감해줘야 된다는 거에요. 제가 하는 비유가 있는데 “젖은 수건은 햇볕에 말려야 됩니다. 젖은 수건을 장롱 속에 넣어두면 썩습니다.”라는 비유입니다. 우리 당사자들보고 “제발 입 좀 떼십시오.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십시오.”라고 저는 강조합니다. 당사자들이 해야 할 것은 말로써 자기 속마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욕구 원하는 걸 표현해야 해요. 당사자는 말로 표현해야 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잘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 두 개가 맞물리는 거예요. 지금 이 시간의 강의주제가 “당사자의 말에 귀기울이기”인데, 왜 귀기울이기이냐 하면 가족이 잘 들어주면 가족이 경청을 하면 당사자가 자기 속을 자꾸 털어내놓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 그게 치료가 되는 거에요. 당사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마어마한 화도 쌓여있고 불안도 쌓여있는데 당사자가 이 속마음을 다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당사자의 공격적인 자기표현 방식을 허용해줘야 한다고 강조하는 거예요. 당사자가 막 소리지를 때 부모님은 마음속으로 “괜찮아. 소리질러도 괜찮아.” 하셔야 하고, 부모에게 온갖 욕을 다해도 “그래. 괜찮아. 뭐 욕하는거야 어쩔수 없지.” 하시면서 들어주셔야 해요.
저는 당사자들에게 “병이 낫고 싶으면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말문을 여는 용기, 또 하나는 사회적 틀에 매이지 않는 용기”라고 얘기해요. 가족분들도 마찬가지로 우리 당사자 병이 낫도록 해주려면 당사자의 말문이 터지게 해주셔야 해요. 당사자의 말수가 많아지면 무조건 좋아지는 거에요. 심지어 입만 열었다 하면 원망이고 욕이고 화내고 그래도 말수가 많아지는 건 무조건 좋아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셔야 해요. 말수가 많아지면 무조건 좋아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당사자의 몸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 무조건 좋아지고 있는 거에요. 이것만 보십시오. 다른 거 보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말문이 트여야 해요. 어떻게 저 말문을 틔워줄까? 당사자가 입만 열었다 하면 가족은 박수를 쳐줘야 되요. “그래. 더 말해 봐라. 더 말해 봐라.” 욕을 해도 잘 됐다 생각하고 “네가 하고 싶은 말 실컷 말해 봐라.” 이렇게 해야된다는 거에요. 말문을 트이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 다음에 사회적인 가치기준에 매이지 않게 해줘야 한다. 남들하고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남이 어떻게 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행복한 게 우선이지. 나는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 없다. 너 하나 행복하면 그걸로 족하다.” 이런 메시지를 주셔야 해요.
두 번째 이유 – 침습적 반추를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조현병, 조울증 당사자들의 큰 특징 중 한 가지는 생각이 많다는 거예요. 특히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계속해서 그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안 좋은 일, 힘들었던 일이 있었던 거에 대해서 계속 기억이나 생각을 떠올리는데, 이러한 생각이 비의도적으로 자동적으로 침투적으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게 침습적 반추에요. 자다가도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요. 공부하려다 말고 공부가 안 되요. 이 생각이 나서. 옛날에 친구들이 나를 놀렸던 거, 주변에서 내가 망신당했던 거, 대학시험에 떨어졌던 거, 등등 이런 안 좋은 기억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계속 이 기억 때문에 괴롭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힘든 일을 겪는다라고 할 때 겪으면 사람들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반추라고 하는 것은 되새김질인데,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소화가 안 되면 다시 되새김질하듯이 생각이 소화가 안되면 생각을 되새김질 하는 거에요. 이게 되새김질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자꾸 되새김질이 되는 걸 침습적 반추라고 해요. 반면에 내가 끄집어내서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게 숙고적 반추에요. 그런데 연구결과를 보면 이렇게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자꾸 생각이 나는 침습적 반추는 고통을 가져와요. 그리고 내가 의지적으로 떠올려서 생각하는 거는 이건 과거를 점검해서 앞으로를 대비하려고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이건 성장을 가져와요.
내가 지금 이렇게 저절로 저절로 반복해서 안 좋은 생각이 나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떻게 하면 성장으로 가느냐?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노출입니다. 자기 속마음을 다 꺼내서 이야기하면 침습적 반추가 멈춰지고 이후에 숙고적 반추를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 지지입니다. 옆에서 잘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면 침습적 반추가 멈춰지고 숙고적 반추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낫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이 두 가지예요. 자기노출과 사회적 지지예요. 이 두 가지가 결정적입니다. 자기노출, 사회적 지지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당사자들은 현재 악순환 속에 빠져있는데 이 두 가지가 악순환을 멈추고 선순환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당사자들이 현재 악순환 속에 빠져 있다는 게 어떤 뜻이냐? 당사자들이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과정은 크게 볼 때 무너지는 단계와 다시 일어서는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치료가 시작된다고 해서 바로 다시 일어서는 단계가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치료가 시작된 이후에도 한 동안 또는 오랜 기간 무너지는 단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시 일어서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무너지는 단계에서는 흔히 사회적 붕괴가 옵니다. 학교 다니던 애들이 학교를 못 다니고 직장 다니던 애들이 직장을 못 다니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붕괴가 오면 필연적으로 심리적 붕괴가 초래됩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가 못난 사람처럼 느껴지고 자기 인생은 여기서 끝난 거 같고 등등. 이런 심리적 붕괴가 와요. 이 심리적 붕괴가 오면 필연적으로 침습적 반추가 온다는 거에요. 그래서 힘들었던 기억이나 생각이 자동적 침투적 반복적으로 떠오르는데 이것이 또다시 심리적 붕괴를 가속화시키고 그러면 또 사회적 붕괴가 더 가속화되고 그러면 별 일 아닌 걸로 또 재발하고 이 악순환의 고리 속에 빠집니다. 침습적 반추의 특징은 “심리적으로 과거에 살고 있다.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억울함 초라함 비참함 속상함 이런 감정을 느낀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한다. 원망하고 남탓하고 병탓을 한다.” 과거에 살고 있다는 거에요.
악순환에서 왜 못 빠져 나오느냐? 이 악순환 속에 뱅뱅 돌게하는 방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해물이냐? 부모의 잘못된 태도, 본인과 가족의 무지, 잘못된 치료관행, 정보의 부재, 제가 요약해서 한마디로 무지의 벽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무지가 병보다 더 무섭다. 무지 때문에 기회가 박탈된다.”는 거에요. 어떻게 해야 이 무지의 벽을 통과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악순환 속에 갇혀서 악순환 속에서 뱅뱅 돌고 있다는 거예요. 무지의 벽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와서 교육을 들으시라는 거에요. 가족분들이 교육을 듣고 당사자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배워야 되고 알아야 됩니다. 당사자의 회복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하나가 무지의 벽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말문을 닫게 만드는 방해물이에요. 말문을 닫게 만들고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해물이 있어요. 그래서 말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말문을 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노출을 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해요. 자기노출이 갈림길입니다. 이것이 선순환의 출발점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걸 다 끄집어내야 됩니다. 방청소 집청소하는 원리에 비유하자면 엉망인 집을 청소하려면 방에 있는걸 싹 끄집어 내라. 끄집어 내고 다시 정리하면 정리가 된다. 안 끄집어 내고 자기 안에만 꾹 넣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가 당사자에 따라서 쪽팔려서 창피해서 이 얘기는 절대 안 할거야. 평생 누구에게도 안 할거야 이렇게 비밀을 갖고 있는 당사자들이 있는데, 비밀이 있으면 안에서 썩어들어가요. “비밀이 없어야 된다. 자기 속의 것을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다 끄집어 내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된다.” 라는 얘기입니다.
자기 노출이 갈림길입니다. 자기노출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기탐색이 되고 자기이해가 됩니다. 자기노출을 해도 역시 악순환으로 가기도 하고 선순환으로 가기도 해요. 악순환으로 가면 침습적 반추가 계속되고 심리적 붕괴, 사회적 붕괴, 재발,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를 도는 것이고, 선순환으로 가면 자기노출을 함으로써 자기탐색이 되고 자기이해가 되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현재의 상태, 못난 모습이 받아들여집니다. 이렇듯 수용이 되면 다시 자기이해가 촉진되고 자기탐색이 촉진되고 자기노출이 촉진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자기탐색, 자기이해, 수용이 촉진되는 선순환의 고리가 돌아갑니다. 악순환과 선순환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 자기노출입니다. “자기노출을 해야 된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에요. 악순환을 멈추고 선순환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자기노출과 사회적 지지인데, 자기노출은 당사자가 해야 되고, 사회적 지지는 가족이 해야 되는 거에요. 그리고 당사자의 자기노출을 촉진시켜주기 위해서 가족이 해야하는 것이 경청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야기가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이유인데,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가 비주장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또 하나가 침습적 반추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3가지 방법 — 비판단적 태도, 공감적 이해, 자기결정권 존중
이번 시간에는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인데요, 비판단적 태도, 공감적 이해, 그리고 자기결정권 존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경청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자기노출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잖아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자기노출을 해야 하고, 가족분들 입장에서는 경청을 해주셔야 합니다. 경청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경청을 하는 과정에서 비판단적으로 듣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판단적으로 들으면, 내 생각을 가지고 저건 옳아, 틀렸어, 이렇게 들으시면 말이 안 들려요. 그러니까 내 생각 없이 무슨 이야기든 판단을 하지 않고 들으셔야 그때부터 비로소 경청이 되는 것이고, 이렇게 경청을 하게 되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공감이 되고, 공감이 되면 수용이 되고, 수용이 되면 존중이 되고,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면 다시 또 경청을 더 잘하게 되고, 이렇게 선순환의 사이클이 돌아갑니다.
경청의 핵심은 첫 번째 비판단적이어야 된다. 또 하나가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경청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해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가족분들이 당사자의 행동을 보고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납득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하는 거를 이해를 하시려고 하면 딴 방법이 없습니다. 들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죠.
비판단적이라는 용어와 이해, 그리고 존중, 이 세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시면 경청을 잘할 수 있습니다. 판단적인 것과 비판단적인 것이 어떻게 다르냐? 판단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당사자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증상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잘못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에요. 고치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한다. 정답을 부모가 갖고 있다는 거예요. 상대방을 안다고 가정한다. 이런 것이고요. 이에 비해서 비판단적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알려고 하고 이해를 하려고 한다. 부모로서는 정답이 없다.” 하는 거예요.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한다. 이런 것이 비판단적이다 하는 거예요. 아무튼 비판단적인 태도로 대하셔야 됩니다. 옳다 그르다가 없어야 됩니다. “자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번 해 봐라. 내가 잘 들어볼게.” 하시고, 듣는 데 주력하셔야 됩니다.
이해한다는 게 뭐냐? 경청을 하는 이유가 이해를 하기 위해서인데, 이해에도 수준과 깊이가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해에는 크게 3가지 종류의 이해가 있는데, 그것은 진단적 이해, 치료적 이해, 그리고 공감적 이해입니다. 세 가지를 비교해서 얘기하자면, 가장 표면적으로 겉으로만 이해하는 게 진단적 이해, 그것보다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게 치료적 이해, 그리고 가장 깊은 이해가 공감적 이해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진단적 이해는 뭐를 가지고 진단을 내리느냐? 나의 지식을 가지고 진단을 내리는 거예요. 전문가들 같으면 예로써 DSM-5에 쓰여진 지식이라든지 정신병리학 지식이라든지 이런 지식을 가지고 당사자가 말을 하면 저 말은 이런 말이네, 저건 망상이군, 과대망상이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해를 하는 거예요. 이와 비슷하게 부모님들도 진단적 이해를 할 수 있죠. 저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저 말을 하는 거 보니까 애가 아직도 많이 어리네, 애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네, 저게 한참 멀었네, 저래 가지고 사회생활을 못할 텐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게 진단적 이해예요. 그러면서 내가 말은 안 하는데 속으로만 “참 한심하다.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러고 있으면, 이게 진단적 이해 수준에서 이해를 하는 거에요.
이걸 말로 꺼내서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내가 속으로만 짐작하는 게 아니라 말로써 “자네가 또는 당신이 지금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환청이 있는 거 같으네요. 지금 그거는 피해망상이 있다는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들이 자꾸 의심이 되고 그런다는 이야기네요.” 이런 방식으로 내가 판단한 내 판단을 상대방에게 말해주면 이게 치료적 이해예요. 내 딴에는 도와주려고 내가 이해한 바를 이렇게 말로써 전달을 해준다는 거예요. 우리 가족분들로서도 “네가 나이에 맞게 좀 생각을 하면 좋겠다.” 이렇게 충고하는 것도 내 딴에는 도와주려고 내 생각을 말로 전달하는 것인데, 이것이 치료적 이해 수준에서 당사자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거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공감적 이해는 뭐냐? 기본 전제가 완전히 달라요. 진단적 이해나 치료적 이해는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내가 안다.”라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그런데 공감적 이해는 “난 알 수가 없다.”예요. 뭐냐면 이런 게 현상학적 태도인데, 현상학적 입장에서는 우리가 바깥세상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뭐 이렇게 색깔이 보이지만 사실은 물리적 세계에는 색이라고 하는 건 존재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물리학 시간에 배웠듯이 파장만 존재해요. 긴 파장 짧은 파장 그런 게 우리 눈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이런 색깔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물리적 세계에는 파장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걸 색으로 느끼는 거예요. 이렇듯이 저 외부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를 내가 받아들이려고 하면 반드시 나의 오감을 거쳐야 돼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단지 오감을 거치는 것만이 아니라 오감을 거치면서 나의 기억과 대조해서 해석을 해야 돼요. 뭔가가 앞에 보였다. 기억과 대조해 보니까 사람 얼굴이네. 누구 얼굴이지? 기억과 대조해 보니까 엄마 얼굴이네.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예요. 이게 지각이에요.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예요.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바깥에서 보이는 것에 대해서 내가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것은 반드시 나의 해석을 거쳐야만 된다는 거예요. 누가 나한테 막 뭐라 하는데, “저게 무슨 소리지?” 들어보니까 “나를 칭찬하는 소리네.” 이렇게 해석을 하면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거고, “나를 욕하는 소리네.” 이렇게 해석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거예요. 그다음에 똑같이 욕하는 소린데 “저 사람이 나를 되게 무시하네.” 이렇게 되면 기분이 상당히 나쁘고, 똑같이 뭐라고 욕하는데 “저 사람 평소에 안 그러던 사람인데 왜 저러지? 저 사람 집에 뭔 일이 있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보네.” 이렇게 해석하면 많은 게 달라지잖아요? 내 감정, 내 행동이 달라지겠지요? 나의 해석에 달렸다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죠 “나는 내 남편을 안다. 내 아내를 안다. 내 자식을 안다.” 이렇듯이 “안다.”라고 생각하는데 현상학적 입장에서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은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해석한 그 사람의 모습이에요. 내가 해석한 그 사람의 모습을 아는 거예요.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인식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해석을 거쳐야 해요. 나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도 상대방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어요. 무슨 소리냐면 앞에 뭐가 보이는데 해석을 안 거치면 뭐가 보인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해요. 앞에 뭔가 보이는데 뭐지 하고 잘 보니까 “아! 엄마 얼굴이네.” 한다는 것은 해석을 거쳐서 엄마 얼굴이라고 아는 거예요. “엄마가 지금 웃고 있네.” 해석을 거쳤으니까 웃고 있다를 아는 거예요. 해석을 거쳤으니까 화가 난 거를 아는 거예요. 해석을 거쳐야만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안다는 거예요. 저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이 화가 났나 보다.” 우리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화가 났나 보다.” 하는 것이 나의 해석인지 또는 진짜로 저 사람이 화가 났는 건지는 알 길이 없잖아요? 나로서는 나의 해석만 아는 것이니까. 나는 해석하기를 “저 사람이 화가 났나 보다.”로 해석했는데,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저 사람한테 물어봐야죠. “내가 보기에 지금 당신이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화가 났습니까? 아닙니까?” 물어보면 본인이 “예, 저 화난 거 맞아요.”라고 하면 “아, 화가 났나 보다.” 하면 되고, “아니 그게 아니고요. 왜 그렇게 보셨어요?”, “아니 표정이 이래저래 화가 난 것처럼 보여서요.” “지금 배가 아파 가지고 잠시 인상 썼을 뿐이에요.” 이렇게 되면 “아, 내가 잘못 봤구나. 내 해석이 틀렸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뭐냐하면 항상 본인한테 물어본다, 본인이 말해주기 전에는 나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해석이 옳은 것인지 또는 그른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모른다가 되는 거예요. 이런 자세로 듣는 게 공감적 이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의 확인을 거쳐야 되는 것이지요.
아까 말했던 진단적 이해, 치료적 이해하고 구분해서 말하자면 이렇죠. 진단적 이해는 내가 듣고는 “참 한심하네. 저 사람 화가 났네.” 이러고 마는 게 이게 진단적 이해예요. 당사자들의 경우에 친구하고 통화했는데 “친구가 나한테 기분 나쁜 소리를 하네. 나를 무시하네.” 이렇게 판단하고 친구관계를 딱 잘라버려요. 일방적으로 내가 진단적으로 이해하고 내 멋대로 이해하고는 딱 잘라버려요. 그다음에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가는 게 말을 하는 거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왜 나를 무시하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왜 표정이 그래?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나를 대하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치료적 이해라고 보시면 돼요. 보통은 우리가 이렇게 한단 말이에요. 그러고는 내가 이해를 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안다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안다는 게 뭐냐? 잘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이해한다는 게 뭐냐? 잘 생각을 해보라는 거예요. 보통의 경우에는 상당수 경우에 상대방한테 물어도 안 보고 나 혼자 속으로 “아 그러네. 역시 저 사람은 그래.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줄 리가 없지. 딱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게 있어서 잘해주는 척했던 거네.”라고 입 꾹 다물고 나 혼자 그렇게 판단하고 연락을 딱 끊어버린다. 아니면 건성으로 대한다. 이렇게 나 혼자 판단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거죠. 아니면 그거를 내가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수준에서 “내가 정말 친구니까 내가 말해주는 건데 너 그렇게 행동하지 마라. 세상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하고 내가 말해주는 수준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들 설득하는 것도 “네가 나이에 맞게 좀 처신을 해라.”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다 “내 판단이 맞다.”가 여기에 다 들어 있잖아요? 내가 본 모습이 맞고 내 판단이 맞다가 들어있는데 단지 입을 다무느냐, 아니면 입을 열어서 말해 주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입을 다물어도 마찬가지고 입을 열어서 말을 해주어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옳다. 내 생각이 맞다. 내 판단이 맞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판단적인 태도예요. 이에 비해서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는 게 비판단적 태도예요. 예로써 내가 한심하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모른다.”로 가게 되면 “내가 볼 때 저 사람이 기분 나쁜 거 같은데?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근데 나로서 알 길이 없지.” 그러면 본인한테 물어봐야죠. “지금 기분이 나쁘세요? 방금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맞나요?” 이렇게 물어봐야죠. 물어봤더니 본인이 “네, 맞아요.” 하면은 맞는 거고, “아니에요.” 하면은 거기서 다시 또 돌아가는 거죠. 이게 공감적 이해예요. 즉 무슨 말이냐면 공감적 이해라고 하는 건 “나는 모른다. 답은 본인이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우리가 대화를 할 때에는 판단적인 태도로 임할 수도 있고 비판단적인 태도로 임할 수도 있는데 비판단적인 태도로 임해야 한다. 그 다음에 또 이해를 하는데 내 관점에서 이해를 하려고 하면 안 되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된다. 이것이 공감적 이해다. 제가 늘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라고 강조하는데, 이것이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거다. 하는 얘기예요.
아무튼 경청을 하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공감이 되고, 공감이 되면 수용이 되고, 수용이 되면 존중이 되고, 그러면 또 다시 더 잘 경청하게 되고, 이렇게 선순환의 싸이클이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뭐가 존중이냐?”라고 했을 때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주는 것이 존중이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병이 낫는 과정에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당사자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삶의 지향점을 정하는 건 당사자 본인의 과업이다 하는 거예요. 자기결정권이라는 게 인생의 큰 목표를 정하는 거, 어떤 인생을 살거냐? 공부하는 인생을 살 거냐? 아니면 음악하고 그런 인생을 살 거냐? 하루 종일 놀러 다니는 인생을 살 거냐? 책 읽는 인생을 살 거냐? 이렇게 어떤 인생을 살 거냐 하는 건 자기 인생이니까 자기한테 선택할 권리가 있다. 작게는 오늘 하루 아침에 눈 떠서 오늘 하루 어떻게 살까? 이거를 결정할 권리가 저한테 있다. 어떤 옷을 입을까? 그걸 결정할 권리가 저한테 있다. 이걸 인정해 줘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결정권이란 자신의 몸과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권리예요. 내 몸을 어디에 둘 거냐? 이게 자기 결정권이예요. 내 몸이 오늘 하루 집에 있을 거냐? 밖에 나갈 거냐? 일어서서 있을 거냐? 앉아 있을 거냐? 누워 있을 거냐? 내 몸을 어떻게 할거냐? 이게 자기 결정권이에요. 또 하나 내 시간을 어떻게 쓸 거냐? 내 시간을 잠자는 데 쓸거냐? 노래 부르는데 쓸 거냐? 공부하는데 쓸 거냐? 이걸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 몸과 내 시간에 대한 권리가 나한테 있다. 이게 자기결정권이에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살지, 어떤 것을 달성할지 이거는 자기한테 달려있다. 이거를 인정해 주는 것. 이게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준다는 거예요. 존중이란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주는 것을 존중이라고 해요.
환청과 망상에 대한 대화법은 오늘은 자세히 말씀드리기에 시간이 촉박해서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유튜브에 이 내용을 자세히 강의해서 올려두었습니다. 제 유튜브를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유튜브에서 “배정규” 또는 “촛불추천”이라고 검색하시면 제 동영상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 공부한 내용은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와 방법입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비주장성의 문제와 침습적 반추 때문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도록 하려면 당사자는 용기를 내어서 적극적으로 자기노출을 해야 하고 가족분들은 끈기 있게 경청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경청의 방법으로는 비판단적 태도, 공감적 이해, 그리고 자기결정권 존중이 중요하다. “나는 모른다. 본인의 속마음은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본인의 인생이니까 본인에게 자신의 뜻대로 살 권리가 있다.” 이러한 자세로 임하시면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제 강의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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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7/6일) 강의를 하면서
읽어 주셨는데 내용이 좋아서
다시 한번 저 혼자 읽어보았습니다.
좋은 강의자료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