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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bDgEHlUaXw" title="신비신학 02 배경"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윌리엄 존스턴 신비신학 사랑학 l 제1부 l 그리스도교 전통 01 배경(Ⅰ) 01-01 신약성경 예수님께서는 여러 곳을 여행하시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시는 등 바쁜 사목활동을 하셨지만, 종종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또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도 하였고, 기도문을 남겨주셨다. 복음서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과 신뢰의 메시지는 우리를 관상의 삶으로 이끌고 있다. 사도 바오로도 기도에 대하여 여러 권고를 하였고, 스스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신약성경에는 기도 중에 황홀경을 체험하였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등장한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2코린 11,14) 즉 안타깝지만 기도의 길을 가파르고 돌투성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산에 오르려는 이들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격려하는 가르침, 곧 기도신학, 신비신학이 기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귀웅 토마입니다.
윌리엄 존스턴 신부님의 신비신학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제일 앞 제1부 그리스도교 전통이라고 되어 있고요,
제1장 신비 신학의 배경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1:03
먼저 신약성경에서 신비신학,
신비 기도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곳을 여행하시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시는 등
바쁜 사목 활동을 하셨지만,
종종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제가 다른 강의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강의 참고로 하시면 될 것 같고요,
아무튼 예수님은 자주 종종 바쁜 가운데에서도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기도하셨다라고 하는 것
이 기도가 예수님에게
당신 자신의 신원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한다 라고 하는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확대하고 공고히 하는 계기였다라고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셨다라고 하는 것
신학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한편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셨고
또 기도문을 남겨주기도 하셨죠.
제자들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기도를 가르쳐 줍니다.
그게 '주님의 기도'라고 해서
우리가 지금까지도 바치는 기도로 남아 있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여러 가지 일들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했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다.'라든가
이런 여러 가지 말씀들,
즉 복음서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과 신뢰의 메시지는
우리를 관상의 삶으로 이끌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깊이 있게
아 저분이 정말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그래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깊이 바라보려고 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누구나 가질 수가 있겠죠.
그래서 이 예수님, 특별히
복음서가 이 신비기도의 가장 근원적인 배경이 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기도에 대하여 여러 권고를 하였고,
스스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신약성경 읽어보면
기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쭉 나옵니다.
또 신약성경에는
기도 중에 황홀경을 체험하였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등장한다.
바오로 사도가
어떤 사람이 두 번째 하늘 세 번째 하늘 뭐 올라갔다.
뭐 이런 이야기 있죠,
그 외에
바오로가 눈이 먼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라든지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런 황홀경을 체험한 이야기들, 이런 것들도 등장을 합니다.
또 코린토 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을 합니다."(2코린 11,14)
그래서 하느님만 우리에게 빛인 것이 아니라
사탄도 마치 하느님을 느끼는 거 같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면서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온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안타깝지만 기도의 길은 가파르고 돌 투성이다라고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올바른 기도
'하느님을 만나러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보호자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산에 오르려는 이들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격려하는 가르침,
곧 기도신학, 신비신학이 기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기도의 길에 나아가서 어떠한 어려움들을 겪게 된다.
기도가 올바로 되는지는 어떻게 어떤 것들을 가지고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내용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신비신학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될 겁니다,
01-02 오리게네스와 <아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역사에서 신약성경이 쓰이던 시대 이후 우선 주목할 만한 이는 오리게네스이다. (185~254) 그가 쓴 <아가 해설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신랑과 거룩한 사랑을 불사르는 신부에 대한 노래인 아가서." '왕이 나를 당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오리게네스는 아가서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후 기도의 여러 스승들이 기도에 대하여 아주 일관된 가르침을 표현하였다. 곧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기도의 핵심이요 중심이 바로 사랑이다." |
5:10
그리고 두 번째로
오리게네스와 그의 저서 <아가서 해설서>입니다,
<아가 해설서>,
이것이 우리 신비신학에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역사에서 신약성경이 쓰이던 시대 이후
우선 주목할 만한 이는 오리게네스이다.
이분은 254년에 돌아가셨으니까 3세기 초의 분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아무튼
이 오리게네스가 쓴 <아가 해설서>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여기에서 신비기도에 근원적인 설명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를 해설하면서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신랑과
거룩한 사랑을 불사르는 신부에 대한 노래인 아가서."
아가서에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의 사랑의 고백들이 나오게 되는데,
신랑은 하느님,
신부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이렇게 이해를 하면서 이 해설을 해 나갔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왕이 나를 당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신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인 우리들을 당신과 하나가 되도록 초대하셨다.
우리가 거기에 기꺼이 나아가야 된다라고 하는 내용인데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설명의 가장 초기의 모습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오리게네스가 하면서
이것이 신비신학의 이후에 계속되는 내용들에 첫 시작인 듯이
그렇게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아가서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았던 것이다라고
존스턴 신부님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후 기도의 여러 스승들이
기도에 대하여 아주 일관된 가르침을 표현하였다.
곧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기도의 핵심이요 중심이 바로 사랑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오리게네스가 이 아가 해설서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 사랑으로 하나가 된 이것으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도에 관한
이후 이 그리스도교에서 20세기 가까이가 흐르는 동안엔
아주 중요하게 이야기 되는 내용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추구해 나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바로 이것을 우리가 오리게네스에게서 확인할 수 있고
이것이 이후 세대에 계속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01-03 부정신학 不定神學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379 니사의 그레고리오 - 니사의 주교 +395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오 - 주교 +390 • "하느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살아계신 신비 중의 신비" •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 심지어 사고하는 능력까지도 버려야 한다. • 여기서 부정신학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게 된다. 5세기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등장. 5세기 말. 이후 부정신학 전통에 직접 영향 끼침.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각하기를 멈추어라!" "이성을 사용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긍정신학과 함께" "우리는 하느님을 알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모른다." <무지의 구름> 1370년 경 "하느님에 대해 온전히 생각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능력으로 하느님을 직접 파악할 수 있다." |
08:32
그리고 이어서 부정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합니다.
부정신학이란 하느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하느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라고 하느님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엇 무엇을 부정할 때
'하느님은 육체를 가진 분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은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런 방식으로 밖에
하느님을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부정신학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이런 부정신학이 등장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 계신데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카파도키아는 지금의 튀르키예, 예전에 터키라고 부르던
그 튀르키예에 카파도키아라고 하는 지역이 있는데요
그 지역에서 사셨던 세 분의 교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분들은
(로마 대제국이 동방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하게 되죠.
그러고 나서 그곳에서 그리스도교가 아주 번성을 하게 되는데)
그때엔 아주 유명했던 세 분들입니다.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오입니다.
이분들은 대부분 (379년이니까요)
4세기 후반이죠, 4세기 후반에 사셨던 분들인데
체사레아의 바실리오는 '동방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분입니다.
이 바실리오의 동생이 바로 니사의 그레고리오라고 있고요,
같은 지역에 살았던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오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대부분 같은 시기에 살았던 분입니다.
이분들이 기도에 관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게 됩니다.
이 체사레아의 바실리오가
'동방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또 그 동생 그레고리오도 형을 따라서
수도자로서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니사의 주교'가 되죠.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오도 신학적으로도 뛰어나서
3위일체의 교리서를 내기도 했는데
이분 역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신비신학이 발전하게 되는
그런 배경으로 작용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카파도키아 세 교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살아계신 신비 중의 신비이다.
하느님을 빛으로 찬란한 빛으로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우리가 눈을 뜨고는 알아볼 수 없는 분으로
그래서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어둠으로 느껴지는 그런 신비 중의 신비다.
하느님을 온전한 지식으로 알 수가 없다.
이 세 분들이 모두
신학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이 하느님에 대한 가장 커다란 신비는
인간의 지성으로 온전히 다 파악할 수 없는 분이다라고 하는
이런 표현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
심지어 사고하는 능력까지도 버려야 한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온전히 만날 수 없다.
하느님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 우리의 감각 능력들을 다 버려야만
하느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부정신학이라고 하는 표현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물론 이분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부정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고
이후에 이분들을 돌아가시고 몇십 년이 지난 이후에
<부정신학>이라고 하는 표현 이런 단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가 이렇게
신비기도 신비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2:35
그리고 이어서 디오니시오라고 하는 바오로 사도의 제자,
그 이름을 가져다가 쓴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요,
디오니시오라고 저자가 되어 있지만
사실은 디오니시도가 아니기 때문에 가짜이다라고 해서
위 디오니시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가 쓴 신비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400년대 말, 즉
5세기말에 등장하게 되는데
신비신학이라고 하는 책, 이것이
기도를 가르치는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획기적인 금자탑과 같은
그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이 이후 부정신학 전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여기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각하기를 멈추어라!"
앞의 세 교부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죠.
물론
"이성을 사용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긍정 신학"도 필요하지만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 이성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멈추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겨야 된다라고 하는 내용들을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모른다."
이런 내용들이 나오게 되는데요.
이것이 이후에 계속적으로
하느님은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이러이러한 분이 아니다라고 하는
그런 부정신학 전통의 아주 이정표와 같은
그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1370년경에
영국에서 '무지의 구름'이라고 하는 책이 쓰이게 되는데요,
이 <무지의 구름>이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 신학을 그대로 인용을 합니다.
여기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에 대해 온전히 생각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능력으로 하는 이를 직접 파악할 수 있다."
신비신학이 나오는 내용들을 가져다가 인용하면서
자기의 가르침을 덧붙이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5세기말에 등장한 책이 1370년경에
14세기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해 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01-04 사막교부들(3-4세기)과 수도생활 - 신비신학, 신비기도의 모태 신심 깊은 영웅적 고행자들로 끊임없는 기도를 추구함 → 에바그리우스 "기도란 모든 개념의 억제다." - "순수한 기도" 요한 카시아누스 "생각 없는 침묵, 이미지 없는 기도, 곧 말 없는 기도" 베네딕도 이후 수도원 "항상 시편을 입술에, 항상 그리스도를 마음에" ▷ 전례와 침묵기도의 결합 → 동방전례에서 더욱 발전 |
15:19
다시 앞세기로 돌아가서
사막의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3세기와 4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은데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없는 사막이라고 하는 곳을 찾아가죠.
거기서 나는 기도를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과만 지내겠다.
그래서 아직 죽지 않아서 이 세상에 살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과 함께 사는 천상의 삶을 살고 싶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게 되죠.
그들이 바로 사막의 교부들이고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굉장히 많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이 널리 이름을 떨친
어떤 스승들 아래로 모여서 함께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수도 생활의 시작이 되죠.
그래서
'이 사막의 교부들과 그들의 수도생활이
이후 기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에 아주 큰 계기가 되고
그래서 신비신학과 신비기도의 모태가 되는 이들이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신신 깊은 영웅적 고행자들로 끊임없는 기도를 추구한다.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려고 했던 겁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을~!
그래서 이들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남기게 되죠.
그중에 유명한 분이
에바그리우스 폰테쿠스, 요한 카시아누스라고 하는
두 분이 계십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란 모든 개념의 억제이다.'
생각을 멈추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서 '순수한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관상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순수한 기도를 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시고요
요한 카시아누스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이분은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생각이 없는 침묵, 이미지 없는 기도 곧 말없는 기도를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생활성서에서 나온 스승님 기도란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책이
그 책에서 이 두 분의 기도에 대한 내용들을 번역해 놓았습니다.
원하신다면 이 책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사막의 교부들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함께 있고자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려고 하지요.
그때에 그들은 점점 이 사막에서의 기도이니까
당연히 말이 없는 침묵 가운데서의 기도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또
성경을 짧은 구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기도,
사고를 멈추고 나의 온 마음으로 나의 온 지향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노력,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지게 되죠.
그래서 이 사막의 교부들이 관상기도의 시작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18:34
이후 베네딕도는 사막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의 산으로 가죠.
내가 사는 곳에서 산을 간다는 이야기는
이 세상을 떠나서 - 우리가 출가라고 하죠. -
이 세상을 떠나서 사막까지 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없는 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지내겠다라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수도원이 사막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고 있는 그 근처로 옮겨 가게 됩니다.
그래서 베네딕도가 우리 서방교회의 수도회에서
거의 시초라고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겠죠.
이 베네딕도는 시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시편을 입술에 달고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간직해라.'
라고 하는 이런 가르침을 남기게 되는데
그래서 이후 수도원에서는
시편을 가지고 기도하는 전례 기도,
지금 우리의 성무일도와 같은 이런 전례기도들이 아주 중요했죠.
그래서 기도는
시편으로 입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임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라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침묵기도가
또한편 중요한 것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 전례와 함께 침묵기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즉 말과 침묵이 함께 있으면서 기도하는 것
이런 전통들이 발전해 오게 되죠.
특별히 이 전례의 중요성은 동방교회에서 더욱더 발전을 하게 됩니다.
물론 침묵기도도 마찬가지지만
전례는 동방에서 더욱더 화려한 모습으로 발전을 해 나가게 됩니다.
아무튼 이 사막의 교부들과 수도자들이 이어서
신비기도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01-05 서방의 관상 서방교회에서의 "관상" "관상기도" 관상기도는 무지의 구름 안에서 행하는 정적이고 단순한 기도이다. 즉 논리나 사고가 배제된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정적인 관상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 또는 무아경 혹은 마음의 자각이 일어난다. 혹은 현존을 느끼는 단순한 감각이 점점 커져서 사랑의 불 혹은 어둠의 밤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01-06 결론 오리게네스에게 신비신학은 사랑의 신학이었고,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디오니시우스에게는 신비의 신학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비신학이 지닌 은총의 차원을 강조했다. |
20:37
그렇다면 여기에서 서방교회
- 베네딕도를 중심으로 한 이후의
수도공동체에서 전해진 기도에 관한 가르침,
관상과 관상기도, 이것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겁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관상기도는 무지의 구름 안에서 행하는 정적이고 단순한 기도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 수 없고
하느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죠.
하느님의 은총 안에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관상기도란 무지의 구름 안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나 사고를 배제한 기도, 그래서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긴 가운데에서 머무는 단순한 기도이다.'
라고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정적인 관상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 또는 무아경 혹은 마음의 자각이 일어난다.
혹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단순한 감각이 점점 커져서
'사랑의 불' 혹은 '어둠의 밤'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후 수백 년 동안 이 부정신학과 또 신비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이 관상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겁니다.
02 배경(Ⅱ) 교부들은 신비기도를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02-01 성경 성경을 읽는 것은 교부들에게 있어 종교적 체험이었다. 마리아와 마르타 (루카 10,38~42)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마리아는 말과 개념을 넘어서 예수의 신성이라는 무한한 침묵에 도달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경 구절은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님 말씀이었다. '받아 먹어라. 내 살이다. 받아 마셔라. 내피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여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종교 체험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
22:03
이어서 신비 신학의 배경을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에 이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두 번째 장에서는
교부들은 그러면 이런 신비 기도를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을까?
하는 측면에서 신비신학의 배경을 이야기를 합니다.
먼저 가장 첫 번째는
성경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배운다고 하는 것이죠.
당연할 겁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교부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체험이었습니다.
성경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니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그것은 곧 종교적인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22:55
특별히 복음에서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가 있죠?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시게 되는데
그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데 분주해 있었죠.
그때 마르타가 이렇게 바쁜데 마리아더러 도와주라고 좀 해주세요
라고 했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을 하였다."
이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에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라고 하는
가르침의 근거를 찾게 되죠.
그래서 조용히 머물러 있었던 마리아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물러 있었던
이 마리아의 모습에서
말과 개념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신성이라는 무한한 침묵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예형을 바라보게 되었던 거죠.
모범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기도를 한다면
마리아와 같은 모습으로
침묵 가운데에서 그분 곁에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
이런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겠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4:22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경 구절은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라고
존스턴 신부님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시죠.
'받아먹어라. 내 살이다.
받아 마셔라. 내 피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여라.'
이것이 이후에
우리 미사에서 그대로 반복이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삶 전체를 관통하게 하는 그런 말씀으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종교 체험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사를 통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고 나서는
언제나 그분과 함께 지낸다.
나는 이렇게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나도 그분 안에 계신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도 그분이 돌아가셨듯이 나도 죽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듯이 나도 그분과 함께 부활하면서
그분과 하나가 되고 싶다라고 하는
이러한 마음들을,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이 신비신학에 있어서 신비기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되는 구절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5:49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이후에 '신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된다.', '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라고 하는 이것이
그리스도교 영성에 있어서 아주 큰 중요한 내용이 되는데요,
바오로 사도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그래서 기도란 바로 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분의 영과 나의 영혼이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후의 가르침, 이후 영성에 아주 중요한 획을 긋게 되죠.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가 또
중요한 신비신학의 배경으로 작용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02-02 헬레니즘 02-03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신비'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신비>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겨자씨 숨겨진 보물 등. 복음에서 신비는 하느님 나라이다. 바오로 바오로 사도에게 신비란 인간이 되신 하느님,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 부활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분,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시다. - 영지주의자들의 심오한 앎에 대적 - 신약의 신비는 밀교의 신비로운 예식 같은 것이 아니다. |
26:43
그런데 여기서 한번 살펴봅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겨자씨, 숨겨진 보물 등
이렇게 복음에서 신비는 하느님 나라를 뜻한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게 신비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라고 하는 것,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비천한 인간으로 이 세상이 오셨는데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은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계시고 또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하는 것,
바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오로에게 신비란 바로 예수님 자신,
예수님이 바로 그에게 신비 자체가 됩니다.
그분의 삶이, 그분의 모든 것이
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을 알려주는 신비로 작용을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당시에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
이 하느님에 대한 심오한 앎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는
그런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들과 대척점에 서서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역사상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던
그런 바오로의 노력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신비는
신비스러운 어떤 행동, 밀교에서의 신비로운 예식 이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아챌 수가 있습니다.
02-04 교부들이 말하는 <신비>와 <신비적> 이는 종교적 체험과 관련이 있다. 육적인 것과 반대되는 영적 체험을 신비적이라고 부른다. |
28:32
그리고 교부들이 말하는 <신비>와 <신비적>이라는
단어를 설명을 하는데요,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비> 또는 <신비적>이라는 말은
종교적 체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옛날 초대교회에서의 많은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어떤 신비적인 체험들을 했었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것 하고는 다른 영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신비적>이라고 부른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02-05 최초의 <신비신학> / 위 디오니우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돕는 데 있다. "사랑하는 티모데오여, 신비적 관상을 신실하게 수련하려면 모든 감각과 지적인 활동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존재와 비존재까지도 전부 버리시오." "완전하고 절대적인 무아경에 의해서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된 당신은 존재를 초월하여 거룩한 어둠의 빛 속으로 순수하게 들어 올려질 것이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하느님의 명칭들>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고 하느님께 빠져들게 되므로,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가 갈망하는 삶, 곧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 : 모든 재산, 논리적 따짐, 위로, 종교적 체험 등등 → 무(無) 이런 이해는 후에 <아가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영적 혼인"으로 발전한다. |
29:14
이어서 최초의 신비 신학
앞에서 이야기한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책을
다시 한번 언급을 합니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돕는 데 있다.
그래서 제자로 하여금
어떻게 기도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친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책으로 이렇게 전해져 옵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티모데오여, 신비적 관상을 신실하게 수련하려면
모든 감각과 지적인 활동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존재와 비존재까지도 전부 버리시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게 바로 신비기도, 관상기도의 이후에 가르침으로
계속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죠.
나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 나의 지성적인 모든 활동
이런 것들을 전부 멈추고
하느님의 힘에 하느님의 은총에 나를 내어 맡겨서
침묵 중에 기도하라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
그래서 존재와 비존재까지도 전부 버리시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신비신학의 아주 중요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무아경에 의해서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된 당신은
존재를 초월하여
거룩한 어둠의 빛 속으로 순수하게 들어 올려질 것이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다른 책 <하느님의 명칭들>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거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고 하느님께 빠져들게 되므로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가 갈망하는 삶, 곧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하는 일
하느님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관상 기도를 하는 일들은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목적이다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여기에서 이 자기 자신이란 예수님께서
그 젊은 청년에게 너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라고 했던
내가 가지고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재산을 다 포함만 하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할 수가 있겠죠.
그리고 논리적인 따짐
나의 이성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모든 것
이성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모든 것
이런 것 역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또 육체적이건 감각적이건 영적이건
모든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이런 마음이 있는데
이런 것 역시 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체험조차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잃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이것을
결국 무(無) 라고 표현을 했던 거죠.
나중에 십자가의 성 요한이 無無라고 했는데
이렇게 나를 완전히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 하느님께 빠져들고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또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런 이해는 후에 이 아가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영적 혼인이라고 하는 말로까지 발전하게 되죠.
이것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사랑에 일치시켜 주신다.
그때 우리는
-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래서 내가 완전히 무(無)가 될 때 -
하느님께서 하느님에 의해서
나는 하느님과 영적인 하나 영적으로 혼인할 수가 있다라고
이러한 식으로 나중에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죠
02-06 첫 번째 위대한 대화 유대 그리스도교는 곧바로 그리스 문화와 만나게 되었고, 거기서 신비신학이 자랐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각자의 문화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 그리스인들은 이방인들답게 위대한 삶의 신비에 접근하는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었듯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문화에서 성령의 활동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도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