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길목에서 봄눈을 치우며
청야 김민식
이른 새벽부터 뿌연 하늘에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나의 집 앞 꽃밭의 희끗희끗한 잔설(殘雪)더미 위에 맥없이 내린다. 봄 시샘을 하는지 봄의 길목을 죈다. 오후쯤이면 게 눈 감추듯 사라질 봄눈이지만 봄눈은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다. 허기야 5월에도 가물에 콩 나듯 캘거리 춘설은 있다. 그러나 봄눈은 대체로 4월 중순이면 끝난다. 작년 늦가을 초설(初雪)을 삽질하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마지막 춘설이라니 가고 오는 빠른 세월을 누가 붙들어 맬 수 있을까? 여린 봄 냄새가 이미 온 몸을 나릇하게 적시며 나의 가슴속으로 바싹 다가온다.
그렇게 서슬이 시퍼래서 기세등등하던 동장군(冬將軍)도 연약한 봄기운에 맥없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전례 없는 강한 시눅바람이 3주째 강행군하며 봄을 몰고 온다. 간간히 영상 16도의 초여름 같은 날씨로 기세등등하지만 밤 기온은 여전히 영하 3~4도를 오르락내리락 계절의 틈새로 방황한다. 동장군 패잔병들이 밤새 행패를 부렸는지 아침 햇살은 따스한데 어린 싹들의 곤혹스럽고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벌써 집 주위를 소리 없이 점령한 봄의 전령사들은 물러설 줄 모르고 봄의 노래를 부른다.
긴긴 겨울 기간 동안 움츠렸던 것들이 기지개 펴며 부활한다. 수놈 로빈새의 청아한 짝짓기 노래 소리가 쩌렁쩌렁 미명未明의 공기를 가른다. 부활 주일 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매년 6시 동틀 무렵 노래하던 로빈새가 공해의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새벽4시부터 노래하기 시작한다. 부지런하다. “찌르찌르 찌…륵” 자기의 영역을 점령하고 확인한 수놈 로빈새 들의 암놈 유인 노래 소리는 천상의 소리다. 하늘나라가 내려온다. 이 세상에서 저렇게 고운 목소리가 또 있을까? 민들레보다 일찍 꽃망울 틔우는 부지런한 꽃밭의 할미꽃!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쫑긋거린다. 나는 할미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글썽거려 남몰래 눈물 훔치곤 하는 계절도 봄이다.
해발 1000M 넘는 고원지 삶의 담백함도 좋아하지만, 사계절 내내 변덕 심한 일교차日較差에서 체험하는 자연의 경외심을 사랑한다. 록키 산마루 만년설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자세를 경건하게 만든다. 오일 경기의 호황이 빗어낸 호사스러운 집들과 차 소음소리에 넌더리 날 법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어찌 사계절의 정겨운 것들을 이겨낼 수가 있으랴? 사계절 중에서 봄을 특별히 사랑한 건 나이 육십을 넘기고부터다. 계절이 바뀌고 해를 거듭할수록 생의 기운은 점점 시들어 가니 서글퍼진다. 허지만 봄의 길목에 서서 심호흡을 하면 생기(生氣)가 돋아나고 삶의 용기가 솟는다. 봄의 생기는 어린 아이같이 해맑은 것, 마음의 탐심을 저만치 밀어내니 마음이 가벼워 진다. 빈 마음엔 사랑과 자비가 자연스레 스며들고 관용의 지혜가 자리 잡는다.
봄을 사랑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이리라. 나는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을 봄에 충전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쁨을 봄에 느낀다. 로빈새는 수백 km를 날아오고 가는 도중에 절반 정도가 맹금류에 잡혀 죽는 슬픔 속에서도 제집을 찾아와서 노래한다. 식물들도 싹을 틔우며 해방을 노래한다. 나는 이 모든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고 약동의 기쁨을 노래하는 자연에 심취하는 생활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삶이 족하다.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더 달라고 욕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봄의 축복은 역경과 고통을 싸워 이겨낸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기회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늘 품도록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캘거리 이른 봄의 진미는 역시 봄눈이다. 캘거리 춘설春雪! 어찌 금상첨화가 아닐까? 북쪽의 찬바람과 싸워 이기고 시눅바람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내려온다. 삼사월에 오는 캘거리 봄눈은 대개가 도둑눈이요 가랑눈이다. 봄의 전령사답게 비릿한 봄 냄새의 향기를 품고 온다.
지난 사월 초순이었던가? 10여 년만의 강설降雪이라 했다. 10cm의 적설량을 동반한 제설除雪의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 가게 일을 마치고 자정 늦게 집 앞에 도착하니. 가루눈이 밤바람 타고 오르락내리락 현란한 춤을 춘다. 집 앞 가로등 불빛을 무대 삼아 밤눈이 멋진 춤을 추고 있다. 수천수만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오며 앞마당에서 어울려 춤을 춘다. 아직도 수북이 쌓인 눈과 꽁꽁 언 땅 때문에 치우지 못한 성탄 조형물들, 지난해 설치한 산타클로스 군상들, 전구박이 사슴들, 내 키만 한 높이의 나팔 부는 게이브리얼 천사 상像을 12월에 태어난 손자를 위해 11월 일찍 설치했다. 한데 어울려 나팔 불며 춤추며 신명 나게 돌아간다. 사랑하는 손자 담헌(Gabriel)이가 천사들의 호위 속에 며늘아기 품속에서 새록새록 잠들고 있으리라.
고요한 적막 속에 하늘나라가 임한다. “하늘나라는 마치 누룩과 겨자씨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들려온다. 불과 삼십여 분 만에 누룩처럼 온 세상을 하얗게 변화 시킨다. 내일 한낮이면 봄눈이 녹아 겨자씨처럼 싹을 틔워 초록빛으로 세상을 바꾸리라. 내 어찌 집 앞의 숫눈길에 차 바퀴 자국을 먼저 남기리오! 차를 세우고 첫 발자국을 남긴다. 조심스럽게 똑바로 걸어가며 흔적을 남긴다. 남은 인생의 흔적도 투명하고 정직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
봄눈을 치우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 봄눈을 치울 때는 여유와 느림이 있어야 제 맛이 난다. 맑고 고운 마음을 품으며 치워야 제 맛이 난다. ‘드~르~륵, 드~르~륵’ 눈 삽으로 눈 치우는 소리가 여리고 느린 소리여야 한다. 겨울눈이야 강추위 때문에 ‘드륵드륵’ 눈 치우는 소리가 삭막하고 빠르다. 빨리 집에 들어가고픈 마음 때문에 서둘러 치우다간 허리를 다치는 경우도 있다. 봄눈을 치울 때는 겨울 보다 갑절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아침 햇살이 눈 속을 스미기 전에 눈을 치워야 한다. 아침 햇살이 비취면 어느새 눈 바닥이 철벅 져서 눈삽이 무거워진다. 힘들어지면 봄눈에 짜증을 낼까 두렵다. 가는 겨울의 아쉬움과 오는 봄을 머리와 가슴으로 느끼며 흥얼흥얼 노래하며 눈을 치워야 제 맛을 느낀다.
간간히 남쪽 담벼락 밑 잔디밭에 쌓인 눈을 발로 툭툭 긁어내면 연초록 색 잔디들이 새록새록 거리고, 앞마당 할미꽃망울은 옹기종기 고개 숙인 체 쫄망 거린다. 여유롭게 보는 즐거움을 느끼며 눈을 치워야 제 맛이 난다.
나는 봄눈에서 인생의 사는 법을 배운다.춘설은 내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르르 녹는다. 도무지 구질구질해 보이지 않는다. 봄눈이 녹으면 그 물로 봄 꽃을 피우며, 언 땅을 녹여서 로빈새가 잔디밭 지렁이를 찍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봄눈이 녹으면 온 세상을 희망의 초록빛으로 변화 시킨다.나도 봄눈같이 녹아져서 이웃에 조그마한 밑거름이 되고 싶다. 교민 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은 기둥이 되고 싶다. 봄눈 녹듯 굳은 마음들을 사르르 녹이고 싶다.
봄눈처럼…….
김민식
아호는 청야.
2004년 <열린문학> 수필 등단.
현재 캐나다 캘거리 거주.
Tommy,s Pizza 운영함(캘거리 헤럴드지 선정 캘거리 맛있는 피자집으로 소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