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들의 전문분야인 시, 소설 외에 수필 등의 글을 쓰는 일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큰 외도를 범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기웃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시인이 시 외의 수필을 포함한 산문을 쓸 때, 잡문雜文을 쓴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소설가가 소설 이외의 산문을 쓸 때도 쓸데 없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걸 보고, 문득 움찔한 적이 있다.
그 놀라움은 잡문이라고 할 때의 '雜'이라는 글자가 풍기는 의미와 어감, '비순수', '찌꺼기', '진국이 아닌 것', '여흥적인 것', 등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리고 시 외의 글을 즐겨 쓰는 자격지심, 내 스스로의 자기 방위적 감정 발로일 것이다.
수필에는 수필나름의 리듬이 있고 향기가 있다.
그것은 수필을 쓴 사람이 살아온 그 인생의 향기다.
"시는 산문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 A. 시몬즈의 말을 풀이하면, 산문의 바탕에서 보다 더 정제된 모양을 이룩한 것이 시라는 말이 될 것이다.
발레리도 "산문은 도보요, 시는 무용이다"라 하였다. 걷지도 못하는 자가 춤을 출 수는 없을 것이니, 완전한 걸음을 걷는 자만이
훌륭한 춤을 출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걷는 것도 오른발 다음에 왼발, 왼발 다음에 오른발 식으로 격식과 법도와 순서만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걷든지 걸으면 물론 전진이야 되겠지만 그리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 되겠지만, 어떻게 나아가느냐가 더 큰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걷는 일에는 내딛는 발의 각도가 있고 걸음의 폭이 있으며 발끝을 떼는 모양, 발뒷굼치의 처리, 속도, 발의 무게에 의한 걸음의 모양, 발걸음에서 일으키는 바람이 세기, 다리와 몸의 다스림, 팔의 보조 맞추기 등 부수되는 여러가지 복잡한 작용이 있다.
무용만이 예술이요 도보는 예술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걸음걸이의 각기 다른 개성, 그 예술성 때문인 것이다.
나는 내 시를 설명하고 싶은 심정으로 수필을 쓴다.
수필을 쓸 때는 독자와 내가 같은 풍속으로 영합되고 있는 듯한 편한 느낌을 갖는다. 이것은 수필의 표현상의 친절성 때문일 것이며, 시처럼 압축, 상징, 비유 등의 표현적 기교를 거치지 않고도 독자와 친근하게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시적인 사람, 소설적인 사람, 수필적인 사람으로 나눈다면 시적인 사람은 고려 청자같이 고고하지만 때로는 복잡한 고집도 있는 사람이며 소설적인 사람은 생활의 소탈한 냄새도 있고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수필적인 사람은 그 중간의 현실과 이상을 알맞게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에, "수필은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서른여섯 살을 넘기면서 피 선생님 글의 이 부분을 여러 번 입속으로 뇌었었다.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은 수필 속에 담기게 되는 내 인생의 중량이다. 반드시 연령과 삶의 길이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지만 보다 더 두렵게도 한다.
여기 묶인 수필들은 내가 춤을 추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가면서 혹은 들어오면서 걸었던 걸음이며 시를 향해 나아가던 도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수입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목적은 무대 위의 춤이었지만 나는 그 전후의 도보도 춤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잡문이란 말은 내게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나는 시로써 표현할 수 없었던 내 인생의 진실을 이들 수필에서 표현하고자 하였다. 내가 쓴 이 글들이 수필의 신성한 권위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일이 없기를 엄숙한 자세로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