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 순천시 왕조동(Ⅰ)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기간은 1964년부터 1969년도까지 인 것같다.
암튼 60년대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TV에서 방영되던 “그 때를 아십니까”프로그램을 볼 때면 우리보다
10년~30년정도 더 나이든 사람들을 기준으로
제작한 것이지만 어찌그리 공감이 갔던지.바꿔 말하면 당시는 사회 발전속도가
그만큼 느렸다고 볼 수 있다.
그 때 사회상을 글로 쓰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고~~~~
난 “높은한질”이라 불리던 곳에 살았다.순천과 광양사이의 신작로를 따라 집들이
옹기종기 지어졌고 시내에서 벗어날수록 그 밀도는 점점 약해지는데 깡패로 유명했던
‘생목’을 기준으로 그곳에서 광양으로 갈수록 집들이 듬성듬성 해 졌는데
우리집은 광양 가는 길에서 순천사범학교이자 순천실고로 들어가는 길이 나눠지는 삼거리.
그 정확한 3거리 지점 윗부분에 있었다.
3거리 아랫쪽 양 길 사이에는 ‘하꼬방’이 하나 있었는데 처음엔 방하나 부엌하나를
한지붕이 덮고 있었으나
주인이 흙벽돌로 쌓아 3거리 양 도로를 동시에 보도록 창문을 내어 붕어빵을 구워 팔았다.
그 구수한 그 냄새는 우리 같은 어린애들의 애간장을 녹였는데 비오는 날에는 아주 괴로울 정도였다.
그 아래로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있었고 또 더 아래에는 형주형과 경주,예쁜 영숙이가
살았던 손씨네가 있었다.
60년대 순천 시가지---대홍수가 있었다.순천만 쪽에서 올려다 보고 찍은 것.동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3개가 보인다.맨위가 죽도봉쪽 '동순천다리'그 다음이 '상투쟁이'로 불리던 잡화 도매상이
있던 '장대다리'세번째다리이름은 생각안나고 맨아래 잘린 다리는 철길이 지나는 철다리.
C지구가 잘나타난 것을 보니 수해 후의 사진인 것같음,우측 맨위의 산이삼산인데
봉우리 하나는 잘렸음.
우리집 뒤로는 바로 산으로 이어졌는데 무덤이 모여있는 무덤터가 있어 그 곳은 소 먹이면서
미끄럼 타는 동네 아이들 놀이터가 됐었고 겨울에는 고구마를 얇게 썬 빼깽이를 대규모로 말려
순천 역전 부근에 있었던 보해소주 공장에 주정 원료로 납품했던 자연 건조장 역할을 했다.
우린 그 빼깽이를 훔쳐다 삶아 먹기도 했지만 감시가 심해 비 오는 날이 아니면 훔쳐내기가
쉽지않았다.초여름에는 그곳 잔디 씨를 받아 판다고 열심히 훑기도 했는데
팔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곳은 낮에는 우리 애들 놀이터였지만 밤에는 청춘남녀들 놀이터이기도 했다.
또한 의붓 엄마와 이복동생들과 힘들게 살면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도망나와 잠을 잤다는
친구의 안식처이기도 한 곳이다.
그 친구는 무덤에서 자면 무서운게 아니라 옆에 사람이 같이 자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얼마나 외롭고 서러운 생활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 맘이다.
길따라 들어선 우리동네는 ‘우명’마을의 뒷산이자 우리동네의 앞산이 가로막아 서 있는데
광양 가는 길과 산 사이는 불과 200여미터 공간이 있었고 모두 논이었다.
그 논 가운데 기와공장이 하나 있었다.
또 높은 논둑아래 논은 수렁이라 불리는 물 뺀 겨울에도 자칫 뻘속에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한겨울에 삽 한 자루만 가져가면 미꾸라지 한 사발은 금방 잡을 정도로
노르스름한 토종미꾸라지가 많아 보양식을 좋아하는 분들이 쉬쉬하며 보존했다.
우명 가는 길이 도랑을 따라 힘없이 놓여 있었고 앞산이 끝나는 부분부터는 꽤나 넓은
해촌뜰이 펼처지는데 앞산 부근의 들판 가운데 변전소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상시
“웅~~”하는 소리를 내뿜어
동네 사람들에게 위용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때 변전 소장님은 작달막한 키에 앞머리가 좀 벗겨지신 분이셨는데
우리 동창 박정희의 아버지셨다.
변전소 울타리 안에는 사택이 있었으나 위험지역이라 일반인들은 들어 갈 수가 없어
그곳은 교도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을 따라 엿 바꿔 먹을 고물을 찾기위해 몰래 숨어들어 변전소 귀퉁이에 있던 쓰레기 장을
뒤졌던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이 귀할 때라 엿 바꿔 먹을 쇠붙이나 공병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60년대 생활모습/신작로 가의 버드나무 가로수/인력과 축력으로 짓던 농사
광양 가는 길에서 변전소 진입로가 자동차가 드나들 넓이로 꽤 길게 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자전거를 배웠다.
꽤 넓은 길이었음에도 뒤뚱거리다가 양쪽에 있는 꽤나 깊은 논으로 쳐박게 되면
온 몸이 뻘조박이 됐음에도
몸 다친 것은 둘째고 자전거부터 살펴봤었다.
생명의 가치는 국민소득과 비례한다 했던가? 몸보다 돈 걱정이 습관적으로 먼저들었다.
광양 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변전소 진입로 맞은 편에는 굴뚝이 무지하게 높은 벽돌공장이 있었다.
그곳에는 벽돌을 굽는 가마가 너댓개 있었고 생산한 벽돌더미가 많이 야적되어 우리의 숨바꼭질
놀이터가 되었다.그 안쪽에 벽돌공장을 지키면서 생활하는 작은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우리 동창 서 옥석이가 살았다.
그 아버지는 마래보시(지금의 대한통운처럼 철도화물 하역하는 곳) 다니셔서
가끔 화물에서 우유가루 같은 것을 빼와 옥석이를 통해 얻어먹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옥석이 어머니는 눈이 크고 얼굴이 작아 요즘 미디어 문화에 맞는 미인이셨던 것같다.
옥석이는 아버지 직장 가까운 곳으로 5학년때이던가 덕암으로 이사를 갔다.
난 동네 얘들과 함께 꽤 먼 거리에 잇는 옥석이 이사간 집에 몇 번 놀러 갔 기억이 있는데 산등성이 높은 곳이어서 순천 역전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우리 부모님들은 이렇게 사는게 전부인줄 알았다.
조례저수지로부터 분배되는 농업용수로는 신월 앞을 지나 공고 서편 담장과 평행선으로 달려
벽돌공장 아랫쪽담장을 타고 광양가는 도로 아래로 연결되어 변전소 진입로와 평행선을 이루며
해촌뜰로 나간다.
그 때는 비도 흔했고 농사위주의 사회였기에 이런 공식화된 수리조합에서 관리하는 수로 말고도
사방으로 도랑이 형성되어 있었다.생목쪽에서 광양가는 도로를 따라온 도랑은 운동 유동밭을
지나온 도랑과 합쳐져 광양 가는 도로 작은 다리 아래를 통과해 들판을 지나 조례저수지로부터
연결되는 냇물로 흘러 들어 갔다.
그곳이‘장자불’이다.도랑을 따라 간길은해촌뜰을 지나면 대석,율산,연향,맹말등으로 이어진다.
그 때 농지정리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어 넓은 해촌들의 구불구불했던 논두렁이
시루떡 자르듯 네모 반듯한 논들로 탈바꿈되어 오늘날 기계화 영농을 위한 준비를 하게된다.
가을이 되면 수리조합에서 관리하는 농수로 연결부위를 양쪽으로 막아놓고 바께스로 퍼내면
그 수통구멍에는 뱀장어는 물론 붕어,메기,미꾸라지,우렁까지 동네 잔치를 할 정도로 많이 나왔다.
여름에는 광양가는 도로를 따라 난 도랑에서 얼기미나 삼태기를 대고 발로 후적거리면
덜 큰 붕어들이나 피라미,각시붕어가 많이 잡힌다.잡는 재미고 보통 잡아다 돼지나 닭에게 줬다.
가뭄이 들면 도랑에 물이 빠진다.연살 만드는 시너대를 1미터쯤 잘라 끝에다 미꾸라지를
동여매어 구멍에다 넣고
살살 돌리다 조금씩 빼면 참게가 미꾸라지를 물고 나온다.
잘 잡는 사람은 금방 한 줄을 잡는데 그것은 사료가 아닌 보양식으로 사람들이 먹었다.
그 때는 논에도 온통 붕어새끼나 미꾸라지가 많았다.본의 아니게 유기농을 한 셈인데
대신 순전히 손으로 아니 몸으로 농사를 지었고 소출도 지금의 반밖에 나지 않았다.
학교 다닐때 우리들의 신발.학교 신발장 모습.
고무신이 차가와 발을 따뜻하게 해 볼 요량으로 짚을깔았다.
손바닥만한 땅도 온 가족이 붙어 일궈야 굶지 않았다.
벽돌공장 정문과 변전소 집입로가 만나는 곳에는 방앗간이 있었고 방앗간과 변전소 진입로
사이로 작은 도랑이 앞산 모퉁이를 지나 흐르는데 그 도랑을 따라 ‘우명’마을로 가는 들길이
놓여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앞산 모퉁이를 돌아가면 수초 등으로 바닥이 보이지않는 둠벙(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날 때면 아주 무서웠다.
그 둠벙 위 밭두렁에는 여시(여우)굴이라 불리는 작은 토굴이 하나 있어서 더 무서웠다.
방앗간은 몇가구 안되었지만 우리동네 유지였고 그 집에는 아들 선호사상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던 때였는데 아들 넷에 딸 하나가 있었고 돈도 남보다 많았으니 유지가 아닐 수 있겠는가?
이 집에는 샘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그집 안마당으로 가 물을 길러다 먹었고 동네 사람들은
그 집 방앗간에서 모든 곡식방아를 찧었다.우리 뿐만 아니라 생목 사람들도 보리 탈곡은
그 집에서 하고 거름이자 땔감으로 쓸 보리대를 자기 키보다 두배 이상 높이의 뭉치로 만들어
지게로 져서 운반 했는데 방앗간에서 생목까지 약 300m정도 되는 거리의 길에 지고 가던 보릿대가
조금씩 떨어져 모이면 우리는 그것들을 갈퀴로 모아 집으로 가져와 여름 땔감으로 썼다.
그 방앗간에는 당시 귀했던 단감나무가 큰 게 있었고 넓은 마당 끝 둘레로는 많은 돼지를 키웠다.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개가 아니고 커다란 ‘때까우’라고 불리던 거위였다.
우리는 그 거위가 무서워 그 집에 가기를 꺼려했으나 그 집 큰아들은 우리같은 꼬마들이
개구리 10마리를 잡아오면 단 감 두 개씩을 따 주었기에 그 단감을 먹을려고 개구리를 잡아
날랐던 기억이 있다.
개구리를 먹은 돼지는 부쩍부쩍 큰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여시굴 하면 또하나 있다.순천실고로 들어가는 벽돌공장 모퉁이 길위 밭두렁에 있었다.
꼭 그런 굴은 후미진 곳에 있어 더 무서웠다.
벽돌공장은 6.25때 그곳으로 사람들을 끌고가 총살을 많이 해서 밤에 대추쟁이(대석) 쪽에서 보면
도깨비 불이 아주 많이 보인다고 어른들이 말씀을 하셔서 더 무서웠는데
운동을 비롯 신월,신대,현남,운곡,왕지,조례,비봉 사는 사람들은 밤에 그 곳을 지나가야 하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다.모르는게 약일 것이라 생각하면 괜챦았을 것도 같다.
벽돌공장 뒤로 돌아가는 모퉁이 차도를 따라가면 황토를 파내는 곳이 있었고
말구루마를 부리던 윤씨네,레공(레그호온)이라 부르던 닭을 많이 키우던 측백나무 울타리의
양계장에는 폐병을 앓는다는 아저씨가 살았고 언덕진 곳을 내려가면 순천실업고등학교가
넓은 유동밭을 끼고 자리하고 있었다.
조례초등학교 쪽으로는 뽕나무 밭도 있었다.
순천공고가 되기 전에 실업고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상고와 농고를 합쳐놓은 것이 실고였던 것같다.
첫댓글 옛 모습을 보니 참 부모님들이 고생이 많으셨던 시절입니다.
지금의 변화된 모습은 상전벽해라 할만합니다.
순천인구가 10만 지금은 30만이라 합니다.
특히 왕지 조례지구의 변화된 모습은 아름답다 할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동네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지도에 표시해 주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