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산
세 명의 하숙 동지에서 D가 군대를 가고 나자 L과 내가 남았다.
하숙집을 계명대학 앞으로 정했다.
당시 계명대학교는 크지는 않았으나 모든 건물들이 중세 건축양식처럼 아름다웠다. 건물 사이로 잘 정돈된 화단과 나무들, 특히 히말라야시다의 키 큰 나무로 드리워진 야외 음악당 계단에 앉아 있으면 달빛이 아늑하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산격동으로, L은 경산으로 등교해야하는 중간지점이라고는 둘 다 너무 먼 그곳에 하숙집을 정한 이유는 거의 그 캠퍼스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아침에 계명대학 앞에서 87번 버스를 타면 버스는 계산 성당을 지나 계성고등학교 앞에서 서문시장을 돌아 동성로를 통과해서 학교로 나를 실어갔다.
그리고 그 하숙집은 동문 아지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와의 거리 탓에 아침에 지각을 하기가 일쑤였다. 이미 등교 시각이 늦은 날은 학교도 가지 않고, 종종 그 학교 교정에서 시간을 지웠다.
그 해 중간고사의 내 성적표는 B이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아무리 주변이 마음에 들었어도, 아무리 동창이 좋아도 우리는 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둘이 각자 헤어지느냐 아니면 한 사람이라도 가까운 쪽으로 옮기느냐.
선택은 내가 했다. 나는 아주 아주 먼 등교 길을 감수하고 경산으로 옮겨갔다.
우리가 집을 선택하는 데 요건의 제일 첫 번째는 여전히 환경이었다. 영대 앞에는 당시에도 상점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주로 단체 손님을 받는 술집과, 다방과 당구장이었다. 그 뒤 쪽으로 대부분 하숙집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구한 곳은 경산 시내에서 들어오자면 영대 정문에 내리기 한 정거장 전의 마을이었다. 그곳에 내려서 우측으로 오 분쯤 들어가면 나즈막한 구릉 아래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마을 주변은 그냥 구릉지였고, 구릉이 끝나면 논이었다. 때는 가을이어서 벼가 황금빛으로 일렁이던 시절이었다.
청기와를 한 기억자의 하숙집에는 마당에 고추를 널어놓기도 하고, 창문 밖으로는 예의 그 벌판이 바라다 보였다.
경북 경산군 압량면. 그곳에서 대구시 북구 산격동의 학교까지는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렸으리라. 1번 버스를 타고, 경산읍내를 지나 고산언덕을 넘고, 남부정류장에서 다시 동대구역으로, 그리고 한일극장 앞에서 내려 다시 51번 버스로 갈아탔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등교 시간이 늦으면 그냥 누워 있었다. 열한시쯤 게으른 몸을 일으켜 어슬렁대고 나오면 들판에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내가 대부분 발을 옮긴 쪽은 영남대였다. 도서관의 정기간행물 실에서 나는 공부가 아닌 잡지를 뒤적였다. 간혹 음악실 아래의 잔디밭에서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반복 음을 들었다. 더 걸어서 운동장을 가면 야구부들이 하얀 공을 쫓고 있었다. 가을 하늘에 그 하얀 공을 쫓는 역동적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아끼던 은밀한 장소는 두 개의 연못이었다. 하나는 공대건물 옆에서 우리 하숙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아주 큰 연못이었다. 그것은 연못이라기 보다 저수지였다. 그 주위로 코스모스가 무수히 피어나 사람들이 더러 구경을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공대를 지나 테니스장을 지나가면 허리만큼 자란 갈대밭 안쪽으로 연못이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을 이따금씩 찾아갔다. 주위는 정돈되지 않은 그대로였다. 나는 풀들을 치우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에서 맞이한 어느 날 밤의 광경. 달빛이 물에 내리고 이따금 새들이 무엇에 놀란 듯 소스라쳐 오르던 곳에 나는 가만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가정대학 건물을 지나 테니스장. 나는 종종 그 테니스장을 찾았다. 열 면은 족히 될 그 테니스장은 늘 비어있었다. 상대가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서 백보드를 쳤다. 혼자서 열심히 공을 쫓다보면 땀이 흐르고 기진해 지면, 수돗가로 가서 물을 들이마셨다. 머리를 기울여 물을 마시는 내 시야에 우연히 높고 넓은 하늘이 잡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연이 그곳에 구름이 떠나고 아주 아주 청명하고 시리게 펼쳐있는 하늘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2002년 6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