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라고 시끌벅적하기보단 높이 오른 물가에 치를 떨듯이 골목골목은 지나는 사람조차 드물어 차분한 분위기였다.
자영업자로서 작년과는 또 달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작년에는 그래도 추석 산소 가는 길에, 납골당 가는 길에, 가족들에게 인사하는 길에, 혹은 명절이라 고생한 아내를 위해 꽃다발을 사 가는 손님이 있었는데.
꽃은 아무래도 사치품이고 얼어붙은 경기를 체감하기 좋은 업종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고정적으로 나가는 거래처들이 있고 어쨌든 자리를 잡아 망하지는 않겠거니 한다는 점.
꽃집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명절 전날 전을 부치기 보다는(사실 음식을 하는데는 썩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꽃집에 나와 꽃을 정리하고- 이따금 산소에 방문하기 위해 작은 꽃다발을 찾는 손님들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날은 친절한 미소보다는 애도의 마음으로 꽃을 만든다.
부모님 뵈러 가는 길, 어떤 때에는 먼저 떠나 보낸 자식을 보러 가는 길, 아이가 아직 어린 젊은 새댁이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일 등을 들으면 밝은 조명 아래 화려한 색색의 꽃마저 빛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어릴 때에는 먹지도 못하는 꽃다발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꽃을 받는 것은 돈이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꽃을 늘 곁에 두고 즐길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 아니었고, 절화는 인위적이란 생각도 했고, 그저 길바닥에 핀 작은 들꽃을 때때로 바라보는 것으로도 꽃은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꽃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기쁨의 순간, 축하의 순간, 가장 선명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선물이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꽃다발이 아니어도. 이 꽃의 빛깔이, 향기가, 이것을 볼 때의 나의 설렘과 기쁨이 너의 설렘과 기쁨이 되길 바라는 마음.
분명 실용적인 선물은 아니다. 사치품이 맞다고 생각한다. 꽃을 바라볼 때의 나의 기분을 선물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것은 반대로 슬픔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인을 위해 가장 탐스럽고 아름다운 장미를 찾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지 않겠는가.
무덤에 꽃을 바치는 일은,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자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먹지도 못할 제사상이 무슨 소용일까.
썩어가는 육신이 묻힌 무덤조차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든 죽은 자를 붙잡아 둘 의미를 찾아야만 했기에 이 모든 소동이 필요했던지도 모른다.
꽃은 베어졌기에 금방 시들고 만다. 영원히 피어있는 장미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시들 것을 알면서도 꽃을 산다.
물을 잘 갈아주어도 일주일 이상 가기 쉽지 않다. 역시나 사치품이다.
그렇지만 꽃이 건내는 위로는 사치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멈춘 시간 위에 그나마 작은 이정표가 되어 준다는 생각을.
2024.09.20.
작성자, 이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