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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16절
TULIP2 무조건적 선택
지난 시간 우리는 전적 타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전적 타락이란 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완전히 타락했다는 것인데, 타락의 결과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으로서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까지 철저히 타락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내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맨 처음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경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 지식과 이웃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또한 의와 거룩과 같은 것을 열매 맺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단지 아담 개인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자연적으로 출생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출발합니다. 그 스스로 짓는 자범죄를 지어야지만 죄인이 아니라, 자범죄를 짓지 않더라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부패성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통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인간은 무엇 하나 할 수 없으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역사하셔야 지만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 그때서야 비로소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타락하기 이전부터, 아니 창조하기 이전부터 영원한 목적을 따라 모든 만물과 모든 일들에 대하여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작정은 결코 변경할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그것도 변경할 수 없는 작정에 대하여 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 탓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해서, 그리고 작정하신 바에 대해서는 결코 변치 않고 반드시 이루신다고 해서 죄 문제를 하나님 탓으로,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죄를 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의 원인자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성경을 보면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을 죄의 저자요, 원인자로 돌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서는 사람에게 그 원인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기도 하시는 것이고, 때로는 죄에 대한 징계 그리고 회개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특별히 죄에 대하여 어거스틴의 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돌리는 것을 이단이라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죄와 무관하게 말하는 것도 이단이라고 했다고 합니다(정지수, 성경과 하나님 지식04).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와 전혀 상관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작정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죄와 전혀 상관없다고는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저자요, 원인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이고, 그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가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작정하신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실행이 되지만 죄가 창조되었느냐 했을 때 죄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난 뒤, 그리고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난 뒤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작정 안에 죄에 대한 것이 분명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원인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기 이전부터, 아니 창조하기 이전부터 영원한 목적을 따라 모든 만물과 모든 일에 대하여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셨는데, 특별히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에 대한 것인데, 말 그대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있는 조건 때문에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선택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있는 어떤 조건도 고려하지 않고 선택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9장 16절이 이 내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특히 바울은 앞선 내용을 통해(롬1-8장) 인간의 유일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지난주 우리가 살핀 내용처럼 인간의 전적 타락과 관련해서 말하기도 했으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되 그 축복이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은 은혜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화에 대해서도, 율법의 효용에 대해서도, 나아가 견인의 은총과 관련해서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말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놀라운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9장에서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복음보다는 그들의 혈통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과 관련해서 마치 하나님이 실패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로마서 9장을 통해 혈통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 그것도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6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거 같지 않도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육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7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 육신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 전에 육신을 따라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했을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삭으로부터 난 자,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이지만 야곱과 에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수 있는가? 야곱의 경우 사랑 받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사랑하셨는가? 에서의 경우 미움 받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미워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나 에서나 아담 안에 있는 자였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낫다가 아니라 두 사람 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아담의 혈통 속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예외 없이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더 낫고 에서는 덜한 그런 내용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보다는 자기 꾀를 따라 행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꾀에 에서가 놀아나다시피 한 모습으로 비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에서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11절과 1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내용으로 보자면 영원 전부터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 어떤 조건을 보시고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리브가에게 말씀하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야곱이 외적으로 더 잘 되어서 에서가 그 아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13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신다고 할 때 그 이유가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1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선택과 유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16절 말씀은 바로 이런 내용 속에서 나오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받은 선택을 우리의 근면이나, 열심이나, 또는 노력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명백한 결론을 이 말씀에서 추론하고 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경우, 그들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그들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감동받아 택할 마음을 갖게 될 만한 어떤 공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취해야 하는 단 하나의 견해는, 우리가 택함 받은 자의 수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뜻이나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에’,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16절에 의하면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며,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유기 역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구분해야 될 것은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정죄를 받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눅22:22)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분명 가룟 유다는 유기자입니다. 선택의 열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하셨기 때문에 정죄를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파는 그 사람, 즉 가룟 유다의 잘못으로 화가 그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무조건적 선택과 관련하여 구약에 있는 말씀 한 구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7장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는가? 여기 보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잠언 14장 28절을 인용하는데,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떠했는가? 그 수효가 미비했습니다. 민족 가운데 가장 적은 수에 불과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어떤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떤 내용까지 들어갈 수 있는가? 그들이 가진 성품, 그들이 가진 자질, 그들이 가진 능력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8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리고 조상에게 맹세하신 바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언약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로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섬겼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수24:2). 아버지만 섬겼느냐?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표현하는 식으로 하자면) 뜬금없이 불러내셨던 겁니다. 왜 하필 그인가? 성경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가 괜찮아서인가? 결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부름을 받은 겁니다.
결국 신명기 7장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어떤 외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을 받은 겁니다. 물론 로마서 9장과 함께 생각하자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것이 민족적인 선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선택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바울이 유대인의 구원과 관련해 하나님이 실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라는 것은 이런 이중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적인 의미에서 선택받았지만 그것이 곧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선택이 아닐 수 있으며, 민족적인 의미에서 선택받음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선택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신명기 7장이나 로마서 9장의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사랑하기로 하신 자들, 그들이 선택의 대상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선택의 원인을 굳이 따지자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사랑하기로 하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전적 타락에 대한 교리를 통해서도 마찬가지고, 오늘 살피고 있는 무조건적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건을 따라 선택하신다고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조건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하나님의 조건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예배 전에 잠시 살폈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처럼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빚을 더 늘려갈 뿐입니다(13문). 늘려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불쾌하게 해 드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타락하지 않은 아담만 생각해 보더라도 그는 그 스스로가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불순종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조건을 맞출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무조건적 선택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 중에는 예정론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으로 누가 믿음을 가질지, 그리고 누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을 내놓을지를 미리 아시고 그 사람을 선택하신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지예정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원문 가깝게 말하자면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앞뒤를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저들은 예지예정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것을 ‘조건’으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는 믿음을 미리 아시고’, ‘그들에게 있는 선행을 미리 아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서 공로를 인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로마서의 전체 문맥 상, 그리고 전 성경의 가르침 아래 이런 해석이 자리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로마서만 보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할 때 분명 모든 공로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6절 이하를 보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이런 이해가 있는데 어떻게 로마서 8장에서 공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있을 어떤 믿음이나 행위를 보실 수도 있지만 그것을 조건으로 선택하시거나 유기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 속성 가운데 ‘무엇이 먼저다’, ‘무엇이 나중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기로 하신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지가 앞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예로 시편 115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 능력을 행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뿐입니다. 즉 전능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가 앞선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예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뜻의 의논을 따라서 작정하시고 예정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입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번역을 고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이 아니라 의논입니다. “...의논대로 일(혹은 역사)하시는 이의...” 계획이 아니라 작정입니다. “...작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의논, 이 순서입니다.
참고로 의논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서로의 견해를 나눔으로서 자신의 부족한 생각을 보충하는 그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생각에 있어 부족함이 결코 없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결코 지혜와 지식에 있어 모자람이 없습니다. 때문에 의논이라고 할 때 어떤 부족함,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입니다. 물론 이 교통하심도 우리에게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의논을 병행하여 사용하기도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본래 내용으로 돌아와 예지예정이라는 입장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정당한 성경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9절을 해석할 때 미리 아신 것을 조건으로서 이해하시면 안 되고, 시편 115편의 이해와 같이 그분의 뜻으로 말미암아 누구를 택할지 미리 아시고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혹은 어떤 분들은 안다는 단어를 선택으로 이해하기도 하며(암3:2에 대한 새번역 비교), 혹은 사랑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롬8:29에 대한 새번역 비교) 분명한 것은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예정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창조와 타락, 구속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간 안에서의 순서입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인간 스스로가 타락했다는 것이고,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롬3:23)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지만(롬6:23)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특히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는 자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3:16).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앞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내 의지의 문제인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사람에게 달린 문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예수 믿으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지만(롬1:19), 심지어 복음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듣도록 하기도 하셨지만 그 스스로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은 그들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럼 동일한 원리로 볼 때 믿는 자들 역시 그들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또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그 스스로 찾아가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혹 복음을 듣게 되더라도 그 복음의 필요성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스스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믿음조차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분명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을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만(행16:31), 복음 앞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내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인간의 결정에 따라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더 근원적인 성격으로까지 올라갑니다. 믿음조차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고 때문에 아무도 자랑할 수 없지만, 성경은 그것만 교훈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대상은 누구냐? 여기에 선택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로 말씀드리자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바로 그들에게만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도 전에, 창조가 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고 할 때 선택하신 바로 그들, 그들만이 시간의 역사 안에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예정론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보면 예정론 자체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꺼려하는 분들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만큼 가르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가르쳐야 할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택을 말하면서도 유기를 말하지 않거나 단지 택자와 유기자가 아니라 좀 더 유순하게 말하기 위해서 비택자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유기하셨다는 것입니다. 택하지 않은 정도로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하여 결코 가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쨌든 성경은 예정에 대한 교리, 즉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구절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로마서 9장 18절 이하를 보시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18-21) 16절의 경우 사람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이 원인이라고 말했다면, 여기서는 그 뜻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반면,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어,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면 거기에 강제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강제성이 있다면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은 긍휼이라는 은혜와는 달리 완악이라는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강제성을 가지고 억지로 완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벌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마치 허물하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유기만 말하면 마치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따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다고 단박에 못을 박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의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 비유라고 해서 토기장이가 자기 뜻대로 하나는 쓸 것으로,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더더욱 그분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나타내고자 하시는 바에 대해서는 다른데, 22절과 2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그러니까 택자에 대해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유기자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과 은혜의 풍성함을 알리시는 한편, 유기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과 오래 참으심 및 공의를 알리실 목적으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속성을 알리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모든 일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속성이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한 두 형태입니다. ‘하고자 하시는 자는 한 분’이시지만, 그 ‘대상은 둘’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참조).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공의가 모순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그러나 유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유기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고(엡3:19) 찬송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전에 택하셨지만 이 땅에서 펼쳐질 때는 죄인을 위하여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선택해야 할 의무도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선택하시고, 선택의 불변성으로 죄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 아들조차 아까지 않고 내어주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유기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자가 아니라 특별히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며 그분의 은혜에 대하여 더욱 감사와 찬송을 돌리도록 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내용으로서 예정론이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그 사실을 잘 증거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왜 우리를 택하셨는가? 궁극적으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해서 무엇까지 정하셨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되,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실 때 택하실 대상만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편도 함께 정하셨습니다. 그 방편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입니다.
여러분,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할 때 선택의 결과로서 구원의 방편이 주어지는데, 선택이 무조건이라면 선택의 결과 역시 무조건이라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죽으신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로를 일체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기로 하셔서 자기 아들까지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칭의를, 양자됨을, 성화를 그리고 영화를 거저 받는 자로 있게 됩니다. 물론 성화에 있어서 우리는 열심을 말합니다. 노력을 말합니다. 순종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전 선택이라고 해서 영원 전 선택하실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질 때도 실제로 무조건적인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인생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 그리고 또 은혜 외에는 확인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데 어떻게 우리의 공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습니다. 겸손만 있을 뿐입니다.
다만 무조건적이라는 것 때문에 나태함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택하신 목적, 다시 말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부지런히 자신을 살피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처럼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