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주의 기도(主의 祈禱)
요한복음 17:17
상동교회
1932. 5. 1.
此主苦難前夕爲門徒祈禱者也. 其意懇懇達於心肝, 足令人感泣也. 今朝禮拜時, 效則主之意, 互相祈禱蒙主之赦免可也. 主曰若不容人則禮拜無益云, 太五章二四. 願僉位之禮拜, 容赦之禮拜可矣. 此祈禱中摭出要意數四, 主曰賜我之人也. 此意甚緊, 我視人以人則有間隙, 怨謗生焉, 紛爭起焉, 甚則大砲軍艦互相衝突, 皆人視之過矣. 過此則至於獸視之, 互相殺戮. 反此而有己視之念, 則其飢飽寒暖, 皆有同於心, 怨謗何由而起, 紛爭何由而生也. 天下安有以大砲軍艦攻擊自己者乎? 간인이不弟視阿別故殺之, 猶大不師視救主故賣之, 僉位各自念在此滿堂之人, 皆各賜我仝人, 以主之血爲兄弟姉妹, 呼兄而勿懷劒, 呼弟而勿懷劒, 呼姉而勿懷劒, 呼妹而勿懷劒可也. 呼兄呼妹之意同爲一家族之意也. 主曰以父名保護云, 一父之下有衆子, 以父之名得保護, 國名保其國民, 校名保其校生, 如團體名保其團體, 天父之名能保其信徒矣. 主曰願爾名聖, 太六章九. 名之聖由信徒之何, 行善則父名顯, 行惡則父名辱, 故孔子立身行道, 揚名於後世孝之終也. 父之名由孝而顯. 古朝鮮貴士有子五人, 家貧而敎子, 一日其子作亂妨工, 其父席槀待罪, 其子乃止亂做工, 當世子皆登科顯揚, 說其父之賢行, 世人稱父多於稱子. 天父亦然, 吾信徒行悖不信, 天父當憂泣不已, 子若改行行善則猶愛蕩子之悔改矣. 吾等不重朝鮮之名, 故國亡民散, 豈不目睹乎? 吾等當重其父名, 行一善思貽父母榮名必果行, 行一不善思貽父母羞辱必不果, 然後其名能保, 其信徒十字旗下, 不能放旗者, 其名有勢故也. 主曰父雖惡, 必思貽其子善物, 太七章十一. 君雖惡必思其民之福, 牧師雖不善必思信徒之福, 爲信徒而怨其牧師者, 甚不可也. 是皆不榮其父之名也. 天父安能保其信徒乎? 主曰使徒爲一如, 吾等云, 一者聖書累言之, 主一也, 信一也, 禮拜一也, 聖一也, 聖神一也. 엡四章. 以主血而爲一體, 此不以情慾, 不以肉體, 以寶血爲一也. 爲一體則各相保護, 無使怨謗可也. 手謂足曰汝無用, 耳謂目曰汝無用可乎? 合衆肢爲一體, 衆肢離散, 體安所在乎? 吾等爲一體, 以十人爲一國, 以百人爲一國, 此吾朝鮮人之美也. 多瓦洞國以六十人爲一國, 一者有力也. 古者桀紂之民, 億而有億人之心, 文武之臣有十人, 有一心故成國家矣. 各自爲心則離散必亡矣. 爲一之道, 聖神爲一云. 엡四章. 人各自高心, 保羅曰爾勿懷過度自高之思. 羅十二章三. 自高如油浮水, 又如丁香樹, 傍樹皆折, 不可爲一也. 必去自高之心然後能爲一也. 又當去自利心, 惟以公心爲之可也.
이것은 주님이 고난을 받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 뜻은 간곡하여 심장과 간에 전달되므로 족히 사람들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예배 때 주님의 뜻을 본받아 서로 기도함으로써 주의 사(赦)하심을 받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르기를 ‘만일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예배가 무익하다’고 하였습니다(마태복음 5:24). 바라건대 여러분의 예배는 용서하는 예가 되어야 옳습니다.
이것은 기도 중에서 중요한 뜻을 가진 두서너 가지를 뽑아낸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남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뜻은 매우 긴요한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남으로 본다면 틈이 생겨서 원망과 비방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고, 이것이 심해지면 대포와 군함으로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 남의 허물을 본 것입니다. 여기에 더 지나치면 서로 죽이게 됩니다.
이것과 반대로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보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의 굶주림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에 다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원망과 비방이 어떻게 생길 것이며, 분쟁이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천하에 대포와 군함으로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아우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구주를 스승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팔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각자 이 자리에 가득 찬 사람들이 다 나에게 준 똑같은 사람으로서 주님의 피로 형제자매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형님이라고 부르며 칼을 품지 말고, 아우라고 부르며 칼을 품지 말고, 누님이라고 부르며 칼을 품지 말고, 누이라고 부르며 칼을 품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형이라고 부르며 누이라고 부르는 뜻은 한 가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한 아버지 밑에 여러 자식이 있으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이름으로 그 국민이 보호되고, 학교의 이름으로 그 학교 학생이 보호되며, 단체의 이름으로 그 단체가 보호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신도가 보호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였습니다(마태복음 6:9).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믿는 자의 행실이 어떠하냐?’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고, 악을 행하면 아버지의 이름이 욕됩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세상에 나가 도를 행하여 이름이 후세에 드날리는 일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최종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자식의 효도로 인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옛날 조선 시대에 귀족 선비가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선생에게 보내지 못하고 직접 자식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자식 하나가 장난을 하여 다른 자식의 공부를 방해하니 그 아버지가 스스로 거적자리를 깔고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노라고 하며 석고대죄하여 벌을 받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자식이 장난을 그치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당대에 그 자식들이 다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그 아버지의 훌륭한 행동을 그 자식들이 훌륭하게 된 것보다 더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천부(天父)이신 하나님 아버지도 그러합니다. 신도들이 패악한 일을 하고 신앙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땅히 근심하며 울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만일 회개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곧 방탕하였던 자식이 회개하면 오히려 더욱 사랑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진 것을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아버지의 이름을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착한 일을 행하여 부모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을 끼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마칠 것이고, 반대로 한 가지 선하지 못한 일을 행하여 부모에게 수치스러운 욕을 끼친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결코 끝내지 말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그 이름을 능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가 십자가 깃발 아래서 그 깃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 때문입니다. 주께서 ‘아버지가 아무리 악하여도 그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1). 이와 같이 임금이 아무리 악하여도 그 백성이 복 받기를 반드시 생각하고, 목사가 아무리 선하지 못 하여도 신도의 복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도가 되어서 그 목사님을 원망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이는 다 그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신 천부(天父)께서는 어떻게 그 신도를 보전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 ‘사도는 우리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라고 한 것은 <성경>에 여러 번 언급하였습니다.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예배도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에베소서 4장). 주님의 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는 정욕으로써가 아니고, 육체로써도 아니고, 보혈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가 되었으니 각각 서로 보호하여 원망하고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손이 발에게 이르기를 ‘너는 쓸 데가 없다’고 하고, 귀가 눈에게 ‘너는 쓸모가 없다’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 지체가 합하여 한 몸이 되었습니다. 여러 지체들이 따로 분리되어 있으면 몸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 몸입니다. 열 사람이 모여 한 나라가 되고, 백 사람이 모여 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조선 사람의 미덕입니다. 다와동국(多瓦洞國?)은 육십 인으로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면 힘이 있게 됩니다. 옛날 폭군인 걸주(桀紂)의 백성은 억(億)만 명의 사람이었지만 마음도 억만으로 달랐고, 성군인 문왕 무왕[文武]의 신하는 열 사람인데 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각자의 마음이 다르면 흩어져서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로 만드는 방도는 성신께서 하나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에베소서 4장).
사람은 각각 스스로 높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너희는 과도하게 스스로 높이려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 하였습니다(로마서 12:3). 스스로 높이려는 것은 마치 기름이 물에 뜨는 것과 같고, 또 정향수(丁香樹)와 같이 그 곁에 있는 나무들을 다 부러뜨려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스스로 높이려는 마음을 제거한 뒤에 능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마땅히 스스로 유익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공평한 마음으로써 해야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