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依神者卽神之子也)
로마서 8:12-17
人或思聖神之來, 特由異常, 或講道時恒望聖神助我, 使我善說眞理, 或祈禱時望神降大如五旬節, 使我能言異像, 又望聖神忽然從心起思異于平常, 能照見人之未來, 又或祈禱愈病, 然皆非聖神本意, 非如盲人依人扶腋方知道路, 或欲盲目忽開如保羅, 是皆妄念, 細讀此聖句, 聖神之來甚不然, 不從世是神引導也. 롬十二章二曰 勿從世受新心焉云. 從世則心不能新, 從世則心甚至染汚又染汚, 終爲重負, 終爲束縛, 終爲不自由, 又至煩悶, 爲魔鬼之子, 非神之子也. 譬如漁網欲脫愈嬰也. 或至隕身滅性. 今日或投水或自縊, 皆由此而生也. 故曰勿從世, 勿從世而殺肉之行, 實則活也云. 故曰 勿負債于肉, 債是束縛之事. 肉雖在縲絏, 其神則自由, 不能償債, 則債權者呈官剛服, 債務者必盡償乃已. 人若以肉而犯罪者, 必盡償乃已也. 此言何也? 肉犯罪而必死乃已也. 呼神父無疑是神引導也. 人初信時多羞愧, 況稱神爲父乎? 對敎會內兄弟姉妹, 稱兄稱妹乎? 看彼養子者, 初對養父, 呼父甚不易, 爲熟已久則可稱父甚熟也. 吾之於神亦養子也, 尊養父如親父, 恩愛兼至則, 恩愛互相交通, 卽我爲養父之子無疑矣. 能愛其父之敎訓, 而能與人和睦, 乃爲神之子, 子能悅親行其父之旨, 亦聖神之所證也. 於是乎子之神與父之神互相交通, 漸漸愛深, 爲獨生之子, 爲最愛之子, 能得父之後嗣也. 子爲孝子而遠離父母者, 是魔之惑也, 吾等呼神爲父, 或無心口相違乎? 呼耶蘇爲救主, 亦無愧於心乎? 若無神之證, 則心口相違, 未免僞善者矣. 赦罪有權勢, 是神之引導也. 信不助我則毫不勝任, 況如山之巨惡乎? 種落于路傍, 雀來啄之者何也? 日常之試誘如鳥雀之多, 不甚苦痛而亦不能勝之. 毫無氣力是何故也? 無由神之權也. 主曰 得權能爲神之子女云. 此權能由何而得也? 肉身不能得, 情欲亦不能得, 人意亦不能得也. 但由聖神而得也. 經曰其苦則其榮云, 與主共苦, 信有苦難, 非權不能制, 非但勝苦以權也, 享榮亦以權也. 享一國之榮者, 非有權而能乎? 制百難之苦, 非有權而能乎? 故權勢云者, 何等貴重也? 世之權勢亦貴重, 況神之權勢乎?
사람들은 간혹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성신께서 특별히 기이한 방법으로 오신다고도 하고, 혹은 말씀을 강론할 때 성신께서 도우시어 나로 하여금 진리를 잘 설교하도록 해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혹은 기도할 때 오순절 같이 중요한 날 강림하셔서 나로 하여금 기이한 현상을 말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며, 또 성신께서 홀연히 마음으로부터 평상시와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켜 다른 사람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하나 이는 모두 성신의 본래 의도는 아닙니다. 앞 못 보는 소경이 남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자신이 가는 길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혹은 소경의 눈이 바울과 같이 갑자기 떠졌으면 하기도 하나 이는 모두 망령된 생각입니다. 이 <성경> 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치에 매우 맞지 않습니다.
세태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끄는 방향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따르면 마음은 새로워질 수 없고, 세상을 따르면 마음이 더러운 데 물들게 되니 더러움에 물들면, 결국에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속박을 당하게 되어 마침내 부자유하게 됩니다. 또한 번민하는데 이르게 되어 마귀의 자식이 되고 하나님의 자식이 되지 못 합니다. 비유해 본다면 어망에 들어간 물고기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얽혀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몸을 망치게 되며 혹은 물에 빠지든지 목을 매기도 합니다. 이게 모두 세태를 따른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태를 본받지 말고 육신의 행위를 죽이면, 그것이 실제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빚을 지지 말라’하였습니다. 빚은 바로 자신의 정신을 속박하는 일입니다. 육신은 비록 쇠사슬에 묶여 있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 정신은 자유롭게 됩니다.
세상에서 빚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는 관청에 고소하여 억지로 자백을 하게하고 채무자인 자신은 그 빚을 다 갚아야 끝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육신의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그 죄 값을 다 갚아야 끝이 납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죄악은 반드시 죽어야 끝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도한다는 사실에 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 믿음을 가질 때 부끄러워하는 일이 많습니다.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겸연쩍어합니다. 또 교회안의 형제자매에게 형이니 누이니 하는 칭호를 쓰기를 부끄러워합니다.
남의 자식으로 들어간 양자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양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매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익숙해지면 아버지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양자입니다.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이 친아버지와 같이 해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겸하여 지극하게 되면 은혜와 사랑이 서로 교통하게 되니 곧 나는 양아버지의 자식임이 의심할 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교훈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자식은 그 어버이를 기쁘게 하며 그 아버지의 뜻한 바를 행하게 되는 것이 역시 성신의 증거 하는 바입니다. 이리하여 아들의 영과 아버지의 영은 서로 교통하여 사랑이 점점 깊어져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獨生子)로 아버지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자식이 효자인데도 부모를 멀리 떠나게 되는 것은 마귀의 유혹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혹 마음과 입술이 서로 어긋난 일은 없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라고 부르면서도 마음에 부끄러운 점은 없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증거가 없다면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나서 위선자가 되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죄 용서의 권세는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믿음의 도움이 없이는 털끝만큼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산과 같은큰 죄를 지은 사람이겠습니까?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니 새가 와서 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일상생활 중의 시험이 마치 많은 새들을 유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 없이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조그마한 기력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의 권능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권능을 얻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권능을 어떤 방법으로 얻겠습니까? 육신으로도 , 정욕으로도, 사람의 뜻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성신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고난이 곧 영화’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같이하고, 신앙에 고난이 있는 것은 주의 권능이 아니면 이길 수 없습니다. 고난을 이기는데 주의 권능으로써 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누리는 데도 역시 권능으로써 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영화를 누리는 자가 주의 권능이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백 가지 고난을 이기는데 권능이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권세라고 이르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세상의 권세도 역시 귀중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권세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