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필 -
비(雨)
박옥태래진
자정이 넘도록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어디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창가에 난초와 수석이 있는 진열장속에 쥐가 있는 가 했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 거실구석에 붉은 벽돌을 쌓고 바닥에 비닐을 깔아서 만든 작은 연못에서 나는 것 같았다. 투명유리같이 둥글게 퍼지는 우산 분수는, 밤이면 꺼 놓기에 이미 조용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날까? 가만히 엉덩이를 치켜들고 무릎걸음을 걸어서 연못을 들여다본다. 물고기들이 잠을 자지 않고 수면을 헤적이면서 놀고 있다. 이놈들이었을까 하는데, 그 소리는 정작 창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얼른 일어나서 커튼을 열어보니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단비다. 며칠째 중국에서 몰려온 황사에 산천이 뿌옇게 보이고 꺼칠했었다. 그런데 비가오자 이제 깨끗해지겠구나 싶어지니 반가웠다. 빗방울이 멀리에 있는 가로등 불을 끄려는 듯이 내린다. 불빛에 반사되어 은빗방울이 되어서 눈처럼 내리고 있다. 이 비가 지나면 이곳 산촌은, 다시 아름다운 꽃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바쁘게 푸르러질 것이다. 봄나물도 가지가지로 밥상을 풍성케 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물고기가 잠을 자지 않으면 비가 온다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마을 앞에는 둠벙(연못)이 있었다. 물이 콸콸 샘솟는 둠벙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둠벙 아래로는 마을의 공동빨래터가 있었고 그 밑으로는 미나리깡이 있었다. 미나리는 시커먼 흐레(뻘)밭에서 자라고 있었고, 그 흐레 속에는 미꾸라지가 떼거지로 우글거렸다. 그때에는 미나리깡에 거머리도 많아서 징그럽고 더럽게만 느꼈었는데, 미나리 밭은, 오염된 물을 정화 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조상들의 지혜를 커서야 알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어쨌든, 밤에 머리를 풀어 세운 섬찍한 미나리깡이 있는 둠벙이 나는 무서웠다. 달이 뜨고 별이 총총한 밤인데도, 둠벙에 물고기가 잠을 자지 않고 수면에서 입을 뻐끔대고 있으면, 꼭 물귀신들이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러한 다음날에는 영락없이 비가 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 밤은 큰형 때문에 나는 또 밤을 무섭게 설쳤다.
“빨리 일어나서 세수 대야 들고 따라와!”
대나무 광주리를 들고 큰형은 언제나 바쁘게 소리를 친다. 나는 아부지보다 무서운 큰형의 명령에는 꼼짝을 못했다. 그래서 엉거주춤 눈을 비비고 따라가면, 큰형은 달빛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돌로 둘러쌓은 크고 깊은 둠벙 가장자리로 간다. 연못은 달빛을 받아서 은빛 거울인데, 뻐끔뻐끔 움직이는 것들이 물가에 많이 있다. 나는 무서워 큰형 뒤에 바짝 붙어서 세수 대야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따른다. 그때 큰형은 대나무 광주리로 물속에 움직이는 그곳을 덮치듯이 쑤셔 넣고 뒤집어서 물을 퍼 올린다. 그러면 물은 대발 사이로 빠져나가고 광주리엔 붕어와 미꾸라지 때들이 시커멓게 파닥댄다. 둠벙을 돌면서 몇 번을 그렇게 물귀신을 잡아 올리듯이 하고나면, 혼날세라 조마조마하게 내가 들이민 세수 대야에는 물고기가 가득 찬다. 붕어찜이나 추어탕은 먹지도 않은 나로서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물고기가 든 세수 대야를 두 손으로 무겁게 들고, 귀신이 뒤에서 바지가랭이를 잡을세라 바르르 떨면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도 비가 오시려고 했는지 거실연못물고기들이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바스락댄다 싶었던 창밖의 밤비 소리가 토닥토닥 더욱 정겹게 들린다. 멀리 계곡물 소리도 커져가고 있다. 3월 봄비는 생명들을 생동케 하고 산과 숲을 새롭게 하리라. 어떤 이는 비를 하늘의 눈물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하늘이 내린 은혜라고도 한다. 천지자연의 고통과 인간의 시련이 있어서 눈물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메마른 산천을 적셔주고 먼지 뭍은 도시를 씻어 내리고, 초목과 동물들의 갈증을 해소 해주니, 하늘의 은혜라고도 한다. 그리고 우울하고 외로운 가슴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도 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잎에 떨어지는 비는 꽃송이 될지니,
그는 부끄러움을 간직할 것이요.
풀잎에 떨어지는 비는 이슬이 될지니,
그는 바람의 목을 축이리라.
사슴눈동자에 떨어진 비는 별이 될지니
그는 별들의 노래를 배우리요.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비는 농부가 될지니
그는 풍년을 영글게 하리라.
봄비가 저리 내 가슴과 영혼으로 내리니, 내 세포들도 모두 화장을 하고 일어선다. 만약 비가 세상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은 바다에만 존재하고 생명은 바다 생명만 있었을 것이다. 지구육지는 메마른 사막뿐으로 생명이 존재하지 못했으리라. 비가 있어 땅이 기름지고, 생명도 태어나 살면서 진화를 이끌어 가고 있으니, 비는 세상 만물의 생명수인 것이다. 비라는 정제(淨財)와 정화(淨化)의 회귀기능이 없었다면, 지구에는 정체된 바다의 짜디짠 염분 수만 있었을 것이다. 비는 인간의 몸속을 맴도는 피와 같이, 지구의 정맥이 되었다 동맥이 되었다 하면서, 지구의 세포를 성장시키고 유지시키면서 끝없는 정화를 해 나아간다. 시냇물이 되어 강이 되고 바닷물이 되어서, 염분은 남기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맑은 빗물이 되어 내려온다. 그렇게 비는 윤회하며 지구의 심장과 핏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빗물을 자연의 사랑이요 정화기능으로서, 잘 못 된 것들에는 화를 내며 씻어내 버리고, 아름다운 것들에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다.
소록 하던 밤비 소리가 창 밖에서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몇 년 전 여름이었다. 이곳 수동계곡 계천가에 있는 2층집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장마철인지라 그때도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정이 넘어서야 붓을 놓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지 한 시간쯤이 지났을까, 밖이 소란하여 잠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계곡물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집 앞 계천가에 세워둔 차들이 계곡 물살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천가에서 여름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물에 잠기는 집과 떠내려가는 방갈로와 시설물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큰 수재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엄청난 폭우는 40년 만에 내린 기록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강변마을의 상황은 정말 아수라장 그것이었다. 자동차는 관광버스를 포함하여 십여 대가 떠내려가고, 집들은 1층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강물은 무섭도록 물살과 파도를 세우고 선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태풍의 영향으로 밤사이 전국 곳곳의 물난리로 아우성치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마을과 집과 농사와 이재민들의 소식들로 온통 세상이 떠들썩했다.
얼마나 무서운 자연의 재앙이요 분노이었는가? 어떤 이는 하늘이 원망스럽다하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모두가 하늘의 재앙인 천재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분명 인재인 것이었다. 인간이 지구와 자연을 파괴한 원인에 의해서 생긴, 태풍과 폭우와 산사태들이기 때문이었다. 지구가 아파하고 몸이 뜨거워지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이 재앙을 받은 것이었다. 인간이 왜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자연을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가함을, 더욱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의 원시림들이 훼손되어 가고, 각처에서는 개발을 앞세워 산과 숲을 없애고 있으니, 인간은 스스로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구생명에 유해한 인간물질문명이 지구의 보호막인 상층권도 파괴를 하고 있다. 지구생명의 방어막을 그렇게 훼손시키니, 태양의 유해파와 자외선 및 태양열을 막지 못해서 지구는 계속 더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지구에는 새로운 병마와 환경재난들이 일어나고, 생명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하늘과 땅의 재난은 천재가 아닌 인재의 재난이 틀림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깨우쳐, 서로를 위해 하나로 일체되지 않은 죄, 그것은 정녕 천벌이 되는 것이리라.
아! 아름다운 비여! 투명한 핏줄이여!
지구 심장의 맥박으로 진맥을 하라!
그들 이기사랑의 상사병에 열꽃이 핀
인간의 부스럼들에게 소독을 하라!
물질탐욕에 오염된 영혼들의 두피 속
이기생법술에 조련 된 골수를 씻으라.
천법과 자연법을 수혈하여 고통 없는
하늘과 땅의 평화가 맴돌도록 하라.
돌무리가 별처럼 반짝이는 물거울 속에
빗물의 눈동자가 그들 눈에 비치도록.
그때에 하늘의 음악소리 들을 수 있고
바람과 대지의 숨소리 들을 수 있으리--
안타까운 시 한 수 스쳐 보내니, 마음이 다시 가라앉는다. 빗소리를 듣자하니, 어린 시절 비가 오시던 날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장대비를 구경하다가,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낙수가 너무도 시원하고 멋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웃통을 벗어 던지고 마당으로 뛰어나가 낙수를 머리에 맞으면서 마당을 첨벙대고 뛰어 다녔었다. 그랬다가 어메한테 크게 혼이 났던 일이 생각난다. 아부지는 태창문을 여시고, 곰방대에 봉초 담배를 덜어서 우겨 넣으신 다음, 불을 붙이시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 하신다.
“이만크럼 오셨승께! 이제 못자리 물도 그득 찼겄고, 무논갈이도 서둘러 해야 겠구먼!” 하시고, 담배를 천천히 빠신다.
그리고, 화를 내시는 어메한테 넌지시 말씀 하신다.
“지그들 멤데로 퇴깽이짓을 허든 말든 네부러 두랑께에! 비님이 저렇게 오싱께 즈그들도 오죽이나 좋컸어!”
아부지 담배연기구름이 추억의 하늘에서 아직도 맴을 돈다. 거실연못을 돌아보니 비단붕어들도 이제 잠이들었나 보다. 나는 빗소리 가득한 창문을 그제 서야 조용히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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