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당면하여 풀어내야 하는 온갖 문제들은
범주의 크기 넓이 깊이는 크든 작든 유사한 문제이고 사안임을 자주 봅니다.
우리는 역사계에서도 그렇지만 우리 음악계에서도 그런 사례를 드러 봅니다.
사필귀정이라고 잠시동안 가려졌던 진실이 드러나고, 왜곡된 사실은 바르게
밝혀지는 것이 세상사의 순리입니다. 남북의 분단상황에서 이념갈등의 희생
이 되어 제대로 순순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짓눌린 억울함으로 한 많은 세상
을 등진 예술인들의 혼을 달래는 신원 굿판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한판 벌여
주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ㅡ 한복차림의 채동선(蔡東鮮, 1901~1953)
채동선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독일 베를린
슈테른쉔음악학원에 입학,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뒤 1929년에 귀국
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악리(樂理)와 실기를 가르쳤습니다.
1924∼1939년에 4회에 걸친 독주회를 가진 바 있으며, 광복 후에는 작곡에
전념하였습니다. 고려음악협회장·작곡가협회장·국립국악원 이사·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는 등, 음악관련 활동을 하면서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독창곡을 지어냈습니다. 특히, 성악곡 가운데에 <조국>과 <한강>의 교성곡
이있고, <현악4중주곡 제 1번>과 바이올린독주곡도 있으며, 우리 민요도
채보(採譜)한 바 있습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여곡으로 엮어졌었는데 1980년에 다시 출판된
<채동선작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입니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나의 애창곡도 망향입니다. 나는 4월만 되면 망향이 부르고 싶습니다.
채동선이 처음 작곡할때는 정지용의 시"고향"에다가 곡을 붙혔는데 시인의
납북으로 이 가사가 금지되는 바람에 박화목의 "망향"과 이은상의 "그리워"
로 개사되어 불려졌습니다. 채동선이 작곡한 우리가곡은 12곡이라 들었는데
그중에 8곡이 모두 정지용시인의 가사였기때문에 사장되다싶이 되었는데
이제 우리양악 100년을 읽으면서 고향(망향)외의 7곡도 메모해 둡니다.
1) 고 향 ------ 망향(박화목 시), 그리워(이은상 시), 고향 그리워(이관옥 시)
2) 향 수 -------- 추 억 (이은상 시)
3) 압 천 ------- 동백꽃 (이은상 시)
4) 다른 하늘 --- 그 창가에(모윤숙 시)
5) 또 하나 다른 태양 ---- 또 하나 다른 세계(이은상 시)
6) 바 다 ------- 갈매기(이은상 시)
7) 몽랑풍 ------- 동 해(이은상 시)
8) 산엣 색시 들녘 사내 ------------ ?
ㅡ 작곡가 윤이상(尹伊桑,1917.9.17~1995.11.3)
작곡가 윤이상은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
에 입학, 1937년 귀국하였습니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56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
였습니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
의 옥고를 치뤄야만 했으나,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을 힘입어 풀려났습니다.
71년 독일에 귀화하고,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
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
의 민족이여(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 범민족통일음악회 '의
산파(産婆) 역할도 하였습니다.
음악계의 일부 인사들은 윤이상은 우리나라의 음악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작품과 예술은, 현대음악계에서 세계 5대 음악가로 손꼽혀지고 있는데
그가 독일로 귀화하였기에 독일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귀화는
이기적 동기나 자발적 모의에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 처지에서 강요된 선택
이었음을 감안하였을때 관용과 재평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부가 그를 구속하고, 그후에도 입국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예우하
고 손을 내미는데 그곳에 체류하고 음악 예술활동을 펼쳤다 해서 백안시하는
것은 상황의 산물인 인간을 흠없는 완전한 신(격)으로 평하는 처사입니다.
그의 태생이 한국인이고, 그의 예술의 내용이 어김없이 한국적이라는 평가에
따르더라도, 윤이상은 한국의 음악가로 대접해야 합니다.
ㅡ고향 그리워의 작사자 만향은?
이흥렬 작곡의 고향 그리워의 작사자는 만향으로 음악책에 나와 있는데
책에 따라서는 작사자를 이흥렬로 표기하고 있어서 만향을 이흥렬의 호로
알고 있을 정도여서 이런 혼동사태가 벌어 지고 있습니다.
별난데 관심이 많은 나는 묻는데까지 물어보고 해답이 안나와서 아드님
이영조교수께 물어 만향은 결단코 아버지의 호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만향은 누구란 말입니까?
또 바우고개의 작사자는 누구일까요?
음악책들에는 작곡자 이흥렬이 작사했다고 하는데 어느 음악강연회에서는
이호섭 작곡가의 형님 극작가 李曙鄕이라고 들었는데 확인하고 싶습니다.
1948년에 그가 고향 원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지워졌지 않나 싶습니다.
나운영 작곡의 <아! 가을인가>는 나운영 작사로 나온 데도 있고
작사자가 김수경으로 나온 데도 있는데 이것은 월북 작가 윤복진의 필명인
김수향(金水鄕)을 한자를 잘못 읽어 金水卿으로 된 것인데, 월북 작사가의
노래가 금지곡이 된 상황에서도 다행스럽게도 살아 남는 계기가 되었습니
다. 이야기인 즉슨 김수향은, 김해경이 李箱의 별명을 가졌듯, 월북 작사가
윤복진의 필명었는데도 월북작품의 금제조치때 사전 조사에서 김수향이었
더라면 끝나고 말았을 것을 김수경이었기때문에 검열에서 벗어 날 수 있었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친숙히 불러온 이 노래는, 이
런 사실말고도 작곡자가 박태준이라고 하는 문제도 안고 있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제주생활과 관련된
"떠나가는 배"의 작시자는 오랫동안 양명문선생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제주 현지의 양중해교수의 작품으로 판명되어 최근에 정정되었습니다.
아마 성씨로 인한 혼동과 영웅업적 몰아만들기의 피해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시(집) 중에서 가장 많이 예술가곡의 노랫말로 작곡된 시는
소월의 김소월의 시(집)입니다. 시인의 가족이 한미하여, 상속자가 저작권
을 양도하였기 때문에 작곡을 하려면, 가족이나 연고권도 없는 제3자
(서영훈)에게 구차하게 승락을 받아야 하는 고충을 말하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익을 누렸으면 그만 가족이나 연고자에게 반환하든가 아니면
이제는 국가가 사들여서 국민들의 몫으로 만들어 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 대중가요의 경우에도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눈물의 여왕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본명/송규)은 우리나라 예술 프로모터
의 선구자로 일하다 북으로 월북하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 선창, 은방울 금방울> 등은 그의 처남 이름(이봉룡?)으로 발표되었고,
월북 작사가 조명암(본명/조영출)은 유명대중가요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
강, 바다의 교향시, 신라의 달밤, 목포는 항구다> 등 33곡의 가사를 썼지만
그의 가사를 쓴 많은 노래들은 작사자를 제3자로 하여 발표되거나 안그러
면 살아 있는 작곡자의 의사에 반하여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 more information
노동은의 두번째 음악상자 // 노동은 / 한국학술정보 / 서울 , 2001년
우리 양악100년 // 이강숙-김춘미-민경환 / 현암사 / 서울 , 2001년
첫댓글 정선배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