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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山 自序
余幼也 學從王父 栗齋公, 王父訓以貧實之理 遂名余曰浩. 其後 句讀師 權丈肯湖 又呼余曰 石爾也. 石之號 不知何由 然親舊每呼 以浩 以石 皆應之無礙與. 莊子所謂呼牛呼馬 事同而實異也. 余爲人㝡下 名實皆不符 名姓尙難自保, 況萬不近似之別名哉?
我東近古 李之菡 築土爲室 乃自號曰 土亭. 金炳鍊 行止常戴黃冠 人稱之曰 金笠. 一則自號 一則人稱 皆不累名德形客, 其爲人則 有餘矣. 若指擬非倫 襃揚不似則 聲聞過情 君子恥之 不可斯須處也. 若符實合德 仰不媿於天 俯不怍於人, 自號與人稱 有何可猥哉?
余於己未春 以事入西獄 每於鐵囱下 晝則向壁而坐 夜則尸臥 而無聲屛息屛氣. 咫天如涯角 親戚如秦越 時從囱間 仰視仁旺山 或朝暉仁蕩 物色鮮姸 國祖之賜號 朝鮮眞不虛矣. 或祥雲來 內幕偃之 形從以隱遁 雿如高人臥雲下視, 或明月照耀 慇懃酬酢 如故人之來訪 叩寂余, 於是乎 戀慕起焉.
有人嘲曰 今子之愛此山 抑有說乎? 古人寓愛於物 以示已志, 淵明愛菊 濂溪愛蓮 有何志之可言乎? 余應之曰 愛之則可也. 志之則不敢也. 今余阨㝡而陷不測 居無寸土坐無尺席 而彼特立地上 凜不可犯 聳出蒼空高不可攀. 韓子曰 指山而問曰 人可乎? 彼培塿不可以爲山 邱垤不可以爲岳者 以其無可窮之實也. 況吾培塿丘垤之不若者乎? 野僧思錫 籠禽望雲已耳.
有人嘲曰 今子之愛此山 抑有說乎? 古人寓愛於物 以示已志, 淵明愛菊 濂溪愛蓮 有何志之可言乎? 余應之曰 愛之則可也. 志之則不敢也. 今余阨㝡而陷不測 居無寸土坐無尺席 而彼特立地上 凜不可犯 聳出蒼空高不可攀. 韓子曰 指山而問曰 人可乎? 彼培塿不可以爲山 邱垤不可以爲岳者 以其無可窮之實也, 況吾培塿丘垤之不若者乎? 野僧思錫籠禽望雲已耳.
人又問曰 子之愛何止 仁旺哉? 我東有大於仁旺者多矣. 金剛以名勝, 聞智異漢拿以靈異, 聞九月妙香 以古雅, 聞, 幷有可愛之實 雖遠在 支那之人 尙吟詩願見, 況我東人哉? 余曰 彼數山者 皆東邦巨岳也, 嘯咏于彼 徜徉于彼 不無其願. 然以余觀之 皆壤虫之於黃鵠, 䳡鶺之於大鵬也.
雖有王勃之席風 列子之乘雲 安所用之? 彼仁旺者 特在吾傍 慰我多矣. 彼安其所 而不動, 風雨不能磨, 霜雪不能堆, 霹靂不能動, 特立自重 足以凌駕太岳. 又鎭在國都之西 嚴嚴屹屹 有若衛國之勢 使盜賊不能窺, 使遠人有所景仰俯瞰, 國人使各安堵 似有子視之恤德.
余又慕之 欲措天下於仁旺之 安將何日 遂其願乎? 乃仰視噓唏 口欲言而犯令 手欲揺 而觸禁 獅吼之聲振撼左右 虎喝之胸風生. 內外首如蝟縮 身似藏 乃仰視仁旺誦出 師正氣等 書海甚忿鬱.
且病母遠在南涯 不聞聲息 此時若聞 吾入獄之事則 病上添患. 必不保朝夕 故不敢上書 陳情. 且二兒澤永 同余入獄, 三兒喜永 抛書不讀, 且荊妻因病絶粒久矣.
家事如是荒凉 宛如失棹之舟 慮慮念念 亦不能期談去也. 乃仰視仁旺 又誦杜工部 思家步月之詩旋放一哭. 仁旺之慰我安我 使我有不可忘者 以其在近故也. 彼金剛漢拿 妙則妙矣, 高則高矣, 靈則靈矣, 願則願矣, 其或在千里之外 慰我安我 反不若在近 仁旺之小山也. 故余之愛仁旺 實在此也.
且仁旺之下 大路也 余居卽其傍也. 車塵馬跡之聲 幷歷歷 入聞于斯特也. 雖父母過之 妻子過之 朋友過之 面不可得見 或有聲音之來則 側耳注聽 如瞽師之相聲.
昨夜忽聞 有讚美聲 似數三人作隊竝唱 余阧數精神 語傍人 此必吾敎會兄弟 爲我 幽閉之諸人 而如是欲過也. 當日畏喝不敢發 翌朝自明 聞無人聲. 乃呼隣囚崔聖模 鄭春洙 兩兄語之 亦皆聞歡喜 聳如山云耳. 三人仰山 其語適山腹 有人登陟俯視 依如吳門匹 未知誰某.
崔兄語余曰 兄若先出 使吾兒景煥 登彼攜手 使我見之云. 余曰諾 然則仁旺之爲慰安, 豈福在浩爲然也. 余又感焉 遂朗唫一絶曰,
名山衛國鎭西東 磨不雨号拂不風
萬姓仰瞻思獨立 盤于特地接于空
更思則是物牽情, 物物我我落如風. 馬牛之不相及則 雖文以紀實 欲以叙情. 只可道吾情實而已, 至於紀念則末也. 今余之愛此山 耀世不可 遺後亦不可 物爲我有然後足焉. 故余倣蘊軾 喜雨名亭之意 遂以作吾別名焉.
一九一九年 己未秋 於西監中 腹稿
애산 자서(愛山 自序)
내 어려서 종조부 율재공(栗齋公)에게서 배웠는데, 그 할아버지께서 빈실지리로 가르치시면서 나의 이름을 ‘호(浩)야’라고 하셨다. 그 후 구두법 스승[句讀師] 권선생 긍호(肯湖) 어른은 또 나를 석(石)이라고 부르셨다. 석(石)이란 호칭의 까닭은 내가 모르지만 친구들은 매번 호(浩)라고, 석(石)이라고 나를 불렀으나 모두 응답하는 데는 내게 거리낌이 없었다. 장자(莊子)의 이른바 호우호마(呼牛呼馬)가 사실은 그러하여도 실상은 다른 것이다. 나의 사람됨이 가장 모자라는 것은 이름이 실상과 모두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름과 성을 아직도 내가 잘 보전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별명에조차 도무지 가까워지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우리나라에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이지함(李之菡)은 흙을 쌓아 집을 삼고 이에 자신을 일컬어 ‘토정(土亭)’이라 하였으며, 김병연(金炳鍊)은 활동할 때 늘 황관(黃冠)을 쓰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김삿갓[金笠]’이라 불렀다. 하나는 자호(自號)이고 하나는 남이 붙여준 이름이니 다 그 덕목을 이름 하는 데에 누(累)가 되지 않았으니 그들의 사람됨을 형용하기에 넉넉하였다. 만약에 그 헤아림이 도리가 아니고 기릴만함이 비슷하지 않다면 그 명성이 정황에 지나쳐서 군자(君子)는 부끄러워서 모름지기 그렇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실제로 덕에 합치한다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자신의 호(號)나 남이 불러주는 호칭을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내가 1919(己未)년 봄에 사건으로 인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적이 있는데, 매일 쇠창살 아래서 낮이면 벽을 맞대고 앉았고 밤이면 시체처럼 누웠으니 소리 없이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아주 가까운 하늘아래에 있으면서 친척은 마치 옛날 진(秦)나라와 월(越)나라의 상거(相距)처럼 땅 끝 먼 곳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때에 창살 사이를 따라 인왕산(仁王山)을 쳐다보았고, 혹 아침햇살이 사랑스럽게 거기 가득히 비치면 만물의 빛깔도 고와 우리나라 시조께서 부르신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진실로 허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혹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면 거기 내막(內幕)에 드리워진 고결한 사람이 높이 누워서 구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하고, 혹은 밝은 달이 밝게 비치면 은근히 잔을 권하는 정든 친구가 내방한 듯 나의 정적을 두드렸으니 이에서 사랑하고 사모함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소하는 사람이 있어 말했다, “지금 당신이 이 산을 사랑하는데, 무슨 까닭이라도 있소? 옛 사람은 물체에 사랑이 깃들면 자기의 뜻을 나타냈으니,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사랑하였고, 염계(濂溪)는 연(蓮)을 사랑했는데 당신은 무슨 뜻을 말할 수 있겠소?” 내가 응답하기를, “산을 내가 사랑하는 것은 가하나 뜻[志]을 두는 것은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가장 거리끼는 형편이고 위험은 예측할 수 없어서 한 치의 흙 위에도 앉을 수가 없고 한 자의 흙더미를 차지할 수도 없지만 저 산은 독특하게 땅 위에 서있으니 그 늠름한 자태를 아무도 침범할 수 없이 푸른 하늘 높이 솟아있는데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유(韓愈)가 말하기를, ‘산을 가리키면서 산이 되겠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저 조그만 흙더미는 산이 될 수 없고 작은 언덕[丘垤]이 큰 산[岳]이 될 수 없는 것이니 그것들로는 불가능할 뿐인데, 하물며 나의 작은 흙더미와 조그만 언덕과 같은 것이겠습니까? 시골 중[野僧]이 풀어주려고 해도 새장에 갇힌 새가 구름을 쳐다볼 뿐이었답니다.”
사람이 또 묻기를, “당신의 사랑은 어찌 인왕산에 그치오? 우리 동방에는 인왕산보다 큰 산이 많이 있소. 금강산은 경치가 빼어나고, 지이산(智異山)과 한라산(漢拿山)은 특별하게 신령하다고 들었으며, 구월(九月) 묘향산(妙香山)은 예부터 우아하다고 들었으니, 아울러 사랑할만한 사실이 있소. 비록 멀리 있기는 하나 중국[支那]의 사람들도 고상하게 여겨 이 산들에서 시를 읊고 보기를 원하였는데, 황차 우리 조선 사람이겠소?” 내가 말하기를, “그 몇 개의 산은 모두 우리나라[東邦]의 큰 산들이니, 거기서 시를 읊고 노래하며 거기서 노닐고자 하는 소원이 없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그 모두가 큰 고니에게 흙 벌레와 같고, 붕새[大鵬]에게 산비둘기나 할미새와 같습니다.”
비록 왕발(王勃)의 바람을 탔던 이야기가 있고, 열자(列子)가 구름을 탔던 것과 같음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인왕산은 특별히 내 곁에 있어서 나를 많이 위안하고 있다. 저것이 제 자리에서 편안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비바람에도 닳지 아니하며, 눈서리에도 더 높이 쌓이지를 않고, 벼락도 요동할 수가 없으며, 독특하게 서서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해가니 족히 큰 산을 능가할 수 있다. 또한 서울의 서쪽을 안정시키며 엄숙하게 우뚝 솟아 나라를 지키는 태세를 취하는 것 같으니 도적이 엿보지 못하게 하고, 먼데 사람은 우러러 존경하도록 내려다보며, 나라백성들이 각기 마음 놓고 평안하도록 하니 마치 자식이 있어 보살펴주는 사랑의 덕을 베푸는 부모와 같다.
나 또한 이 산을 사모하여 천하가 인왕산에 조처되기를 바라니, 그 소원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는가? 이에 내가 바라다보며 탄식하니 입으로는 말하고자 하나 법령을 어기게 되고, 올라가 손으로 만지고 싶으나 만질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으니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로 좌우를 흔들고 호랑이 가슴에서 외쳐 나오는 소리가 바람처럼 생겨난다. 안팎으로 머리는 고슴도치처럼 오므라들고 몸은 맹꽁이처럼 감출뿐이지만 이에 인왕산을 쳐다보면 우뚝 솟아올라 강직한 정기(正氣)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바다 같은 울분을 수술해주는 것 같았다.
또한 병환에 계신 나의 어머니께서는 남쪽땅 끝에 계시는데 소식도 듣지 못하니 이때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들으신다면 병상에서 우환을 더하게 될 것이니 조석으로 돌봐드려야 하면서도 사정을 아뢰는 편지도 감히 올리지 못하는 까닭이 있었다. 또 둘째 아이 택영(澤永)은 나와 한가지로 감옥에 들어왔고, 셋째 아이 희영(喜永)은 책을 던지고 읽지 아니하며, 또 아내는 병으로 인하여 음식을 먹지 못한지가 오래다.
가정의 일은 이같이 처량하니 완연히 노를 잃은 배와 같아서 걱정하고 염려함이 또 언제 지나갈지 기약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인왕산을 올려다보고 또 두보(杜甫)의 달밤에 집을 생각하며 걷는다는 시를 외면서 돌다 한바탕 울음을 터트렸었다. 인왕산이 나를 위로하고 안위하여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그것이 가까이 있는 까닭이었다. 저 금강산과 한라산이 기묘하면 기묘하고, 높으면 높고, 신령하면 신령하고, 소원하면 소원할 만하겠지만, 그것들이 혹 천리 밖에 있으니 나를 위로하고 안위함에는 도리어 가까이 있는 인왕산만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내가 인왕산을 사랑함이 실로 여기에 있다.
그 인왕산 아래에 큰 길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 곁에 산다. 수레 먼지와 말 지나는 소리가 아울러 분명하게 들려오는 그런 특별한 곳이다. 설사 부모님이 거기 지나가시고 아내와 자식이 지나가거나 친구들이 거기를 지나간다고 해도 얼굴을 뵙지 않고 혹 음성만이 들려온다면 장님 악사(樂士)와 같이 귀를 기울여 듣도록 집중해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젯밤에 홀연히 서너 사람인 듯 악대(樂隊)가 되어 병창(竝唱)으로 찬미(讚美)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갑자기 몇 번 정신을 차리고 옆 사람에게 말했다, ‘이는 필시 나의 교회 형제들이 나를 위하여 깊숙이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찬미하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당일에는 두려워 크게 소리를 감히 지를 수가 없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의 소리도 들림이 없었던 게 명백하였다. 이에 동료 죄수[囚人]들인 최성모(崔聖模), 정춘수(鄭春洙) 두 형을 불러서 말했더니 역시 모두 그 환희의 찬미가 산처럼 솟아오른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이 산을 올려다보며 산허리에 올라가는 얘기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올라가며 내려다보니 그 옷이 오문필련(吳門匹練)과 같았으니 누구인지는 몰랐다.
최성모 형이 내게 말하기를, ‘형이 만약 먼저 나가거든 나의 아들 경환(景煥)으로 하여금 저기 오르게 하여 그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올라가셔서 나로 하여금 그를 보게 해 주시오’ 라고 했다. 내가 그러마고 허락하였고 인왕산은 위안이 되었으니, 어찌 나 호(浩)에게 그리되는 축복이 아니리요? 내가 또 감복하여 이에 시 한 구절을 읊었네;
“명산이 나라를 지켜 서쪽동쪽을 진정시키니/ 비에도 닳지 않고 바람도 흔들지 못하네.
만백성이 우러르고 독립을 생각하게 하니/ 특별한 땅에 굳게 서서 하늘에 접하였다네.”
다시 생각하면 이 물체가 정을 끌어내니, 각 물체와 내가 따로따로 여서 바람난 말과 소가 서로 내달아도 미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연관이 없는 것 같이, 설사 그 사건을 느낌으로 글을 써서 나타내고자 할지라도 단지 자신의 사사로운 정을 말할 뿐이니, 더욱이 기념하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 자랑할 수도 없고, 후대에 남기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니, 나를 위한 물체가 있은 연후에 만족하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소식(蘇軾)의 유명한 희우정(喜雨亭)을 본 따서 이로서 나의 별명(別名)을 지은 것이다.
1919년 기미(己未) 가을
서대문 감옥에서 마음에 생각했던 원고(原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