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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무지개(제 4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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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인연의 끈이 짧아
내 손이 닿지 못하는 그쯤에서
그대는 울고 있다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면
서로 다투어 핀 개나리, 목련
사붓 밟고 서성이는
잡힐 듯 아득한
그대 그림자
늘 마음 자리에 머물러
내 삶을 지탱하는데 활력소가 되어준
이웃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01년 봄
寓居에서 崔湖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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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서울 무지개
미소
그 여인
그대가 그립다 1
그대가 그립다 2
그대가 그립다 3
그대가 그립다 4
그대가 그립다 5
그대가 그립다 6
그대가 그립다 7
그대가 그립다 8
사랑 법
오늘은 비
서울 무지개
하늘
그대의 비
추억 만들기
먼 산
2 꿈꾸는 마을
허준 1
허준 2
허준 3
허준 4
허준 5
허준 6
그 마을 1
그 마을 2
그래 그래
인왕산 까치
가족
그 집의 전통
대나무
장작
이 도시의 적막
허수아비
해질 녘 한참은
꿈꾸는 마을
3 이 시대의 아벨
사과
거울
불빛
천우의 목련
저승의 라일락 꽃밭에 간 그대여
라미의 죽음
슬픈 시
뒷모습
미꾸라지
이 시대의 아벨
역설
마음 비우기
하루살이
4 겨울바다
봄비
장다리꽃
숲에서
귀뚜라미
눈 오는 날에 띄우는 엽서
겨울 일기
겨울나무 3
겨울나무 4
겨울바다
시 해설-월평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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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를 동산의 장미라 부르다가
샤론의 수선화라 부르다가
가시떨기 속 흰 백합이라 부르다가
구름 빛 꿈을 머금은 귀여운 노루새끼
물빛에 조히 씻은 슬기로운 사슴이라고
오늘도 가만히 불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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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우리를 매혹시킬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하루 동안에 무엇이
그토록 아름다운 꽃이 되는가
그대가 머물러 더욱 그리운 얼굴
그 여인
시와 같은 여인이다
그 여인을 보면 시가 생각나고
곧 시가 된다
너무나 산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잘 쓴 시와 같은 그 여인은
스스로 시인 줄 알고 있을까
시와 무관해도
시를 전혀 모르면 또 어떠리
오늘도 한 편의 아름답고 즐거운
시를 읽는다
그대가 그립다 1
그대와 더불어 온 하루는
쏜살 같이 달려가지만
그대 없는 날
허전한 빈자리
나는 우두커니 앉아서
느림보 같은 시간에 눈을 흘긴다
어느 날이었던가
내 마음의 창에 날아든
어여쁜 비둘기 한 마리
오늘도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그립다 2
밤이 낮을 기다리듯이
학처럼 서서 기다린다
그대가 올 때까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눈에 어리는 그대는
전생의 어느 길목에서
애달프게 헤어진 누이였을까
그리운 사람아
내 마음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오늘은 또 내게 있어
이리도 아득한 슬픔이 되는가
그대가 그립다 3
그대가 다닌 이 길을 걷는다
그대가 밟았을지 모를
돌멩이 하나까지
그지없이 소중하구나
발자국이 남아있는
그 자리를 가늠하며 딛는다
발자국 하나 하나를 줍는다
그대의 몸과 마음을 지탱해 온
사랑스런 흔적 모두를
더 이상 그리워 할 수 없는
길이 끝나는 데까지
그대가 그립다 4
앉으나 서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누웠을 때나
그대만을 생각한다
가까이 더 가까이
얼마나 더 다가서야
그대의 수심을 만날까
이처럼 가슴에 각인 된
그대의 모습
이름 하여 사랑인가
그대가 그립다 5
가장 귀중한 보석은
드러내지 않는다, 더욱이
남에게 자랑해선 안 된다
드러내면 잃어버린다
나만이 아는 곳에
꼭꼭 깊이 감추어 둔다
그대는 나의 보석
그리울 때마다
무시로 꺼내어
바래지 않는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닦고 닦는다
그대가 그립다 6
이리도 간절히 보고픈 날
그대는 오지 않는다
기린처럼 목을 뽑아도
그림자조차 없다 일순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
한나절이 무겁게 간다
다 주고 싶은 마음이
갈 곳 몰라 비틀거린다
무정한 사람
아픔만 한아름 안겨주고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그대가 그립다 7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ㅇㅇㅇ하고 불러본다
쓰고 써 본 글자 셋
그립다
ㅇㅇㅇ하고 또 불러본다
살풋 미소 짓고 다가서는
청순한 그대
너무 그립다
오늘은
이름까지도 그립다
그대가 그립다 8
내 마음 향한 곳에 그대는 없고
오가는 길에도 보이지 않고
잠들 수 없는 밤에는 침묵하고
내 외롬 아는지 모르는지
애타는 그리움에 가슴 아프다
내 눈길 멈추는 곳에 그대 머물고
다니는 길목에서 만났으면
그대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이렇게 그리운 하루가 또 저문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은 고향이 아니다
그대를 만난 후
내 가슴 한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물소리 바람소리
온 바다를 불러 모아
출렁이고 있다
내 갈증의 사막에서
만난 그대의 섬
내 그리움의 끝
그 섬에 가고 싶다
사랑 법
산이 좋아도
산에 가지 않는다 더없이
바다가 좋아서도
바다를 찾지 않는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니
산과 바다가 달려와
나를 점령해 버린다
그 날 이후
산과 함께 산다
바다가 되어 출렁인다
오늘은 비
속상해 돌아서는 뒷모습
차마 잡지 못하고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내 맘 다 안다는 그대를
그냥 떠나보낸다
돌아보면 쏟아질 듯 눈물 고인 발걸음
잠시 헤어짐도 이리 안타까운가
어께 도닥거려 줄 손길이 무척 그리운 날
하늘은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이고
나는 추적추적 운다 사랑 때문에
서울 무지개
한결같이 아름다운 그대의 마음씨를
오늘토록 못잊어 이 저녁 무렵
사무친 그리움을 하늘이 알고
저리도 곱게 무늬를 수 놓았네
하늘
그대 슬플 때 울어주리
기쁠 때는 함께 웃고
외로움에 여윌 때는
잃어버린 그림자 되어
온 종일 그대 곁에 서성이리
맹세하지만 나는 그대를
아프게 하지 않으리
그대가 젖어 흐느끼면
내 마음도 덩달아 추워지는 것을
하루에 열두 번 더
변덕스런 고집과
조각난 생각들에 시달리지만
그대 가슴에 익사해도
후회하지 않을
끝없는 내 사랑
그대를 위해 한없이
풀밭 펼쳐놓고
그대의 양떼를 먹이리
까만 융단을 펴
그대를 위한 꽃을 수놓으리
그대의 비
비속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떠나 간 그대
비 오는 날마다
비가 되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그대
투정 부리듯
영 잠재우지 않는다
나무 잎새를 적시는
그 은근한 속삭임보다
더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대를 미워할 수 없다
그대의 본심은
비속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 간
조용한 흐느낌
정말 우리는 사랑했는데
비에 젖은 입술과 입술이
뜨겁게 만나고
비속에서
비를 맞으며
나는 그대에게 젖는다
추억 만들기
그대의 삼각주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감미로운 물살의 음악에 떠받들려
알맞게 솟아오른 모래섬
물새들의 발자국 무늬 되어
언제나 신비로운 작은 능선
그곳에 나의 그림자를 눕히고
지워지지 않는 추억을 만들며
간지러운 바람의 손길이 되고 싶다
때로 폭우의 거친 숨결에
흔적 없이 사라져도
다시 햇살 부신 날 그리움만큼
쌓이고 쌓이는 물살의 내력
그대의 비밀스런 계곡엔 샘이 흐르고
언제나 달콤한 밀어의 숲 가득
노을이 곱게 채색되면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또 하나의 삼각주
기다림만큼 쌓여간다
먼 산
내가 그대를 생각함으로
그대는 늘 나와 함께 있다
그래서 나를 보듯
그대를 분명히 알고 싶다
가리운 안개 훌훌이 걷어내고
멀어진 마음이 달려와서
게곡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지난 밤 별빛이 떨군 사연들
넓디넓은 가슴을 열고
아낌없이 보듬어 안는 내력
무엇을 위해 침묵하고
하늘의 섭리와 만나는가
그리워 바라보면
유년의 뜰에서 떠나보낸
아쉽고 허전한 꿈처럼
나의 손이 닿지 않는 그곳에
하늘과 동화되어 가는
그대의 종교
가깝다 하면 멀고
멀다 느끼면 가까운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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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꿈꾸는 마을
보내고 보내어도 남는
이 마음의 그리움을 구슬로 꿰어
그대의 예쁜 목에 걸어주면
그대는 한 마리 학이 되어
천리 먼 내 맘의 창으로 날아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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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1
- 그대는 누구
달려가라
그대 가고 싶은 곳까지
머뭇거려도 세월은 간다.
눈물 많은 사람들에겐
젖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
달려가야 한다.
첩첩 막아설지라도
저 산들을 넘어야 한다.
이쯤에서 돌아서면 어쩌자는 것이냐
어차피 그늘진 인생
더는 짓밟힐 수 없다
부딪는 벽과 어둠뿐이지만
달려가라, 허준
그대 세상에 왜 왔는가,
양반도 못 되고 쌍것도 아닌
씨도 자란다는 걸
보여줄 오기라도 있다면
그대 어미의 눈물을 마시고
부릅뜬 눈감지 말라.
허준, 2
-그리운 다희
돈만 있으면
양반부인도 살 수 있는 세월에
사랑타령을 해선 안 된다
배고픈 이들의 푸념 같이
죽고 못 살 사랑이란
서글픈 넋두리다
비천한 인간의 사랑도
향기가 날까
사랑에도
양반 쌍놈의 구별이 있다면
그리운 다희!
그대는 양반의 핏줄
양반도 못 된 쌍 것도 아닌
나와 만난 인연이여 모질구나.
피해갈 수는 없었을까
누가 뭐래도 꽃 같은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살 맛 나는 세상도 되나니
허준 3
-이 땅의 예수
누가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가,
아직 이 땅에 예수는 오지 않았고
무지렁이 민초들의 아픔을 대신하여
내의원 취재의 길 놓치도록
이 땅의 나사렛 동네
진천의 산골 버드네 마을로 찾아든
마음이 크고 넓은 사람아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 된
그대는 이 땅의 예수
말뿐인 사랑이 번지르르한 세상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배고프면서
이름 없고 빛도 없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이들과 어울려
눈물 닦아주던 사람아!
허준 4
-스승 유의태
의술은 곧 인술
사랑에 뿌리 해야 하느니
어찌 거품 같은 이름에 연연하여
재물에 눈 어둡고
명리를 쫓으면
약초도 잡초가 되는 것을
무명초가 되어도
병자를 고치는 약초가 되어라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셀 수 없이 많은 세상 아닌가,
대쪽 같은 고집에 숨긴 뜻
누가 감히 알 수 있었으랴
인체해부는 상상도 못한 시절
자진하여 몸을 내놓고 떠난
스승의 사랑 한없어라
생각하면 눈물 난다
그 그릇의 크기여
허준 5
-혜민서
어디서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뜨면
구름 떼처럼 몰려가는 발걸음들
예나 지금이나
아픈 사람들 너무 많구나,
그래서 오늘의 기도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사이비 교주는 살 쩌 가는데
몸 누일 곳이라곤
초가집 울타리 주변 흙바닥
허 준의 집엔
고급 가마는 얼씬도 않고
걸어 걸어서 찾아 온
남루의 모습들만 줄을 이었구나,
서 있는 사람들
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혜민서 근무를 자청하고
늦은 귀가 후에 또 밤늦도록
아픔의 뿌리를 찾아 씨름한 그대
진정 자비가 깃든 마음엔
기적이 일어나는 법
병 고친 사람들 늘어나는 구나
그때는 시샘과 미움이 없었을까
사람 사는 세상인데
허준 6
-의녀 미사
지구의 끝까지
저승의 길목까지 가자해도
따라나설 그대여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아 늘
내 곁에 서성이는 그림자
미사!
그러나 그대는
내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
저 하늘의 태양이 빛나는 한
어찌 잊을 수 있으리
오늘은 또 비가 내리고
그대에게 나는
멀리 있어 애달프구나.
그 마을 1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저기 또 하나 뜨는 별
시가 되어 살다 간
용래*가 웃고 있다
* 박용래 시인
그 마을 2
여윈 달빛에 부셔지는
뜰 앞 오동나무 그림자의 나직한 신음이
창에 와 쌓일 때쯤, 섬돌 밑
질펀히 목 놓아 울다 지친 귀뚜라미
가만 귀 곤두세워 엿듣고 있다
그래 그래
말도 말아라, 아비야
온다간다 하겠느냐
문 열고 동구 밖 너머
먼 산 바라볼 때,
인왕산 까치
그렇게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었다.
천 년 세월의 꽃잎이
나무 가지에 살풋 내려앉는다.
십리 밖 언덕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하루해가 또 저문다.
사립문은 열어둔 체
산 밑 외딴집에는
밤새도록 손짓하는
불빛 한 점
가족
몸과 마음이 쉴
지상엔 집 한 채
딸 둘, 아들 하나
아내와 나
구름 같은 세상
산다. 허물없이
어울려 산다
인연의 줄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지상의 집 한 채
아들 하나, 딸 둘
그리고 나와 아내
바람 같은 세월
사랑하며 산다.
그 집의 전통
여느 며느리 같으면
시어머니의 흉을 본다.
그러나 그 집 며느리는
칭찬만 하고 다닌다.
나이보다 젊어 청춘 같다느니
군살 없는 몸이 처녀 같다느니
아직은 건강해서 일을 가져야 한다느니
예쁘고 아름답다느니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을 늘어놓는다.
대나무
깊은 어둠과 만나기 전에
밝은 이웃과 어울린다.
비록 뿌리는 얕아도 키는 크게 자라고
활처럼 휘어져 겸손도 익힌다.
거목이 쓰러지는 태풍에도
땅이 갈라지는 지진에도
서로 손잡고 이룬 세상
죽음도 떼어놓을 수 없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장작
불을 지피면 기다렸다는 듯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라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생명이여
밤마다 별빛이 숨어들고
날마다 햇빛과 바람이 배어들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뜨거운 불덩이가 된 나무
자르고 쪼개어도 불덩이는 불덩이
누군가 손이 불을 댕겨주면
그때부터 침묵을 털고 깨어나는 불의 씨앗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아궁이 속 허무를 삼키고
확 확 절정에 서면
오래 전 떠난 인정의 손도 보이고
반가운 얼굴도 웃고 달려온다.
시골집 뒤안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이면
그 해 겨울은 한없이 따뜻했다.
이 도시의 적막
이 도시의 적막은
변두리에 몰려 있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고달픈 발자국들
수척한 밤마다
버림받은 유배지
산 번지에 몰려들어
수심 깊은 바다를 키운다
이 도시의 적막은
피안 같은 변두리에서
남루의 그림자를 닦아내는
고향의 등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다.
또한 별빛과 만나고
이슬 맺히는 소리에 눈뜨는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면 우뚝 일어서는 얼굴
허수아비
형편이 나아졌다지만
여전 논바닥
요란스레 옷 걸쳐도
우스꽝스럽기 마찬가지
어설픈 모습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누가 알아주나요.
새들도 그것 보라는 듯이
이제는 속지 않습니다.
허수아비 하고 불러주면
낭만적인 시절도 지나고
낯익은 얼굴들 점차 떠나가 버린
그냥 그대로 버려진 외로움
여기 저기
서로를 부르는 인정들
배가 고파도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해질 녘 한참은
해질 녘 한참은
그대의 품이다
하늘은 장미꽃밭
구름향기 넘치고
잠들지 않아도 이윽고
밤이 오는 길목
까마귀는 가장 고운
울음을 운다.
나는 수면 같은
회상의 뜰을 거닐며
지상의 모든 노래가
순간의 그림자인 것을
어느새 빛나는 별
하나, 둘
영생의 씨앗이 된다.
꿈꾸는 마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마을에 가서
생활에 찌든 때와 피곤을 벗어놓았네
오만과 거짓의 화장을 하고
언제나 그럴싸한 웃음을
거울 속에 새기며 만족해하던
납덩이같은 몸과 마음이
한 줌 바람에도 껍질이 벗겨지고
냉수 한 사발에 눈처럼 녹아
날개를 단 듯 가벼워졌네.
유난히 생기 도는 꽃과 새들의 노래
반갑다고 온 몸으로 산천이 달려와
건강한 손을 내밀어 덥석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아주었네
어디에도 탐욕에 일그러진
이목구비 보이지 않고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법 없이도 넉넉하게 잘들 살아가는
그 마을에 가서
비로소 가슴 뜨거운 사랑을 알게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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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시대의 아벨
그대 속에 내가 살고
내 그리움 속에 그대가 산다
나를 만나기 전 그대는
빛이었을까
바람이었을까
아니면 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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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잘 익어 때깔 고운 그대
욕심이 지나쳐서 옷을 벗기고
감춘 속살을 보고 싶어 하는
지지리도 못난 동물근성
부끄럽다고 비명 지르며
한사코 도리질치는
그대의 옷을 벗긴다
벗길 때마다 묻어나는
끈적끈적한 아픔이
내 손에 달라붙는다
이제 그만 하라고 발버둥쳐도
폭군이 되어 완전히 벗겨버린다
알몸이 되어 어쩔 줄 모르는
그대의 난처함 아랑곳없이
덥석 한 입 깨물어 맛있다 한다.
거울
하늘이 너무 맑아서
내 얼굴 미치지 못하고
환하게 밝혀만 준다.
눈동자에 빛이 샘솟게 하고
이마에 서늘한 바람 한 자락 풀어
거울이 되게 닦아준다.
열매는 익어
기쁨의 강이 철철 넘쳐흘러
어둠을 거두어 간다.
나를 보는 그대 또한
빛나고 아름다운
거울이 되어
저만큼 하늘에 걸린다.
한 줌 빛을 더한다.
불빛
이
어둔 밤에도
내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저 불빛 때문이다
저 불빛, 나의 길이다
저 불빛, 나의 신앙이다
저 불빛, 영혼의 눈빛이다
저 불빛, 오로지 나의 사랑이다.
천우의 목련
앞뜰의 목련 한 그루
내 마음 어이 알고
그대 있는 쪽으로 팔을 뻗었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나
다소곳 그리운 몸짓인가
오색 수실로 엮은 마음이 달려와서
밝음 위에 밝음을 수놓아
너무나 눈부신 나의 뜰
목련꽃 송이 송이마다
그대의 예쁜 사랑 보겠네.
저승의 라일락 꽃밭에 간 그대여
- 고 박 정만 시인 영전에
오늘 아침 신문에서 부고를 접했다
이제 한 창 일 할 나이 마흔 둘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모든 그리운 인연을 훌훌 떨쳐버리고
힘겹고 남루한 삶과는 반대로
주옥같은 시편들을 남겨놓고
떠나간 그대
보다 아름다움을 탐해
조금은 성급한 작별을 한 것 아닌가
그대는 또 내게 고마운 사람
누구도 거들떠 안보는 시를
맨 처음 이 달의 시에 소개한
그래서 더욱 생각난다.
시편들을 읽으며 눈물 난다.
살아서 한 번도 대면 못했지만
그대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내 영토의 양지 바른 언덕에 높이 세우고
세상사 여의치 못할 때마다
소주병 들고 찾아가
그대와 함께 취하리라
부디 저승의 라일락 꽃밭에서
이승의 못다 한 인연
못다 한 사랑
노래로 영원 하라.
*1988년 작고
라미의 죽음
아버지와 아들
살려 달라 애원하는
무저항의 손짓을 향해
신나게 난사한
이스라엘 병사의 총구
유대교의 최고 명절인
욤 키푸르에*
풍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랬을까
두려움이 공포로 변한
팔레스타인의 열 세 살 난
라미. 알두라
끝내 그의 생명을 앗아간
비정한 자는 바로
신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군인
신의 이름을 더럽힌
용서받지 못할 자
한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그를 죽여 얻은 게 무언가
생명을 죽이는 전쟁이
인류의 희망이고 미래라면
도리 킬 수 없는 주검 앞에서
슬로모 벤 아미 이스라엘 외무장관이나
이스라엘 측 억지 주장은*
더욱 우리를 분노케 한다.
* 속죄의 날.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성스러운 기간
* 라미의 죽음을 조작된 것이라 함.
슬픈 시
- 1997.8.4. 새벽 충북 옥천 산사태로 매몰 된
일가족 5명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모처럼 손자의 재롱에 밤 깊은 줄 모르고
산기슭 외딴집 단란한 웃음소리
창 밖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아들 내외의 효심은 부모 모시고 며칠 간
손자를 안겨드리는 정성이었다.
그렇게 여름휴가는 즐거운 나들이었다.
무슨 죄업이었을까
벼락 치듯 무너져 내린 산사태
수만 톤의 어둠에 깔려
아들 딸 살리려 몸부림치다
끝내 숨져 간 내외와 할아버지
지상에서 마지막 불빛은 그렇게
영혼의 별이 되어 떠났지만
그 순간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살아있는 이들의 몫으로 눈물 난다.
뒷모습
-97.9.5. 마더 테레사 영면하다
석양의 하늘은
그리움이 충만한 꽃밭이다
서쪽으로 몰리는 새 떼
한 뼘 남은 해를 따라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
둘이서, 셋이서, 여럿이 어울려
두런두런 귀로를 서두른다.
빈자의 뜰을 누비다가
한 생의 난간을 딛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더. 테레사!
당신의 마지막 손길이
온 누리를 가득 적시고 있음을
영생하소서.
미꾸라지
잘 썩은 진흙바닥에 숨어 있을 일이다
미꾸라지여, 네가 얼굴을 드러내면
세상은 온통 흙탕물이 되고
무성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시시비비가 끊일 새 없다
비비꼬는 유연한 몸매로
잡히지 않고 곧잘 빠져 달아나면서
어질러 놓는 도랑물은 난장판이다
어느 새 저만치
맑은 물이 흐르는 바닥에 엎드려
시침을 뚝 떼고 몸 사리는 처세
애꿎은 붕어와 피라미가
흙탕물을 일군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미움을 받는다. 변명할 수도 없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말이 없어야 할
너는 활개 치며 끼어들지 않는 데가 없고
하품을 하면서 바쁘다 바뻐
연신 땀을 닦는 제스처
교활한 잔머리를 굴리면서
어리숙한 이웃의 눈을 흐리게 하는
재주 뛰어나도
너는 미꾸라지
너의 권모와 술수
거짓이 먹혀 들어가는 세상이
다만 답답할 뿐이다
이 시대의 아벨
내가 언제 배고픈 이웃을 위해
부른 배를 줄여 본 적 있었던가,
언제 내가 굶주린 이웃을 생각하여
배고픔을 참으며 적선하였던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쉴 새 없이
나만의 몸무게를 늘여갔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세상은
정의롭고 인정이 철철 넘치는
이 시대의 양심이라고 박수를 보냈다
명분과 실리가 있는 곳엔 빠진 적 없고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일에는
눈길 한 번 보낸 적 없는데
가랑잎 같은 이웃의 친구라고
해마다 표창장과 감사패가 주어졌다
내가 진정 헌신하고 봉사했던가
타고 난 달변으로 재주를 부린 것 외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진실한 일꾼, 위대한 인물이라고
그런 칭찬 자주 듣다보니
그렇게 살아온 듯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역설
돈은 더럽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은
가장 깨끗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럽지 않다면
겉을 깨끗하게 하는 돈
더럽다 더럽다 하면서도
서로 움켜쥐려 혈안이 되는
누구나 제일 좋아하는 돈
돈이 많으면
하루 새 선남선녀로 둔갑하는 세상
거지는 더럽다
그러나 돈은 거지가 아니다
마음 비우기
언제부터인가
별빛 한 점 쓰며들 틈도 없이
오욕으로 가득 찬 실내
밖을 내다볼 창도 막혀버리고
이슬처럼 맺히는 그리움도
간직할 수 없게 된 요즈음
갈수록 어둠만 쌓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
전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의 물맛 같은
인정도 여유도 만날 수 없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기와 불신이
그 맑던 하늘 다 삼켜버렸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그대가 찾아와도 앉을 자리 없어
문밖에서 돌려 세웁니다.
얻은 것은 많아졌는데
갈수록 외롭고 허전합니다.
구원이 될 수 없는
이 적막의 덩이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오직 하나
빛이 스며들도록
마음을 비우고 비웁니다.
밤낮 없이 닦고 닦습니다.
꽃향기 가득 넘치고
싱그러운 이슬의 새벽이 열릴 때까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겨우 눈뜨고 있습니다.
하루살이
하루살이에게 인간은 신의 위치다
인간도 신이 볼 때는 하루살이
하루를 산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모두 다 신 앞에선 하루살이
***************************
4 겨울바다
그대 있기에
내가 사는 세상
그지없이 좋아라.
****************************
봄비
고집스런 나무들의 기가 죽는다.
부드러운 손길에는 어쩔 수 없이
감춘 비밀 하나씩을 털어놓는다.
그때마다 적막한 주위가 환해져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
양지바른 곳에 웅성거리던 햇살들이
제각각 꿈을 안고 흩어져 간 자리마다
연두 빛 속살 드러내며 얼굴을 내미는 새순들
얼마나 많은 슬픔 감춘 채로
아득히 멀어갔던가, 잊어졌던가.
아픈 마음 가다듬고 다시 한번
미지의 꿈을 펼쳐놓고 일어선다.
그래서 기다림은 또 눈부신
예감으로 다가오고
약속이나 하듯
촉촉이 가슴을 적시며 내리는 봄비
장다리꽃
피자가 천국의 음식이었던
4,50년대를 살아온 아버지
170cm면 제법 큰 키에 들었다
아이들이 자라 170cm를 넘어서자
아버지의 자랑은 안으로 숨어들고
잃어버린 키만큼 커 가는 아이들
아이들의 숲에 서면 어깨 밑에 닿는다.
보리밥에 된장찌개라도 배불리 먹어봤으면
오로지 한 소망을 안고
오뉴월 땡볕에 엎드려 밭고랑을 누비느라
허리 한 번 꼿꼿이 펼 수 없었던
보릿고개를 넘을 때마다 키가 줄어들었다.
쌀밥에 불고기도 싫다는 요즘 아이들
피자, 햄버거에 쑥쑥 자라
점차 아버지의 모습 대신 서구의
그리도 잘난 얼굴 흐뭇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따금 아버지는 고향의 밭이랑마다
지천으로 핀 장다리꽃을 생각한다.
숲에서
그렇게 밝은 자연의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비뚤어질 수 있는가
그렇게 푸른 하늘 짙은 숲을 보면서
붉으락 푸르락 하는 얼굴이 되는가.
한 컵의 냉수를 마셔도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 생각에 어긋난다고
외면하는 고집은 무언가
그 고운 얼굴이
그 잘난 마음이
깨진 거울조각처럼 되어야겠느냐
나무처럼 풀처럼도 못 사는
사람들아
귀뚜라미
이맘때쯤 생각난다.
앞집 수다쟁이 영자엄마의 해말간 웃음과
속없이 좋은 뒷집 덕구 아제의 육자배기 한가락
순아 누이의 분 냄새도 아직 풍긴다.
항아리 뚜껑 여닫는 소리에
새벽은 부스스 눈을 떴지
장독대 옆에서 모로 누운 삽살개 꼬리치는
오지 같은 침묵이 한나절을 키우면
야트막한 앞산 이마를 적시고 온 바람이
뜰에 뚝뚝 낙엽을 떨구고
노을빛에 익어가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집집마다 하나 둘 등불이 걸리면
산도 돌아앉아 서걱서걱 머리를 빗고
먼 발의 개 짖는 소리
별들이 숨바꼭질하는 달밤
달빛을 헤치며 거닐던
그 골목 어귀의 전봇대에 새긴 숱한 사연들
밤송이 툭툭 붉어지고
설레는 그리움이 애타
불면의 바다가 수심을 키우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섬돌 밑 우는 귀뚜라미
눈 오는 날에 쓴 엽서
그대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어,
덩달아 나까지 도매금이 될 순 없잖아
난 아직 그대로인데
변한 건 안경 너머 세상
그대의 형편이 달라졌다고
한결같은 내 맘을 속단 하지 마
가슴을 활짝 열어 내보일 수 있다면
조금 과장 되어도 좋아
아직 날 사랑한다고 해줘
겨울일기
그리움에 색깔 있다면
눈과 같으리.
밤새도록
우리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귀속 말로 속삭여 준 하늘의 배려
멍든 마음에
기쁨 한 줌 안겨주려고
저리도 활짝
밝은 세상 펼쳐 놓았네.
어릴 적 동구로 치닫던 함성이
되살아나는 이 아침
그리움이 쌓이고 쌓인다면
눈과 같으리.
겨울나무 3
무더기로 던져 와도 추운 햇살을
겨우내 한 줌 안고
여윈 그림자 굽어보면
세상은 참으로 춥고 배고프다.
키만큼 자란 고독의 무게를
이제껏 지탱해 온 것은
가지 끝마다 따뜻한 피가 돌고 있기 때문
무시로 참새들이 날아들어 지저귀다
풍요의 뜰로 달려가고 나면
빈자리가 더욱 허전해진다.
지난해도 내가 손 내밀어
가까워진 이웃 몇몇
바람이 불 때마다 곧잘 등을 돌리지만
올해도 욕심 없는 발돋움으로
하늘을 가까이 하리라.
때로 옹이 박힌 고집 때문에
안이한 타협을 거부하고
서 있어 부끄럽지 않는 고독의 덩이만은
누구도 덜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 겨울의 인심
겨울나무 4
훌훌 옷 벗어
알몸까지 드러내고
마음을 열지 않는
그대의 외로움은
또 다른 기다림 때문인가,
차디 찬 거부의 몸짓은
겨울보다 춥다.
무시로 바람은
그대의 속살을 파고 들어
잔잔한 수심을 마구
어질러 놓아도
표정 하나 변치 않는
그 오만한 자존심
때로 체념하고 누감지만
끝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고고한 발돋움
종교의 모습이다.
겨울바다
1
오랜 방황 끝에 겨우 도달한
겨울바다는 비어있었네
채우기에 급급해 온
오욕의 무거운 마음이
비어 있어 넉넉한
겨울바다를 만났네
육신의 모든 욕망을
양파 벗기듯 벗고 나면
영혼보다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까
겨울바다엔
비울수록 넉넉한
사랑이 가득 넘치고 있었네
2
마음이 아무리 맑다해도
겨울바다에 비하랴
파도로 닦고 닦아 주름살을 지우고
늙지 않는 영원의 거울에 비친
슬픔도 익어 아름답고
즐거움도 넘쳐 넉넉한 것이
안으로 뜨겁게 타올라
꺼지지 않는 불길 품고 사는
우리의 꿈이 아무리 푸르다 해도
겨울바다에 비할 수 있으랴
3
그대는 목말라도
겨울바다를 사랑하네
한 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넉넉함이 오히려 죄스러운
겨울바다의 눈물을 사랑하네
끝내 만날 수 없는 수평선
그리움만 맺힌 채
그대를 떠나지 못하네
점점이 섬을 키워
머물고 싶은 세월
펄럭이는 옷자락 영원처럼 품고
그대는 끝내 잠들 수 없네
4
바다여
그대는 울고 있는가,
억겁 죄업을 벗어나지 못한
물을 안고도 한없이 목마른
그대는 잠들 수 없는가,
짓 푸르게 멍든 수심을 키워도
밤낮 없이 아픔의 덩이만이
자라고 자라서
때로 속구쳐 피를 토하는
잊고 싶어 물안개로 얼굴 가리고
흐느끼는 바다여
무시로 나도 울고 싶어
그대 품에 안긴다
5
죽음과 삶의 가까이에
겨울바다는 누워 있었네
한없이 조용하고 깊은
마음을 열고
죽음과 손 잡아도 어울리고
삶과 어깨 가지런해도 정다운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아득히 그리운 수평선 펼쳐 놓고
불멸로 이어지는 영원을
쉴 새 없이 노래하고 있었네
*************************************
시 해설
욕망의 변증법 --金相一( 문학평론가)
최호림의 「겨울바다」는 모두 5연으로 그 첫 연 도입부분은 이런 것이다 "오랜 방황 끝에 겨우 도달한/겨울바다는비어있었네/채우기에 급급해 온/오욕의 무거운 마음이/비어 있어 넉넉한/겨울바다를 만났네/육신의 모든 욕망을/양파 벗기듯 벗고 나면/영혼보다 가벼워져/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까" 주석 할 필요 없이 바다는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못 채운다는 스키머(속담)가 있었다. 시인은 그러한 스키머를 제재화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인은 인간의 욕심에도 계절처럼 리듬(영고성쇠)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겨울바다가 비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겨울은 노년을 은유하고 있었으니 인간의 욕망도 노년에 이르면 쇠퇴하거나 무너지는 것이다. 세월은 욕망을 조금씩 버리는 과정이요, 그리하여 말년에 이르면 육신도 영혼처럼 가벼워져 바다(이번에 상재하는 그것) 위를 걸을 수 있을까, 그런데 욕망의 변증법은 어떻게 되는지 이 작품 마지막 연을 읽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을 열고 /죽음과 손 잡아도 어울리고......죽음과 삶 사이에서 ......불멸로 이어지는 영원을 /쉴 새 없이 노래하고 있었네" 이 마지막 연은 첫 연의 "겨울바다엔/비울수록 넉넉한/사랑이 가득 넘치고 이었네"와 대응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요컨데 산문 투로 해설을 하자면 사랑이나 노래(시)는 오랜 방황 끝에, 같은 말이지만 인간의 그 끝없는 소유욕을 버려야만 (이는 죽음을 의미한다 탄생 창조 어는 것이나 삶을 의미한다) 된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곡예의가능성 여부를 묻지 마라 아전인수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시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체험적 시 창작의 정서-金松培(시인. 문학평론가)
최호림의 「겨울나무 3」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느 누구도 덜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이 겨울의 인심"이라고 대미를 장식함으로써 겨울나무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고뇌를 한 짐 지고 외롭게 버티는 하늘 가까이 하는 존재의식에서 자아성찰로 전이되고 있다. "그대의 외로움은/또 다른 기다림인가" 하고 강렬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겨울나무 4」나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 또 하나의 삼각주/기다림만큼 쌓여간다." 고 회상의 늪에서 반추되는 그 무엇의 승화된 기다림의 간절한 기구가 배어 있는 「추억 만들기」도 역시 체험의 소산에서 빚어진 주옥 같은 시편들이다. 우리들의 삶을 통한 선험적 인식을 한 생의 영위나 시 창작에 있어서 커다란 주춧돌로 그 바탕을 조성하는 계기로 많이 삼고 있는데 자칫하면 지적인 자양의 흡수부족으로 단순한 현상의 표현만 보는 경우도 가끔 접하게 되는데 이는 덜 익은 과일의 맛처럼 본래의 향내나 참 맛을 떨어뜨리게 된다. 시가 간직하는 일차 기능이 이런 설익은 인생관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체험적 시 창작의 정서라면 이 본능적 감상을 억제하고 논리적 사고도 지양하는 것이 정서의 매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체험의 픽셔나이즈 된 서정시 -李秀和(시인. 문학평론가)
불을 지피면 기다렸다는 듯이
탁 탁 소리를 내어 타올라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생명이여(장작 첫 3행)
최호림의 택스트 「장작」(본지 3월호 이하 언급되는 텍스트 모두 동일 지면임)은 현 단계 우리 현대시의 서정시가 거둘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전형을 획득하고 있다. 20행 이내의 단련구성으로 「장작」이라는 생활적인 오브제를 통해서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전통사회의 향수와 생명력을 회상적으로 명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본다. 현대시의 서정적인 텍스트 또는 서정시가 지향하는 철저한 명상적인 주관 표현이자 개인적인 발화라는 점 또한 최 호림의 텍스트 장작은 흔쾌하게 감당해 내고 있다 하겠다. 그의 다른 텍스트 「인왕산 까치」와 「그 집의 전통」역시 현 단계 서정시나 현대시의 일반적 지향인 체험의 픽셔나이즈 된 창출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회상적 향토미의 정서를 표출해 놓고 있다.(문학 21 )
현실인식과 역설의 해학-이운룡(시인.문학평론가)
최 호림의 「미꾸라지」는 사회적 모순과 가치 전도를 압축성 있게 풍자한 시이다.
잘 썩은 진흙바닥에 숨어 있을 일이다
미꾸라지여, 네가 얼굴을 드러내면
세상은 온통 흙탕물이 되고
무성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시시비비가 끊일 새 없다
비비꼬는 유연한 몸매로
잡히지 않고 곧잘 빠져 달아나면서
어질러 놓는 도랑물은 난장판이다
(미꾸라지의 앞 부분)
시적 자아는 미꾸라지의 세상을 흙탕물 난장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시의 후반부에서는 사실적 관점이 역설과 해학을 동반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미꾸라지로 의물화 된 "너는 그러나 하품을 하면서 바쁘다 바뻐/연신 땀을 닦는/교활한 잔머리를 굴리면서 더욱 이웃의 눈을 흐리게 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는 현실인식으로써 그의 역설과 해학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미꾸라지는 누구이고 눈이 흐려진 이웃은 누구일까, 시인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들의 질문은 비인간화의 산업문명과 극도로 타락한 윤리문제를 중심으로 현대사회 실상을 낱낱이 되짚으면서, 그러나 미래 사회의 건강을 비젼으로 한 자기 응시로써 풍자와 역설과 반어를 튼튼한 희망의 틀로 짜 놓고 있는 것이다. 풍요를 누리는 문명의 반대편에는 필연적으로 빈곤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 어떤 시대보다 풍요를 누리는 우리의 처지에서도 발전했다는 말로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농촌생활의 실상은 이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빈민생활의 시적 승화-趙蒼氓(시인. 문학평론가
이 도시의 적막은
변두리에 몰려 있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고달픈 발자국들
수척한 밤마다
버림받은 유배지
산 번지에 몰려들어
수심 깊은 바다를 키운다
이 도시의 적막은
피안 같은 변두리에서
남루의 그림자를 닦아내는
고향의 등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다.
또한 별빛과 만나고
이슬 맺히는 소리에 눈뜨는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면 우뚝 일어서는 얼굴
「 이 도시의 적막」 전문
이것은 에뤼알의 레지스탕스를 노래한 용기라는 작품을 연상 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작시의 동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그는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마는 다르나 내용이 거의 흡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면 관계로 ㅇ룡기의 전문을 소개할 수 없으나 파리는 늙은이의ㅣ낡은 옷을 걸치고 이다. 등의 구절이 있는 시인 것이다. 도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이 그대로 시로 승화된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산 번지에 몰려들어/수심 깊은 바다를 키운다"는 구절은 그들의 생활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호림의 고독 찾기--蔡洙永(시인.문학평론가)
최 호림의 시는 고독에 젖은 느낌으로 눈을 뜬다. 이런 단서는 비단 (고독한 산행)이라는 제목에서만이 아니다. 「나팔꽃」이나 「먼산」을 응시하는 두 눈에 물기가 젖어 있고, 삶의 투쟁에서 승리자이기보다는 슬픔을 어루어주는 모성 쪽에 애착을 갖는 시인의 심성 때문이다. 이런 시적 분위기는 대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간격의 거리를 밀착시키지 못하는 성격의 일단이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거울
하늘이 너무 맑아서
내 얼굴 미치지 못하고
환하게 밝혀만 준다.
눈동자에 빛이 샘솟게 하고
이마에 서늘한 바람 한 자락 풀어
거울이 되게 닦아준다.
열매는 익어
기쁨의 강이 철철 넘쳐흘러
어둠을 거두어 간다.
나를 보는 그대 또한
빛나고 아름다운
거울이 되어
저만큼 하늘에 걸린다.
한 줌 빛을 더한다.
「거울」 전문
투명함은 슬픔에 닿고 슬픔은 투명함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이런 이치는 살아감의 진솔함과 순수함이 탄생하는 결말일 것이다. 가을 날에 푸른 하늘에 취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심성은 깨끗함을 입고 사는 이유 때문이지만 그를 결코 유약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최 호림은 인생의 순수에 취해 사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순화시키는 순결함 때문에 흐린 대상조차도 맑아지는 거울을 마음으로 갖고 산다. 환하게 밝혀만 준다는 투명성은 다시 거울로 변하고 거울은 온 세상을 밝음으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나를 보는 그대가 빛나고 아름다운 거울로 하늘에 걸릴 때 빛은 삶의 궁극을 아름다움으로 채색한다. 최 호림은 정겨움을 순수로 포장하는 고도과 인생의 깊이에 취한 선량함을 실현하기 위해 시로서 선택하는 나그네 시인이다.
우리를 매혹시킬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하루 동안에 무엇이
그토록 아름다운 꽃이 되는가
그대가 머물러 더욱 그리운 얼굴
「미소」전문
웃는다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무서운 전파력을 갖고 삶의 길을 밝혀주는 밝은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최 호림의 짧은 호흡의 시에는 정서이입의 그런 미소가 들어 있다. 그대라는 미지의 대상이 있어 꽃이 되고 또 매혹의 안타까움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돌아설 때, 꽃은 그리움을 넘어 삶의 요소를 더욱 진지함으로 바꾸는 힘을 갖게 된다. 그대라는 대상은 시인에게 미지의 대상을 넘어 그만의 내밀한 위력을 발휘하는 조용한 에너지로 작용하게 된다. 사는 일이 신기루를 쫓아 산과 강을 넘는 일이라면 그 신기루는 결국 인간으로 돌어가는 길 찾기에서 최 호림은 그런 일에 순박한 시심을 투영하는 것 같다. 새천년 한국문인 )
************************************* 최호림(崔湖林) 시인 장신대(서울), 선교신학대학원을 수학하고 1978 년「시문학」2회 1979년 「현대문학」각 2회 추천으로 문단에 나와 전통적인 시풍을 지켜 일상에서 얻은 소재로 시를 쓰고 있다. E_mail-: wom15@daum.ne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