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과 려말(麗末)에 충의(忠義) 제공(諸公)들
이태조(李太祖)가 혁명(革命)의 뜻을 품은 뒤로 조정(朝廷)에 이당(李黨)과 왕당(王黨)이 서로 갈려 형세(形勢) 자못 위험(危險) 하더니 이장(李檣)은 우왕(禑王) 창왕(昌王) 폐위론(廢位論)을 반대(反對)함으로 찬축(竄逐)을 당(當)하였다가 그 아들 종학(種學) 종덕(種德)이 죽음에 이장(李檣)이 또한 쫓김을 당(當)하여 죽고 정몽주(鄭夢周)는 우조(禑朝)에 시중(侍中)이 되었더니 이태조(李太祖)의 음모(陰謀)를 알고 이태조(李太祖)가 원(元)에 간 사이에 조정(朝廷)에 있던 이당(李黨)을 다 물리치고 국가(國家)를 바로 잡고자 하더니 이태조(李太祖)의 아들 태종(太宗)이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선죽교(善竹橋)에서 몽주(夢周)를 죽이었고 김진양(金震陽)은 몽주(夢周)가 이당(李黨)을 쫓을 때 간섭(干涉)하였다가 몽주(夢周) 죽음에 또한 장일백(杖一百)을 맞고 죽었고 그 외 우현보(禹玄寶) 이숭인(李崇仁) 변안열(邊安烈) 등이 다 극형(極刑)에 죽었으며 그 시(時) 72인이 이태조(李太祖)에게 불복(不服)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죽었다 운(云)하니라.
- 한글
이태조가 혁명의 뜻을 품은 뒤로 조정에 이당과 왕당이 서로 갈려 상황이 매우 위험해졌습니다. 이장은 우왕과 창왕의 폐위론을 반대했다가 쫓겨나게 되었고, 그의 아들 종학과 종덕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에 이장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정몽주는 우조에서 시중이 되었는데, 이태조의 음모를 알고는 이당을 물리치고 국가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태조의 아들 태종이 조영규에게 명령하여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고, 김진양도 정몽주를 도운 죄로 처형당했습니다. 그 밖에도 우현보, 이숭인, 변안열 등 많은 사람들이 이태조에 불복하다 극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72인이 이태조에게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자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태조의 집권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