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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탄의 열정페이가 복지를 지운다>의 줄거리:
요즘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열정페이(熱情Pay)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줬다는 구실로 청년 구직자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로 대기업 인턴이나 방송, 예·체능 계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즉 열정을 불사를 기회를 준 것으로 급여를 대신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 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문제 삼지 않는 열정페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인까지를 포함아여 70억을 착취하는 사단의 열정페이입니다.
사탄의 열정페이가 복지를 지운다
(사사기 2:1~23)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탄의 열정페이가 복지를 지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사탄의 열정페이가 복지를 지운다.’
2015년부터 “열정페이(熱情Pay)”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pay’는 일한 것에 대한 급여를 의미하는데 돈으로 지불하지 않고 열정으로 지불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기회로 급여를 대신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하게 해주었으니 따로 급여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대기업의 인턴, 방송국의 예체능계 인턴, 영화사의 인턴으로 들어갔을 때에 일을 하는 양에 비해서 차비 정도나 겨우 줄뿐 거의 급여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못된 행태를 벌이느냐? ‘우리 같은 대단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귀중한 경험이 되는 만큼 월급을 받지 못하거나 적게 받더라도 불만을 갖지 말라’는 것인데 정 싫으면 언제든지 관두라는 거예요. ‘너 아니라도 우리 회사에 인턴으로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줄 서있다’고 하는 태도를 비꼬아서 열정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열정페이’는 무엇일까요?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을 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서 생긴 현상으로 이 세상을 가만히 보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아할 만한 것과 싫어할 만한 것을 판단해서, 어떤 것은 좋아하면서 마음에 담고 어떤 것은 싫어하면서 피하려고 하다가 마음에 담습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마음에 담으면 열정이 생기는데, 마음에 담은 좋아하는 것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열정이 생기고, 마음에 담은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는 열정이 생깁니다. 이 열정을 가지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으면서 일평생을 사는데 이것이 바로 사탄이 준 열정입니다. 이것이 열정페이인 이유는 결국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죽어서 이 세상 삶이 끝나게 될 때에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내가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들을 위해서 일평생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얼마나 돈을 좋아하고 부자 되기를 원합니까? 돼지꿈이라도 꾸면 괜히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좋아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고 돈을 손에 쥐려는 열정이 생기는 이유는 그것들을 마음에 담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사탄이 준 열정인데 이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열정이 마음의 힘이라면 에너지는 실천과 수행을 위한 물리적 힘입니다. 마음의 힘이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온 인류에게 극소수의 성공사례를 들춰내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바벨론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을 유혹합니다. 70억 인구가 극소수의 성공신화를 바라보고 자기와 동일시하며 달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알리바바의 마윈, 삼성, 현대 이러한 극소수의 성공사례를 들춰내서 그쪽으로 가도록 길을 내는 것이 바로 사탄의 열정페이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 그렇게 좋아하는 부자 되는 길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와 마윈으로 달려갈 길과 열정을 제시해 줬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죽을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도 후회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바로 이 열정페이에 가담하기 때문인데 이게 사사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제 “사토리(득도) 세대”를 비유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과 에너지가 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이 없는 상태를 사토리 세대로 비유했지만 실제로 열정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이 없는 것뿐이지 사탄의 열정페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열정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명적 열정과 에너지는 좋고 나쁨의 판단을 따라 마음이 세상 것을 담고, 그 담은 것을 위해 손에 쥐려는 열정이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유격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열정적인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열정적인 계획으로부터 열정이 옮겨져 오는 것이 참 열정입니다. 그 열정을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가 오는 것이 참 사명적 열정이고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사사기를 보면 선민들조차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주는 우상으로 믿었습니다. 쉽게 말해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주는 신을 섬긴다.’는 것은 모든 선민들의 마음에 풍요와 다산이 들어와 앉아버린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우리식으로 피부에 닿게 이야기하자면, 재테크로 재산을 증식하고 돈 많이 벌어 부자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업에서 거래처가 많아져서 부흥하고 이득이 많이 생길 것을 바랍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동년배들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바알숭배로 빠져듭니다. ‘바알숭배에 빠졌다’는 것은 쉽게 말해 마음속에 돈이나 수적인 부흥을 담은 것입니다. ‘수적인 부흥’은 목회에서만 얘기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업을 할 때도 수적인 부흥을 말하는데 그것을 마음에 담게 될 때 생겨난 열정이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방식으로 돈 벌기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 옛날에 돈을 버는 방법은 바로 바알숭배였던 것입니다. 바알숭배를 통해 부자 된 자들의 성공사례를 보면서 거기에 몰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등의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그 옛날에는 분배된 땅은 거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재테크의 방법은 바알숭배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알숭배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명적 열정과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됨으로서 정복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가나안 족속들이 가시와 막대기가 되어서 그들을 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했다고 울부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나면 또 다시 바알숭배를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면 또다시 회개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냅니다. 사사를 보내서 구원하시면 또 다시 바알숭배를 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350년 동안 계속 됩니다. 이 악순환에서 드러나는 것은 돈을 향한 열정입니다.
여기에서 선민들이 갖는 돈에 대한 열정과, 선민을 자신에게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 부딪힙니다. 그런데 돈을 향한 열정이 계속 하나님의 열정을 넘어서는데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옛날에 바알숭배를 했던 똑같은 마음상태가 교회를 삼켜버렸습니다. 모든 목회자와 장로님들로 구성된 당회가 첫 번째로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의 예산입니다. 예산이 얼마나 풍부하고, 그 풍부한 예산을 위해 교인이 몇이나 왔느냐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일 뿐, 실지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 수와 예산을 따지는 것이 당회의 일입니다. 교인이 늘지 않아서 예산이 부족하면 목사님을 재촉합니다. 당회가 목사님께 은근히 압박을 가하고, 목사님이 목회하는 동안 재정과 교인이 늘어나면, 목사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장로들은 잘 섬기는데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가나안에 정착하여 여호수아가 다스린 지 30년이고 죽은 지 20년인데, 그 동안에 우상을 섬겼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는데 모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안다’라고 할 때의 표현은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로 ‘체험적인 관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이 ‘오바마’라는 것은 70억 인구가 다 알고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부 내각에 들어 있는 장관들이 오바마를 대면해서 아는 것과 우리가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바마의 자녀와 아내가 아는 것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릅니다. 오바마의 아내와 딸이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의 ‘안다’라는 말이고, 내각의 장관들이 오바마 대통령을 아는 것이 바로 히브리어 ‘야다’의 ‘안다’라는 참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모른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여호와를 알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과 성막과 법궤가 있고 번제단이 있고 모세의 기록이 다 남아있습니다. 출애굽을 누가 시켰느냐는 질문에 ‘여호와’라고 답하지 못할 선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마음이 체험적 관계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체험적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마음 안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열정이 생기는데 이게 바로 사탄의 열정페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정착을 해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농사를 짓는 사람이 풍요를 관장하는 주변의 모든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바알을 숭배하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농사를 짓는 사람은 당연히 풍요와 다산을 원하게 되어있습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장사를 할 때에도 마음속으로 이익이 많아질 것을 바라지 않고 장사를 할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되겠냐는 것인데 인지상정입니다.
B. C. 586년에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허물어져 망할 때까지 문제가 되었던 최고의 우상은 바알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장사를 하면서 풍요와 다산을 꿈꾸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수확이 많지 않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바알숭배는 꼭 우상에 절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풍요와 다산을 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가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절하지 않아도 마음에 담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이방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은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친히 행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섬김을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움직여 역사하실 때에, 그 친히 행하심의 손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려면 내가 장갑이 되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장갑삼아 끼셨을 때 나타나는 일이 사명적 열정과 에너지입니다.
장갑의 특성을 살펴보면 장갑을 끼고 일을 할 때에 온갖 다양한 물질에 접촉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장갑이 접촉하는 물질들이 절대로 장갑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공사장에서 일할 때에 돌이나 시멘트나 못 같은 것들이 장갑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를 할 때에 물기가 장갑 안으로 들어와서도 안 되고, 김장을 할 때에 김치속이 장갑 안으로 들어와서도 안 됩니다. 그것들이 들어오면 그 장갑은 못 쓰는 장갑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에서 풍요와 다산을 마음에 담고 꿈꾸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실 때에 장갑에는 절대로 농사와 농사의 결과가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절대로 농사를 지으며 그 결과가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 되고 들어오셔야 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농사의 결과에 대해 당신의 계획이 있으십니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장갑이라면 자식을 키울 때에도 자식과 접촉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자녀가 한 방울이라도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장사를 한다면 육체적으로 장사와 접촉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장사와 관계된 일과 결과가 눈곱만큼도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업하러 나간 장로님이 마음에 사업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김장을 담글 때에 김치 속을 장갑에 가득 담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사장님이 사업장에서 풍요와 다산을 마음에 담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민인 사장님이라면 사업장에서 풍요와 다산을 담지 않는 것이 그만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장갑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농사를 지을 때에 선민인 주제에 마음속에 풍요와 다산을 집어넣게 됩니다. 하나님과 유격이 생기고 하나님을 나 몰라라 하게 됩니다. 그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바알을 숭배하는데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모든 열정적 방해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마음에 돈을 담고 추구해 들어가면, 마음에 돈을 먼저 담아 생겨난 그 열정으로 하나님까지 불러댑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심어준 가치대로 좋고 나쁨을 판단해서 돈이 좋다거나 건강이 좋다거나 재산이 좋다는 가치를 마음에 담고 그것을 추구하는 열정으로, 사탄의 열정페이를 수행하기 위한 과정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수가 없으신 것은 하나님도 열정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부자 되기를 바라고 건강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께서는 돈이 안 벌리게 하시고 건강에 이상을 주시는데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탄의 열정페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열정적인 방해를 끝없이 뛰어넘습니다. 세상은 스티브 잡스를 바라보고 빌 게이츠를 바라보면서 ‘너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꿈과 이상과 확신과 신념과 긍정의 힘을 가지고 달려가라’고 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선민으로서의 열정과 에너지로 활력 있는 복지를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소망을 계속해서 파괴하고 뛰어 넘어갑니다.
30대 중반이 됐는데도 돈을 못 벌고 있다면 돈 버는 일 중단하고, 하나님의 장갑이 되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 생활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아담으로부터 이어져온 끈질긴 유전적 죄적 기질은 계속해서 세상 것을 마음에 담으려고 합니다. 마음에 담으면 그것으로 인한 열정이 생기고, 그 열정으로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을 부려 먹으려는 행태가 나타나게 되므로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사업장에 나가면 나는 장갑이고 사업장은 김치속입니다. 그 사업장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행하실 것입니다. 망하게 하셔도 하나님의 뜻이고 흥하게 하셔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하시려는데 내가 흥하게 하려고 노력하니 내 건강까지 상하게 되고 더 망하게 됩니다. 내가 장갑이 되어서 망하게 될 일이라면 빨리 망하고 하나님 뜻에 맞는 다른 일을 성공시키도록 하면 됩니다.
내가 바알숭배에 준하는 세상 가치를 마음에 담았는데 소원대로 다 잘 된다면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입니다. 더 이상 선민이 아니에요. 마음에 담고 있는데 잘 안 된다면 하나님께서 아직도 열정적으로 붙잡고 계신 것이므로 얼른 십자가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음에 세상 가치가 담기려 하고 소원이 생기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 붙잡고 죽음으로, 온전히 내 마음만큼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사탄의 열정페이로 인한 우리 인생의 불필요한 소진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사탄의 열정페이의 행태를 벗어나서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장갑되어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