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 Cha)’는 한국, 중국, 일본의
공통어이다. 비단 동아시아에 위치한 이 3국 뿐 만이 아닌 세계 공통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러시아와 몽골,
아라비아, 터키 등에서는 차이(Chai 또는 Chay)라 하고 서방으로 가면 Tea(미국, 영국), Te(이태리, 스페인,
노르웨이, 스웨덴), Tee(독일, 핀란드), Tey 또는 They(인도, 스리랑카)라고 한다. 우리말로도 茶라는 문자를
경우에 따라 ‘차(,Cha)’ 또는 ‘다(Tha)’라고 발음하는 것을 보면 ‘차’라는 단어만치 세계적 공통성을 갖는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중국 남서부 내륙 깊숙이 인도와의 경계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차나무(Camellia Sinensis)가 동으로 중국, 한국, 일본으로, 서로는 인도, 아라비아, 유럽으로 뻗어나가면서
동양에서는 녹차문화가, 서양에서는 홍차문화가 각각 형성된 것이다. 홍차가 커피와 함께 서구인들의 기호품이 되어 있지만 차의
원형은 녹차이고 세계 차문화의 중심은 동양, 그 중에서도 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중국과 중국으로부터 차를 받아들여 이를
토착화하면서 독특한 자국의 차문화를 발전시킨 한국, 일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고대
3황 5제시대의 ‘신농(神農)’은 세계적으로 차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본래 농사와 의약을 관할하였는데 B.C
2,737년 차 잎을 해독제로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 후 350년에 발간된 중국 사전에는 차를 ‘잎을
끓여서 우려내는 음료’라고 정의하고 있고 한 때는 그 희귀성 때문에 벽돌 형태로 만들어진 차가 화폐로 통용되던 시대가
있었다고도 전하여진다. 당나라 중기인 AD 780년, 중국에서 다성으로 추앙되는 ‘육우’(727-803)는 ‘다경(茶經)’이란
최초의 다서를 펴내었다. 이 책은 차의 재배에서부터 제조, 저장, 품평, 음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고전으로 중국, 한국, 일본차의 원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차는 중국을 왕래하는 인접국가와의 문화적 교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한국의 차는 일설에는 4세기
경, 인도를 통해서 남해안을 따라 번성하던 가야국으로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6~7세기 신라시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이 차를 즐겨 마셨고 문무왕은 예불시 헌다를
지시하고(AD.661)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설총은 신문왕(681-692 재위)에게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서 차를 마실
것을 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AD 828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흥덕왕이 지리산
근처에 파종을 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땅에서 차가 자라면서부터 음다풍속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도 지리산
남쪽의 화개와 보성 지역들이 차의 주산지가 되어 있다
신라를
이은 고려왕조(918-1392)는 불교국가였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차문화 역시 꽃을 피운 시대였으며 차는 왕의 시혜품으로,
예불을 비롯한 국가의 공식행사에서의 진상품으로 널리 쓰였다. 차선일체(茶禪一体)란 말 그대로 차는 선의 정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그 각성작용 때문에 수행중인 승려들에게 필수품으로 애용되고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시중에 다원(여관)과
다점(다방)들이 운영되었다. 조선왕조(1392-1910)가 고려를 대체한 후부터 차는 수난기를 맞는다. 불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국가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차문화 역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에 대한 과중한 세금부과는 차 농사를
기피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특히 일본의 한국침략으로부터 비롯된 7년 전쟁(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의 국토와
민생을 황폐화시켰으며 전쟁 중에 한국의 도공들이 대거 일본으로 납치되어가면서 도자기문화와 함께 차문화도 한동안 실종되고
말았다. 후세 사가들이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란이후 200여 년간 실종되었던 한국의 차문화는 19세기 초,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과 걸출한
다승 초의 장의순(1786-1866)에 의해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전남 강진에서 10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은
만덕산 아래 다산초당을 짓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차에 관한 서적과 논문들을 집필했다. 때마침 멀지 않은 해남 대흥사 부근에
일지암을 짓고 은둔해있던 초의는 그를 방문해 차와 다담을 나누며 차를 매개로 한 유교와 불교 간의 교유가 깊어간다. 초의는
입적할 때까지 40년 간 일지암에 머물면서 한국 차의 명저로 손꼽히는 ‘동차송(東茶頌)’과 ‘차신전(茶神傳)’을 집필하여
자연주의와 실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고유의 차문화를 일으켜 세운 중훙조로서 추앙받고 있다
일본에서
차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9세기경에 나타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차도 선불교와 함께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 7세기말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한 후 왕족을 포함한 많은 유민들이 당시 교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으로
대거 망명하면서 융성했던 백제문화와 함께 차를 포함한 불교문화가 전파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차문화는
1191년 불승인 ‘에이사이’(永西, 1141-1215)가 송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차씨를 가져와 교토 북서쪽에 있는 고우잔사(高山寺)에
파종할 때까지는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신라의 대렴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 부근에 심은 것보다 약 300년이
뒤지는 시기이다. 그 때까지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차의 양이 워낙 희귀해서 귀족들과 불가에서나 겨우 음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에이사이는 1214년 일본최초의 다서인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는 등 일본차의 시조로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차도[Chanoyu]는 당시의 군벌인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던
‘센 리큐’(千利休, 1522-1591)에 의해서 기틀이 닦여졌다. 그는 차와 일본 전래의 시문, 화예, 건축, 도예 등을
연결시켜 다기, 행다법 등 차문화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의 다도는 자손들에 의해 대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일본차문화의 발흥은 전술한 바대로 도자기전쟁으로 불리는 임진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에 의한 도자문화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나무는
대엽종과 소엽종으로 나누어지긴 하지만 모두 한 종류에 속하며 제조방법에 따라 비발효차인 녹차와 중간 발효차인 황차, 완전
발효차인 홍차 등 세 종류로 나눈다. 서양의 차는 모두가 홍차이고 한국과 일본차는 대부분 녹차인데 비해 중국에선 녹차와
황차를 골고루 생산한다. 보이차와 오룡차, 철관음차, 무이차 등은 모두 발효차들이고 용정차, 벽라춘 등은 녹차에 속한다.
동양의학의 음양이론으로 볼 때 가공 이전의 차 잎이나 녹차는 ‘음(陰)’이고 발효과정에서 ‘양(陽)’으로 바뀐다. 한국과
일본은 전통적으로 녹차를 애용해왔지만 녹차의 제조방법은 다르다. 한국차는 가마솥에 불을 지펴 볶아내는 덖음차이고 일본차는
차 잎을 수증기로 쪄내는 증차이다. 차 잎의 가공법에 따라 차의 향 색 미가 달라진다. 발효도가 높아지면서 차색은 녹색에서
황색으로, 다시 황색에서 홍색으로 변해간다. 맛 역시 녹차가 연하고 부드럽다면 발효도가 높아갈수록 진하고 강해진다. 향기
또한 비슷한 변화를 겪는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차인들은 차향을 중시해서 차 그릇 중에 향기를 맡기 위한 향기 잔을 별도로 구비하는 경우가 많고 일본의
차인들은 차색을 중시해서 연녹색보다 진한 녹색을 선호한다. 향기나 색을 돋보이기 위해 제조과정에서 향료와 색료를 첨가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비해 한국의 차인들은 은은한 향기와 연한 녹색을 좋아하고 본래의 차잎이 가지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향기와 색을 즐긴다. 느껴질듯 말듯한 향기, 보일듯 말듯한 색깔,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차 맛을
최고로 친다. 마시는 방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발효차는 차탕을 하거나 끓는 물을 그대로 차 잎에 부어 뜨겁게 마신다.
일본의 다도는 녹차 잎을 가루로 내어 다완이라 부르는 대접에 덜어내고 물을 부은 후 다선이라 부르는 솔로 거품이 날 때까지
저어 마신다. 한국차는 녹차 잎을 다관에 넣은 후 섭씨 60~70도 정도로 식힌 물을 부어 우러날 때까지 2~3분간
기다렸다가 찻잔에 부어 마신다. 증차법으로 제조된 녹차잎은 우려낸 후에는 삶은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다른 용도로 쓰기가
적당하지 않은데 비해 덖음차는 차잎을 여러 번 우려마신 후에도 잎 모양이 싱싱하게 살아 있어 음식용으로도 재활용이 가능한
장점도 가지고 있다.
다도(茶道)
혹은 차도란 말은 본래 일본에서 유래된 말이다. 검도(劍道), 유도(柔道), 서도(書道) 등에서와 같이 기술성과 정신성이
함께 요구되는 분야를 ‘도’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문화의 한 가지 특색이다. 동일한 대상을 한국에서는 검술(劍術),
유술(柔術), 서예(書藝)라고 불러왔고 중국에서라면 검법, 서법이란 표현이 더 익숙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가에서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던 차에 ‘도’를 붙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본식 발상법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다도라기보다는
다법(茶法)이 자주 쓰이고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다례 혹은 차례(茶禮)란 말이 사용되어 온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불전에서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의식을 헌다례(獻茶禮)라 하고 명절 제사상에서 조상님께 차를 올리는 의식을 차례(茶禮)라 불러온
것이다. 요즈음 한국에서 일본식 다도가 일부 차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것은 인접국가의 문화를 배운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한국엔 다도가 없었다’란 의식이 깔려있거나 배후에 ‘일본이야말로 다도의 원조이다’라는
왜곡된 정보가 들어있다면 경계해야할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 일본식 다도가 없고 중국에도 일본식 다도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대신 한국엔 한국식 다례가 있고 중국엔 중국식 다법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식
다법은 그 근원을 육우 ‘다경’에 두고 있다. 이 책은 전문이 10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분은 차의 근원(根源)과 차의 고사(故事) 등과 같은 차 지식을 정리해놓은 것(1, 7, 10장 등)이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차의 산지, 차 만들기, 차의 도구와 그릇, 차 달이기, 차 마시기, 쉽게 마시기 등의 주제들(2장~6장,
8~9장)을 다루면서 차를 옳게 마시는 방법을 상술하고 있다. 다실에서의 의식을 주로 다루고 있는 일본식 다도와 달리 차의
효용을 일차적으로 약용에 두고 올바른 차 마시는 법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 대조적이다. 다경에 나타난 중국식 다법의
특징은 차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차를 대하는 검박한 자세로 요약할 수 있다. 차를 올바르게 마시고 차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세밀한 선택과 수련을 통한 정확한 차 관련 지식의 습득과 소탈하고 검소한 차인의 덕을 강조하는 것이다. 차인들은
한국 일본과 대비되는 중국차의 특성을 ‘정행검덕(精行儉德)’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차 역사가 그로부터
1200년이나 경과하면서 차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되고 차 생활이 보편화되면서 차문화의 특색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육우의 본래 주장과 달리 차는 모든 음식과 곁들여지고 차의 제조 시 다른 약초들과 섞이는 일이 흔해지면서 점차로 그
순수성을 잃어 갔으며 정행검덕의 차정신은 ‘다반사(茶飯事)문화’로 변모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서의 차 생활은
다법이라기 보다는 ‘다사(茶事)’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물을 대신하는 음료로서 일상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다도’는 중국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약으로서의 효능이나 음료로서의 기능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다는 그
정신적 성격이 강조된다. 일본의 차가 중국의 선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에이사이’나 ‘무라다 슈코’, ‘센리큐’ 등이
모두 출가 승려로서 수행방법으로서의 차의 정신적 가치가 일찍부터 ‘일본다도’의 바탕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4백여년 전
센 리큐가 일본다도의 규칙을 정하면서부터 ‘화경청적(和敬淸寂)’은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화(和)는
화합을, 경(敬)은 존경을 표현한다. 청(淸)은 차생활의 내면과 외면의 청정을 뜻하며 정(寂)은 번뇌가 없는 고요한 상태를
나타낸다. ‘화’와 ‘경’은 행다(行茶)에 있어서, ‘청’과 ‘적’은 다실과 다기에 대한 차인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다도에서는 중국의 덩이차(團茶)나 한국의 잎차(葉茶)가 아닌 말차(抹茶) 즉 가루차를 쓴다. 중국의 송,
한국의 고려시대 이후에는 사라진 가루차의 전통이 일본에선 그대로 계승되어 있는 것이다. 차 가루를 한국 전래의 대접모양으로
생긴 다완(茶碗)에서 물에 개어 마시는데 이 과정이 극히 기교적이고 의식화되어 있다. 다실의 구조와 다실의 치장, 다구의
위치, 차를 마실 때의 절차, 다실 내에서의 행동거지 등이 모두 엄격한 순서와 격식에 따르게 되어 있어 차를 마시는
행위라기보다 일종의 퍼포먼스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이 일본식 차문화의 특색이라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같이 차 문화 역시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 존재한다. 양국 간의 조화와 중정(中正)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차가 도입된 시기가 그렇고 차 그릇의 크기만 보아도 중국이 가장 작고 일본이 가장 크다. 차 마시는 법이 중국이
극히 일상적이라면 일본은 극히 표현적이고 한국은 표현의 멋과 실용의 양면을 모두 버리지 않으면서 양자 사이의 절묘한 조화를 얻어내고
있다. 우리 차문화의 특징은 자연주의와 실질주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주의란 제조에서 행다(行茶)까지 모든 과정에서
차 본래의 자연성을 완벽하게 살려내고자 한다는 뜻이고 실질주의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차 본래의 효용과 가치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우리
차는 차잎 본래의 성분을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덖음법으로 제조되고 그 과정에서 일체의 첨가물을 쓰지 않는다. 차를 마실 때 다식
외에는 다른 음식과 함께 하지 않으며 차 자리에서도 과도한 형식이나 절차를 배제한 채 자연스럽게 마시는 것을 제일로 친다. 또한 한국의
차인들은 향기나 색깔보다 맛을 중시하고 약효나 종교적인 수행가치보다 차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차는 맛이 있고 따뜻하며 자리를
여유롭게 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 것처럼[上善若水] 물을 매개체로 삼아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차는 마음속의 다툼을 없애주고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 한국의 차인들은 차가 가진 이러한 미덕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장 중요시한다. 형식이 과도하면 차의 본질을 잃을 수 있고 차가 일상적인 행위로 떨어져 버리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없기에 길고 복잡한 의식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그 행위가 일상사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차생활의 조화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 조상들이 발견한 지혜일 것이다. 중국의 ‘정행검덕’이나 일본의 ‘화경청적’과
비교할 때 한국의 차 정신은 ‘순청온공(純․淸․溫․恭)’의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순(純)은 순수함이며 자연을 표상한다. 청(淸)은
맑음이며 은은한 녹차의 성질을 나타낸다. 온(溫)은 따뜻함이며 부드러움이다. 공(恭)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며 같이 하는 사람들을
공경하는 예절이다. 순(純)과 청(淸)이 차 잎과 차 자체의 순수함과 맑음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차를 다루는 차인의 심성과 행위는
온(溫)과 공(恭)으로서 상징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차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면서도 각각 다르게 발전해 오면서 고유한 특성을 형성했다. 문화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숙성되는 유 무형의 가치들이기 때문에 지역과 민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각각의 지향점과 중시하는 부문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우수한 문화라고도 말할 수 없다. 현재의 달라진 모습들이 하나의 뿌리로부터
분화된 것임이 분명하다면 3국의 차문화를 하나로 통합해야할 필요성이 혹시 있을까? 오늘날 개방화와 세계화란 새로운 패러다임아래 인적 물적
자본적 면에서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과는 달리 자기 문화의 정통성과 고유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오히려 세계 공통의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한복과 한옥, 한지, 한식, 한글, 드라마 등을 통해 한류브랜드를 세계화하려는 한국, 공자를 재평가하고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역사까지도 자국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중국, 중국과 한국으로부터의 문화전파라는 역사적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일본문화의
신수성(神受性)에 집착하는 일본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양적 세계관의 축이 동양으로
선회할 기미가 예고되고 있다. 변혁을 가능케 하는 동력은 언제나 문화이며 동양문화는 유교와 불교, 도교라는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사상적 뿌리를 공유하면서 각각 현대화를 이룩한 한국과 일본, 중국이 앞으로의 변화를 주도해갈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동양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차가 있어왔다. 차문화는 오랜 시간 속에서 성숙해온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고급문화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의
녹차국가인 베트남과 태국을 남방한계선으로 한 중 일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는 녹차문화권이 장래의 문화 동력이라고 볼 때 3국 차문화의
특성을 조화롭게 융합해갈 방법을 찾는 것은 이 시대의 흥미로운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차가 세 가지 성질을 모두 갖고 있고 차문화에도 세 측면이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차를 정신수행의 방편으로 보는 것, 차에서 약리적
혹은 생리적 효용을 찾는 것, 차에서 삶의 멋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이 셋은 하나의 차를 각각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일본은 첫 번 째 측면을 가장 강조하기에 차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키며 엄격한 의식을 통해 일본차문화를 시현하고자 한다. 중국은 차의
약효를 강조하고 물 대용으로 차를 이용하면서 차의 덕을 발전시켰다. 한국은 차를 예(禮) 혹은 예(藝)로서 전승해오면서 차 속에서 자연과
하나되는 생활의 멋과 맛을 찾고자 했다. ‘화경청적’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차문화를 ‘차도(茶道)’라 하고 ‘정행검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차문화를 ‘차덕(茶德)’이라 칭하고 ‘순청온공’으로 표현되는 한국의 차문화를 ‘차미(茶美)’라고 부를 때, 차도와 차덕과 차미는 차의 세
가지 특성을 각각 반영하면서 하나로 융합될 때 포괄적인 동양의 차문화로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차가 가진 본래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일, 세 측면을 가진 차문화의 완전성을 이해하는 일, 다양성과 차별성을 넘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보편성을 인정하고 자기중심과 독선에서
벗어나는 일, 이러한 일들이야말로 앞으로 3국의 차인들이 모여 찻잔을 비우듯이 마음을 비우면서 함께 찾아가야 할 문화사적 과업이 되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