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최면상담'을 통한 무의식 정화와 창조에 희망을 건다.
꿈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하고, 내 자신의 작업과정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아동기의 누적된 감정을 통합하는 작업으로 '현존호흡'을 오랜 시간 연습한 적이 있다. 1주부터 10주까지의 과정을 반복해서 세 바퀴를 돌았고, 다시 수개월이 지나 똑같은 과정으로, 그렇게 세 번을 더 했던가?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우선은 새벽 루틴이 일상을 안정감있게 잡아주었고,
어떤 기계를 조작함에 있어 설명서의 역할을 하듯, 과정에 대한 안내가 또한 '예측가능성'과 함께 심적 자원이 되어주었다. 내 개인적, 주관적 경험과 기억회로 옆에 이 자원이 새로운 회로가 되어 '뇌가소성'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실제로 과정연습 뒤에 그룹안에서 나눔이 있고, 일상과 연결한 작업이다보니 새로운 기억과 새로운 경험으로 저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것을 그만두게 된 계기는 참으로 얄팍하다. 바로 '미라클모닝'의 유행이다.
맨발어씽도 그렇고, 타로도 그렇고 무엇이든 둘레에서 환영을 받으면 금새 호기심이 사라진다. 내안에 '특별하고 싶은' 부분의 추동일까? 나는 그 부분이 올라올 때 마다 '사악한'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추적에 들어간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왔는지, 어떤 의도와 계락이 뒤따르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에 대한 추적, 10에 9는 늘 의도적이다.
나는 '특별한', '고유한' 상담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임상시간을 위해 '상담가'과정을 밟게 되고, 수련과정과 함께 덜컥 취업이 되어 ( 덜컥은 아니었다. 둘레 인연에게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것이 이루어진거다. 아니다 덜컥은 덜컥이었다. 사실 진짜 될 줄은 몰랐으니까. ) 한 사람에 대한 파일을 마주하게 된다. 이전에도 파일에 상담일지와 임상기록을 담아 쓰곤 했지만, 센터에서 마주한 파일의 느낌은 색달랐다. 누군가의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밀스럽고 또한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 표현예술매체를 도구로 사용하는 지라, 그의 작품이 함께 창조되는 상담의 과정, 상담실 한 쪽엔 작품서가가 마련되어 있어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어떤 이의 작품은 보이지 않게, 어떤 이는 보이게.
그러면서 언젠가 이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면 어떨까.
이 생각이 가장 강렬했던 것은 한 청년을 만났을 때다. 두 손을 물어 뜯고, 손으로 뜯어 피와 상처로 범벅이 된 ... 그 친구의 두 손이 흙을 만날 때 마다, 펜을 만날 때 마다 더이상 상처를 입히지 않고 '몰입'의 세계에서 여행하는 것을 보았다. 상처입은 손이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이 찰흙을 반죽하며 점점 섬세한 모양을 잡아나가는 과정을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우린 주로 '우울증'을 흙으로 빚었다. 그 친구의 작품들을 모아다가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창가에 '독립갤러리'를 만들어, 내 일상에서 조명하고, 그 친구를 위한 기도의 장소로 썼다. 여기는 문발동 '조율'이다. 1층이었어서 견고한 창살이 눈에 거슬렸지만 내가 좋아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창밖에 있던.
이 친구의 작품들을 폐기할 때 갈등이 컸다. 그런데 그 땐 내가 다시 '상담소'를 열게 될지도 미지수였었고, 이미 내 삶의 많은 것들이 폐기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달리 그 친구는 작품에 대해 그닥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일수도 있겠다. 심드렁한 모습? 나는 마지막 작업으로 색을 입히는 게 어떻게냐고 제안했다. 그러마 했는데, 시간이 늘어지고 길어지고.....'그러마'는 실행되지 않았다.
그 때 일상 생활을 힘들게 할 정도로 무겁거나, 힘든 고통의 감정을 흙이나 종이 작업, 노래와 춤, 글 작업으로 풀어 놓은 것들을 '감정의 방'이라고 하는 드러나지 않는 방에 설치한 뒤 그와 닮은 작업을 할 수 있게 매체를 들여 놓고, '보는 자'가 '하는 자'가 되는 그런 갤러리를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점점 오브제가 늘어날 것이고, 마지막 입장하는 사람이 그 공간의 디렉터인 것이다. 각각의 입구 앞에는 기다란 출석표?가 붙어 있다. 다음 입장을 알리는. 지금 생각엔 맹렬하게 달라붙을 것 같은데...어쩌면 텅 빈 출석표일수도.
표현예술의 과정이 최면상태의 과정과 닮아 있다.
어제 만난 오센틱무브먼트도 마찬가지다.
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무의식의 이야기, 몸을 통해 읽혀지는 감정들, 그 감정들이 바닥과 만나 용솟음 치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것을 '접촉'할 수 있도록 도울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떤 접촉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목격자'로 움직이는 자, 무버와 연결한다. 때론 무버의 움직임을 '소리'로 목격하기도. 반응하지 않고 그저 목격하는 것은 느리고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과정이다. 어느 누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목격자의 시선에 위험을 느끼겠는가. 낯설음에서 오는 경계는 있을지라도, 이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거의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그 목격자를 구하는 몸을 만난다.
꿈 속에서 나를 만날 때, 이와 좀 비슷한 것 같다. 꿈에서 어떤 판단이 있나? 비교와 분석? 없다. 그저 바라보는 세계, 그것이 아무리 위험해도 아무 감정 없는 관찰카메라처럼 바라볼 뿐이다. 어떤 꿈은 오래오래 아주 선명하다. 이태원 참사의 날에 꾼 꿈이 그랬다. 그 꿈에서는 냄새마저 난다. 2009년 여행했던 네팔의 사원 냄새, 처음부터 이 냄새였나? 아니 피비린내, 비린내.....이번에 상담실을 구하러 다니는 과정에서도 이 냄새가 나는 건물들이 있었다. 겉은 깔끔하고 화려한데 건물에서 나는 총체적인 냄새,
'에펠타워'를 선택한 이유는 냄새가 순해서다. 아무튼 저 꿈에선 언제부턴가 향내음이 난다. 아마도 기도하는 마음이 깊어서일까? 그리고 그 꿈에서 만난, 만나지 못 한 문양, 싱크대 문 안쪽의 문양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해진다. 며칠 전 '이것일까?'싶은 문양을 보았는데 (이 장면, 요 부분만 떠오른다. 그게 무엇인지 다 사라졌다)
나는 동굴의 안쪽을 쉼없이 파고 있는 삽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 이 글이 그렇고 대부분 나의 내면작업이 그렇다. '단순하게' 아하!가 올라오기보다는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구멍과 구멍을 이어나가며 한 번의 삽질에 한 번의 다가섬이 있는, 그런 작업이다.
그러고 살고 있다. 마치 뇌에 있는 여러 다른 종류의 동굴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그렇게 길을 열며 가고 있다. 어떤 동굴은 파다 만 것도 있고, 삽이 나뒹구는 가운데 '봉인'의 팻말이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보류'와 '위험' ....등등의 안내문구가 떠오른다.
요즘 새벽 수련방에서 날마다 스무명이 넘는 이들과 주문수련과 몸수련을 하면서는, 이들이 모두 나의 부분들은 아닐까?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접촉하는 부분에 대해, 존재에 대해 물음을 품게 되었다. 왜 건드려지는가? 나는 어딜가나 '리더'에 대한 투사를 하는 편이다. 이것은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오마주일까? '리더가 그룹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보고 살피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때론 골륨의 모습이고 어떤 때는 늠름한 기마병이다. 아주 커다란 성벽 안쪽에서 바깥쪽의 상황들을 살피며 나를 지켜준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을.
내가 경험한 의식변화프로그램이나 집단치료의 장에서 리더는 '카리스마'로 '통합적인 메신저'로 메세지를 준다. 무엇보다 '사이코드라마'나 '가족세우기'코스에서 리더의 모습은 거의 '신'에 가깝다. 나는 언제부턴가 '신'과 가까운 리더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어떤 리더는 영원한 '피터팬'이다. 그래도 '신 흉내'를 내는 것 보다는 '피터팬' 쪽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내가 집단치료를 멀리하고 '서클'형태의 수평적 만남을 지향하게 된 것도 이러한 경험들에서 온 '안전장치'였다. 이런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내면이, 내면의 공동체가 '통합'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밖의 공동체도 그렇게 '분열'되고 쪼개어진 모습이다. 세상은 모두 나의 거울이다. 공동체작업은 그래서 더더욱 괴롭다. 더욱이 어린시절 최초의 공동체에 대한 재현작업이 모두에게 일어날 것이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이들에겐 각자의 공동체에서 경험한 상처와 결핍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지금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이 모두 이러한 개인의 공동체의 얽힘과 대물림의 반영이 아닐까? 그러하니 더더욱 '한 개인'을 평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너무 가는 거 아니냐며, 나를 멈추게 하는 이가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더 가보는 수 밖에 없는. 나는 최초의 공동체에서 유기와 방임으로 내 몰아진, 추방자와도 같은 존재로 자신을 만나곤 한다. 그러하니 나의 공동체에선 누구도 추방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둘이 망명 가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 라고 말하니, 벗은 그들이 꼭 감옥에 가는 것을 봐야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된다고 알려야 한다며.
나는 죄를 지은 사람, 그 자신이 그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고통보다 더 큰 것이 있을까? 묻는 사람이다. 그런데 '죄의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도 있다니까.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