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불퇴
바둑에서 가장 엄격한 규칙은 일수불퇴(一手不退)다. 한 번 착점한 돌은 무를 수 없다. 그만큼 선택의 결과에 따르는 책임이 무겁다. 이래서 바둑에서는 순간의 착점이 판 전체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국의 진행이 철저하게 일회성의 원칙에 지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한 번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모든 것은 일기일회(一期一會)다. 법정 스님은 이를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삶은 소중하면서도 슬픈 운명을 지녔다.
번복할 수 없다는 슬픈 운명 때문에 인생이 더욱 아름답다면, 한 판의 바둑도 그렇다. 바둑에선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만났을 때 최선의 수를 찾아야 한다. 같은 기회는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선의 수를 찾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혼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택한 수는 엉뚱하게 패착으로 귀결될 때가 허다하다. 대국자에게 이 이상의 열패감은 없다. 주식시장에서 급등하리라 전망하고 잔뜩 투자했는데 그 반대의 결과를 만난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수를 무르지 않고 끝까지 감수할 때, 한 판의 바둑은 빛난다. 그것이 순리이다.
그치를 만나 / 젖혀 이을 수도 있는 일을 / 한 자욱 물러서서 / 호구를 쳤다. / 따지고 보면 / 그것이 패착(敗着). / 각생(各生)하자는 것이 어수룩한 수작. / 밀고 나가야 했다. / 그리고도 기회는 있었다. / 그치를 만나 / 건곤일척(乾坤一擲), / '패'라도 쓸 수 있었다. / 하지만 / 삶은 투쟁이 아니다. / 순리(順理)로 질 수도 있다. / 이미 그르친 일을 / 귀를 살리자니 / 중앙(中央)이 흔들리고 / 돌을 쥔 손에 땀이 배는데 / 마음을 모아 / 조용히 한 점(點), / 천심(天心)에 두고 / 박영준씨(朴榮濬氏)의 위로를 받으며 / 교문을 나왔다. -박목월, '패착(敗着)' 전문
바둑 두는 상황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진술한 시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다소 길어도 전문을 인용했다. 이 시에서 화자는 "그치"와 한 판의 바둑을 두고 있다. 승부처에서 젖혀 이을 수도 있고 밀고 나갈 수도 있었는데 "한 자욱 물러서서 호구를 치는" 바람에 판세를 그르치고 말았다. 하다못해 패싸움이라도 벌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기회마저 놓친다. 그 결과 "귀를 살리자니 중앙이 흔들리고" 중앙을 안정시키자니 귀의 말들이 죽을 형편에 봉착했다(이런 경우를 '양곤마'라 한다). 어쩔 수 없이 화자는 "순리로 지는" 길을 택해 불계패를 인정한다(천심[천원]에다 조용히 돌을 올려 놓는다). 그리고 옆에서 관전했던 "박영준 씨의 위로를 받으며" 대국장을 떠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조용히" 불계패를 인정하는 자세다. 화자는 실수 때문에 바둑을 망쳤지만 그 수를 무르거나, 무리해서 패싸움을 걸지 않았다. 자신의 착오를 "이미 그르친 일"이라고 "순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자세야말로 "천심", 즉 하늘의 뜻에 맞게 살려는 태도일 것이다. 일기일회에 대한 뼈아픈 교훈이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면이다. 바둑의 원칙이 자기 성찰의 모습으로 격조 높게 내면화되었다. (계속)
첫댓글 우리 인생사와 같은 바둑판이군요.
조용히 받아들이는 자세,천심을 가지기 쉽지 않지만
아름다운모습을 지녀야겠습니다!
네 맞아요. 박목월의 인용 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자세는 바로 그런 모습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