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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중동중학교 시절
나는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중동중학교를 70년대 초중반에 다녔다. 인터넷을 쳐서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설립일이 1906년으로 나오는데, 1976년 졸업한 내가 69회 졸업생이니 그럭저럭 데이터가 맞는 것 같다. 1896년에 설립되어 73년에 졸업한 내가 65회 졸업인 서울 미동초등학교 못지 않게 이 중동중학교도 역사와 전통이 긴 학교로서 그러한 사실은 입학수속을 위해 학교를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알아봤다. 오래된 건물, 낡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대체로 연세가 많은 선생님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중동중학교의 이미지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미동초등학교 시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여러가지 좋은 것들을 다 뒤덮고도 남는 ‘야만’이었다면 중동중학교의 이미지는 ‘폭력’이라 하겠다. 일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진학한 우리 또래 사내아이들 세계에는 싸움이 아주 잦았다. 그 나이가 아마 지금도 그럴 것 같은데, 대학교에서야 물론 같은 학과 내에서 주먹다짐이 거의 없었지만 그 이전 초등, 중등, 고등 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내지 같은 학년 학생들끼리, 그리고 주변 다른 학교학생들과도 싸움은 심심하면 일어나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초등시절에는 그래도 비교적 드문 일이었고 고등시절에도 그렇게까지 잦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춘기로 막 들어가면서 남성성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중등시절이 그 면에서는 절정기였던 것 같다. 여학교에서는 설사 학교 내 싸움이 있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다고 추측했는데, 아내에게 들어 보면 중학교고 고등학교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정도의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고.
학생들끼리만 폭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선생이 학생에게 가한 폭력. 1학년 때에 사회과목 선생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기간제교사로 P라는 선생이 온 일이 있다. 그 사람(그 분이라거나 그 선생님이라고 전혀 일컫고 싶지 않음)은 지방 출신으로 사투리와 억양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행정고시 준비를 하다가 왔다고 했다. 전후 맥락이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고시공부를 하다가 돈이 떨어져서 잠시 돈을 벌어야겠다 해서 왔거나 아니면 포기할까 말까 하는 상태에서 교사 직업의 간을 보러 온 경우라기보다는 낮에는 기간제 교사를 하고 저녁에는 고시공부를 계속한 경우로 보인다. 이 사람 특기는 기회만 되면,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 학생들 뺨을 때리는 것. 감정을 잔뜩 실어 힘있게 휘두르는 뺨. 내가 1학년 당시 우리 반 반장을 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많이 불량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맞은 뺨만 두 차례. 한 번은 반장으로서 담임선생을 찾아볼 일이 있었는지 교무실에 간 일이 있는데 저만치 있는 책상에 앉아 있던 이 사회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무실에 들어올 때에는 일단 문에 들어오자마자 입구에서 선생들 모두를 향해 힘찬 구호와 함께 경례를 하고 볼일이 있는 선생 자리로 가서 다시 힘찬 구호와 함께 경례를 하고 용무를 봐야 하고 나가면서 다시 역순으로 두 번 경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해 보라고 해서 그리 했는데, 내가 억울한 심정을 누르고 교무실을 나갈 때 어느 다른 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뭔가 나에게 미안하다는 느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다른 선생들도 이렇게 심하고 앞뒤 없는 훈육에는 전혀 찬성할 수는 없으되 새로 들어온 선생이 학생을 훈육하는데 대놓고 참견할 수는 없다고 생각들을 한 것 같다. 나중에 군에 입대해 교육을 받아 보니 그게 상관 내지 상관들이 있는 다른 사무실 출입예법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을 사전에 누구도 하지 않았고 허구헌날 다들 그냥 출입하던 게 일반적인 상태에서, 그리고 군대도 아닌 학교에서 느닷없이 일단 뺨부터 때리고 하는 훈육이 정당할 수 없다. 이 선생에게는 그 전에 뺨을 맞은 적이 또 한 번 있었는데, 하루는 소풍을 가는데 혼잡한 버스 안에 이 선생이 나보다 뒤에 타서 이렇게 쳐다보더니, 나와 옆에 서 있던 1년 선배에게 이따가 내리면 보자 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무런 말도 없이 느닷없이 뺨 한 대 씩을 날리고 사라지기.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맞았으니 거의 폭행수준인데, 하여간 버스에서 눈이 마주쳤는데 왜 거수경례를 안 했냐 하는 것인가 본데, 당시는 그 선생이 온 지도 얼마 안되어서 얼굴을 제대로 익히기 전이기도 하였거니와 다른 승객들도 있는 혼잡한 버스에 서서 무슨 거수경례?
이 무도한 선생은 몇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야말로 조용히 그만 두었는데 임시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에게 이임인사도 않고 어느 날 편지만 한 장 달랑 남기고 떴다고 들었다. 그 편지가 뭔가 감동적이었는지 아직 어린 이 중학교 1학년 학생들 상당수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후문인데, 그 좋은 문장력 다듬을 시간에 먼저 인간이 좀 되었어야 할 텐데. 그리고 훗날 나는 이 선생이 결국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때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학교에서 수시로 학생들 뺨을 때린 것은 직장생활 끝나고 지친 심신으로 야간에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낮에 풀기 위한 것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선생이 불과 몇 달 만에 선생질을 그만 둔 것은 아마도 이 선생의 과도한 폭행을 다른 선생들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여 그만두게 했을 것이라고. 사실 다른 선생들이 학생들에 대한 폭행 문제는 별로 개의치 않았고 그건 그냥 추가적인 이유였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이 선생이 동료 선생들과도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국가대표 청소년 축구팀 출신 Y라는 체육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체격이 매우 우람하고 근육질에 주먹이 엄청 세게 생긴 선생이었고 P선생보다 키도 훨씬 컸다. 축구선수 출신이니 발길질도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런데 그 둘이서 교무실에서 다투면서 P가 Y에게 “쳐 봐라” 하면서 알통이 우람한 팔을 보이며 대드는 것을 내가 직접 본 것이다. 내 기억에 체육선생 Y가 이 P선생보다 최소 10년 정도는 연상이었고 기간제가 아닌 정규 터줏대감 선생이었는데, 하여간 좌충우돌.
이 선생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정부관료가 된 후, 전두환 정권이 시작되면서 공무원들 중 일정 비율을 강제해직시킨 80년대 초에 정부중앙부처 사무관직에서 해직된 것으로 안다. 오죽하면 행시 출신 젊은 사무관이 임용된 지 몇 해 되지 않아 해직 대상이 되었겠는가. 이 선생이 해직당한 이야기는 마침 내 둘째형이 첫 직장으로 들어간 곳에 사무관 출신 P가 부장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이 선생이 그 대기업 그룹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으면 당연히 인터넷 검색에 뜰 것이나 전혀 안 뜨는 것을 보면 행시출신이라는 후광에도 불구하고 거기서도 별 출세는 못한 모양이다.
이 선생만 유별났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게 당시에는 폭력적인 선생이 여기저기 참 많았다. 다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내가 2학년 때 담임을 맡은 K선생은 별명이 똥물선생. 그 별명이 붙은 이유는 이 선생이 때렸다 하면 학생이 똥물을 지릴 때까지 때린다 해서. 이 선생의 경우도 내가 1학년 때 뺨을 맞은 적이 있는데, 그 이유도 수상하다. 당시에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서서 행하는 조회가 최소 주 1회 있었는데 하루는 서 있다가 속이 안 좋아서 대열에서 이탈하여 화장실로 갔다. 가는 중 한적한 공간에 이 선생이 홀로 서 있기에 거수경례를 하고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로 가는 중이라고 해명을 한 것인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쳐다보더니 뺨을 오지게 때리는 것. 이유도 설명도 없고 그냥 뺨 한 대 때리고 자기 갈 길 가는 선생. 그야말로 학생은 선생들 스트레스 해소용인가? 이런 선생이 담임이 되었으니 우리 반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2학년 때 담임이 된 P에게는 별로 맞지 않았다. 자기 반 학생들은 잘 안 때리기는 게 그 업계의 국룰인지? 그래서 앞의 임시담임 P가 몇 달만에 퇴직할 때 남기고 간 그 알량한 편지를 누군가가 대신 낭독할 때 그 반의 많은 학생들이 운 것인지?
하여간 이 똥물선생도 지방 출신으로 그 도를 대표하는 명문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를 나온 사람인데, 당시 중동중학교에는 서울대, 고대, 연대 등 명문대 출신 선생들이 꽤 있었다. 그 이유로 당시와 훗날 내가 들은 이유를 종합하면 이렇다. 중동중학교는 내가 입학하기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경쟁입시가 있었고 중동고등학교 입시는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도 있던 그 시절 꽤 명문이었다. 최상위권은 아니었으되 오랜 동안 1차 모집에서 경기, 서울, 경복 같은 일류학교를 떨어진 수험생들이 2차 후기 모집으로 가는 학교 중 가장 좋은 학교였으며 이후 경동고에 밀리고 또 전기에서 후기로 전환한 중앙고에 다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소위 5대사립에 들어가는 명문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야간부까지 있다 보니 학생 수가 꽤 많았는데, 당시에는 합격해도 재수하려고 등록 안하는 수험생, 다니다가 재수하기 위해 자퇴하거나 다른 학교로 편입해 가는 학생 등이 있어서 소위 보결로 들어오는 학생들이 꽤 있었고 학교 측에서는 이들의 학부형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찬조금을 받아 그 금액의 일부를 선생들에게 보너스 주는 데 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수한 선생들을 모집하고 유지하면 그게 도움이 되어 고교입시나 대학입시에서 성적을 내고 그러면 다시 보결생 모집 때 잡수입이 들어오는 훈훈한 선순환(?). 그래서 한동안 이런 명문고 교사 자리는 기본급에 위 잡수입 보너스를 합한 연봉이 제법 좋은 데다가 당시에는 현직 교사도 과외를 많이 뛰던 때이다 보니 다른 어느 직장보다 괜찮은 취직자리였고, 당시만 해도 재벌그룹 회사들이 아직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전인 아주 초기이다 보니 웬만한 명문중고 교직은 좋은 직업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수한 학생들 가르치는 보람도 있었겠다. 하여간 그래서 들어온 교직인데 이후 중학교와 고교 입시가 없어지고 평준화되다 보니 보결학생들에게서 들어와 선생의 보너스가 된 돈도 마르고 다른 직장, 예컨대 당시 나라 전체의 경제가 커지고 활발해지면서 한창 새로 생기고 해가 다르게 커가는 재벌그룹사에 들어간 친구들이 개인의 발전, 승진, 연봉 등에서 크게 좋아지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나이나 경력면에서 그리로 갈아타지는 못하고 꼼짝 못하고 갇혀 있다 보니 느끼게 되는 좌절감과 열패감을 학생들 두드려 패는 것으로 해소한 경우가 있었으리라고 감히 추론해 본다.
이 똥물선생은 학생 패는 것 외에 고약한 취미도 여럿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마치 노예들 앞의 절대군주처럼 군림하는 것. 이 선생 취미활동 중 하나가 툭하면 우리에게 합창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그 곡은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등이 부른 유명한 샹송 ‘Sous le Ciel de Paris(파리의 하늘 밑)’라는 곡에 자신이 지은 한글 가사를 붙여 부르게 하는 것. 그 가사인 즉, ‘붕어야 붕어 붕어야 붕어야 붕어, 물어라 어서 어서 물어라. 그리~움에 지친~ 사람이 그림자도 없이~ 있~다. 붕어야 붕어 붕어야 붕어야 붕어. 붕어야 붕어 붕어야 붕어야 붕어, 한 치라도 좋구나 아하하하하’ 어쩌고 하는 매우 유치한 내용이었는데, 하여간 우리들 70명은 선생이 불러라 하면 일제히 이 노래를 불러야 했으니, 인간 축음기도 아니고.
이 선생의 이후 행보도 내 귀에 들어왔다. (나에게 찍힌 사람들 행적은 결국 내게 알려지는 신통한 재주가 내게 있는 듯.) 당시 중학 2학년 때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내고 이후 오랫동안 사귄 B라는 친구에게는 여섯살이나 많은 작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군 제대 후 복학생 시절에 어느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 똥물선생이 그새 학교에서 이 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밤낮 이 형에게 퇴근하고 소주 한 잔 하자고 졸랐다는 것이다. 아마도 수입이 정체되어 시대가 바뀌며 유망해진 다른 직장에 비해 별볼일 없게 된 학교선생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학원에서 고수입을 올려 노후에 목욕탕을 하나 차리겠다는 꿈(이 꿈은우리에게 이야기한 바 있음)을 이루려 한 모양인데, 수시로 학생들 뺨따귀를 때리는 취미생활을 더 이상 학원에서는 못했을 텐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폭행 대신 술이라는 대체재를 찾은 모양인데 충분히 만족스러웠을까? 이후 이 사람이 목욕탕 주인이 되어 편안한 노후를 지금도 즐기고 있는지 이미 돌아가셨는지는 추적이 안되었는데 하여간 내 인생에 좋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중동이 역사가 오래여서 나름 그 전통이랄까 하는 게 빛을 발하는 순간도 있었다. 예컨대 각 반 대표로 구성되는 학생회가 꽤 활발했고 그 학생회 멤버들에 대하여 배정되는 예산도 있고 그 예산을 학생회에서 의결하는 절차까지 있었다. 그리고는 이 학생회 멤버들이 마치 대학 학도호국단이나 학생회 구성원들이 하는 멤버십 트레이닝같이 어디 다같이 놀러가서 친목을 다지는 행사도 있었다. 그리고 매년인지 격년인지 ‘중동’이라는 잡지를 발간한 것도 이후 역사가 10년도 안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짚어두고 싶은 것은 그 잡지에 수록된 한 학생의 논문인지 산문인지 그 내용이 라디오의 효용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인데, 73년에서 75년 사이라면 우리나라에 이미 텔레비전이 보편화된 시기인데 왜 하필 그 전단계 매체라 할 라디오에 대한 것인지이다. 그리고 1955년생으로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해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선구자로 억만장자가 된 미국의 빌 게이츠가 다닌 상류층 사립학교의 어머니회에서 그 해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단말기와 제너럴 일렉트릭(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게이츠가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된 것이 1968년 정도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미 컴퓨터를 미국의 한 중학교에서 다루기 시작하여 훗날 인류의 삶을 바꾼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을 일으킨 사람을 키우게 된 지 5년에서 7 년 후에 중동중학교에서는 라디오에 대한 논문이 교지에 실렸다는 점이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중동중학교만의 잘못은 결코 아니다만.
당시 중동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 설립자의 아들들로 구성된 경영진인 C씨 가문은 1974년 바로 옆에 위치한 수송중고를 인수한 후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다는데 이들을 구제한 게 정부가 강남 개발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명문고들을 강남으로 이전하도록 갖은 혜택을 주면서 유도한 사실. 매사 한가지 이유만으로 세상일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으나 1958년생들을 대상으로 갑자기 이루어진 고교평준화도 강남개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일부 있었다는데, 하여간 이 학교 이전은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던 이들 C씨 가문의 명맥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후일 들었다. 그렇게 내 모교 중동중학교는 중동고등학교와 함께 1984년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전했으니 결과적으로 시류를 잘 탔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4년에는 중동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유시에 따라 삼성그룹에 인수되었고 이후 삼성그룹도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고 들었으며, C씨 가문의 흔적은 이제 중동중학교에 없는 듯하다.
이리저리 모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했으나 불행하게도 내가 졸업 후 진학한, 당시 역사가 10년도 안된 C고등학교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고 내가 그 학교를 다니면서 가끔 역사가 오래 된 미동초등학교나 중동중학교에 비해 이 학교는 역사가 짧으니 이렇구나 하는 순간이 몇 번 있었으니 그나마 역사와 전통이 있어서 좀 나았달까. 결국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그 시절 우리 나라의 보편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좀 사정이 나았을 것 같지도 않다.
첫댓글 일부 수정하다가 서툴러서 이왕 댓글 올린 두 분 댓글도 사라졌네요. 안정균 선생님, 체리(?)님 죄송합니다. 안선생님은 잘 읽었다고 쓰셨고 체리님은 그 시절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의 과거 자화상 같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의 학창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