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눈으로 본 연년세세
박 문 철
문화원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늦은 오전, 햇살은 벌써 봄이라고 곰살맞게 속삭이는데 1월의 바람은 여전히 심술궂다. 저절로 목이 숙어지고 어깨가 움츠러든다. 날씨가 나를 스스로 겸손해지게 만든다. 연년세세를 읽다가 문득 한 인물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대치동 학부모를 능가하는 교육열을 가지고 세 번이나 이사하여 그를 대학자로 만들었다. 그는 맹자다.
디즈니가 제작하여 흥행한 영화로 한 소녀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에서는 사람의 뇌 속에는 까칠, 소심, 기쁨, 슬픔, 버럭 이라는 다섯 가지 감정이 있다고 한다. 2,300년 전에 맹자도 사람들 마음의 바탕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네 가지 선한 감정이 있으며, 이는 각기 다른 마음씨들로부터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순일의 외할아버지 묘는 교통이 불편하고 마음대로 갈 수도 없는 강원도 철원군 지경리의 비무장지대 근처에 있다. 칠십대 고령으로 무릎이 아픈 그로서는 매년 성묘 가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강 때문에 더는 갈 수 없고 대신 갈 사람도 없어서 파묘를 결정했다. 유골을 수습해서 화장하려는 마지막 성묘에서도 이순일은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어릴 적 착취에 가까운 열정페이로 고모집에서 세월을 보내던 이순일은 간호사라는 꿈을 찾아서 몰래 집을 나온다. 그러나 병원에 취직하여 간호사의 꿈을 펼치던 그녀는 반년 만에 찾아온 고모부를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불평하지 않고 고모네 살림을 돕는다. 맹자는 이처럼 어른을 공경하고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이순일의 마음을 사양지심이라 하고 이로부터 공손한 마음인 예(禮)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을 맹자가 말하는 마음의 네 가지 끝자락인 사단(四端) 중 하나인 사양지심 예지단야(辭讓之心 禮之端也)라고 한다.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예의 근본 또는 시작이란 뜻이다.
한영진은 장사가 망해서 가장의 의무를 못 하고 기죽어서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소녀가장 노릇을 하는 큰딸인 자신에게 따뜻한 저녁밥을 차려주기 위하여 아무리 늦어도 잠들지 않고 그녀가 귀가하기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애틋하다. 처가에 잘하고 있으나 표현이 서툴러서 오해받고 있는 남편 김원상을 바라보는 한영진의 모습에는 다소 포기한 듯한 슬픈 느낌도 든다. 맹자는 가족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한영진의 마음을 측은지심이라 하고 이로부터 어진 마음인 인(仁)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을 측은지심 인지단야(惻隱之心 仁之端也)라고 한다.
한세진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기를 더 좋아했다. 남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남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조금은 더 관대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작가로서 가족을 소재로 한 연극의 시나리오에서도 가족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맹자는 사리를 분별하고 잘잘못을 분명하게 가리는 한세진의 마음을 시비지심이라 하고 이로부터 지혜로운 마음인 지(智)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을 시비지심 지지단야(是非之心 智之端也)라고 한다.
한중언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의무를 포기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위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도 별로 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김원상 또한 장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인 의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처럼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하고 이로부터 옳은 마음인 의(義)가 나온다고 한다. 이것을 수오지심 의지단야(羞惡之心 義之端也)라고 한다.
책에서 한영진을 만나면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측은지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맹자의 사단(四端)’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얘기라고 느낄 수 있고 이를 통한 가족들의 설명에도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래서 분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하여 나만의 방법으로 연년세세를 만나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