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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포구와 나루
해운 및 수운은 인마와 조세 그리고 물화의 운송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산만 유역에 수로, 해로교통이 발달한 것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통일을 전후해서는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이 대당교역의 중심으로 역할 했고, 근대 전후에도 충청도 내포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및 교역창구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 읍지邑誌에는 안성천, 진위천 변의 여러 포구유적이 소개됐다.
16세기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조에는 나루와 포구가 나와 있지 않고 평택현만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시포市浦·신덕포新德浦·군물진이 소개됐다. 또 직산현 조에는 경양포가, 양성현 조에는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가 보인다. 조선후기 대동법이 실시되고 경강상인들이 조운활동과 선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평택지역에도 나루와 포구들이 만들어졌다. 1899년 『진위군읍지』에 군문포·황구포·고잔포·해창포가 수록됐으며, 18∼19 세기의 고지도에 기존의 나루, 포구 외에 다라고비진·동청포·항곶포(황구포)가 표시돼 있다. 또 18세기 초에 편찬된 『팽성지』에는 곤지나루·신덕포·삽교포·통복개·시포 등 5개의 나루와 포구가 보인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만호리의 대진을 소개하고 있다. 대진은 옛 기록에 솔개바위나루 또는 한진으로 불렸다.
큰 나루로는 계두진·구진·석화진·당포진이다.
그 외에도 대동여지도 등에는 합정동 통미 부근에 남창(南倉)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존폐여부는 알 수 없다. 평택현에는 초기에 시포의 남창을 이용하였지만 후기에는 직산현 관할이었던 경양포의 경양창(현 팽성읍 노양리)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양성현에는 사창 6고(庫)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구룡동면 창리(현 용이동 구룡동 마을)에 남창(南倉) 3개가 있었다. 이곳의 남창은 육면세와 대동미를 수세(收稅)하여 보관하였는데, 1872년에 대청 6칸, 창고 12칸, 신당 1칸, 대문 1칸, 헛간 2칸을 새로 지었다 『양성군지』, 광무3년(1899)
또한 청북면 삼계리 옹포에는 해창이 있었다. 옹포 해창은 양성현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는데, 이 같은 역할을 일제강점기 강제공출된 곡물을 출하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승량동면(포승면)과 서신리면(청북면), 도일동 상리에도 조창이 있었다. 수원부에는 칠창(七倉)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안중읍 용성리 설창마을에 있었다 『대동지지』
이 조창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와 있어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직산현은 팽성읍 노양리의 경양창을 해창으로 이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앞서 말했지만 경양창은 본래 고려의 하양창으로 조선초 경양현이 직산현에 편입되면서 직산현의 해창(海倉)이 되었다. 그 외에도 안중읍 황산리에 안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존폐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조선시대 평택지방에는 경창(京倉)과 연결된 해창(海倉)이 3개였고, 남창(南倉)이 6개, 읍창(邑倉)이 2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조창에는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위해 주변 마을에 조군(漕軍)의 역(役)을 부과했으며, 물산이 집산되면서 교역이 이루어져 대처로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평택의 나루와 포구를 살펴보자
1. 군문동 군물포(군문포),
군문포(軍門浦)는 평택시 군문동에 있었던 포구다. 정확한 위치는 안성천 변을 가로지르는 군문교 아래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이다. 이 포구는 평택현 영역이면서 조선시대 전국10대로 가운데 하나인 충청수영로가 지나는 길목이었으며 안성천을 건너 경기도 진위현에서 충청도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5년 1월 경부선 평택역이 군문포와 인접한 통복리(동)에 세워진 것도 포구를 통하여 서해의 물산이 유입되고 평택평야에서 생산되는 양곡의 집적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군문포는 ‘청일전쟁(1894) 때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주둔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전에도 안성천의 가장 중요한 수로교통로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 같은 지명이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軍勿浦)’다. 군물포라는 지명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나지 않고 18세기에 편찬된 『팽성지』에 처음 나타난다. 그 후 1895년에 편찬된 『평택현 읍지』에도 쓰였는데 1899년에 편찬된 『진위군 읍지』에는 ‘군문포(軍門浦)’라고 기록하여 4년 사이에 지명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4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주목되는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이다. 앞서 청일전쟁은 아산만과 소사벌 일대에서 시작되었고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의 풍도를 거쳐 아산의 백석포와 군물포로 상륙하여 주둔하였음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바뀌었을 것이다.
2. 통복동과 신대동의 신덕포·화포·삽교포,
통복동은 조선시대 진위현 병파면에 속한 갯가로 이로 인해 유래된 지명이 “통복개”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통복리가 되었다. 통복동은 통복천을 끼고 있는 갯가였던 만큼 농경이 어려워 근대 이전부터 현 군문동인 군물포를 비롯하여 신덕포, 고잔포, 간포, 군두포, 삽교포 등의 포구가 발달하여 새우젓과 소금 등 서해안의 물산이 내륙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근접하여 이 일대에 자연부락이 형성되었다.
통복포는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이다. 『대동지지』에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에있으며, 양성 가천역 하류로 평택으로가는 길과 통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1770년경 편찬된 『팽성지』에는 ‘평택현 관아에서 북쪽으로 8리 지점에 있는데, 진위현과 수원부로 갈라지는 경계다’라고 했다. 통복포의 위치는 통복동 화촌으로 보인다. 화촌은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만의 소금과 새우젓, 굴젓이 거래되던 포구였다.
삽교포는 신대동 삽교마을 신대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다. 안성천과 도일천이 합쳐지는 지점인데다 바닷물이 유입돼 하천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주민들은 하천에 섶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됐다. 옛날 이곳에서 배를 타면 지제동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고덕면이나 팽성읍과도 통했다고 한다. 삽교포는 1922년 신대교 가설과 주변지역의 간척으로 역할이 줄어들다가 1974년 이후 폐지됐다.
3. 팽성읍 석봉리의 원봉나루·석봉나루,
원봉 : 석봉리 동쪽 안성천 변에 있었던 마을. 나루가 있었으며 군물포와 연결됐다.
1946년 수해를 겪었고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폐동廢洞됐다.
• 석봉나루터 : 석봉리 서쪽 안성천 변에 있었던 나루. 석봉양어장과 낚시터가 있었으며 안성천 건너 동고리 이포나루를 통해 궁리와 연결됐다.
4. 팽성읍 대추리의 곤지진,
곤지머리나루(곤지진)는 삼국시대 이후 평택현에서 건너편 계두진으로 넘어가는 수로교통과 아산만 어업의 중심이었으며, 노양리 경양포는 고려시대 이후 전국에서 가장 큰 조창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근대 들어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갯벌이 메워지고 토사가 쌓이면서 나루와 포구는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은 미군기지 확장공사로 편입된 팽성읍 구 대추리에 있었다. 대추리 지역은 해방 전후 도두리벌이 간척되기 전까지는 포구였다. 삼국시대에는 경주에서 청주와 진천 또는 천안을 거쳐 북상하면 곤지진에서 배를 타고 현덕면 신흥포나 계두진으로 건넜다. 18세기 초에 편찬된 사찬私撰 『팽성지』에 의하면 ‘이곳은 수원으로 왕래하는 나루이다. 밀물 때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썰물에는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다. 고깃배 새우젓배들이 나루에 매어져 있다. 이 나루의 위쪽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수원부와 소북면으로 통한다’고 했다(여기에서 수원은 서평택지역의 오성면과 현덕면을 말한다). 크게 번 성했던 곤지진은 1899년 『평택현읍지』가 편찬될 때쯤에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토사가 많이 쌓여 배가 들어올 수 없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시간 토사가 쌓여 나루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2년 K-6 미군기지가 주둔할 때까지만 해도 소금배나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며, 뱃터에는 주막집이 세 집이나 있었다고 한다.
갯벌과 나루의 기능을 상실한 이 땅이 광활한 들판으로 탈바꿈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다. 도두리벌의 간척은 고향에 송곳 하나 꽂을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의 손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거의 맨손으로 산을 허물어 마을 앞 작은 갯벌부터 메워나갔다. 그래서 가수 정태춘의 고향이기도 한 도두리 마을에는 ‘보미사논’ ‘구원들’ ‘다섯가래논’과 같은 지명이 만들어졌다. 보미사논은 봄에 개간한 논, 구원들은 아홉 개의 원둑을 쌓아 개간한 들, 다섯가래 논은 가래 다섯 개로 개간한 논을 말한다. 바다를 메워 자기 땅을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마을의 민중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해일에 둑이 무너지면 다시 둑을 쌓고, 소금기가 많아 식수가 없으면 백반을 갈아넣어 마시며 버텼다. 먹는 것이 부실하고 식수가 좋지 않은 민중들에게 전염병은 하늘이 내린 재앙이었다. 도두리 주민 송아무개씨는 보릿고개에 호열자라도 돌면 수십 명씩 죽어나갈 때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 땅’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5. 진위면 마산리 마산포
6. 현덕면 신왕리의 신흥포, 당포진신왕나루
현덕면에서도 ‘광덕廣德’은 특별한 지역이다. 광덕은 고려시대 광덕현이었으며 조선건국 후 수원도호부에 편입된 뒤에도 ‘광덕면’으로 일정한 영역을 보장받았다. 광덕면이 독립된 지위를 잃은 것은 1914년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 현암면과 가사면·광덕면이 통합되면서 현덕면이 된 것이다. 근대 이전 현덕면에는 나루와 포구가 많았다. 큰 나루만 해도 계두진·구진·석화진·당포진이 있었으며, 어민들이 이용하던 작은 포구는 이보다도 더 많았다. 안성천 하구의 나루·포구들은 수로교통의 거점이면서 아산만 어업과 포구상업의 전진기지였다. 그 가운데 신왕나루는 현덕면 권관리의 계두진, 팽성읍 노양리의 경양포, 아산의 백석포와 함께 안성천 하류를 대표하는 나루였다.
신왕나루라는 지명은 근대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읍지>, <지리지>에는 당포진·당진포로 기록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된 지명은 당포진. 당포진은 16세기 전반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포진堂浦津’으로 표기되었지만, 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와 18세기 후반의 <여지도서>에는 ‘당포진唐浦津’, ‘당진포唐津浦’라고 기록되었다. 또 당포진은 ‘수원부에서 90리 지점에 있으며 아산의 여러 고을들과 통하는 첩로’라고도 기록하였다.
포구의 명칭에 ‘당唐’자가 들어간 것은 이곳이 삼국시대 당나라와 연결된 나루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충청도 당진과 연결되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가까운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나 아산의 백석포 뿐 아니라 삼국시대에는 당나라, 근대 이전에는 당진 일대와 연결된 나루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후기 당포진은 포구상업이 발달한 나루였다. 19세기 말의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도 청어·조기·미역·미곡·대맥·조·소금·목화·창호지·우피·담배에 관한 조세를 당포진에서 거둬갔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당포진의 포구상업이 아산만 일대의 어염 뿐 아니라 미곡과 목화·담배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신왕나루는 ‘광덕나루’로도 불렀다. 본래 ‘고등산’과 ‘심복사’의 본래 이름이 ‘광덕산’ ‘광덕사’였고 아직도 대안리에는 광덕분교가 남아 있어 새삼스런 지명은 아니다. 나루터는 신왕1리 말머리에 있었다. 말머리는 30호 내외의 마을로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안성천 하구의 대표적인 어촌이었다. 안성천 하구와 아산만 일대에서는 이른 봄에 잡히는 숭어를 비롯해서 강다리·뱅어·준치·새우와 같은 어종이 많이 잡혀 봄·가을이 되면 서해안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었다.
신왕리에는 5톤급 중선배만 10여 척, 작은 어선들은 30여 척 넘게 있었다. 중선中船은 우리나라 전통의 평저선이 아니라 일본배 형태를 빌려온 왜중선이었다. 중선들은 안강망이라는 어구를 사용해서 아산만 뿐 아니라 서해 연안을 오르내리며 고기를 잡았고, 작은 어선들은 안성천 하구에서 투망이나 삼중망을 이용해서 숭어와 강다리·농어·삼치·준치를 잡았다. 지금은 금값보다 비싼 꽃게는 잡아도 판로가 없어 반찬으로 먹거나 버렸고, 장마철에는 최고의 횟감으로 꼽히는 농어를 낚시만으로 100kg이상씩 잡았다. 9월에서 10월 파시에는 산란을 위해 안성천을 거슬러 오르는 민물장어도 잡았다. 섬진강 일대에서 많이 잡히는 참게와 함께 재첩보다 희고 작으면서도 맛이 좋은 씨조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잡았다. 가난했으면서도 모든 것이 풍성했던 시절들이었다.
파시波市가 되면 신왕나루는 활기가 넘쳤다. 말머리산 끄트머리에 있었던 뱃터 주변에는 하얀 천막을 두른 간이술집들이 15~16집씩이나 문을 열었으며 고깃배들은 흰돛·황포돛을 달고 위풍당당 바다로 나갔다. 나루터 커다란 미류나루에는 아이들을 위한 그네가 설치되었으며 간간이 약장수들이 출현하여 순진한 시골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나루터의 간이주막들은 아가씨를 고용해 술과 회를 팔았다. 주요 고객은 생선회를 맛보려는 관광객들이었지만 저녁이 되면 고기잡이에 지친 어부들과 소금배·새우젓배를 타고 들어온 상선들도 등록된 고객이었다.
술집 아가씨들은 지분냄새와 값싼 웃음으로 순진한 배따라기들을 꼬드겼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술과 회를 게걸스럽게 먹어댔으며 호주머니가 두둑한 남자들을 노름판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신왕나루 일대에는 ‘술집 여자들은 소금 한 배를 먹어도 짜다는 법이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서산과 당진에서 숭어 잡이 왔다가 술과 여자에 빠지는 바람에 빚만 잔뜩 져서 고기 잡아 갚아주고 돌아갔다는 사연, 덕적도에서 소금 한 배 싣고 들어왔다가 술집여자에게 모두 털리고 빈 배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나루터 주변에 파다하게 떠돌았다.
신왕리 사람들은 풍어제와 뱃고사를 함께 지냈다. 풍어제는 정월에 마을제당에서 지냈고 뱃고사는 배 위에서 지냈다. 뱃고사는 정월 열나흘과 출어를 할 때마다 지냈다. 어부들은 대보름이 가까워오면 배를 닦고 뱃기를 꽂은 뒤 제물을 진설했고 고시례를 한 뒤에야 술을 올렸다. 대보름 뱃고사는 풍어제와 마찬가지로 시루떡과 북어·삼색실과에 돼지머리를 올렸다. 대보름에는 성대했지만 출어를 할 때는 ‘조금때’를 기다렸다가 약식으로 지냈다.
경양포와 백석포를 오가는 나룻배는 신왕리에서 운영하였다.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 만해도 현덕면은 오지 중의 오지여서 평택으로 나가 기차를 타거나 아산·당진으로 갈 때면 나룻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나룻터의 뱃사공은 황OO 씨였다. 황 씨는 밤이나 낮이나 건너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룻배를 띠웠다. 황 씨 덕분에 아산 사람들은 쉽게 수원과 서울을 오갈 수 있었으며, 현덕면 사람들도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에서 내려 평택역과 평택장을 오갈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광덕사람들의 발이 되어준 황 씨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환갑 때는 나루터에서 환갑잔치를 해주었으며 대안리로 넘어가는 서낭나무 옆에 송덕비까지 세워주었다. 황 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공 몇 사람이 나루터를 지켰다. 하지만 황씨 처럼 안전하고도 성심껏 일해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신왕나루는 1974년 아산만방조제 건설로 수명을 다했다. 나루가 수명을 다하면서 아산만어업과 풍어제·뱃고사 그리고 나루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나룻배 운행도 중단되었다. 포구가 닫히면서 덕적도에서부터 들어온 소금장수가 주막집 아가씨에게 홀려 소금 팔은 돈을 모두 날리고 돌아갔다는 사연도, 파주에서 들어온 강다리배 선주가 노름으로 어선까지 날리고 빈 몸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모두 평택호 속에 잠겨버렸다.
방조제 건설 뒤에도 신왕리 어민들은 어업계를 조직하고 한동안 어업을 계속했지만 물속에서는 숭어와 강다리 대신 민물어종인 붕어·잉어·민물새우가 잡혔다. 어업이 중단되면서 정부는 어업보상을 실시했다. 어업보상은 쌀 한 가마에 3만원일 때 30~40만원씩 지급되었다. 어민들은 고기잡이가 어려워지면서 농업으로 전환하였다. 주업이 부업이 되고 부업이 주업이 된 셈이다. 어업이 중단되면서 풍어제와 뱃고사도 중단되었다.
다만 근래 신왕리에서 여선제를 운영하는 행위예술가 김석환 선생이 어민들의 옛 기억을 끄집어내 ‘신왕나루 뱃고사’ 퍼포먼스를 거행했고 지금은 평택문화원과 현덕면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해 진행하고 있다. 광덕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황포돛배 뱃사공의 사연도 1970년대 새마을사업 때 황 씨의 송덕비를 땅 속에 묻어버려 행방이 묘연하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의 추억들이 사라진 세상에 산다.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7. 대안4리 구진,
해방 전후만 해도 아산만 어장의 대표적인 어항일 뿐 아니라 농업과 더불어 어업이 발달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갈매기 나루’라는 뜻의 ‘구진개’이다.
마을의 대성(大姓)은 청주 한씨다. 호(戶) 수에서도 47호나 되고,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도 ‘청주 한씨 세거비’다.
구진개 청주 한씨는 3백 년의 역사를 가졋다. 성남 율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사정이 생겨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형님은 포승면 내기리에 정착하였고, 동생은 아산 쪽으로 가려다가 안성천에 막혀 구진개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어업인구가 줄어든 것은 간척사업이 진행된 일제강점기부터다. 기산리 노인들도 4월 어장철이 되면 구진개 나루에는 하얀 돛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어부들이 잡는 고기는 숭어, 강다리, 병어, 깡치(거물치)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숭어가 많이 잡히는 이른 봄이면 강화도, 옹진군 일대의 어선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루만 조업해도 만선을 이룰 만큼 고기를 많이 잡았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한데다 수요가 적어서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이 없었다. 그래서 타지에서 온 배들은 고기를 손질하여 말리거나 염장을 하였고, 동네 사람들은 큰말로 담아서 팔았다가 나중에 겉보리로 받았다.
하지만 겉보리도 안 주면 그만이어서 어민들의 삶은 항상 팍팍하였다. 팍팍한 삶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장마철이었다. 장마철에는 잡은 고기를 제 때 팔수도 없었고, 말리려고 해도 잘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진개에 성공회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30년대 초였다. 이곳에 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무래도 구진나루의 어업발달과 관련이 있을 것이나 그보다는 병인박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서양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구진개로 들어와 조선에 발을 딛고 수로와 논길을 따라서 갔다는 선교사들의 편지내용이 있고, 오매트르 라는 신부가 안전하게 머물다 나중에 잡혀 해미읍성에서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용인 수지 손골 성지에 성 오메트르 신부 순교지가 있다. 손골은 1863년 6월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가 그해 7월부터 15개월간 사목했던 곳이다. 오메트르 신부의 마지막 은신처 ‘샘골’이 구진개 마을이라고한다.(카돌릭 평화신문)
8. 권관리 계두진
현덕면 권관리 노랑바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80리(『대동지지』도 동일함)인데 아산으로 통한다’고 했다.
조선후기에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포나 백석포에서 배를 타면 계두진에 내릴 수 있었다.
계두진에서는 육로로 안중을 지나 수원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한양으로 가는 과객들이나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해방 전후에는 주로 어항과 나루로 기능했지만 1974년 아산만방 조제로 막힌 뒤에는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은 요트와 윈드서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9. 고덕면 동고리의 이포진,
이포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수원부 남쪽 70리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돼 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수원부 조에는 금물촌면에 있다고 기록됐고, 다른 읍지邑誌에는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였다고 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수원부 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래소청나루라고 해 국도38호를 지나 서평택으로 넘어가는 차량과 사람을 실어날랐다. 이포진에서 배를 타면 안성천 건너 원봉나루나 곤지진, 진위천 건너 오성면 신리 삼동촌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포진은 1930년 궁안교가 가설되고, 1938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되면서 역할이 줄었다가 일제 말 수로가 바뀌고 주변지역이 간척되면서 사라졌다.
10. 궁리의 다라고비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다라고비진은 수원부에 속한 나루로 수원부 관문 남쪽 67리 지점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조
. 이 나루는 항곶천(황구지천)과 장호천(진위천)이 합류하여 흘러온 물이 홍경천(안성천)과 합류하여 아산만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이었다. 나루의 위치는 궁안휴게소 뒤 서정천과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청나루라고도 불렀는데, 궁안교가 소청교로 불렸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이 나루를 다루지나루라고 하고 있으며, 진위천 변에 위치한 궁1리 마을 이름이 다루지 마을이라는 점도 위치 고증에 확신을 준다.
주민들에 따르면 다루지나루는 1930년대 말까지 막사리 때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젓 배들이 돛대를 쓰러뜨리고 황구지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새우젓 배들은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을 가지고 와서 곡식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 궁안교가 놓이고, 1970년대 초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나루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11. 해창리의 해창진,
고덕면 해창리는 조선시대에 진위현의 해창(海倉)이 있던 마을이다 경기도박물관,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 평택시, 1999
이곳에 조창이 설치된 것은 진위천의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루는 해창 4리 "뱃말"에 있었고, 조창은 해창3리 서북쪽 창말에 있었다. 현재 나루는 간척으로 흔적이 없어졌으며, 창고 터와 배를 묶어두었던 자리만 남아있다.
12. 동청리의 동청포,
동청포는 고덕면 동청리에 있었던 포구다. 조선후기 청북면 사람들은 동청포를 건너야 수원이나 한양을 갈 수 있었고 근대 이후에는 서정리역이나 서정리장을 볼 수 있었다. 밀물이 올라오면 진위천 수로를 따라 조운선과 상선들도 드나들었다. <고려사>에 보면 1217년(고려 고종4) 진위현의 영동정 이장대·직장동정 이당필·별장동정 김예가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지 못하는 최 씨 무신정권에 대항하여 진위민란을 일으킨 다음 종덕창과 하양창을 점령하여 곡식을 군졸들에게 풀어 먹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종덕창의 위치도 동청포로 추정된다.
동청포의 위치는 본래 동청2리 원동청이었다.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청2리는 남서쪽으로 진위천이 휘돌아 흘렀고 남동쪽으로는 두릉천이 흘러 배들이 접안하기에 좋았다. 나루터는 두릉2리 계루지 마을 사이의 ‘뱃터’라 곳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청포의 전성기시절 뱃터에는 옹진군의 용유도·덕적도에서 밀물을 따라 올라온 중선中船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궁안교(소청다리) 건설로 큰 배가 드나들 수 없게 되면서 작은 평저선이나 전마선들이 들어왔다.
상선과 나룻배가 닿고 상거래가 활발하면서 마을 옆에는 장시場市도 열렸다. 장시場市는 일제시기에 계루지벌과 구동안들이 간척되면서 없어졌지만 아직도 ‘장터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알려준다. 동청포는 일제강점기 간척 계루지벌과 구동안들이 간척되고 나루터가 메워지면서 동청1리 동연교 아래로 옮겨졌다. 동연교 아래 뱃터에는 주막도 두 세집 있었고 청북면으로 건너가는 나루터도 있었다. 나룻배는 항곶포처럼 청북면 어소리 사람들이 운영하였다.
냇가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나루터가 가져다주는 이점도 컸지만 만성적인 수해를 숙명처럼 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냇가의 삶이었다. 박OO(88세) 씨, 전OO(87세) 씨는 동청2리 주민이다. 두 사람은 포승읍 서두물이라는 마을과 머물이라는 마을에서 동청리로 시집왔다. 박 씨는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동청리는 매년 수해가 났었다고 말했다. 수해가 나면 경작지가 침수되고 집안까지 물이 차올라 지대가 높은 동청1리로 대피하였다. 주민 김기순(74세) 씨도 신혼 때 물이 불어나는지도 모르고 밥을 먹다가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급히 아이를 들쳐 업은 뒤 새끼줄을 잡고서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해방 전후 진위천에는 동청교(동청이다리)가 놓였다. 초기 동청이다리는 목교木橋였다. 수해가 심할 때면 동청이다리도 떠내려갔다. 다리가 떠내려가면 청북사람들은 다시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한산리 수부가 친정인 김기순 씨도 어릴적 서정리장을 갈 때 나룻배를 탔던 기억이 있었다. 포승읍 원정리가 친정인 박 씨는 60리가 넘는 친정을 궁안교까지 걸어가서 넘어 다녔다고 말했다.
동청교에서 서정리까지는 10리였다. 동청리 사람들은 두릉2리 계루지와 아홉거리를 지나 서정리장을 오갔다. 옛날에는 30리가 넘는 평택장도 걸어 다녔다. 평택장은 서정리장보다 컸고 우시장이 있어서 진귀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평택장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릴 때 율포리에서 동청리로 이사와 혼인하고 지금껏 살아온 김종여(71세) 씨는 아버지가 소 팔러 평택장을 갈 때 따라갔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김기순 씨도 송아지를 팔러 우시장에 따라갔다가 해장국을 사먹었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전 씨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장사를 했다. 빈농인데다 농사만 지어서는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살기 힘들어 시작한 일이다. 전 씨는 마을에서 쌀이나 채소와 같은 농산물을 사다가 서정리장이나 송탄 중앙시장에 팔았다. 30~40년 전에는 쌀 서너 말씩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내다 팔면 한 말에 500원을 남겼다. 동청리 마을에는 전 씨 말고도 쌀장수를 한 사람이 여러 명이다. 콩이나 채소 같은 농작물을 팔러 다녔던 사람도 많다. 쌀장사·채소장사는 버스가 다니면서 조금 수월해졌다. 하지만 짐이 많다면서 잘 태워주지 않아서 서러움도 많이 겪었다.
어르신들과 인터뷰하다가 박 씨 할머니에게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시적 머물마을에 살 때 포승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일제 말 민족말살정책으로 일본어만 배워서 정작 한글은 잘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참 웃기고도 서글픈 현대사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과 한참을 웃었다.
수 백 년 나루와 함께 살아온 황구지리는 해방 후 큰 변화를 겪었다. 1971년 큰 물난리로 나루터 마을이었던 둑너머가 폐동되어 황구지리와 통합된 것, 나루터에 다리가 놓이고 1974년에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고깃배·새우젓배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게 된 것, 근래 미군기지 확장으로 황구지리마을이 폐동되어 두릉3리로 집단 이주한 것이 그것이다.
황구지리만큼은 아니지만 동청포도 변화를 겪었다. 가장 큰 변화라면 1957년 동청포 자리에 콘크리트 교량이 건설되고 진위천 제방이 높게 쌓이면서 수해에서 해방된 것이다. 근래에는 청북지역에 어연·한산공단을 비롯한 여러 곳의 지방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다리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조만간 고덕국제신도시 건설공사가 완성되면 번화한 시가지를 곁에 둔 생경한 마을이 될 것이다.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토진리 톷나루를 연결하는 나루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의 읍치 동항리에서 도일동과 고덕면 율포리를 거쳐 동청포를 건너 한산리와 옹포로 건너갔다.
일제강점 뒤에는 청북면 주민들이 서정리역에서 열차를 타거나 서정리장을 갈 때에도 이나루를 이용했고, 반대로 고덕면이나 서탄면에서 청북으로 건너갈 때에도 이곳으로 건넜다. 나루는 동청2리 뱃터였지만 일제강점 전후에 계루지들이 간척되면서 동연교 아래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직후만 해도 나루터에는 배를 건너 주는 사공이 있었고 주민들은 배 삯으로 일 년에 얼마씩의 쌀과 보리를 거둬 주었다.
동청포 일대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진위천의 민물과 만나는 지점이어서 어패류가 풍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여·붕어·메기·뱀장어·바다새우·민물참게가 많이 잡혔다 하고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따르면 백화염 1항아리마다 1냥, 석화염 1항아리마다 1냥 5전을 1884년(고종 21)에 해방영에서 거둬갔고, 배 1척마다 2냥을 선세로 수북면의 서상돈이 거둬갔다고 기한다.
13. 서탄면 황구지리의 항곶포,
『진위현읍지』에는 황구포黃口浦라고 했고 ‘예전에는 항곶포項串浦라고 했으며, 현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수원 경계로 통한다’라고 기록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항곶진(항곶포)’으로부터 비롯됐다. 진위천과 합류하는 황구지천의 본류는 수원 광교산에서 발원한다.
그러다가 수원 시내를 관통하면서 유천과 합류하고, 다시 대황교에서 원천과 합류해 흐르다가 서탄면 내천리에서 내천이 되고, 항곶포가 있는 황구지리 부근에서 황구지천(항곶천)이 돼 진위천(장호천)과 합류한다’고 해 본래 항곶포였지만 19세기 후반에 황구포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곶포는 화성시 양감면의 장안나루와 연결됐다. 1970년 전후까지만 해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학생들이 배를 타고 건너다녔고, 서정리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도 이 나루를 이용했다.
항곶포는 바닷물이 역류하는 최상류의 포구다. 다른 이름으로는 항곶진·황구포라고 불렀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아산만·남양만에서 밀려들던 바닷물은 안성천·진위천·발안천 수로를 따라 항곶포와 서탄면 회화리까지 올라갔다. 이곳은 좌동 숯고개에서 갈라져 사거리, 금각리를 거쳐 온 육로교통의 한 갈래와 신장동 구장터와 K-55오산공군기지 안에 있었던 장등리·신야리를 거쳐 온 다른 갈래 길이 만나는 요지였고, 평택에서 화성시 양감면으로 건너가는 수로교통의 중심이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수원도호부에서 내려오는 군대의 이동통로였다.
항곶포 일대가 교통의 요지이고 하천부지가 넓다 보니 일찍부터 간척과 포구상업이 활발했다. 교통과 상업의 발달로 나루터에는 둑너머라는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낮은 구릉지대에는 황구지리가 만들어졌다. 황구지리 전 노인회장 황영승(2006년·76세)씨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옹진군의 용유도나 아산만의 길음리·당거리 어부들이 강다리·숭어 같은 생선과 새우젓·어리굴젓·민어포를 배에다 싣고 들어와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고 말했다.
어염魚鹽의 물물교환은 외상거래가 많았다. 어부들은 보리이삭이 팰 때나 늦가을 김장철에 우선 생선이나 젓갈을 퍼주고는 초여름이나 가을 추수 때 쌀로 받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항곶포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화성시 양감면 사람들이었다. 양감 사람들은 초등학교도 서탄면 금각초등학교를 다녔고, 시장은 중앙시장이나 서정리장, 심지어 해방 전후에는 야학이나 강습소까지 항곶포로 건너다녔다. 아쉬운 쪽이 양감사람이다 보니 나룻배도 양감사람, 뱃사공도 양감사람이 운영했다.(양감면 용소리 정문리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황구지로 이전한 홍참봉(융건릉 참봉)이 나루를 내고 운영도 했다고 한다)양감면지
14. 진위면 갈곶리의 갈곶포,
15. 청북면 토진리의 토진土津나루
청북면 토진1리에 있었다. 톷나루·텃나루·선살미나루라고 했다. 반대편의 고덕면 동청리 동청나루와 연결됐으며, 현덕면의 신흥포나 계두진에서 수원을 거쳐 한양을 오가는 소로와 공수다리가 나루 옆에 있었다. 조선 말기 기록에 토진은 현곡리의 신포와 함께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 영역이었으며, 경우궁에서 포세浦稅, 선세船稅를 받아갔다.
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토진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구릉 건너편 토진1리 주민 김학목의 가족묘 자리에 있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골이 형성돼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근대교통로가 새로이 형성되면서 쇠퇴했다.
16.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
청북면 삼계리에 있다. 19세기 전반에 작성된 청구도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독개"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고려 때 감미부곡이 있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땅이어서 양성현의 해창으로 "양성독개"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벼 2백 섬을 싣는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 갈 정도로 큰 나루였고, 일제말에는 강제공출된 곡식들이 이곳으로 반출되었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는 이곳의 거래품목이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민어 등 생선과 미역, 대합, 김 등 해산물 그리고 쌀, 소금, 소가죽, 백목, 생대합 등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포구주인(객주나 여각)들에게 조세를 걷은 것으로 봐서 상업도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만의 갯벌』,
나루터는 1970년대 남양만 방조제 건설 후 간척되었다
양성현 해창이었던 독개나루
독개나루(甕浦)는 청북면 삼계리에 있는 포구였다. 남양만에서부터 고잔리를 거쳐 들어온 바닷물은 독개를 지나 신포와 광승까지 들어갔다. 밀물이 들어올 때면 한층 높아진 수위를 타고 배가 들어왔다. 썰물에도 갯골을 따라 작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배들은 조운선이나 상선도 있었고 어선들도 있었다. 독개나루의 가장 큰 손님은 한양의 경강상인이었다. 한강을 무대로 자본을 축적하였던 경강상인들은 조선후기에는 서남해안을 주름잡으며 세곡운송과 포구상업을 주도하였다.
독개나루(甕浦)는 청북면 삼계리에 있는 포구였다. 남양만에서부터 고잔리를 거쳐 들어온 바닷물은 독개를 지나 신포와 광승까지 들어갔다. 밀물이 들어올 때면 한층 높아진 수위를 타고 배가 들어왔다. 썰물에도 갯골을 따라 작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배들은 조운선이나 상선도 있었고 어선들도 있었다. 독개나루의 가장 큰 손님은 한양의 경강상인이었다. 한강을 무대로 자본을 축적하였던 경강상인들은 조선후기에는 서남해안을 주름잡으며 세곡운송과 포구상업을 주도하였다.
바다와 100여리나 떨어져 있는데다 조운선이 드나들만한 하천을 확보하지 못했던 양성현의 가장 큰 문제는 세곡의 운송과 어염 확보였다. 조선왕조는 양성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진위와 수원고을의 경계 안에 땅을 나눠 주었다. 이런 땅을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또는 월경지(越境地)라고 하였다. 근대이전 독개나루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그래서 양성독개로도 불렀다. 1899년에 작성된 양성군지에 따르면 양성현에는 4개의 해창이 있었는데 모두 감미동 다시 말해서 삼계리 옹포와 현곡리 신포 일대에 있었다.
김정호의 청구도에 독개나루는 ‘저포(苧浦)’라고 기록되었다. 저포(苧浦)에서 저(苧)는 모시를 의미한다. 충청도 서남부의 저산팔읍(苧産八邑)과 같은 지명도 모시생산과 관련 있다.
옹포가 저포로 불렸다면 청구도가 작성된 1834년 경 청북면 일대에서는 모시가 생산되었고 이것이 독개나루를 통해서 반출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저포(苧浦)가 옹포(瓮浦=독개나루)로 바뀐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저간의 사정으로 볼 때 대략 19세기 후반으로 판단될 뿐이다. 옹포 다시 말해서 독개는 항아리를 거래하던 포구다. 근대전후만 해도 항아리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상품가치가 높은 항아리배가 독개를 드나들었다면 옹포의 포구상업은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다.
19세기 말에 작성된 <수원부선세혁파성책>이라는 문헌에는 독개나루의 거래품목이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민어 등 생선과 미역, 대합, 김 등 해산물 그리고 쌀, 소금, 소가죽, 백목, 생대합이라고 기록하였다. 쌀과 소금이 가장 큰 상품이었겠지만 남양만에서 잡히는 어물과 생선도 주요 품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어세(漁稅)나 선세(船稅)는 특별세에 해당하였다.
독개나루의 어세, 선세는 경우궁(景祐宮. 순조의 모친 수빈 박씨의 사당)에서 징수하였다. 경우궁은 선세 뿐 아니라 독개(삼계리), 신포(현국리), 톳나루(토진리) 일대의 객주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1896년 궁내부대신 이재순이 양성군수에게 보낸 훈령에 옹포의 경우궁 소관 포구에서 내부 훈령을 빙자하여 객주를 설치한 신순필을 엄벌하고, 경우궁 주인 최진우로 하여금 착실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 같은 사실 때문이었다.
일제 말에는 공출미 실어 내가기도
조창(漕倉)은 삼덕초등학교와 원삼계 뱃터마을, 옹포 등에 있었다. 조창 앞으로는 갯골이 형성되었고 접안시설이 되어 있어 쉽게 배를 댈 수 있었다. 지금도 원삼계 마을 버스정류장 건너편에는 일제강점기 조창 터에 건축한 옛 창고가 남아 있다.
창고 옆에는 주막집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조창에 수납한 조세는 포면세와 대동미, 환곡미, 호조와 상진청, 균역청, 영진, 고마청, 순아병의 세곡이었다. 세곡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 콩, 팥, 밀 등을 거뒀는데, 늦가을에 거둬들여 저장하였다가 이듬해 해동(解冬)이 되면 조운선을 이용하여 한양의 경창까지 운송하였다.
조선시대의 조세운송은 관선(官船) 조운체계였다. 국가에서는 전국의 대 조창에 해운판관, 수운판관과 같은 관원을 파견하여 세곡의 관리와 운송을 책임지게 하였다. 옹포처럼 경기도에 속한 작은 해창은 해당 고을의 수령이 관리하였다. 본래 청북농협 앞에 있었다가 지금은 청북면사무소 마당에 세워져 있는 현감 이용익의 선정비는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양성고을의 수령은 현곡리, 삼계리 일대의 주민들을 차출하여 세곡을 운송할 조군(漕軍)을 확보하였다. 이들은 500~600석 규모의 조운선에 14~17명씩 승선하여 선장 격인 사공과 조군의 우두머리인 무상조군과 격조군의 지휘를 받았다.
조창(漕倉)은 삼덕초등학교와 원삼계 뱃터마을, 옹포 등에 있었다. 조창 앞으로는 갯골이 형성되었고 접안시설이 되어 있어 쉽게 배를 댈 수 있었다. 지금도 원삼계 마을 버스정류장 건너편에는 일제강점기 조창 터에 건축한 옛 창고가 남아 있다. 창고 옆에는 주막집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조창에 수납한 조세는 포면세와 대동미, 환곡미, 호조와 상진청, 균역청, 영진, 고마청, 순아병의 세곡이었다. 세곡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 콩, 팥, 밀 등을 거뒀는데, 늦가을에 거둬들여 저장하였다가 이듬해 해동(解冬)이 되면 조운선을 이용하여 한양의 경창까지 운송하였다. 조선시대의 조세운송은 관선(官船) 조운체계였다. 국가에서는 전국의 대 조창에 해운판관, 수운판관과 같은 관원을 파견하여 세곡의 관리와 운송을 책임지게 하였다. 옹포처럼 경기도에 속한 작은 해창은 해당 고을의 수령이 관리하였다. 본래 청북농협 앞에 있었다가 지금은 청북면사무소 마당에 세워져 있는 현감 이용익의 선정비는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양성고을의 수령은 현곡리, 삼계리 일대의 주민들을 차출하여 세곡을 운송할 조군(漕軍)을 확보하였다. 이들은 500~600석 규모의 조운선에 14~17명씩 승선하여 선장 격인 사공과 조군의 우두머리인 무상조군과 격조군의 지휘를 받았다.
세곡운송에는 반드시 관선(官船)만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관선은 훈련되지 않은 백성들이 조군으로 승선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고의 위험이 많았다. 일례로 15세기 초 전라도에서 출발하여 경창(京倉)으로 향하던 조운선 66척이 태안반도의 거센 해류와 풍랑을 견디지 못하고 난파되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어려움 때문에 조정에서는 항해경험이 풍부한 경강상인들에게 조운(漕運)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경강상인은 삼남지방의 미곡운송 뿐 아니라 나루나 포구에서의 상업활동을 주도하였다. 신포에 장시(場市)가 열린 것도 안중장에서 발안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옹포의 포구상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포구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옹포에는 객주와 여각이 들어섰다. 객주와 여각은 옹포 외에도 39번국도가 지났던 신포(新浦)에도 있었다.
일제 말에는 강제공출미도 옹포를 통하여 반출되었다. 일제는 조창이 있었던 삼덕초등학교 터와 현재의 창고자리에 커다란 곡물창고를 지어 놓고 농민들로부터 곡물과 잡곡을 착취하였다.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던 공출미는 인천으로부터 벼 2백 섬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들이 들어와 싣고 갔다고 한다.
조운선과 상선들로 북적이던 옹포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빛을 잃어갔다. 더구나 일제 말에는 신포에서 원삼계 앞에 이르는 간석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좌판이라는 일본인이 간척하면서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몇 년 전까지 바다와 포구에 기대어 먹고 살던 주민들은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동척농장의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신포 장터 앞에는 마음에도 없는 좌판(佐坂, 사사카)의 공덕비까지 세워줘야 하였다.
해방 후에는 삼계리와 옥길리 사이에 쌓았던 장둑 아래까지 간척이 되면서 옹포는 지명만 남겨두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옛 수도사 자리에 있었던 석조 승탑만이 지금의 수도사로 옮겨져 수도사가 조선시대까지는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수도사가 원효의 오도성지라는 사실을 굳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리 순탄해 보이지가 않다.
17. 현곡리의 신포,
신포는 옹포가 간척이 된 후 새로 개설한 포구이다.
18. 포승읍 홍원리의 자오포, 호구포
조선시대 홍원목장의 말과 소를 운송했던 곳이며, 화성시 장안면 장안포와 연결됐던 나루다. 청북면이나 포승읍, 안중읍의 주민들은 발안장을 보거나 수원을 다녀올 때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배를 타고 장안포에서 내렸으며, 화성시 장안면 사람들도 자오포를 통해 안중장을 오갔다.
홍원목장은 홍원리와 포승면 원정리, 도곡리 등 5곳에 걸쳐 있었으며 초기에는 말을 사육하다가 후기에는 소도 길렀다. 목장의 말은 제주도에서 어린말을 들여와 사육한 뒤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실어냈다.
20. 신영리의 신전포,
새바탱이 간석지에 있던 포구로 평택항 건설로 사라졌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반하던 곳이고 1990년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21. 원정리의 한나루,
22. 현덕면 장수리의 석화진
23. 팽성읍 노양리의 경양포
팽성읍 노양리의 계양마을과 노산마을은 고려시대 편섭포로 조창이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 “고려시대 이곳은 경양폐현이며 하양창이 있었다. 경양현의 수령은 염(鹽)장관을 겸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 “경양폐현 : 고려 때 아주의 하양창이었다가 경양현이 되었다, 뒤에 영(令)을 두고 염(鹽)장관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하양창은 고려시대의 전국 13조창 중하나이며 경기남부와 충청북부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건국 후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경기지역의 세곡에 대한 직접운송이 실시되면서 대 대조창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운송을 담당하는 해창으로 기능하였다.
하양창은 현재 팽성읍 노양리로서 고려시대에는 타이포 또는 편섭포라고 불렀다. 이곳에 조창이 설치된 것은 10세기 초 전국 12조창이 설치되면서다. 고려사를 보면 이곳에는 한척에 1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있었다. 평택시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에는 하양창 외에도 무한천변의 장포(長浦, 아산시 선장면 장곶리)에도 당성창이 있어서 내포지방의 세곡은 이곳에서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경기남부와 충청북부 일부지역의 세곡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이곳의 세곡을 관리하고 운송하기 위해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을 배속하였고, 운송책임은 세곡의 징수와 관리를 책임졌던 향리와 조창이 있던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뱃사공, 소공, 수수와 같은 조군(漕軍)들이 맡았다. 이와 같은 중요성으로 고려는 이곳을 경양현으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감독케 함과 동시에 아산만 연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관장하는 염(鹽)장관을 겸하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직산현 조
. 하지만 하양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삼남의 해운이 끊기고 세곡운송이 육운으로 대체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된 후 안성천 이북지역이 경기도에 편입되고, 인근 아산의 공세리에 공세곶창(공진창)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24. 합정동 통미 남창(南倉)
25.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 大津
대진(大津)은 포승면 만호리의 옛 지명으로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해안 포구였다. 만호리는 ‘느지’ 또는 ‘느새’라는 자연지명이 있는 곳으로 천연적인 항구의 입지조건을 보유한 곳이었다. 신증여지승람 수원부 조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하였다. 포내미는 포승지역에 있었던 고려시대 지명(포내미 부곡)이다. 통상 대진(大津)이라고 기록되었지만 다른 기록에는 한진, 또는 대포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나루 부근은 바닷물의 흐름이 사나웠지만 바다 쪽으로 열려있어서 일제강점기에는 당진이나 서산 사람들이 이곳으로 드나들었으며, 안중장에서 소를 사서 대규모 선단을 이루고 떠났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 후 대외무역항으로의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가 2000년대를 전후하여 평택항이 건설되면서 또 다시 국제무역항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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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5곳이나 되는군요.
하루에 2곳씩 자료조사한다고 해도 적어도 열번의 현지 답사가 필요한데....
우리 박경순작가와 함께 시간 마추고 우쩌고 하면 몇달 조이 걸릴것 같으구먼유....
훌륭하십니다~
단지 많은 포구들을 평택의 남단 '대진'부터이든 평택 북단의 '마산리포구'부터이든 지리적으로 정렬하여 지도로 표시되면 옛물길의 시각적으로 개념 파악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혹시 대진을 시작으로 옹포쪽 갈래와 진위천 황구지천쪽 갈래, 안성천쪽 갈래로 나누는 건 의미가 있을까요?
지도는 실지도에는 가능한데.... 다이아 그램은 내실력으로 불가능하고
갈래를 나누는것은 당연한일 아니겠오.
섶길코스 지도같이 다음 카카오 맵은 가능하지 않나요?
아~
이미 그렇게 올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