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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장 4-5절
빛을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은 나머지 세 복음서보다 좀 더 근원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세 복음서가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요한복음의 경우는 사건과 더불어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나머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경우 요한복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보다 요한복음이 더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자는 다르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상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권위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저자라는 사실 때문에 동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건만 기록했다고 해서 사건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기록자를 통하여 기록하게 하실 때 아무런 의미 없이 기록하게 하셨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건만 기록하였다 할지라도 기록한 목적과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설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른 복음서보다 요한복음이 더 낫다, 요한복음의 권위가 더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시는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인 겁니다. 그 한 부분을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 사실로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는 지난 시간 요한복음 맨 첫 부분을 살폈는데, 요한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불리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언제부터 계셨는가? 태초부터 계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때 태초란 시간과 공간이 시작한 시점, 다시 말해 창조되는 시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단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에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계시지만 그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설명하자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구별되신 분으로 계시지만, 그분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분이 성부 하나님이신 것은 아닙니다. 성부와 구별되는 성자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겁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란 사실을 그의 창조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즉 모든 만물이 그가 없이는 지어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만큼 능력과 지혜가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실 만큼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면 그 일을 어떻게 이루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4절로 오시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할 때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천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신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만물에 대하여 생명을 부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 없이는 어떤 것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히브리서 1장에 표현되는데, 지난주 본문과 함께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1절 이하를 보시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요한복음이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처럼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2a). 그리고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2b). 이것은 창조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리고 설명하는 것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말합니다(3a).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로 계시다는 것을 말하는데, 요한복음 1장 1절의 내용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3b) 지금 사도 요한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할 때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분 없이는 어떤 만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만드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유지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때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지금도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시며 유지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17:28) 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라는 도시에 가서 전도할 때 말한 내용인데,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우상, 저런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 즉 어떤 생명도 하나님 없이 살며 기동하는 존재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바울이 증거 하면서 당시 유명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는데, 이 사람은 믿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인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할 때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이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기동하며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의 경우 하나님을 염두 해 두고 있지 않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을 내가 알게 하겠다고 하면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란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분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생명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그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인하는 것 자체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다시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생명이 사람들이 빛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생명으로 붙드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요한이 4절에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때는 모든 식물의 생명, 모든 동물의 생명이 그분에게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기보다는 특별히 인간과 관련된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 비하여 인간은 좀 더 구별된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은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라 이성의 빛과 연합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깨우쳐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을 공급받는 존재이며, 그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며 사는 자들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그 사실을 아담 안에서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말씀을 어기게 되었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생명의 빛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자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가 된 것입니다. 구원의 빛이 비춰지지 않는 이상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더 엄밀히 말해 타락하기 전 하나님은 택자와 유기자를 구별하셨고, 택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의 빛 없이는 그 누구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타락조차 뜻하셨지만, 타락만 뜻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까지 다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4절 말씀은 5절 말씀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라고 말하는 전제를 가지고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인류는 어둠이라는 것이고, 그 어둠을 비추기 위한 빛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이 생명은 어둠을 전제로 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한번 부여 받은 육신과 관련된 생명이 아니라 한번의 죽음을 전제로 한 생명입니다. 때문에 이 생명은 중생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중생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생명입니다. 바로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태는 어떠한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러분, 여기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는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은 사라집니다. 깜깜한 밤에 불도 켜 있지 않는 방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어둡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불을 켜게 되면 빛으로 인해 어둠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지만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빛이 어둠을 물리칠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능히 어둠을 물리칠 힘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만물을 유지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없겠습니까? 창세기 1장에 보시면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만큼 어둠이 어둠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가 할 때 빛이 어둠에 비치면 깨달아야 정상인데, 빛이 비치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히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전적인 타락이라고 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시면 인간의 타락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8-23)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그 빛 이전에는 아무런 빛이 없었는가 할 때 로마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그들 속에 보이셨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20절은 설명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찾아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2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23절처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28절로 가시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이전에도 소위 일반계시라는 측면에서 빛을 비추셨지만, 그래서 로마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하셨고 그런 측면에서 핑계할 수 없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9절부터 보시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9-18)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철저히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본래는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죄의 종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할 때 의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나마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묻지만 성경은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의인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가 그렇고, 욥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때 의인이라는 말은 그들 스스로가 의인이라서 의인이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은 자 되었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칭해지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라고 할 때 부분적으로는 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조차 부인합니다. 이미 방금 읽은 말씀에서조차 어떻게 말하느냐?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선과 상관없는 자, 그들이 바로 죄의 종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모르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빛이 왔지만 그 빛에 대하여 어둠이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철저한 어둠, 빛에 대해서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의 어둠이 바로 죄의 종인 것입니다. 당연히 죄의 종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지만,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 믿으라고 하면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라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죄인이냐?”고 따지고 물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이 가는 길은 파멸과 고생의 길이지 결코 평강의 길이 아닙니다. 평강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제공되고 있지만 그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의 모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를 죽었다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어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것이 있는가? 그들이 활동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 그들이 바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입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느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빛이신 성자 하나님을 인간의 몸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시도록까지 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정도의 빛이 아니라 더욱 뚜렷한 빛을 비추셨습니다. 일반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로서의 말씀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보이도록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한 어둠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요한이 5절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어둠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말씀이라 칭하는 성자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셔서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은 어둠이지만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것이고, 저들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저들 가운데 자기 백성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요한복음 1장 9절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되기도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9-13) 여기서도 보면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창조주로서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런 분이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영접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접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냐? 결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들만이 영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무엇이 거절됩니까? 혈통이 거절됩니다. 육정이 거절 됩니다. 사람의 뜻이 거절됩니다. 어떤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혈통으로 가능하다, 육정으로 가능하다,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부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란 겁니다. 달리 말하면 구원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물과 성령으로 난 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이것을 3절에서는 거듭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금 태어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위로부터 난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 그리고 이 떡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사람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로 있을 뿐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뭔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 오셔서 말씀하신 것이고, 말씀하셔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살려 내신 것입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친히 오신 것은 아니지만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말씀을 통하여 죽은 영혼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살려 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도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출발뿐만 아니라 과정도 마찬가지고,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의 일하심의 결과가 구원으로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분의 신성을 먼저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죄로 인하여 죽은 자를 살려내실 수 있다.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면 깨달아야 하지만, 깨닫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어둠인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했다,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인간 스스로 구원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타락에서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란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지만, 이미 구약에서부터 역사하셨던 성령의 역사하심, 또한 성령과 분리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구원의 모든 것을 하나님 홀로 행하셨기 때문에 철저히 그분에게만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구원의 시작만이 아니라 앞서 구원의 과정, 결과도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 그분께만 감사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