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2024) 개봉한 홍콩 영화 《구룡성채 九龍城寨》는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여 과거 속으로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사라진 구룡성채를 기억하는 어떤 이에게는 낭만과 추억을 소환하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에게는 과거를 더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九龍城寨는 엄연한 홍콩정부의 관할이지만 정부의 행정과 치안이 미치지 않았던 구역이며,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과 그 사이를 잇는 미로 속에서 도박과 매춘과 마약 같은 온갖 불법이 성행하던 곳이다. 우범지역이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구룡성채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한 동네였으며 그 곳 주민들은 서로 정을 붙이고 의지하며 공동체적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청포좌이(鄭保瑞) 감독은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를 재현하려는 듯 홍콩의 상징적 범죄구역이었던 九龍城寨를 배경으로 하여 고천락, 홍금보, 곽부성 같은 올드 스타들과 임봉, 유준겸, 오운룡 같은 신세대 배우들을 출연시켜 레토르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는 구룡성채 암흑세계의 관할권을 두고 두 세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지만 실재했던 도시의 전설이 영화의 서사 일부 받쳐주면서 조직 폭력배들의 살기등등한 칼부림을 넘어 1980년대 거기서 살았던 도시 빈민들의 열악하지만 반짝이는 삶을 역사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다.
九龍城寨(Kowloon Walled City 현지 광동어로는 까우롱생짜이)는 까우롱 북쪽 사자산(獅子山 Lion Rock) 자락에서 해안을 내려다보는 언덕배기에 세워진 청나라의 군사 요새였으나 1912년 이후 청(淸)이 실질적으로 성채의 관할권을 포기하면서 무법지대가 된다.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淸)은 1842년 난징조약에 따라 홍콩섬을 영국에 영구 할양하였고, 2차 아편전쟁 패배와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의해 영국의 점령지는 빅토리아항을 건너 지금의 구룡반도까지 확대된다. 이 때 구룡지역에는 Boundary Street(界限街) 라는 경계선이 그어지고, 그 남쪽은 영국이 지배하고 북쪽지역은 여전히 중국이 다스렸다. 구룡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바운더리 스트리트(界限街)의 서쪽은 삼수이포(深水埗) 앞바다의 스톤커더섬(Stonecutter Island)에서 시작하여 프린스 에드워드 로드(Prince Edward Road)를 지나 동쪽 해안가 끝은 구룡성채(九龍城寨) 앞까지 이어졌다. 영국이 점령지를 재차 확대하여 1898년 바운더리 스트리트 위쪽의 신계지역(新界 New Territory)을 100년간 조차하자 청나라 관리책임자는 성채를 버려둔 채 떠나고 이 때부터 九龍城寨의 흑역사가 시작된다.
청(淸)이 멸망한 이후 새로 건국한 중국 국민당 정부는 영국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구룡성채의 관할권을 주장하였고 양국간의 외교적 분쟁지역이 되어 버리자 영국과 홍콩총독정부은 그 지역에 대한 실질적 관리를 하지 못하고 행정 및 치안이 수수방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1년 12월 25일 페닌슐라 호텔에서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홍콩은 일제 치하에 놓이게 되고, 일본은 九龍城寨 근처에 있던 간이공항 수준의 카이탁 공항(Kai Tak Airport)을 확장하기 위해 성채의 외벽을 헐어서 매립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가 패망하면서 본토에서 밀려 내려온 난민이 급증하고, 이들이 까우롱생짜이(九龍城寨)로 이주하여 주민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범죄의 소굴로 변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 초 1,000명에 불과했던 거주민은 1960년대에는 1만명 정도로 늘어나고, 70년대에는 3만여명이 넘었으며, 80년대 전성기에는 5만여명의 주민이 2만 6천 평방 미터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살았다.
다시 영화 《구룡성채 九龍城寨》로 돌아가 보자. 영화에서 주인공 찬록쿤(임봉 분)은 중국에서 홍콩으로 밀항한 난민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의 아버지 찬침(곽부성 분)은 암흑가의 실력자 중 하나였으며, 九龍城寨의 자치위원장이자 무술고수 사이클론(고천락 분)과는 막역한 친구이면서도 서로 반대파에 속해 있었다. 둘은 피할 수 없는 조직 간의 혈투에 뛰어들고 찬침은 친구의 칼에 숨진다. 불법 이민자인 찬록쿤은 홍콩 신분증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무슨 막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미스터 빅(홍금보 분)이 이끄는 범죄조직 삼합회에 속아 신분증도 얻지 못하고 돈도 돌려받지 못하자 물건을 훔쳐 달아난다. 삼합회 조직원들의 추격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던 찬록쿤이 다다른 곳은 사이클론이 지배하는 구룡성채였다. 사이클론은 죽은 친구의 아들을 받아들이고, 찬록쿤은 거기서 신이(유준겸 분), 십이소(호자동 분), AV(장문걸 분) 같은 암흑세계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찬록쿤은 九龍城寨에서 처음으로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낀다고 고백하는데 그 말은 이 범죄구역의 이중성을 잘 대변해준다. 외부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범죄 소굴이지만 오갈데 없는 난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안식처인 것이다. 그들은 또 이야기한다. 이 곳에서는 신분증이 필요 없다고.
내가 처음 九龍城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3년 5월 홍콩으로 주재 근무를 나오기 전에 읽었던 여행 가이드북을 통해서이다. 가이드북은 九龍城寨가 도박과 범죄 그리고 마약과 매춘이 일상적인 벌어지는 곳이라고 소개하면서 대낮에도 현지인 여행 가이드 없이 가서는 안 되며, 밤에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1998년 7월 첵랍콕 신공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카이탁 공항은 홍콩의 관문이었는데 입국장에서 육교를 통해 대로를 건너면 에어포트 리갈호텔이 있었고, 호텔에서 위쪽으로 삼백 미터쯤 올라가면 거기에 九龍城寨가 있었다. 내가 궁금증을 못 견디고 그 곳에 갔을 때는 벌써 九龍城寨가 철거되고 콘크리트 더미만 산처럼 쌓여 있었다. 구룡성채는 1993년 3월 경부터 성냥갑처럼 쌓아 올린 주상복합 건물들을 헐어내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는 철거작업을 거의 완료하였다.
그 뒤로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정보 검색이 쉬워지면서 九龍城寨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니는 킹 조지 파이브 스쿨(King George V School)근처의 까우롱통(Kowloon Tong)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다시한번 구룡성채를 찾게 되었다. 2000년대 초라고 기억되는데, 구룡성채가 있던 지역은 푸른 잔디와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로 가득 찬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청나라 양식으로 복원된 정자들(邀山樓, 魁星半亭)과 연못들이 눈에 들어왔고 기와 올린 건물들을 이어주는 회랑도 고풍스러운 정원(廣蔭庭, 童樂苑)과 잘 조화되어 아주 예스러운 공원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무질서하게 올라간 아파트 성채는 사라졌지만 대신 오래전 九龍城寨의 청나라 관청을 보여주는 아문(衙府/衙門)이 남아 있어서 세월의 향수를 느끼게 했다. 특별히 공원 한 가운데 있는 아문(衙府)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나라의 옛 건물로 1847년에 지어졌으며 성채를 관할하던 군사관리자가 공무를 보던 공간이었다.
좁은 면적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무허가 건물들을 성냥갑처럼 쌓아 올린 아주 기형적인 모습의 九龍城寨는 이제 옛 기록영화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다. 가로 213미터 세로 122미터에 높이 15층 정도의 직사각형 고층 성채는 사실 350여개의 서로 다른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만들어낸 거대한 빈민굴이었다. 26,000평방미터의 공간에는 폭이 1~2미터에 불과한 수십 개의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으며 사람들은 땅을 밟지 않고도 건물의 이, 삼층 공간에 만들어진 계단과 복도를 통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아파트 한 채의 크기는 아주 작아서 대략 20~30 평방미터였으며 상하수도 같은 공공시설은 없었다. 물은 항상 부족하여 수차로 물을 공급받거나 성채 바깥에서 물을 받아왔다고 한다. 건물의 지붕들은 전기줄과 텔레비전 안테나, 물탱크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건물 옥상은 위층에 사는 주민들에게 휴식 장소였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난 후 그곳에서 놀거나 숙제를 했다고 한다. 한 때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던 구룡성채는 엄청난 거주 인구로 인해 그 좁은 땅 안에는 수백개의 크고 작은 식당들이 있었고, 과일가게, 생활용품점, 문방구, 미용실, 철물점 같은 상점과 무허가 의원과 치과 등이 건물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랫동안 구룡성채로 알려져 왔고, 현지 주민들도 까우롱생짜이(九龍城寨)로 불러왔으나 성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구룡채성(九龍寨城)이라고 쓰인 현판이 발견되면서 현재는 두 가지 모두 혼용해서 쓰기도 한다. 성채(城寨)나 채성(寨城)이나 모두 목책을 두른 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작은 규모의 요새를 가리키는 말이니 구룡채성(九龍寨城)의 현판이 나왔다고 해도 이전부터 불러오던 대로 구룡성채라고 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갔고 기억의 수단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구룡성채가 현재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구룡성채는 어떤 이에게 호기심의 장소로, 또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삶을 추억하는 장소로, 또 어떤 이에게는 빈민굴의 형성과 사회적 의미를 고민하게 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에게는 더럽고 위험한 무법천지였던 구룡성채가 그곳 주민들과 영화의 찬록쿤처럼 오갈데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처였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