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왕 계 / 이헌표 前 주미한국문화원장
7세기 말 한여름, 신라 수도 서라벌의 궁궐. 누각에 임금과 신하가 앉아 있다. 왕은 맛있는 음식과 감동적인 음악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고상한 이야기와 유익한 해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신하는 임금의 도리를 꽃에 비유하여 간언(諫言)한다. 흔히 ‘화왕계(花王戒)’로 불리는 우화를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꽃 중의 왕, 모란꽃이 향기로운 정원에서
봄을 맞아 유달리 예쁜 꽃을 피우니,
모든 꽃들이 앞다퉈 알현하려 왔답니다.
붉은 얼굴에, 이가 백옥 같은 하얀 꽃이
곱게 단장하고 얌전히 다가와,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은 장미예요.
임금님을 침소에서 모시려고 왔습니다.
이어 지팡이 짚은 백발의 할미꽃이 다가와,
기름진 고기, 맛있는 음식으로 배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하더라도
원기 돕는 약과 독을 뽑을 침이 필요합니다.
할미꽃이 장미에 반한 모란꽃에 아뢰기를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한 임금은 많으나,
정직한 자를 곁에 두었던 임금은 드뭅니다.
옛날부터 그랬으니 전들 어찌하겠습니까?
고상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임금은 신문왕(재위 681~692)이었고, 꽃에 빗대어 충신을 가까이 하고 간신을 멀리 하도록 왕에게 간언을 한 인물은 설총이었다. 신문왕은 역모를 꾀한 왕비의 부친을 처형했지만, 부인은 폐위시켜 궁에서 내쫓았지 죽이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즉위 2년 만에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이후 울적한 마음으로 설총과 마주 앉았던 그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그대의 우화는 실로 깊은 뜻이 있구려. 부디 내게 들려 준 얘기를 글로 써서 임금이 된 자들의 경계로 삼게 하시오!”
설총은 곧 높은 관직에 중용됐으며, 후일 신라의 10대 현인(賢人)이자 강수·최치원과 더불어 3대 문장가로 추앙을 받게 됐다.
이헌표 前 주미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