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우스개_‘ 와그(래)너 _#2’ 배은 망덕 유대계 독일인 마이어베어(Myerbeer,1791~1864)의 소개장으로 파리에 오게 된 바그너는 그의 이름의 프랑스어 발음인 「바네(열심히 번다)」가 뜻하는 바와 같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정말로 열심히 일했으나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살았다. 돈이 들어오는 곳은 파리에 있는 이복형 아베나리우스, 독일에 있는 다소 유복한 친척, 라이프치히의 상인, 민나의 무대의상을 저당 잡히거나 팔아 버리는 것, 그리고 바그너 자신이 비평의 붓을 들거나 하청 받은 편곡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리엔치(Rienzi)>>가 완성되기까지, 결국 그는 빚 때문에 몇 주간 옥에 갇히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리가에서 빚에 쫒겨 도앙 가던 중에 태풍을 만나 노르웨이 피오르드에 갇혀 있을 때의 수부의 노래에서 받은 감명에 북 유럽의 신화를 차용해서 오페라 <<방황하는 네델란드인>>을 1841년 7월과 8월 불과 7주간 만에 완성하였다. 파리 그랑오페라(Grand Opera)의 높은 벽에 막혀 오페라 <<리엔치>>의 상영의 길이 막히자, 마이어베어는 그와 친한 드레스덴궁정극장 지배인을 통해 <<리엔치>>의 드레스덴 상영이 결정되었고, 이 <<방랑하는 네델란인>>도 마이어베어의 도움으로 베를린 가극장에서 상연키로 결정되었다. 그는 파리 그랑오페라가에서 <<위그노>>와 <<예언자>> 등의 공연으로 부와 명성을 날리고 있는 마이어베어가 부러운 가운데 시기심으로 가득 찾다. 라인강을 넘어 독일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언젠가는 독일오페라가 파리 그랑오페라를 능가하는 날이 오도록 하겠다며,이빨을 뿌두둑 갈았다는 말이 전해 진다.
그런데 마이어베어한테 받은 실로 어마어마한 이 도움을 바그너는 무럿으로 갚았을까요?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 자기 출세를 위해 마이어베어를 매장하고, 힛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빌미를 마련한 것이다.
바그너가 죽은 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 페스트발을 계속하면서 바그너를 신격화 하는데 노력했다. 독일 민족정신을 강조하는데다가 군국주의 냄새가 심한 바그너의음악은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를 선전하는데 아주 꼭 맞는 작품들 이었다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드’도 코지마처럼 바이로이트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히틀러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히틀러가 특하 좋아했던 작품은 ‘니벨룽의 반지’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