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보고, 저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허무주의 종교이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를 들 수 있다.
기독교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는 이상세계로 가고자 한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이 세계를 부정 하는 종교는 모두 허무주의 종교라 볼 수 있다.
그런 범주에 대승불교도 예외 일 수 없다. 천상을 이야기 하고 극락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한 허무주의 종교, 염세주의 종교라는 오명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최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글을 보면 실망스럽다. 불교평론의 열린논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족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초기불교의 연기론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일깨움을 주었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하고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다고 비판 하고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늘 말하는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은 결국 ‘허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두 분의 부처님이 계신데
그런데 글의 중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머묾 없이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각종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는 결국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인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언급 하고 있다. 무상 고 무아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각종 상(相)을 버리고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부처님은 어느 부처님일까.
부처님은 한 분인데 경전상으로 보면 두 분이다.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한 분의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를 설하였지만 허망한 논리라고 반박 받는 역사적 부처님인 ‘고따마 붓다’이고, 또 한 분의 부처님은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고 말한 ‘대승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이다.
역사적 부처님과 경전상의 부처님, 이렇게 한국불교에는 두분의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부처님의 무상 고 무아의 논리가 허망 하다는 것이다. 허망 하다는 것은 허무한 것이고, 염세적이라는 말과 같다. 졸지에 역사적 부처님인 고따마 붓다가 ‘허무주의자’ 내지는 ‘염세주의자’로 몰리는 순간이다.
말씀에 공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혹 연꽃님께서 만드신 각종 도표를 일목요연하게 순서에 따라서 한 권의 책이나 참고자료로 만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비담마 교리체계에 따라서 초심자가 공부할 때 순서에 따라서 도표만 읽어가도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물론 제가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해서 실수하여 순서가 뒤바뀐다면 큰 실례가 될 것입니다. 몇 개 분단을 나누어서 도표에 간략한 설명을 붙여주신다면 우리 불자들이 초기불교를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대승의 쓸데없는 교리를 타파하여 고민없이 정법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날 그날 떠 오르는 생각을 정리 한 것이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또 체계화 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미 다 나와 있는 경전이 있고, 그 것을 체계화한 아비담마, 청정도론이 있는데 무의미 한 것 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사서 보는 것 입니다.
글을 쓰면서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없을까 해서 표를 만들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 과정이라 생각 합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고마운신 내용 입니다.
글을 쓰면서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없을까 해서 표를 만들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 과정이라 생각 합니다.
답글| 그러나 만상이 다 허무하다, 모든 것을 다 버려라 라고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은 대상은 출가자에게 한정된 것입니다.
재가자의 스승되는 출가자에게는 이 존재의 실상이 무상함을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 속에 부처님께서는 재가자에게 선행과 보시와 자비심의 공덕만을 가르치셨습니다.
오계를 지키고 봉사의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누린다, 욕심을 조금 줄이고 이 세상 모든 것에 이익되는 삶을 살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라 하는 것이지요.
재가자에게 주신 가르침에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끼여들 여지가 추호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살라 하셨습니까?
재가자는 갈애와 집착을 떠나 경건한 수행을 하는 출가자를 스승과 모범삼아서, 이 생에서 과한 욕심을 버리고 사는 것이, 개인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출가자의 수행을 보고 본받고 알고 사는 것이지요.
천주교 신부나 수녀 역시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묵상 기도만 하는 그들을 보고 허무하다면 안되는 것처럼,
세상의 스승이 되는 자는 경건하고 모범되어야 하기에, 개인적인 쾌락이나 소유 집착을 떠나,
재가자에게 무소유의 삶이 가치있다 욕심을 버리고도 이 세상을 보다 더 가치있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출가자들이 자기희생을 통해서 가르치는 그 위대한 수행을 염세적이라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일 뿐입니다.
불교를 모르거나 비방하고 싶은 타종교인들이나 대승인들이 엉뚱한 경전을 부처님 말씀인양하니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불교는 염세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소지는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상이 다 허무하다, 모든 것을 다 버려라 라고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은 대상은 출가자에게 한정된 것입니다. 재가자의 스승되는 출가자에게는 이 존재의 실상이 무상함을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 속에 부처님께서는 재가자에게 선행과 보시와 자비심의 공덕만을 가르치셨습니다. 오계를 지키고 봉사의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누린다, 욕심을 조금 줄이고 이 세상 모든 것에 이익되는 삶을 살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라 하는 것이지요. 재가자에게 주신 가르침에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끼여들 여지가 추호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살라 하셨습니까?
재가자는 갈애와 집착을 떠나 경건한 수행을 하는 출가자를 스승과 모범삼아서, 이 생에서 과한 욕심을 버리고 사는 것이, 개인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출가자의 수행을 보고 본받고 알고 사는 것이지요.
천주교 신부나 수녀 역시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묵상 기도만 하는 그들을 보고 허무하다면 안되는 것처럼, 세상의 스승이 되는 자는 경건하고 모범되어야 하기에, 개인적인 쾌락이나 소유 집착을 떠나, 재가자에게 무소유의 삶이 가치있다 욕심을 버리고도 이 세상을 보다 더 가치있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출가자들이 자기희생을 통해서 가르치는 그 위대한 수행을 염세적이라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일 뿐입니다.
불교를 모르거나 비방하고 싶은 타종교인들이나 대승인들이 엉뚱한 경전을 부처님 말씀인양하니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이야기에 머리가 숙여 집니다. 불교는 결코 염세적이거나 허무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초기 불교는 그런 사상을 원초적으로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세상과 저세상을 갈랐을 때 이 세상이 무의미 하고 무가치 하다고 느낄 때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저 세계가 따로 있다고 설한 적이 없다는 것 입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감사 합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이야기에 머리가 숙여 집니다. 불교는 결코 염세적이거나 허무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초기 불교는 그런 사상을 원초적으로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세상과 저세상을 갈랐을 때 이 세상이 무의미 하고 무가치 하다고 느낄 때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저 세계가 따로 있다고 설한 적이 없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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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카와 멧따
둑카와 멧따Y
2012.02.04 20:34
수정|삭제|기독교는 "저 세계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 이 궁극적 목표지만(각주) 불교는 그것조차도 열반에 들지 못한 중생의 삶이라고 간주해서 아예 모든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지 않습니까?(육도윤회도 저 세계는 저 세계죠.)
불교가 염세주의라고 오해받는 이유는 법구경 278번 게송의 유명한 구절 \'삽베상카라둑크(모든 상카라는 둑카다.)\' 를 한역불교권에서 一切皆苦(일체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각묵스님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죄송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거라 책에서 인용한 것보다 신뢰도는 낮습니다.) 사실 저 두 단어는 불교 교학에서 가장 중요한 빠알리 원어임에도 단일 번역어로 번역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단어들입니다. 이 점은 연꽃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이 상카라를, 의도적 행위, 인위적 작용, 인위적 형성, 업형성의 무더기, 심리현상, 하는마음(\'아는마음\'인 식과 비교해서), 조건지어진 현상(각묵스님), 형성(일아스님)으로, 둑카를 괴로움(기존번역). 마뜩잖음(불만족), 맞갖잖음(입맛에 맞지 않음), 꺼림함(마음에 걸려 언짢은 느낌이 있음),씁쓸함, 찜찜함, 켕김(각묵스님) 으로 번역해 보았지만 어느 번역어도 원어의 의미를 100% 전달하는 번역어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상카라는 \'업형성의 무더기\'가 둑카는 \'꺼림함\'이 가장 나은 것 같지만 이것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은 이 구절은 \'어떤 업을 지어도 꺼림하다.\'고 이해합니다.
참고로 각묵스님은 동 구절을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둑카다.\'라고 옮겼습니다. 각주 :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는 그게 아니라 이 세계에 하느님이 개입해 최후의 심판을 해서 세상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바르게 산 이는 영광을 얻기 위해, 거짓되게 산 이는 심판받기 위해 부활해서 세계의 부조리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나 2000년 세월이 지나도 종말이 오지 않아 현재 그 관점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곧 기독교의 원래 궁극적 목표는 \'죽음 이후의 삶\' 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며 원래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는 영혼구원이라기보다는 몸의 구원입니다. 편견없이 바이블을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바이블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죽을만큼 괴로운 병에서 회복되는 것(복음서의 입장)\'. \'적들에 둘러쌓여 있다가 구출되는 것(시편의 입장)\',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바울서신의 입장)\' 등 다양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공통적으로 구원이란 "짓눌린 상태에서 빠져나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병에 짓눌렸다 회복되고, 적국에 짓눌렸다 이기고, 죄에 짓눌렸다 의롭게 되고... 덤으로 기독교에서 \'영혼\'을 남발하는데 영혼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원래 \'숨결\', 네페쉬는 \'목숨\', \'생명\'을, 그리스어 프쉬케 역시 \'목숨\', \'가는 숨(바람)\' 프뉴마는 \'센바람\', \'거친 숨\'이라는 뜻입니다. 곧 \'영혼\'은 본래 호흡의 작용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의 영혼관에는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깊게 배어있습니다.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으로 출애굽기의 저 유명한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를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에고 에이미 호 온(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옮겼는데 사실 이 말의 뜻은 \'나는 ~되어갈 나다.\', \'나는 ~하는 나다.\' \'나는 있을 나다.\', \'나는 있는 나다.\' 등 다양하게 옮길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 어디에도 \'스스로\' 라는 뜻은 없습니다. 바이블은 하느님의 존재증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이블 갖고 신존재증명하려는 행태는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이블은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보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실천적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저 세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저 세계가 궁극적 목표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닐까요? 기독교는 "저 세계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 이 궁극적 목표지만(각주) 불교는 그것조차도 열반에 들지 못한 중생의 삶이라고 간주해서 아예 모든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지 않습니까?(육도윤회도 저 세계는 저 세계죠.)
불교가 염세주의라고 오해받는 이유는 법구경 278번 게송의 유명한 구절 '삽베상카라둑크(모든 상카라는 둑카다.)' 를 한역불교권에서 一切皆苦(일체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각묵스님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죄송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거라 책에서 인용한 것보다 신뢰도는 낮습니다.) 사실 저 두 단어는 불교 교학에서 가장 중요한 빠알리 원어임에도 단일 번역어로 번역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단어들입니다. 이 점은 연꽃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이 상카라를, 의도적 행위, 인위적 작용, 인위적 형성, 업형성의 무더기, 심리현상, 하는마음('아는마음'인 식과 비교해서), 조건지어진 현상(각묵스님), 형성(일아스님)으로, 둑카를 괴로움(기존번역). 마뜩잖음(불만족), 맞갖잖음(입맛에 맞지 않음), 꺼림함(마음에 걸려 언짢은 느낌이 있음),씁쓸함, 찜찜함, 켕김(각묵스님) 으로 번역해 보았지만 어느 번역어도 원어의 의미를 100% 전달하는 번역어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상카라는 '업형성의 무더기'가 둑카는 '꺼림함'이 가장 나은 것 같지만 이것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은 이 구절은 '어떤 업을 지어도 꺼림하다.'고 이해합니다.
참고로 각묵스님은 동 구절을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둑카다.'라고 옮겼습니다. 각주 :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는 그게 아니라 이 세계에 하느님이 개입해 최후의 심판을 해서 세상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바르게 산 이는 영광을 얻기 위해, 거짓되게 산 이는 심판받기 위해 부활해서 세계의 부조리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나 2000년 세월이 지나도 종말이 오지 않아 현재 그 관점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곧 기독교의 원래 궁극적 목표는 '죽음 이후의 삶' 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며 원래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는 영혼구원이라기보다는 몸의 구원입니다. 편견없이 바이블을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바이블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죽을만큼 괴로운 병에서 회복되는 것(복음서의 입장)'. '적들에 둘러쌓여 있다가 구출되는 것(시편의 입장)',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바울서신의 입장)' 등 다양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공통적으로 구원이란 "짓눌린 상태에서 빠져나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병에 짓눌렸다 회복되고, 적국에 짓눌렸다 이기고, 죄에 짓눌렸다 의롭게 되고... 덤으로 기독교에서 '영혼'을 남발하는데 영혼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원래 '숨결', 네페쉬는 '목숨', '생명'을, 그리스어 프쉬케 역시 '목숨', '가는 숨(바람)' 프뉴마는 '센바람', '거친 숨'이라는 뜻입니다. 곧 '영혼'은 본래 호흡의 작용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의 영혼관에는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깊게 배어있습니다.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으로 출애굽기의 저 유명한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를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에고 에이미 호 온(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옮겼는데 사실 이 말의 뜻은 '나는 ~되어갈 나다.', '나는 ~하는 나다.' '나는 있을 나다.', '나는 있는 나다.' 등 다양하게 옮길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 어디에도 '스스로' 라는 뜻은 없습니다. 바이블은 하느님의 존재증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이블 갖고 신존재증명하려는 행태는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이블은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보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실천적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나 카페가 있으면 소개부탁드립니다_()_',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둑카와 멧따님은 다방변으로 아주 많은 연구가 되신 학자시군요. 자주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블로그나 카페가 있으면 소개부탁드립니다_()_
학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일개 학부생일 따름입니다. 그저 다니는 학과가 종교와 관련된 학과다 보니까 군데군데 알음알이로 줏어들은 것을 풀어쓸 뿐입니다. 블로그나 까페는 없습니다. 대신 제가 가입한 까페 주소를 올려놓겠습니다. http://cafe.naver.com/bohd?20120205054552
둑카와 멧따님 참 멋진 분입니다. 좋은 글 원불사에 올려 공부하겠습니다.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YWu9/2039 소개하신 카페를 보았습니다. 처음 클릭한 곳이 논어강의인데 공자님이 일이관지한 것이 <양심>이라고 했군요. 저는 <인의예지>라고 답글을 적어보려니 글쓰기가 되지 않아 그냥 두었습니다.
답글| 초기경전에는 없는 부처님 아닌지요? 혹시 연꽃님이 올리신 글중에 이에 대해 올린 글 없는지요? 어떤 절에 가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없고 대웅전에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있는 곳이 있어서 황당스러워서요..',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연꽃님.. 그런데 상좌불교에도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노사나불, 약사여래불 등등 있는지요? 초기경전에는 없는 부처님 아닌지요? 혹시 연꽃님이 올리신 글중에 이에 대해 올린 글 없는지요? 어떤 절에 가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없고 대웅전에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있는 곳이 있어서 황당스러워서요..
인간붓다가 무슨 복을 줄 수 있을까 해서 살아 죽어 복 준다는 보살들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남방에는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과 완벽히 같다고 할 수 있는 과거의 부처님 외에는 없습니다. 고타마 붓다 옆을 차지하는 상이 있기도 하지만 그 상들은 제자들의 형상이지요. 대승에서는 석가모니의 연기 사제로 끝나는 깨달음의 가르침은 시시하고 저급하더고 합니다. 그래서 별로 칭송하지 않지요. 인간붓다가 무슨 복을 줄 수 있을까 해서 살아 죽어 복 준다는 보살들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매일 글쓰기가 생활화 되어서 불교를 어떻게 하면 잘 알릴까 하고 고민 하고 있습니다. 그 것도 부처님의 초기에 설한 불교를 말하지요. 많은 도움 되시기를 바랍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관심 있게 지켜 보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매일 글쓰기가 생활화 되어서 불교를 어떻게 하면 잘 알릴까 하고 고민 하고 있습니다. 그 것도 부처님의 초기에 설한 불교를 말하지요. 많은 도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 할 것이 있었는데, 깊게 이야기 드리지는 못할듯 합니다. 같은 불법이지만, 연꽃님과 저의 귀결은 전혀 다른것 같습니다. 요점만 설명하자면, 멸도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귀결이 다릅니다. 태어나지 않아서 멸도에 이른다는 것이 당신의 귀결이고, 계속 태어나서, 종국에 부처에 이름으로서 멸도에 이른다는 것이 저의 귀결입니다.
삶은 괴로운 것이므로 버려야 한다라는게, 님의 귀결이고, 삶은 부처되는 종자의 거름이므로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서 정토를 향해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귀결이죠.
같은 멸도임에는 분명하나 방향은 서로 반대입니다. 이 차이는 바로 사성제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식을 그대로 취해서 얻으신것이 님의 귀결이고, 그 상식의 역류도를 취함이 저의 귀결입니다.
버림으로서 멸도에 이르는 길은 깨우치고나서 몇생이면 충분하지만, 버리지 않고 지켜냄으로서, 멸도에 이르는 길은 억겁의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같은 탄소로 연필을 만드는것 보다 다이아몬드를 만드는게 훨씬 더 오래걸리죠 그건 왜 그럴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이 확실한 길인가에 대한 진위는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법을 놓고 서로 다투고 말것이기 때문이죠. 같은 수행자 끼리 그런 이유로는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멸도에 이르는 길이 두가지가 나오게 된 이 현 상황이 의아하고 흥미로워서 적은것 뿐입니다. 그 답의 진위는 부처님 만이 아시겠지요.',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말씀을 드릴까 말까 하여 몇시간 동안 주저하다가 이제서야 글을 적습니다.
..이야기 할 것이 있었는데, 깊게 이야기 드리지는 못할듯 합니다. 같은 불법이지만, 연꽃님과 저의 귀결은 전혀 다른것 같습니다. 요점만 설명하자면, 멸도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귀결이 다릅니다. 태어나지 않아서 멸도에 이른다는 것이 당신의 귀결이고, 계속 태어나서, 종국에 부처에 이름으로서 멸도에 이른다는 것이 저의 귀결입니다.
삶은 괴로운 것이므로 버려야 한다라는게, 님의 귀결이고, 삶은 부처되는 종자의 거름이므로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서 정토를 향해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귀결이죠.
같은 멸도임에는 분명하나 방향은 서로 반대입니다. 이 차이는 바로 사성제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식을 그대로 취해서 얻으신것이 님의 귀결이고, 그 상식의 역류도를 취함이 저의 귀결입니다.
버림으로서 멸도에 이르는 길은 깨우치고나서 몇생이면 충분하지만, 버리지 않고 지켜냄으로서, 멸도에 이르는 길은 억겁의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같은 탄소로 연필을 만드는것 보다 다이아몬드를 만드는게 훨씬 더 오래걸리죠 그건 왜 그럴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이 확실한 길인가에 대한 진위는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법을 놓고 서로 다투고 말것이기 때문이죠. 같은 수행자 끼리 그런 이유로는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멸도에 이르는 길이 두가지가 나오게 된 이 현 상황이 의아하고 흥미로워서 적은것 뿐입니다. 그 답의 진위는 부처님 만이 아시겠지요.
불자는 자신의 견해 보다 경전에 있는 내용에 근거해서 말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주로 신변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 적 입니다. 설령 경전의 내용을 이용 한다고 하더라도 천수경이나 금강경, 육조단경 과 같은 대승 경전위주 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승경전은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고따마 붓다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른 대승논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설한 것이기에 다르다는 것 입니다. 고따마의 붓다가 설한 8만4천법문은 니까야에 있고, 그 니까야를 요약설명한 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입니다. 수다원이 되어 7생 이내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야기는 니까야 수도 없이 나옵니다.
문제는 대승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을 믿느냐, 역사적인 붓다의 니까야를 신봉 하느냐의 차이라 봅니다.
귀중한 글 감사 드립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장문의 글 감사 합니다.
불자는 자신의 견해 보다 경전에 있는 내용에 근거해서 말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주로 신변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 적 입니다. 설령 경전의 내용을 이용 한다고 하더라도 천수경이나 금강경, 육조단경 과 같은 대승 경전위주 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승경전은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고따마 붓다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른 대승논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설한 것이기에 다르다는 것 입니다. 고따마의 붓다가 설한 8만4천법문은 니까야에 있고, 그 니까야를 요약설명한 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입니다. 수다원이 되어 7생 이내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야기는 니까야 수도 없이 나옵니다.
문제는 대승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을 믿느냐, 역사적인 붓다의 니까야를 신봉 하느냐의 차이라 봅니다. 귀중한 글 감사 드립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에서 苦는 괴로울 고로 읽지만, 거듭날 고라고도 읽습니다. 이 글자는 괴롭다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죠. 오래 계속한다와 힘쓴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集은 집에서 한자변환 눌러서 똑같은 글자를 선택해 보세요. 모을집이라고 나와있을겁니다. 집착을 뜻하는 집이라면 執(잡을집)을 써야 합니다. 모을집을 사전에 찾아보면 당신이 이야기했던 그 의미가 나오지 않죠. 잡을 집으로 찾으면 나오지만요.
사성제의 해석의 차이라고 앞에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건 역사적인 붓다에 의한 것도 아니고, 대승경전에 의한것도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한자 해석에서 비롯되는 결과인 것이죠.
자, 같은 고집이라는 글자를, 괴로울고와 잡을집으로 볼 것인가, 거듭날고와 모을 집으로 볼것인가 에 따라, 사성제의 결론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고집에 대한 해석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경전에 있는 내용을 정말 믿을수 있을까요?
연꽃님이 쓴 글로 유추해보건데, 당신이 보셨던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도 사성제의 의미가 위와 같이 나와 있을것 같은데, 제가 꺼낸 사례를 상기해보면, 그 경전들도 결국은 모두 믿을수는 없게 됩니다.
기본 전제로 시작되는 사성제의 의미에서 결점이 있었으니까 말이죠.
거듭날고와 모을 집으로 사성제를 보면 귀결이 어떻게 되는가?
죽고 사는 것을 반복하여 거듭남으로서 우리는 법신을 모아서 키우게 됩니다. 이 법신이 완성되어 죽음을 극복할때 우리는 멸도에 이르는 것이고, 이는 곧 부처로 거듭남을 의미하죠. 이는 숯덩어리가 불속에서 억겁을 익어서 다이아몬드를 이루는 것과 같죠. 이 고집멸도는 태어남을 긍정하고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고난도 기꺼이 짊어지죠. 그러한 고난이 부처가 되는 길임을 관하여 알고 있으니까요. 태어니지 않음으로서, 멸도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깨우치는 것으로 끝이지만, 긑까지 살아서 멸도에 이르면, 깨우치는 것 뿐만 아니라 법신까지 이룰수가 있죠. 불법은 깨우치는게 다가 아닙니다. 이루는 것 까지 해야 비로써 완성되는 것이죠.
이 글을 읽으면 지금 사실을 부정하시고 싶으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 이걸 알았을때 못 믿었거든요.
새로운 의미로 사성제를 다시 살펴 보실 의향이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역사적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믿는다고 하셨는데,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도 사성제가 위와 같은 의미로 나옵니까? 저 사성제의 의미에 문제가 있다는 의문은 들지 않나요? 지금 이야기를 잘 생각해 보십시요.
고집멸도(苦集滅道)에서 苦는 괴로울 고로 읽지만, 거듭날 고라고도 읽습니다. 이 글자는 괴롭다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죠. 오래 계속한다와 힘쓴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集은 집에서 한자변환 눌러서 똑같은 글자를 선택해 보세요. 모을집이라고 나와있을겁니다. 집착을 뜻하는 집이라면 執(잡을집)을 써야 합니다. 모을집을 사전에 찾아보면 당신이 이야기했던 그 의미가 나오지 않죠. 잡을 집으로 찾으면 나오지만요.
사성제의 해석의 차이라고 앞에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건 역사적인 붓다에 의한 것도 아니고, 대승경전에 의한것도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한자 해석에서 비롯되는 결과인 것이죠.
자, 같은 고집이라는 글자를, 괴로울고와 잡을집으로 볼 것인가, 거듭날고와 모을 집으로 볼것인가 에 따라, 사성제의 결론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고집에 대한 해석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경전에 있는 내용을 정말 믿을수 있을까요? 연꽃님이 쓴 글로 유추해보건데, 당신이 보셨던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도 사성제의 의미가 위와 같이 나와 있을것 같은데, 제가 꺼낸 사례를 상기해보면, 그 경전들도 결국은 모두 믿을수는 없게 됩니다. 기본 전제로 시작되는 사성제의 의미에서 결점이 있었으니까 말이죠.
거듭날고와 모을 집으로 사성제를 보면 귀결이 어떻게 되는가?
죽고 사는 것을 반복하여 거듭남으로서 우리는 법신을 모아서 키우게 됩니다. 이 법신이 완성되어 죽음을 극복할때 우리는 멸도에 이르는 것이고, 이는 곧 부처로 거듭남을 의미하죠. 이는 숯덩어리가 불속에서 억겁을 익어서 다이아몬드를 이루는 것과 같죠. 이 고집멸도는 태어남을 긍정하고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고난도 기꺼이 짊어지죠. 그러한 고난이 부처가 되는 길임을 관하여 알고 있으니까요. 태어니지 않음으로서, 멸도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깨우치는 것으로 끝이지만, 긑까지 살아서 멸도에 이르면, 깨우치는 것 뿐만 아니라 법신까지 이룰수가 있죠. 불법은 깨우치는게 다가 아닙니다. 이루는 것 까지 해야 비로써 완성되는 것이죠.
이 글을 읽으면 지금 사실을 부정하시고 싶으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 이걸 알았을때 못 믿었거든요.
새로운 의미로 사성제를 다시 살펴 보실 의향이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참고 하겠습니다.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귀하신 의견 감사 합니다. 잘 참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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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꿈
서라벌의 꿈Y
2012.02.04 22:41
사성제를 빠알리어로 풀어서 쓰면 의미가 명백하다고 연꽃님 스스로가 쓰시지 않았습니까?
옐로골드님의 댓글은 번역어에 불과한 한자어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물러서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법에 의거한 정당한 반박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4559&admin=&refequery=%EC%82%AC%EC%84%B1%EC%A0%9C#">신고
연꽃님 뭘 잘 참고합니까? 사성제를 빠알리어로 풀어서 쓰면 의미가 명백하다고 연꽃님 스스로가 쓰시지 않았습니까? 옐로골드님의 댓글은 번역어에 불과한 한자어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물러서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법에 의거한 정당한 반박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중생들의 업이 천차만별이라서 부처님께선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지요. 잘 살펴보면 맥락은 같은데.. 아와 어가 다르듯이.. 하지만 아와어가 다른게 참으로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깊은 사유를 통해 모든 조건을 부수는것.. 어떤 형태로 가든 결국엔 만법귀일로...옳고 그른건 나안에서 다 녹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