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의 인생관
불교식 인사 “성불하세요”
법회가 끝날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사홍서원이다. 그런데 노래가 하나 더 있다. 산회가이다. “몸은 비록 이 자리에서 헤어지지만~”으로 시작 되는 산회가에서 마지막 구절인 “다음 날 반가웁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부처님의 성전에 다시 만나세”로 끝날 때 사방을 향하여 “성불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참석한 법우님들에게 합장하며 반배 한다.
불교식 인사는 “성불하세요”이다. 법회에서 뿐만 아니라 연등축제와 같은 대규모 행사에서도 “성불하세요”라는 말을 아나운서 멘트에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성불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불자들은 안다.
부처님은 부처가 되기를 발원하여 3아승지겁 이상이라는 까마득한 시간동안 보살행을 하였다. 더구나 부처가 되려면 살아계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야 한다. 부처가 되기를 발원한다고 해서 모두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초기경에 따르면 이제까지 출현한 붓다가 과거 25불이고 56억년 후 미래세에 미륵불이 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부처가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의 인사방식은 “성불하세요”이다.
부처의 성품을 보아 버리면
그런데 성불하는 방식이 하나 더 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다. 우리마음에 내재된 부처의 성품을 보아 버리면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3아승지 겁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않고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성불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견성성불방식도 쉬운 것 같지 않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3년, 10년, 20년, 30년, 평생 화두를 들어도 견성하였다는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견성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것이 바른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가 되라는 말이 없다. 그대신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아라한의 인생관
초기불교에서 최종 목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아라한의 경지는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와 같다. 그래서 열반 또는 불사 등 여러가지로 표현된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아라한의 인생관은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patticca-samuppada)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ṅ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이 있는 것입니다.
(아라한의 인생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
아라한의 인생관 .docx
Sangha, Bhikkhu
아라한은 번뇌가 다하여 유여열반의 상태이지만 죽음과 함께 무여열반 상태가 되어 다시 태어남이 없게 된다. 이를 불사(不死, atama)라고도 한다. 그런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조금도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심지어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라 한다. 이는 황혼고독에 시달리는 노인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다른 것이다.
황혼고독과 고독사
갈수록 기대수명이 높아짐에 따라 80세를 넘어 90세,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삶의 조건은 나빠지고 건강 또한 나빠져서 오래 산다는 것 자체가 재난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더구나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 가게 됨에 따라 혼자 쓸쓸히 죽어 가는 고독사가 발생하고,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여 갈수록 노인자살율이 증가 하고 있다고 한다.
노인의 자살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와 가깝다. 몸이 무너짐에 따라 마음도 함께 무저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말한다. 또 한편으로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죽음으로서 몸만 바꾸어 환생한다거나 천상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동경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갈애는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은 아라한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은 아라한에게 있어서 오래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서는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이미 정복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parinibbana)’에 드는 것이라 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테라가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Thag.654)
(아라한의 인생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
테라가타 654번 게송인데 레와따(Revata)존자가 읊은 것이라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주석에 실려 있는 이 게송을 보면 죽음에 대하여 월급생활자가 월급날자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뜻으로 노래 하고 있다.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이다 (venayiko samaṇo gotamo)”라고
이 게송만 본다면 혹자는 “불교가 염세주의 종교가 아니냐?”라고 오해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마하시사야도의 ‘아라한의 인생관’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네티즌이 불교는 염세주의적 종교라고 비난한 것이다. 죽을날 만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을 혐오하여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번뇌 다한 아라한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하여 발생된 오해로 본다.
그런데 이런 오해는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다.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Evaṃ vādiṃ kho maṃ bhikkhave evamakkhāyiṃ eke samaṇabrāhmaṇā asatā tucchā musā abhūtena abbhācikkhanti: venayiko samaṇo gotamo,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āpetīti.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설하고, 이와같이 말하는 나를 두고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진실없이 공허하고 허망하게 거짓으로 중상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이다. 살아있는 뭇삶에게 단멸과 파멸과 허무를 가르친다.’라고 말한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경을 보면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중상모략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이다 (venayiko samaṇo gotamo)”라는 문장이다. 빠알리어 venayika는 ‘허무주의자(a nihilist)’라는 뜻이다. 초기경에서 말하는 허무주의자는 유물론자를 뜻한다.
아지따 께싸깜발린(Ajita Kesakambalin)이 말하기를
유물론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Ajita Kesakambalin)이 주장하였다. 그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
인간은 네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으며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세계로, 물은 물의 세계로, 불은 불의 세계로,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돌아가며 모든 감각기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단멸론을 말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는 견해를 말한다.
영원주의자들의 오해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오해를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Evaṃ vimuttacittaṃ kho bhikkhave bhikkhuṃ saindā devā sabrahmakā sapajāpatikā anvesaṃ nādhigacchanti: 'idaṃ nissitaṃ tathāgatassa viññāṇa'nti. Taṃ kissa hetu: diṭṭhevāhaṃ bhikkhave dhamme tathāgataṃ ananuvejjoti vadāmi.
수행승들이여,
제석천세계, 하느님 세계, 창조주 세계의 신들이 이와같이 해탈한 마음을 지닌 수행승을 찾으려고 할 때 ‘여기에 여래의식이 있다.’라고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지금 여기 알려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제석천세계 (saindā devā), 하느님 세계 (sabrahmakā), 창조주 세계의 신들 (sapajāpatikā)은 부처님 당시 인도의 주류 종교에 대한 것이다. 이들 주류 는 영원주의 종교로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여래는 알려 질 수 없다’라는 말을 오해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지금 살아 있는 아라한은 궁극적으로 자아로서 존재가 없기 때문에 존재나 개인으로 추적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열반을 말하는데 일반인들은 이런 열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주류종교의 영원론자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단멸론자, 허무론자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thā vāhaṃ1 bhikkhave na,2 yathā vāhaṃ na vadāmi, tathā maṃ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satā tucchā musā abhūtena abbhācikkhanti: venayiko samaṇo gotamo,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āpetīti.
그러나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진실없이 공허하고 허망하게 거짓으로 중상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이다. 살아있는 뭇삶에게 단멸과 파멸과 허무를 가르친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와 같이 설하는 자, 그와 같이 말하는 자가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한다. 허무주의자도 아니도 단멸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은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피하기 위해 언제나 괴로움이라는 사실에 관해 언급을 하고 그 소멸에 관해 말한다”고 하였다. 만일 영원주의자들에게 열반, 적멸, 불사에 대하여 말한다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하는 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허무주의, 유물론, 단멸론으로 오해 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부처님이 이와 같이 말씀 하신 이유는 영원론자들의 혼란을 덜어 주기 위하여 한 말이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여래 또는 여래의 제자로부터 모든 견해의 관점, 선입견, 편견, 집착, 경향을 뿌리뽑고 모든 형성을 중지하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갈애를 부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열반하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들었다면, 그는 ‘나는 단멸할 것이다. 나는 파멸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될 수있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so loko so attā)”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영원론자들에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포에 가깝다. 영원론자들은 “세계는 자아와 동일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번뇌가 소멸되어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 때 영원론자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곤혹스러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영원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허무주의, 단멸주의라고 중상모략을 한 것이다.
타닛사로 비구가 영역한 것을 보면
영원론자들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혼란스럽고 오해 받기 쉽다. 이는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라한의 인생관에 있어서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라는 문구에 대하여 염세적으로 보는 것이다.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는 표현은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은 어떤 것일까.
Nābhinandāmi maraṇaṃ
nābhinandāmi jīvitaṃ,
Kālaṃ ca paṭikaṅkhāmi
nibbisaṃ bhatako yathā.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like a worker his wage.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mindful, alert.
(테라가타, Thag.606, Thanissaro Bhikkhu)
타닛사로 비구가 영역한 것을 보면 ‘죽을 때를 기다린다’라는 라는 말 대신 ‘await my time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직역하면 ‘내 시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는 완전한 열반을 말한다. 이 때 my time에 해당하는 빠알리어가 ‘Kāla(깔라)’이다. 이 깔라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때, 정시, 적당한 시간’을 의미 한다.
또 Paṭikaṅkha는 가시적 기대를 뜻하고, nibbisa는 임금을 뜻하고, bhataka는 고용된 자를 뜻하기 때문에 ‘Kālaṃ ca paṭikaṅkhāmi nibbisaṃ bhatako’라는 문구는 ‘고용된자가 임금을 기다리는 것처럼 때를 기다린다’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주석에서는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라고 과도하게 의역하였다. 게송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수시마경(S2:29)에서도
이 게송과 유사한 게송이 상윳따니까야에도 있다. 수시마경(Susīmasutta, S2:29)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Paṇḍitoti samaññāto 빤디또띠 사만냐또
sāriputto akodhano, 사리뿟또 아꼬다노
Appiccho sorato danto kālaṃ 압삣초 소라또 단또 깔랑
kaṅkhati sudantoti. 깐카띠 수단또띠
[세존]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잘 훈련된 자처럼 때를 기다리는 님,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수시마경-Susīmasutta, 상윳따니까야 S2:29(3-9), 전재성님역)
수시마경(S2-29).docx
부처님이 사리뿟따존자를 칭찬한 게송이다. 내용은 테리가타 606번 게송과 거의 같다.
게송에서 번뇌 다한 아라한이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하여 ‘kālaṃ kaṅkhati’라 하였다. 이는 ‘죽을 때를 기다리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잘 훈련된 자처럼(kālaṃ kaṅkhati sudanto)’ 이라는 뜻은 Srp.I.126에 의하면, 번뇌를 끊은 자(khinasava)는 여러 다른 시간에 열반에 들게 되므로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 한다. 동일한 생각이 테라가타(Thag.606)에도 나와 있다.
“아라한이 되고 싶어요”
대승불교에서는 “성불하세요”가 인사말 처럼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불하기 위한 노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목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이다 보니 단지 인사말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성불하세요”라는 말 대신 “행불(行佛)하세요”라고 제창하기도 한다.
수행처에서 법사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 가요?” 그 질문에 어느 여성 수행자는 “아라한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였다. 초기불교수행자에게 있어서 되고 싶은 것은 부처가 아니라 아라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탈하면 그들에게 윤회는 시설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들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부처님이 증득하였던 경지에 올라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열려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분명하고, 열려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는 나의 가르침 가운데, 만약 수행승들이 거룩한 이로서 번뇌를 부수고 수행이 원만하고 해야 할 일을 해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끊고 올바른 지혜를 얻어 해탈하면 그들에게 윤회는 시설되지 않는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단현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위선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믿고 실천한다면 궁극적으로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라 하였다. 그 결과 해탈하면 다시는 “윤회는 시설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윤회는 시설되지 않는다”라는 뜻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아라한이 존재의 전과정에서 해탈을 성취할 때에, 그들이 다시 태어나야 할 영역안에 어떤 존재를 시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해탈하여 열반에 든자에게 더 이상 나고 죽는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월급날을 기다리는 노동자와 같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아라한은 죽음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는 황혼고독으로 인하여 어서 빨리 죽기를 원하는 노인과도 다른 것이다. 또 그렇다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짐’과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아라한에게 있어서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인데, 이것이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으로 본다.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열반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축복이다. 그래서 행복경에 따르면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n1.8)
라 하였다.
이와 같은 아라한의 죽음은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영원주의자들은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허무주의나 단멸론으로 몰아 부친다. 이는 영원에 대한 환상이 깨짐으로 인하여 당황하고 혼란스런 마음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교학의 대가 마하시 큰스님께서는 아라한은 삶을 따분하게 여겨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셨지만, 부처님의 삶도 그러셨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아라한 부처님께서 밤이면 이불이 되는 무거운 누더기를 걸치시고 열사의 거친 땅을 하루 빠짐없이 맨발로 걸으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세상 뭇 중생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서시고, 열반에 이르러 토사광란의 고통을 참으시면서도 흙벽집에 사는 가난한 밧지족들이 현생에서는 가난의 고통을 당하지만 후생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도록 법문하기 위해 수십 번 가다 쉬면서 걸음을 옮기셨던 부처님의 삶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염증을 느끼는 삶이셨을까요?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혹 불교의 목적을 해탈 열반에 두신 것은 아니었을 까요?
교학불교 수행불교가 불교의 궁극이라 생각하시는 걸까요?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의 이익과 평화와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60분의 아라한들의 수행은 보람과 기쁨과 행복의 연속일 것이라 생각하고, 아라한 역시 삶의 염증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교학과 수행은 세상 모든 중생들이 평화와 행복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는 깨달음은 없는 것일까요?
수행병 깨달음병에 빠져 부처님의 진정한 바램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연꽃님, 타로사 스님의 영역을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_()_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Thag.654)
......(아라한의 인생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
Nābhinandāmi maraṇaṃ ~ nābhinandāmi jīvitaṃ,
Kālaṃ ca paṭikaṅkhāmi ~ nibbisaṃ bhatako yathā.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like a worker his wage.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mindful, alert.
......(테라가타, Thag.606, Thanissaro Bhikkhu)
죽음 ~ 삶
세속의 죽음 vs kālaṃ_깔랑 + kaṅkhati_깐카티 (시간 + 기다림)
my time --- I await “my time” like a worker his wage. ~ I await “my time” mindful, alert.
세간적 사유 ← <한국어> → 영어 → 빠알리어
사유에 대한 언어의 구속은 종종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적절한 언어의 맥락을 쫓아 항상 열심히 풀어 주시는 연꽃님께 감사 드립니다. __()__
붓다는 오온이 여래도 아니고 오온을 떠나서도 여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래와 오온이 둘도 하나도 아닌 불가분의 관계라고 한 것이죠. 안으로 연기된 오온에 대한 시각을 밖으로 전 우주적으로 돌려 연기된 전 존재계를 보면 저절로 자비로운 행위(이때는 의도가 아니라 여래, 열반에서 나오는 기능적 마음의 발로이겠지요)가 나온다고 합니다. 연기된 세계가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고 할지라도 허상인 연기된 존재계에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은 자연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행위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결국 불교는 지혜와 자비가 더불어 갈 수 밖에 없다는 모든 깨달은 자들의 공통된 말씀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자비수행은 열반을 위한 큰 공덕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깨친 분들은 지혜로 이 오온을 사용하겠지요. 오온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