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린 여인 ‘둘시네아’
조 계 환
어느 해 여름. 성지순례 가는 길에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에 들렀다. 폭염이 이글거리는 광장은 시에스타 때문인지 적막했다. 중심에 세익스피어와 견준다는 문호 세르반테스의 석상과 비쩍 마른 말에 올라 탄 돈키호테의 청동상이 있었다. 높은 좌대에 앉은 세르반테스의 모습이 동양에서 온 이방인에겐 다소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돈키호테는 오른 팔을 내밀어 말을 멈추려한다. 뒤를 따르는 산초판사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인다. 풍차를 발견한 걸까? 아내가 돈키호테에게 가서 그의 구두코를 만진다. 수많은 관광객이 만져서인지 빤질빤질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아내의 표정. 둘시네아를 떠올리는 것일까. 돈키호테만큼 익숙했던 이름 둘시네아.
책 『돈키호테』를 언제 접했는지는 확실한 기억이 없다. 중학교 시절 아니었던가 싶다. 햄릿과 대비되는, 현실과 동 떨어진 공상가로만 알고 있었던 돈키호테. 그가 용기있는 이상주의자라고 이해하기까지는 나이를 한참 먹고서였다.
1981년 3월, 네 살이 채 안된 딸과 이별하고서부터 아내의 태도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어 열쇠로 따고 들어가면 아내가 아파트 발코니에서 깜깜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석고상 하나가 있었다.
그 와중에 리야드대학 건설공사 TF팀의 일원으로 8월경에 출국하라는 회사의 명을 받았다.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 결단해야 할 초읽기에 몰려 고민하던 중 신문에 실린 〈M.E 운동〉에 대한 소개 기사를 봤다. 문제 소년들을 위해 일하던 스페인의 가브리엘 칼보 신부가 대부분의 가정 문제가 불안정한 부부 관계에 있다고 보고,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소통되도록 특별한 대화방법을 체험시키는 피정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아무 문제 없어.’ 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부부들도 내면으로 가면 갈등의 씨앗이 새순처럼 돋고 자란다는 것이다. 파탄 직전의 위기에 내 몰릴 상황에 다다라서야 심각성을 깨닫고 수습하려 하지만 이미 금이 간 그릇을 어쩌랴. 꼭 우리 부부를 위해 맞춘 프로그램 같다는 생각에 피정신청을 했다. 신청을 받는 수녀님이 대기자가 많아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수녀님께 편지로 우리의 절박함을 전했다. 달포나 되었을까 반가운 전화가 왔다. 수녀님이 신청자 중에서 한 커플이 포기하여 자리가 났는데 앞 순위의 대기자로부터 양보를 받아냈다고 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들이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준 은인이다. 피정의 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둘시네아」 테이프를 들려주고 해설을 해주었다.
창녀 알돈자를 둘시네아 공주라고 한 돈키호테.
주변의 사람처럼 알돈자도 그를 무시하지만 변치 않는 진심에 감동하여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게 된 알돈자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그녀는 무지막지한 노새꾼들에게 처절히 능욕당하고 만다. 다음 날, 엉망이 된 알돈자 앞에서 돈키호테는 무릎을 꿇고 여전히 아름다운 둘시네아라며 노래부른다. 그러나 알돈자는 자신은 더럽고 천한 거리의 여자일 뿐이라며 절규하고.
그댈 꿈 꿔왔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댈 알고 있었소
기도로 노래로
볼 순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였소
둘시네아 둘시네아
하늘에서 내린 여인 둘시네아
천사의 속삭임같은 그대 이름
둘시네아
둘시네아
-중략-
둘시네아 둘시네아
그댈 위해 살아왔네 둘시네아
그댈 만남은 기다림 끝에 영광
둘시네아
둘시네아
'돈키호테'가 둘시네아, 둘시네아 애절히 부르는 대목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내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그 날 밤 우리는 살면서 서로에게 생채기낸 말들을 찾아냈다. 깊은 어둠의 우물에 갇혀있던 과거, 성장기에 느꼈던 열등감, 좌절감, 괴로웠던 일, 상처받았던 일 모두를 끌어냈다.
꼭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사람에게마저 감추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는 있을 터. 부끄러운 나의 내면, 위선과 가식, 알량한 자존심을 벗어던지자 나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분의 유물처럼 녹슨 놈도 있고, 아직 광택이 죽지 않은 놈도 보였다.
허상을 걷어낸 거짓 없는 내 본성을 8년 만에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큰 다툼 없이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8년의 결혼생활에서 그렇게 높은 담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깊은 해자가 둘러친 성곽 안에 꽁꽁 숨겨 둔 서로의 아픈 상처들, 작은 충격에도 계란처럼 바스러질 아슬아슬한 상황. 병은 깊었다.
가슴에 송진처럼 진득하니 달라붙은 아내의 울분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수롭지 않게 뱉은 나의 언어들, 집안 주위 곳곳에서 툭툭 던지는 참견이 외향적 성격이 못되는 그녀에겐 참기 힘든 고통이었음을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쌓았던 담을 허물고 그 날 비로소 온전히 결합했다. 그 피정으로 아내의 표정이 살아나고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몇 달 후 나도 안심하고 사우디로 출국하게 되었다.
부부 간에 서로의 결점이 크게 보일 때가 위기라고 한다. 상대의 흠은 알아도 모른 채 장점만 봐야 된다고 한다. 둘시네아에 사랑을 고백하는 돈키호테처럼 눈에 콩깍지를 쓰고 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올해로 피정 37년째가 되는 우리 부부의 현재는?
첫댓글 콩깍지도 씌였고, 이젠 피부 탄력이 떨어져 눈꺼풀까지 내려 앉으니
더 보이는게 없지요!
옛날에는 공처가 아니냐며 놀렸는데~~~~